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abandoned mountain fortresses were urgently repaired for the operation of foothold mountain fortresses in Gyeongsang-do,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immediately after the Qing Invasion of Korea in 1636. Immediately after the Qing Invasion of Korea, an external fortress wall was built and added to each of Cheonsaeng Fortress and Geumo Fortress to establish a system of protecting locals inside a fortress at important locations for border defense against Japan in the Yeongnam region. Cheonseng Fortress, however, did not have sufficient geographical and protection conditions as a mountain fortress for protecting people inside it; thus, Gasan Fortress was newly built to replace Cheonsaeng Fortress. Geumo and Gasan Fortresses were used in border defense against Japan during the period from King Injo's reign to the end of Joseon Dynasty, because the fortresses served the purpose of defending Nakdonggang River and middle roads located at important roads along the border in the Yeongnam region and because it was possible to quickly repair and use their existing fortress walls and internal facilities, such as middle fortress walls and ponds, that were constructed for long-term protection of locals inside the fortress. In addition, it was found, in this study, that a continuous discussion on how to supplement fortresses led to the reinforcement and improvement of fortress facilities and fortification technology through the application of major strengths of Chinese (Ming) and Japanese fortress systems.
Not much research has focused on the combat history of the Manchu invasion of Korea. In particular, the role of the navy has not been properly examined. However, the naval forces of the Joseon Dynasty were critical to the military strategies adopted by the leaders of Joseon and the courts of the Ming and Later Jin dynasties. Therefore, by investigating the role of Joseon's navy, we can establish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dynamic situation in East Asia during this period. This paper traces the specific naval strategies of Joseon and also looks at the parts played by the Ming and Later Jin dynasties, based on their historical records. The main part of this paper consists of three chapters. Chapter 1 will uncover the reputation and the actual military strategies of Joseon's naval forces during this period. Chapter 2 will discuss the military strategies devised by the Ming and Later Jin courts as a reaction to each other and to Joseon's naval power. Last, Chapter 3 will examine how the naval forces of Joseon and Qing collided at Ganghwa Island in January 1637 and afterward Qing's requisition of Joseon's navy in its fight against the Ming. In conclusion, when Joseon's naval forces were strong enough to protect Joseon, they maintained the military status quo in East Asia. However, when their strength was superseded by that of the Later Jin's naval forces in a very short time, Joseon was forced to experience the worst humiliation in its history and East Asia to undergo a violent upheaval, the replacement of Ming by the Manchu/Qing dynasty.
In 1882, after the French defeated Tonkin for the second time, the Nguyen Dynasty led by King Tự Đức 嗣德 appointed Phạm Thận Duật 范慎遹 and Nguyễn Thuật 阮述 as envoys to the Qing Dynasty to seek the Chinese's help to deal with the French invasion. The trip's information from 1883 such as the schedule, the content, the discussion, and the progress was specifically reflected in the two envoys' diaries, including "Notes of Voyage to Qing Dynasty in The First Year of Jianfu" 建福元年如清日程 (Phạm Thận Duật and Nguyễn Thuật), "Notes of Voyage to Tianjin" 往津日记(Nguyễn Thuật). This article presents the origin of these documents and their historical values in order to provide insights into the study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Nguyen Dynasty and the Qing Dynasty in the late 19th century through the 1883 mission.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hreefold. First, to highlight research of Seonmin KIM, whose 2006 Ph.D. dissertation elucidates complex relationships among Ming China, Choson Korea, Tokugawa Japan, and mountainous ginseng-producing "borderlands" between Korea and China; her story concludes with the remarkable rise of a borderlands power that overthrew Ming China, there-by establishing dominance that lasted into the $20^{th}$ century - the Qing Dynasty. A second purpose is to showcase application of a non-standard-model - the Hydraulic Metaphor - that elucidates economic components of Professor KIM's history via visual and intuitive mechanisms designed to be understandable for non-specialists. Last, an outline of East Asian history is placed within context of centuries of monetary evolution that eventually yielded the late-$16^{th}$-century birth of globalization.
