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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lysis and Improvement Strategies for Korea's Cyber Security Systems Regulations and Policies

  • Park, Dong-Kyun;Cho, Sung-Je;Soung, Jea-Hyen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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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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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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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21세기 첨단기술을 활용하고 있는 테러집단들이 앞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은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사이버테러이다. 현실에서는 상상만으로 가능한 일이 사이버 공간에서는 실제로 가능한 경우가 많다. 손쉬운 예로 병원에 입원 중인 요인들의 전산기록 중 혈액형 한 글자만을 임의로 변경하여도 주요 인물에게 타격을 주어 상대편의 체제전복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와 같이 테러분자들이 사이버테러를 선호하는 이유는 다른 물리적인 테러수단 보다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폭탄설치나 인질납치 보다 사이버 테러리스트들은 인터넷으로 언제 어디서나 공격 대상에 침투할 수 있다. 1999년 4월 26일 발생했던 CIH 대란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만의 대학생이 뚜렷한 목적 없이 만들었던 몇 줄짜리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인터넷을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국내에서만 30만대의 PC를 손상시켰고, 수리비와 데이터 복구에 소요된 비용만 20억원 이상이 소요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세계적으로 피해액은 무려 2억 5000만 달러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사이버테러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국내 사이트의 상당수가 보안조치에 허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는 수백만명 이상의 회원이 가입한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회사마저도 보안조치에는 소홀한 경우가 많다. 사이버테러에 대한 전국가적인 대비가 필요한 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에서는 우리나라 사이버 안전체계의 실태를 법률과 제도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아울러 개선전략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제시한 연구결과를 압축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사이버위기를 국가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제도와 구체적 방법 절차가 정립되어 있지 않아 테러 등 각종 위기상황 발생시 국가안보와 국익에 중대할 위험과 막대한 손해를 끼칠 우려가 높다. 따라서 사이버공격을 사전에 탐지하여 위기발생 가능성을 조기에 차단하며 위기발생시 국가의 역량을 결집하여 정부와 민간이 참여한 종합적인 국가대응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 둘째, 국가차원의 사이버 안전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해서는 국가사회 전반의 국가 사이버 안전의 기준과 새로운 모범을 제시하는 한편, 각 부처 및 국가사회의 구성요소들에 대해 국가 사이버 안전관리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국가 사이버 안전관리 조직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요구된다. 법률 및 추진체계 등을 통합 정비하여 정보보호 법률 제도 운영의 일관성을 확보함으로써 각종 정보보호 위협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정부는 국가 사이버 안전관리에 관한 주요 정책의 심의 및 기획 조정, 통합된 국가 사이버 위기관리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현행 '국가사이버안전센터'의 기능을 확대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국가 사이버 위기와 관련된 정보의 종합적 수집, 분석, 처리의 종합적 기능을 수행하고 각 정보 및 공공 기관을 통할하며 민간부문과의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요구된다. 자율적 정보보호 수준제고를 위해 행정기관 공공기관의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 제도를 확대하고 행정기관의 정보보호제품 도입 간소화 및 사용 촉진을 위해 행정정보보호용 시스템 선정 및 이용 규정을 신설 주요정보기반으로 지정된 정보기반 운영자, 정보공유 분석센터 등의 침해정보 공유 활성화 규정을 신설 및 정비함으로써 사이버침해로부터 국가 사회 주요시설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정부와 민간부분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국가차원의 종합적인 대응체계를 구축하여 사이버공격을 사전에 탐지하여 사이버위기 발생 가능성을 조기에 차단하며 위기 발생 시 국가의 역량을 결집하여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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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법적 지위와 경계획정 문제 (The Definition of Outer Space and the Air/Outer Space Boundary Question)

  • 이영진
