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Late Goryeo

검색결과 122건 처리시간 0.023초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병서(兵書) 편찬(編纂)과 병학(兵學) 사상(思想) (Compilation of Books on Military Arts and Science and Ideology of Military Scienc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 윤무학
    • 동양고전연구
    • /
    • 제49호
    • /
    • pp.325-355
    • /
    • 2012
  • 이 논문은 조선 초기에 편찬된 병서(兵書)를 통하여 지식인들의 병학(兵學) 사상을 개괄한 것이다. 선초는 대외적으로는 남북으로 외세(外勢)를 극복하고,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왕조(王朝)의 기반을 확립하는 상황이었으며, 이것은 병서 간행에 있어서도 전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의 병서는 병학 자체의 정립 목적과 아울러 여말(麗末)의 무장(武將)이자 조선(朝鮮)의 개조(開祖)로서 활약상을 반영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고려하고 있다. 선초에 출간된 병서는 일부 전쟁사 기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경칠서(武經七書)와 그 주해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병학 정립의 시급성과 아울러 우리나라 고래의 병서가 전해지지 않았던 데 원인이 있다. 그러나 당시 지식인들은 무경칠서를 권모궤계(權謀詭計)에 치우친 것으로 평가하고 유가적 입장에서 병학을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로부터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리적(地理的) 차별성이 병학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병학과 음양가(陰陽家), 병학과 유가(儒家)와의 관계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선초의 병서에서는 무엇보다 장수의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리더십과 군대의 화합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현실적 측면에서 예악(禮樂)과 병형(兵刑)의 겸용(兼用)을 강조하고, 순자(荀子)의 '부민(附民)'(일민(壹民))의 사상을 대량으로 원용(援用)하고 있다. 이 점은 중국의 병가(兵家)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성리학의 정립 과정에서 맹자를 전제로 하는 것과는 다른 경향이다. 요컨대 선초 지식인들은 문무병용(文武竝用)이라는 전제하에 병학을 유가의 성현(聖賢)과 연계시키고, 양자의 접합점으로서 인의(仁義), 예악(禮樂), 충효(忠孝), 삼강(三綱), 오륜(五倫) 등의 덕목을 들고 있다. 특히 병학을 유가의 삼강이나 오륜과 연계시키는 것은 중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며, 한 마디로 조선 초기 병학의 특징은 '병학(兵學)의 윤리화(倫理化)'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석인상의 조영시기와 훼손도 진단 및 보존관리 (The Damage Assessment, Construction Point of Time and Deterioration Diagnosis and Conservation Maintenance of Stone Statues Around the Stone Pagoda in Mireuksaji Temple in Iksan)

  • 이동식;이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7권4호
    • /
    • pp.74-91
    • /
    • 2014
  • 익산 미륵사지 석탑 석인상은 639년경 석탑이 조영된 이후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탑 주변에 조성되었다. 이 석인상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며, 탑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석인상의 표면은 삭박되어 뚜렷한 도상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그러져 있다. 그러나 남서 석인상은 세 방위(서북 북동 동남)에 놓인 석인상에 비해 물성은 약하지만 도상이 뚜렷하게 잘 남아 있다. 이러한 석인상의 표면 상태는 석인상이 위치한 노출환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세 방위에 놓인 석인상은 그동안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남서쪽에 놓인 석인상은 17세기경 석탑 주변에 석축을 축조하면서 석축 안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외부 저해환경으로부터 차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약 400여 년간 다른 환경에 놓여 있었던 석인상은 차별적인 풍화현상을 보인다. 즉 세 방위(서북 북동 동남; $176{\cdot}109{\cdot}273kgf/cm^2$)에 놓인 석인상은 원래 물성이 좋았지만 삭박에 의해 도상이 불분명하고 생물의 침해가 심한 반면, 남서쪽에 놓인 석인상은 원래 물성($133kgf/cm^2$)은 좋지 않았지만 흑색오염물과 입상 분해 현상이 관찰될 뿐 도상형태가 잘 남아 있다. 석인상을 외부에 그대로 노출시켜 보존하는 것은 석인상의 형태적 보존을 위해서 권장할 만한 보존 관리방안이라 할 수 없다. 미륵사지 주변에 대한 미기후 환경 데이터를 적용해볼 때 미륵사지는 해를 거듭할수록 강산성비가 내리는 강한 풍화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인상의 형태적 보존을 위해서는 석인상이 있었던 원래의 위치를 고려한 보존 관리방안보다는 현재의 도상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는 보존 관리방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도쿄 오쿠라슈코칸 협저보살좌상(東京 大倉集古館 夾紵菩薩坐像)을 통하여 본 한국 협저불상의 제작기법 (The Production Techniques of Korean Dried-lacquer Buddha Statue seen through the Seated Dried-lacquer Bodhisattva Statue in Okura Museum of Art in Tokyo)