선약해(宣若海)의 "심양일기(瀋陽日記)"는 중국 대륙에 후금(後金)과 명(明)이 병존하며 조선과 더불어 외교적 갈등을 빚고 있던 17세기 초반의 기록물로, 조선조 무신(武臣) 선약해가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쓴 일기이다. 본 자료는 중국의 역대 중요 문집자료를 모아놓은 중국 자료총서(資料叢書) 속에 수록되어 중국에서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별반 주목받지 못했다. 이미 학계에 소개된 같은 이름의 "심양일기"가 병자호란이후 심양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의 8년간의 체류 기록이라면, 이 자료는 병자호란 발발 직전 심양에 갔던 조선 사신의 기록이다. 본 "심양일기"의 기록자 선약해는 자신이 사신의 임무를 어떻게 잘 처리하였는가를 서술하고, 동시에 당시 후금의 정치, 군사 상황을 정탐하듯이 알아내 기록하고 있다. 그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로 외교문제를 해결할 때는 무인다운 강인한 면모를 보였고, 또 전략적으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동시에 문인적인 자질로 사실적인 산문 기록과 솔직한 내면감정을 드러내는 시를 써서 개성적인 일기체 기록물을 남기게 되었다. 본 선약해의 "심양일기"는 17세기 병자호란 발발 전 조선과 명, 그리고 후금간의 외교 상황을 보여주는 역사자료로서의 가치와 문무겸전 지식인의 독특한 현실대응태도와 표현방식을 보여주는 문학자료로서의 가치를 함께 가지고 있다.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중국 촉(蜀)나라의 장수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이다. 이러한 사당이 우리나라에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598년 정유재란 때부터이다. 당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은 관우의 힘으로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길 염원하면서 그들의 주둔지마다 관왕묘를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중국 명나라 황제와 조선의 국왕은 외세를 물리치려는 의지로 관왕묘를 세우고자 하였다. 1599년 8월 조선 정부는 '동관왕묘조성청' 이라는 관청을 임시로 설치하고 인력과 물력을 총동원하였다. 명나라 기술자의 감독 아래 연 2,400명의 조선 장인과 역군(役軍)들이 중국 제저우(解州) 관제묘(關帝廟)를 본으로 삼아 영건하여 3년 뒤인 1602년 봄에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 한 중 기술자가 협력하여 세웠기 때문에 관왕묘의 정전 건축과 내부 구조 및 조각상에는 양국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관왕묘 내부에는 7기의 조각상이 서 있다. 관우상 1기는 금동상이며, 나머지 6기는 소조상 위에 채색한 것이다. 이들 조각상들은 1602년에 만들어졌고, 관우와 그를 배위하는 관평(關平) 주창(周倉) 조루(趙累) 왕보(王甫)는 삼국시대에 실존했던 인물들의 초상조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복식은 관우를 추숭하던 당송대에 확립된 도상을 따르고 있었으며, 세부적으로는 명대적 요소와 조선적 배치가 절충되어 있었다. 이로 미루어 송대 이후 확산된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판화의 도상이나 명나라 만력황제가 1593년 조영한 제저우 관제묘의 명대 관우 도상이 동관왕묘를 제작할 때 직접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재 동관왕묘와 비교되는 중국 제저우 관제묘의 경우 건축과 조각상이 모두 청대 18~19세기에 중건된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동관왕묘의 조각상은 17세기 초 한 중 관왕묘 중에서 제작시기가 가장 이른 예로서 당시의 원형을 지니고 있다는 점, 한 중 기술자의 합작으로 규모가 매우 크다는 점, 금동으로 만든 관우상은 유일하다는 점, 문무 배위상을 각 1쌍씩 마주 배열하여 조선왕릉의 석인 배치와 친연성이 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민중사상은 도교적 요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정감록』을 중심으로 한 민중사상은 '해도기병설'과 '남조선신앙', '미륵하생' 등으로 구체화되고, 이는 『정역』에 의해 개벽이라는 형태로 발전한다. 이들 민중사상에는 풍수와 도참의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도교의 방술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철종 때부터 도교서들이 번역되기 시작하고, 고종에 의해서 국가의 국역사업으로 많은 도교서들이 번역, 간행된다. 이들 도교서의 성격은 선서류(善書類)이거나 보권류(寶卷類)이다. 문제는 이들 선서와 보권류의 도교서들이 청대 민란의 주요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사업으로 진행된 도교서들의 번역은 민란이나 변혁을 바라는 민중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것인데, 왜 고종은 도교서 번역 사업을 국가적으로 시행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 후기의 민중사상을 정리하고, 그 내용들이 도교와 밀접한 관계임을 해명하였다. 또한 한국의 역사에서 도교는 국가적 위기에서 진호(鎭護)의 성격으로 등장해왔던 사실들을 정리하고, 임진왜란 당시에 도교가 호출되는 상황을 정리했다. 아울러 『홍길동전』과 『홍길동전』과 거의 동일한 서사를 갖는 야담(野談)의 내용들 속에 도교적 요소들이 있음을 해명하였다. 고종이 국권을 잃을 상황에서 도교 선서와 보권을 국역하고 보급한 것은 도교의 국가 진호적 성격을 인식하고, 도교를 통해 국권을 지키고자 한 의도임을 해명했다. 아울러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도교적 풍습과 관례는 고종의 도교 선서와 보권의 보급과 관련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민간도교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해 왔는가를 고찰하고, 민간도교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적 측면의 내용과 특징에 대해 논구하려는 것이다. 