    • 항공우주정책ㆍ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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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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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7-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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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지금까지 우주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설립된 UN COPUOS의 첫 번째 과제중 하나로 부각된 우주공간의 경계획정 문제에 대한 학설상의 견해 및 국가의 입장 그리고 UN COPUOS을 중심으로한 국제사회의 논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나름의 평가도 해보았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영공과 우주공간을 구분하는데 있어서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논의되어 왔는데 이는 말하자면 영역구분론자(공간론자, spatialist)와 기능주의자(functionalist)로 구분하여 설명되어질 수 있다. 영역구분론자들은 1967년 우주조약 제2조에서 우주공간의 법적 지위가 국가주권이 배제된 일종의 국제공역(res commercium)인데 반하여, 1944년 시카고 협약 제1조와 국제관습법에 따르면 영공주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므로 이 두 영역간의 경계는 반드시 획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COPUOS의 과학기술소위원회나 법률소위원회에서 우주의 경계획정 문제를 지난 반세기에 걸쳐 줄곧 논의해 오긴 했으나 우주조약, 손해배상 책임, 우주물체의 등록 등의 이슈외에도 위성직접방송이나 원격탐사, 달 자원 이용 문제 등 다른 의제에 비해 비교적 소홀히 다루어진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가 적도국가들에 의해 주창된 보고 타 선언 이후 법적결과를 수반하는 많은 실제적 문제점들이 우주공간의 경계획정과 관련한 논란을 야기 하였고, 이 때문에 우주에 대한 구체적 정의가 더욱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주의 개발과 이용이 커다란 진전을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국가들이 뚜렷한 과학적 기준 없이 경계를 결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거나 부적절하다는 등 경계획정에 소극적 입장을 보여온 논거들에 있어서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50년 이상의 기간동안 논란만 거듭해 왔다. 21세기에 와서도 우주의 정의와 경계획정에 관하여 국가들간의 논의가 계속 되었는데 앞서 본바와 같이 러시아를 위시한 다수의 국가들은 100~110km를 넘지 않는 선에서 협상을 통한 경계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에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상당수의 국가들은 아직 분명한 기준없이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반대하였다. 반대견해의 대표적 국가인 미국은 상기한 구소련의 제안에 대해 한마디로 시기상조이며 적절한 법적, 과학적 분석의 토대위에서 경계선이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에는 무엇보다도 국제공동체라는 인식을 통해 각 국가의 적극적이면서 평화적인 협력의지가 요구된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일찍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우주활동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였던 '달 연설(Moon Speech)'에서 모든 인류가 우주에서의 평화로운 협력과 공존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을 촉구하면서 현 상태의 우주활동에서는 분쟁이나 국제갈등이 미미하지만 그것의 위험한 환경은 결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이를 극복하려면 인류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자칫하면 그 평화적인 협력을 위한 소중한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던 바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요컨대 이상의 제 상황 및 지구궤도공간에서 우주활동을 해온 우주물체들에 대해 인정해온 다수의 국가관행을 고려하고 여러 이론과 학설을 통해 자연과학적, 천체물리학적 구획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사견으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인공위성의 최저근지점을 기준으로 한 100km 정도의 영공과 우주공간의 경계구분안으로 국제적 합의를 도출해 내도록 전향적 노력을 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웹검색 트래픽 정보를 활용한 지능형 브랜드 포지셔닝 시스템 : 태블릿 PC 사례를 중심으로 (Intelligent Brand Positioning Visualization System Based on Web Search Traffic Information : Focusing on Tablet PC)

  • 전승표;박도형
    • 지능정보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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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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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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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최근 독감 예측이나 부동산가격 예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웹검색 트래픽이나 소셜 네트워크 등의 방대한 고객 데이터를 통해 사회 현상, 소비 트렌드 등을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증가하고 있다. 최근 구글이나 네이버 등의 인터넷 포털서비스 업체들은 온라인 사용자들의 웹검색 트래픽 정보를 구글 트렌드, 네이버 트렌드 등의 서비스로 공개하고 있는데, 이들이 제공하는 웹검색 트래픽 정보를 기반으로 온라인 사용자들의 정보 검색 행태에 대한 연구들이 학계 업계 등에서 주목받고 있다. 