조선 후기 관제신앙이 관우를 중심으로 하는 민간신앙이라면, 선음즐교(묘련사)와 무상단은 조직을 갖춘 종교결사이다. 선음즐교(묘련사(妙蓮社))의 경우 '선음즐(善陰?)'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홍범전(洪範傳)에서 유래한 유학의 천관을 담고 있지만 수행의 방법으로는 보살성호(예-관세음보살)를 주문으로 수행하고, 신앙의 대상은 삼성(三聖)(관제, 문창, 부우)이다. 이러한 점은 조선 후기 민간도교의 삼교합일적 현상을 보여준다. 임란 이후 왕실의 주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던 관제신앙은 민간에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조선 후기 관제(關帝)는 충과 효의 화신이면서 유 불 도의 삼교 교권을 집장하며, 생사 죄과 명운을 관장하는 신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신의 위력과 가피력이 민간에 경전으로 유포되면서 관제신앙은 벽사와 구복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선음즐교 '묘련사'는 명청대 '백련사(白蓮社)'를 모방한 종교결사이다. 선음즐교는 염불을 통한 신과의 '감응(感應)'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종교적 엑시터시(ecstasy)의 상태에서의 강필(降筆)을 비난(飛鸞)으로 표현하였다. 비난(飛鸞)이란 부난(扶鸞) 부계(扶?)라고도 하는데, 종교결사에서 경전을 만드는 방법으로, 신과의 합일 상태에서의 강필을 의미한다. 선음즐교는 부주수행을 통해 신과의 합일 상태를 추구하였으며, 신과의 합일 상태에서 강필한 경전을 교단의 중심 교리로 삼았다. 선음즐교의 난서 "제중감로(濟衆甘露)"의 서문을 장식한 여순양이 강림한 곳이 '무상단(無相壇)'이다. 무상단은 서정(徐珽), 정학구(丁鶴九), 유운(劉雲), 최성환(崔?煥)이 주축이 된 독립된 교파로 관성제군, 문창제군, 부우제군의 삼성제군(三聖帝君)을 숭배하면서 난서(鸞書)와 선서(善書)를 편찬하고 간행 보급하였다. 조선후기 민간도교 경전은 크게는 난서(鸞書)와 선서(善書)로 구분할 수 있다. 난서(鸞書)는 비난시(飛鸞時)의 관성제군 문창제군 부우제군 강필서이고, 선서(善書)는 "태상감응편"과 "공과격" 같은 선행의 표준을 보여주고 권면하기 위한 책이다. 조선 후기 민간도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적 이유로 지어진 관묘가 조선 후기 민간도교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관제신앙은 구복과 벽사의 대상으로 민간에 널리 확산되었다. 둘째 조선 후기에는 묘련사와 무상단이라는 구체적인 민간도교단체가 등장했다. 이들은 '감응'을 통한 영성(靈性)의 고양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추구한 난단도교(鸞壇道敎)였다. 셋째 조선의 민간도교는 청대 민간도교의 유불도 합일과 종교결사의 조직형태 난단도교 등의 영향을 받았다. 넷째 조선의 민간도교 경전은 난서(鸞書)와 선서(善書)로 구분되는데, 조선에서 직접 만들어진 난서(鸞書)는 민간도교의 특징을 밝혀줄 열쇠가 되리라고 기대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 DMZ) 내의 문화재는 14종 35개소이지만 앞으로 더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지하에 묻혀있는 철원도성(鐵原都城)과 김화 병자호란 전골총(戰骨塚)은 남과 북이 공동조사를 실시하여 그 실체를 밝히는 것이 보존방향의 첫걸음일 것이다. 특히 철원도성의 공동조사는 남북이 오랫동안 동일한 역사와 문화전통을 지녀온 같은 민족임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를 평화의 무대로 전환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김화의 전골총도 청(淸)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운 평안도 근왕군(謹王軍)의 전몰자 집단무덤인 만큼 남북의 공동조사를 통하여 그 위치와 규모 등을 확인하여 국가지정문화재로 관리해야 할 것이다. 또한 비무장지대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국제적 전쟁인 한국전쟁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의 요건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100여종의 멸종위기종 및 천연기념물 외에도 6,000여종의 온대림을 갖고 있어 세계자연유산의 자격도 갖추고 있으므로 비무장지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자연유산의 자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세계복합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비무장지대는 한국전 당시의 수많은 고지, 땅굴, 진지 등이 그대로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휴전협정으로 생긴 감시초소(GP), 군사분계선, 남북한 한계선 철조망, 판문점 등이 남아있어 그 일부구간과 전쟁시설을 선별하여 근대 문화재로 등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끝으로 도라산의 봉수지는 복원하여 남과 북이 평양-개성-도라산-서울을 잇는 전통시대의 통신시설을 필요시 재연하여 남북간의 원활한 소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종전으로 인한 비무장지대의 난개발에 대비하기 위하여 정부 및 문화재 전문가들은 비무장지대의 문화재 파악과 보전에 힘써야 할 것이며 무분별한 조사나 지뢰제거 등의 문제도 일관성 있게 통제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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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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