웹검색 정보를 기반으로 사회 현상이나, 소비 동향, 정치 투표 결과 등을 예측해 볼 수 있음을 실증하고 있는 분야는 많은 연구가 수행되고 있지만, 웹검색 트래픽 정보를 이용하여, 소비자의 제품에 대한 중요한 속성 도출 및 소비자의 기대 변화 관측 등의 온라인 사용자 행태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되고 있는 분야는 상대적으로 많은 연구가 수행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구글이나 네이버가 제공하는 소비자의 웹검색 트래픽을 활용해서 소비자가 생각하는 제품 포지션을 가시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브랜드 간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동시 검색 트래픽 정보를 활용하여 네트워크 모델링의 방법을 사용한 시스템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소비자들이 제품 간의 유사성을 어떻게 인지하고 형성하며, 새로운 혁신 제품 카테고리 내에서 제품 브랜드들이 소비자의 마음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의 브랜드 포지셔닝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안하였다. 또한 이를 태블릿 PC의 사례를 통해서, 미시적인 관점에서 소비자의 마음속에 위치한 태블릿 PC 개별 브랜드들의 위치 및 관계를 보여주었다. 기업은 소비자의 제품에 대한 인식 및 중요 속성 도출을 위해 많은 비용과 시간을 소요하여 소비자 조사를 행하게 되는데, 본 연구의 방법론을 활용하여 소비자의 제품에 대한 인식, 제품간 유사도, 제품에 대한 중요 속성의 변화 등을 일반에게 공개된 검색 트래픽 정보를 활용하여 비교적 쉽고 추가적인 비용 없이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1788년 김응환의 봉명사경과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 (Kim Eung-hwan's Official Excursion for Drawing Scenic Spots in 1788 and his Album of Complete Views of Seas and Mountains)

  • 오다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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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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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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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은 금강산과 해금강, 관동팔경을 그린 60점의 실경산수화와 51편의 기문(記文)으로 이루어진 화첩으로 규모와 화풍에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림의 특징은 화면을 가득 채운 구성과 남종화풍을 따르면서도 거칠고 파격적인 화법, 산석(山石)의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표현 등이다. 1973년의 특별전, '한국미술이천년(韓國美術二千年)'을 처음으로 화첩의 일부만 공개되었던 작품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그 전모가 공개되었다. 《해악전도첩》이 김응환(金應煥)(1742~1789)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화첩의 마지막 장에 쓰여진 관지(款識)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칠보대>에 찍힌 '복헌'이라는 도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응환을 지시하는 관지와 도장은 모두 후대에 더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본 연구는 화첩을 둘러싼 여러 요소를 고찰하여 제작자를 재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악전도첩》 제작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18세기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과 봉명사경을 살펴보았다. 정선(鄭敾)(1676~1759)의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1711)을 비롯하여 심사정(沈師正)(1707~1769), 김윤겸(金允謙)(1711~1775), 최북(崔北)(1712~1786 이후), 강세황(姜世晃)(1713~1791) 등은 조선 후기 최고의 여행지였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기행사경도를 제작하였다. 화가들은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여 내금강의 명승명소를 주로 그렸고, 자신들이 경험한 장소를 새롭게 시각화하였다. 이러한 기행사경도는 여행을 기념하며 동행자나 후원자를 위해 여러 장면을 담을 수 있는 화첩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개별적인 금강산 기행사 경도의 제작이 증가하는 가운데 1788년에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도화서 화원인 김응환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에게 영동9군과 금강산의 명승(名勝)을 그려오도록 명한 일은 공적 업무였다. 정조는 이들의 관계 및 지방관으로서의 경력, 서로 다른 화풍 등을 고려해 봉명사경의 화원으로 선발하였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영조(英祖)(재위 1724~1776)조부터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며 선후배이자 동료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아가 이들은 영남 지역의 찰방(察訪)으로서 지방관의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두 화원의 화풍은 서로 달라 김홍도는 부드럽고도 섬세하게 필선을 운용한 반면, 김응환은 굳세면서도 울창한 풍치를 잘 표현했다. 두 명의 화원은 각자의 개성으로 봉명사경 기간 동안 100여 폭의 초본을 그렸고, 이를 선별하여 60~70여 폭의 화첩 혹은 두루마리를 완성하였다. 이들의 그림은 18세기 전중반에 내금강과 관동팔경 위주로 제작된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을 더욱 풍부하게 했고 영동과 외금강의 명승명소를 새롭게 발견하며 소재를 확장시켰다. 현재 《해악전도첩》은 원(元), 형(亨), 이(利), 정(貞) 4책으로 이루어졌는데, 원(元), 형(亨)책은 내금강의 그림 29점이며 이(利)책은 외금강의 장면 17점, 정(貞)책은 해금강과 관동팔경 14점으로 구성되었다. 비단 위에 그려진 각 그림은 기하학적으로 산석을 표현했으며, 연백으로 금강산의 암봉을 흰색 혹은 회청색으로 표현했다. 《해악전도첩》의 구도와 화법은 정선, 강세황, 심사정, 정충엽(鄭忠燁)(1725~1800 이후), 김응환, 김홍도의 화법과 비교할 수 있어 18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을 갖는다. 특히 화첩의 일부 그림은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1788)과 구성 및 회화적 모티프가 매우 유사하여 두 화첩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반면에 <영랑호>, <해산정>, <월송정> 등은 김홍도의 그림과는 구별된다. 이를 통해 화가가 김홍도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첩을 제작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해악전도첩》에는 다른 화첩에는 등장하지 않는 <자운담>, <백운대>, <안문점망비로봉>, <백정봉>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장면마다 경물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참신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화가는 산석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고 선과 면을 도드라지게 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다. 그는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법을 확립했고 이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면서 화면에 동적인 리듬감을 부여했다. 이처럼 60점의 그림은 거칠고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 안에서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본고는 화법과 봉명사경의 정황을 종합해 《해악전도첩》의 제작자를 김응환으로 추론하였다. 나아가 김하종(金夏鍾)(1793~1878 이후)의 《풍악권(楓嶽卷)》(1865년 이후)과의 친연성은 《해악전도첩》의 화가를 김응환으로 추정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해산첩》과는 달리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미비한데 김하종의 《풍악권》만이 《해악전도첩》의 소재와 화법을 따르고 있다. 김하종은 《풍악권》에서 50년 전, 춘천부사 이광문(李光文)(1778~1838)을 위해 제작한 《해산도첩》(1816)과는 전혀 다른 화법을 구사했다. 그는 김응환의 《해악전도첩》과 유사한 구성과 회화적 요소, 화보식 인물표현을 따르면서 사의적인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개성김씨의 일원이자 김응환의 종손인 김하종은 가문에 전해지는 《해악전도첩》류의 그림을 감상했고 이를 새롭게 번안했다고 추측된다. 화첩에 포함된 51편의 기문은 그림 다음 장에서 그려진 장소를 설명하고 있어 각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문은 그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앞의 장소로부터의 이동 정보, 이름의 유래, 지형적 특징, 관련 정보 등이 서술되었다. 이와 같은 백과사전식 혹은 지리지와 같은 기문은 19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금강산 화첩류에 더해졌다. 《해악전도첩》의 백화암 기문에는 1845년의 암자에 대한 중건 내용이 기록되어, 기문의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김하종에게 《풍악권》을 주문한 이유원(李裕元)(1814~1888)도 각 그림에 글을 붙였는데 이 글들은 김응환의 화첩에 포함된 기문 51편과 내용 및 서술방식이 흡사하다. 이유원의 기문은 《해악전도첩》의 기문이나 그 초고(원본)와 관련성이 높지만 두 화첩의 기문 필사의 선후관계를 판정하는 데에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봉명사경 초본 및 김홍도의 영향으로 제작된 19세기의 금강산 화첩과는 구별된다. 이 화첩은 화원 김응환의 회화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넓히고 18세기 후반 실경산수화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국의 사지서목에 대하여 -육사예문$\cdot$경적지의 분류 및 편목체재 비교를 중심으로- (On the Bibliographies of Chinese Historical Books - Classifying and cataloguing system of six historical bibliographies -)

  • 강순애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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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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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9-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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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
  • In china, six bibliographies of offical historical books are evaluated at the most important things among the systematically-editing bibliographies. These bibliographies would be usful to study the orign of classical sciences and their development, bibliographic research of Chinese classics, bibliographic judgement on genuine books, titles, authors, volumes. They could be refered to research into graving, correcting, and existence of ancient books. therefore, these bibliographies would be applied to estimation the phase of scientific and cultural development. The study of these bibliographies has been not yet made in Korea. This thesis lays its importance on the background of their appearance, their classification norms, organizing system of their catalogue, and comparison between their difference. 1. Editing and compiling of Chilyak (칠약) by Liu Chin (유흠) and official histories played an important role of entering an apperance of historical book's bibliographies. Chilyak has been lost. However, its classification and compiling system of classical books would be traced by Hansoyemunji(한서예문지) of which basic system is similar to Chilyak. It classified books according to their scientific characteristic. If a few books didn't have their own categories, they were combined by the circles parallel to the books' characteristic. With the books classified under the same scientific characteristic, they were again divided into the scientific schools or structures. It also arranged the same kinds of books according to the chronology. The some books wi th duplicate subjects were classified multiplely by their duplicate subject. 2. Ssu-ma Chon's (사마천) The Historical Records (Saki, 사기) and Pan Ku's (반고) The History of the Former Han Dynasty (Hanso, 한서) has also took effects on appearance of historical books' bibliographies. Covering overall history, Saki was structured by the five parts: The basic annals(본기), the chronological tables (표), the documents (서), the hereditary houses (세가), biographies (열전). The basic annals dealt with kings and courts' affairs according to the chronology. The chronological tables was the records of the annals. The documents described overall the social and cultural systems. The hereditary houses recorded courts' meritorious officials and public figures. The biographies showed exemplars of seventy peoples selected by their social status. Pan Ku(반구)'s The History of the Former Han Dynasty(한서) deserved to be called the prototype for the offical histories after Saki's (사기; The Historical Records) apperance. Although it modelled on Saki, it had set up its own cataloguing system. It was organized by four parts; the basic annals (본기), the chronological tables (표), treatises(지), biographies (열전). The documents in the Hanso(한서) was converted into treatises(지). The hereditary houses and biographies were merged. For the first time, the treatise with The Yemunji could operate function for historical bibliographies. 3. There were six historical bibliographies: Hansoyemunji(한서예문지), Susokyongjeokji (수서경적지), Kudangsokyongjeokji(구당서경적지), Shindangsoyemunji (신당서예문지), Songsayemunji (송사예문지), Myongsayemunji (명사예문지). 1) Modelling on Liu Chin's Chilyak except Chipryak(집략), Hansoyemunji divided the characteristic of the books and documents into six parts: Yukrye(육예), Cheja(제자), Shibu(시부), Pyongsoh(병서), Susul(수술), Pangki(방기). Under six parts, there were thirty eight orders in Hansoyemunji. To its own classification, Hansoyemunji applied the Chilyak's theory of classification that the books or documents were managed according to characteristic of sciences, the difference of schools, the organization of sentences. However the overlapped subjects were deleted and unified into one. The books included into an unsuitable subject were corrected and converted into another. The Hansoyemunji consisted of main preface (Taesoh 대서), minor preface (Sosoh 소서) , the general preface (Chongso 총서). It also recorded the introduction of books and documents, the origin of sciences, the outline of subjects, and the establishment of orders. The books classified by the subject had title, author, and volumes. They were rearranged by titles and the chronological publication year. Sometimes author was the first access point to catalogue the books. If it was necessary for the books to take footnotes, detail notes were formed. The Volume number written consecutively to order and subject could clarify the quantity of books. 2) Refering to Classfication System by Seven Norms (칠분법) and Classification System by Four Norms(사분법), Susokyongjeokji(수서경적지) had accomplished the classification by four norms. In fact, its classification largely imitated Wanhyosoh(완효서)'s Chilrok(칠록), Susokyongjeokji's system of classification consisted of four parts-Kyung(경), Sa(사), Cha(자), Chip(칩). The four parts were divided into 40 orders. Its appendix was again divided into two parts, Buddihism and Taiosm. Under the two parts there were fifteen orders. Totally Susokyongjeokji was made of six parts and fifty five orders. In comparison with Hansoyemunji(한서예문지), it clearly showed the conception of Kyung, Sa, Cha, Chip. Especially it deserved to be paid attention that Hansoyemunji laied history off Chunchu(춘추) and removed history to Sabu(사부). However Chabu(사부) put many contrary subjects such as Cheja(제자), Kiye(기예), Sulsu(술수), Sosol(소설) into the same boundary, which committed errors insufficient theoretical basis. Anothor demerit of Susokyongjeokji was that it dealt with Taiosm scriptures and Buddism scriptures at the appendix because they were considered as quasi-religion. Its compilation of bibliographical facts consisted of main preface(Taesoh 대서), minor preface(Sosoh 소서), general preface (Chongsoh 총서), postscript (Husoh 후서). Its bibliological facts mainly focused on the titles. Its recorded authors' birth date and their position. It wrote the lost and existence of books consecutive to total number of books, which revealed total of the lost books in Su Dynasty. 3) Modelling on the basis of Kokumsorok(고분서록) and Naewaekyongrok(내외경록), Kudangsokyongjeokji(구당서경적지) had four parts and fourty five orders. It was estimated as the important role of establishing basic frame of classification by four norms in classification theory's history. However it had also its own limit. Editing and compling orders of Kudangsokyongjeokji had been not progressively changed. Its orders imitated by and large Susokyongjeokji. In Its system of organizing catalogue, with its minor preface and general preface deleting, Kudangsokyongjeokji by titles after orders sometimes broke out confusion because of unclear boundaries between orders. 4) Shindangsoyemunji(신당서예문지), adding 28,469 books to Kudangsokyongjeokji, recorded 82,384 books which were divided by four parts and fourty four orders. In comparison with Kudangkyongjeokj, Sindangsoyemunji corrected unclear order's norm. It merged the analogical norms four orders (for instance, Kohun 고훈 and Sohakryu 소학류) and seperated the different norms four orders (for example, Hyokyong 효경 and Noneuhryu 논어류, Chamwi 참위 and Kyonghaeryu 경해류, Pyonryon 편년 and Wisaryu 위사류). Recording kings' behaviors and speeches (Kikochuryu 기거주류) in the historical parts induced the concept of specfication category. For the first time, part of Chipbu (집부) set up the order of classification norm for historical and literatural books and documents (Munsaryu 문사류). Its editing and compiling had been more simplified than Kudangsokyongjeokji. Introduction was written at first part of bibliographies. Appendants except bibliographic items such subject, author, title, volume number, total were omitted. 5) Songsayemunji(송사예문지) were edited in the basis of combining Puksong(북송) and Namsong(남송), depending on Sabukuksayemunji(사부국사예문지). Generally Songsayemunji had lost a lot of bibliographical facts of many books. They were duplicated and wrongly classified books because it committed an error of the incorrectly annalistic editing. Particularly Namsong showed more open these defaults. Songsayemunji didin't include the books published since the king Youngchong(영종). Its system of classification was more better controlled. Chamwiryu(참위류) in the part of Kyongbu(경부) was omitted. In the part of history(Sabu 사부), recordings of kings' behaviors and speeches more merged in the annals. Historical abstract documents (Sachoryu 사초류) were seperately arranged. In the part of Chabu(자부), Myongdangkyongmaekryu(명당경맥류) and Euisulryu(의술류) were combined. Ohangryu(오행류) were laied off Shikuryu(시구류). In the part of Chipbu(집부), historical and literatural books (Munsaryu 문사류) were independentely arranged. There were the renamed orders; from Wisa(위사) to Paesa(패사), Chapsa (잡사) to Pyolsa(열사), Chapchonki(잡전기) to Chonki(전기), Ryusoh(류서) to Ryusa(류서). Introduction had only main preface. The books of each subject catalogued by title, the volume number, and author and arranged mainly by authors. Annotations were written consecutively after title and the volume number. In the afternote the number of not-treated books were revealed. Difference from Singdangsohyemunji(신당서예문지) were that the concept and boundary of orders became more clearer. It also wrote the number of books consecutive to main subject. 6) Modelling on Chonkyongdangsomok (경당서목), Myongsayemunji(명사예문지) was compiled in the basis of books and documents published in the Ming Danasty. In classification system, Myongsayemunji partly merged and the seperated some orders for it. It also deleted and renamed some of orders. In case of necessity, combining of orders' norm was occured particulary in the part of Sabu(사부) and Chabu(자부). Therefore these merging of orders norm didn't offer sufficient theretical background. For example, such demerits were seen in the case that historical books edited by annals were combined with offical historical ones which were differently compiled and edited from the former. In the part of Chabu(자부), it broke out another confusion that Pubga(법가), Meongga(명가), Mukga(묵가), Chonghweongka's(종횡가) thoughts were classified in the Chapka(잡가). Scriptures of Taiosim and Buddhism were seperated from each other. There were some deleted books such as Mokrokryu(목록류), Paesaryu(패사류) in the part of history (Sabu 사부) and Chosaryu(초사류) in the part of Chipbu(집부). The some in the each orders had been renamed. Imitating compiling system of Songsayemunji(송사예문지), with reffering to its differ-ence, Myongsayemunji(명사예문지) wrote the review and the change of the books by author. The number of not-treated books didn't appear at the total. It also deleted the total following main 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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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시된 효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연구 (Showing Filial Piety: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재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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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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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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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덕수5520)는 그림과 발문(跋文) 열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으로, 작가는 조중묵(趙重黙)(1820~1894 이후), 주문자는 박경빈(朴景彬)(생몰년 미상), 발문을 쓴 사람은 홍선주(洪善疇)(생몰년 미상), 제작연대는 1868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낱장으로 보관되어 온 <인왕선영도>를 병풍으로 복원하고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최초로 공개하였다. <인왕선영도>에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홍은동을 아우르는 인왕산 서쪽 실경이 묘사되어있고 원경에는 북한산 연봉이 그려져 있다. 화면 속에는 인왕산(仁旺山), 추모현(追慕峴), 홍재원(弘濟院), 삼각산(三角山), 대남문(大南門), 미륵당(彌勒堂)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있다. 이 지역을 나타낸 조선후기 지도와 비교해보면 지형 표현과 지명 표기에 유사성이 있다. 조중묵은 넓은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지도의 지리정보를 숙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경의 현장을 답사한 결과, 조중묵은 각각의 경물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였고 수평의 화면에 나열식으로 조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조중묵은 남종화풍 정형산수에 뛰어났던 화가로, <인왕선영도>의 세부 표현에서 사왕파(四王派) 화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도화서 화원들이 화보를 활용하여 가옥을 그리거나 토파에 호초점을 찍고 당분법(撞粉法)으로 꽃을 나타내는 등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한 경향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인왕선영도>에는 바위를 짙은 먹으로 쓸어내리듯 붓질한 기법, 산세의 괴량감, 가로로 붓을 대어 단순하게 그린 소나무 등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의 개성적 양식도 가미되어있다. 조중묵은 인왕산 실경산수로 유명한 정선의 양식과 권위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유기적 공간감과 현장의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연폭 화면이라는 매체도 조중묵의 개인 양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인왕선영도>는 발문의 텍스트와 화면의 이미지가 잘 조응하는 작품이다. 발문의 내용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①무덤의 주인공과 이장 경위, ②무덤의 입지와 풍수, ③묘제(墓祭)와 신이(神異)한 응답, ④무덤 관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 ⑤병풍 제작의 동기인 박경빈의 효성과 수묘(守墓), ⑥발문을 쓴 의의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용이한 ②의 내용은 화면에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인왕선영도> 제작의 직접적 동기인 ⑤를 보면 주문자 박경빈이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다."라 하여 <인왕선영도>에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경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듯 나열한 구도는 회화미는 떨어지더라도 무덤의 풍수지리를 전달하는 데는 더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산도(山圖)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목판본 선영도로서, 족보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기록에서는 족자 선영도를 첨배(瞻拜)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선영도 첨배는 현실적으로 수묘(守墓)가 곤란할 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의례로 인정되었다. 한효원(韓效元)(1468~1534), 조실구(曺實久)(1591~1658) 등이 선영도를 제작한 후 당대의 명사에게 서문을 요청하고 효심을 과시한 사례는 <인왕선영도>의 선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개인 소장),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선영도는 아니지만 계회도 형식의 족자이고 풍수를 도해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선영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인왕선영도>는 첨배라는 측면에서 초상화와도 의미가 비슷했다. 발문의 "부친의 기침소리를 직접 접하는 듯하고, 그 태도와 몸가짐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는 표현과 부친의 초상에 조석 문안을 올린 서효숙 고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경빈이 일반적인 선영도 형식이었던 족자나 목판화 대신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를 주문한 의도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사례(四禮) 의식에 다수의 병풍을 배설(排設)하였는데, 의례의 성격에 따라 그림의 주제를 반드시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인왕선영도> 또한 여러 의례에 두루 배설하거나 장식 병풍으로도 사용하기 위해서 선영 그림이라는 주제를 실경산수화 이미지 아래에 가렸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왕선영도>의 핵심 소재인 무덤 봉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것은 사산금표(四山禁標)의 금제 위반을 숨기기 위함일 가능성이 있다. <인왕선영도>에 묘사된 인왕산 서쪽 산기슭은 분묘 조성 금지구역이었다. 1832년에 금표 내에 몰래 쓴 묘를 적발하여 즉시 파내고 관련자를 엄히 처벌한 사례로 볼 때, 19세기 중엽까지도 사산금표 내의 분묘 금제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장지를 얻기 위해 쏟은 정성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장지조성에 마을사람들의 협조와 묵인이 필요했던 것은 금표 구역 내에 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인왕선영도>와 비교 가능한 동시대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로 이한철(李漢喆)(1808~1880)이 그린 <석파정도(石坡亭圖)>(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를 들 수 있다. <석파정도> 제작시기를 전후한 1861년에 이한철과 조중묵은 철종어진도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조중묵이 이한철의 <석파정도> 제작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조중묵이 몇 년 후 <인왕선영도>를 주문받았을 때 <석파정도>의 인상적인 연폭 실경산수를 본 경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작품의 화풍 차이는 주문자의 취향과 제작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는 실경산수화와 선영도의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지식수준과 주문자와의 친분, 관람에 들이는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과 자호, 본관이 일체 작성되지 않은 채 '박공(朴公)'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주문자인 박경빈의 인적 사항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다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가계를 미루어 볼 때 재력이 있음에도 지배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발문을 쓴 홍선주 또한 사대부로 보기 어려우며, 『승정원일기』 기록에 나타나는 경아전 서리일 가능성이 있다. 박경빈은 상류 계층에 진입하고 싶은 욕망으로 보수적인 가치인 효(孝)를 강조하여 부친의 무덤을 명당으로 이전하고 <인왕선영도>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금제위반 적발에 대한 우려, 병풍의 다목적성 등의 이유로 본래의 제작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모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병풍이 제작된 지 47년 만에 각 폭이 분리된 채 미술상을 통해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이 된 상황을 보더라도, 박경빈이 <인왕선영도>에서 꿈꾸었던 명당 발복과 가문의 신분상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