  • 정지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6권3호
    • /
    • pp.172-193
    • /
    • 2013
  • 본 논문은 도쿄 오쿠라슈코칸(東京 大倉集古館)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협저보살좌상(夾紵菩薩坐像)의 연구를 통하여 한국 협저불상에 나타나는 제작 기법과 재료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먼저, X-ray 데이터와 현장조사결과를 종합하여 이 상에 나타나는 제작기법과 재료의 특징을 분석하였다. 이것을 기초로 제작과정에 대한 가설을 세운 다음, 검증을 위하여 실제 제작과정을 재연하고 각 공정에 적용된 기법의 특징과 재료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였다. 특히, 협저기법과 재료 부분에 있어서는 육안관찰 결과를 토대로 문헌자료와 비교 검토하며 추정하였는데, 칠예기법의 교과서격인 명대(明代) 황성(黃成)이 편찬한 "휴식록(?飾?)"의 기록을 중심으로 적용하였으며, 한국의 전통나전칠기 제작기법에 사용되고 있는 재료도 참고하였다. 그 결과, 오쿠라슈코칸상에 나타나고 있는 제작기법과 재료의 특징은 호놀롤루 미술관(Honolulu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는 송대(宋代) 원부2년명(元符二年銘 1098) 협저나한좌상(夾紵羅漢坐像)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원형(原型)의 흙과 심목을 제거한 후 새로 심목을 제작하여 넣지 않아 상의 내부가 텅 비어 있는 점이나, 소상(塑像)의 단계에서 완전한 형태를 만들어 베 바르기를 하는 점, 소상의 흙과 심목은 상의 아랫부분을 통해서 제거하는 점, 모델링(Modelling) 작업 단계를 거치지 않으며 마감층이 매우 얇다는 점 등이 공통된 특징이다. 그 외에도 보발과 영락 등 장식물을 가소성 재료로 따로 만들어 상을 장엄하는 것은 송대에 크게 유행하였던 기법으로, 오쿠라슈코칸상이 송대의 협저불 제작기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 시사한다. 한국 협저불상에 대해서는 기원과 역사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작품도 매우 한정되어 있다. 원풍연간(元豊年間 1078~1085)의 협저불상 전래를 알 수 있는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기록도 최초의 전래시기로는 보기 힘들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협저불상들을 통해 제작기법의 전래경로를 명백하게 찾아내기도 그리 쉬운 상황만은 아니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오쿠라슈코칸상을 위시한 현존하는 한국의 협저불상들은 적어도, 협저불상 제작기법의 정설처럼 알려져 있던 기존의 일본 탈활협저불상의 제작기법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19세기 한중(韓中) 묵연(墨緣)의 상징, 매감도(梅龕圖) (Maegamdo(梅龕圖), Symbol of Chinese and Korean Scholary Comespondence in the 19th Century)

  • 김현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5권1호
    • /
    • pp.16-33
    • /
    • 2012
  • 매화나무는 동아시아 문학과 예술에서 군자의 덕성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즐겨 애용되었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역시 매화와 관련된 주요한 회화 형식이다. 이 논문은 구리매화촌사도(九里梅花村舍圖)류의 구성상 기원과 해당 그림들이 조선에 알려지는 과정을 밝히고 매감도(梅龕圖)가 제작되는 과정과 그 특징을 논의하고자 하였기에 이들 작품이 속한 매화서옥도의 발생부터 검토하였다. 현재 학계에서는 매화서옥도를 임포고사(林逋故事)와 연결시키고 있다. 물론 매화서옥도와 임포고사 간의 관계가 문인의 은거라는 의미로 연결되지만 작품의 구성 방식에 있어서는 임포고사에 기초한 회화류와 직접적인 비교가 힘들다. 방학도(放鶴圖)나 관매도(觀梅圖) 같은 임포 관련 회화에는 대개 한 두 그루의 매화나무와 학이 그려지고 이에 조응하는 문인이 표현된 반면, 매화서옥도는 문인의 은거가 묘사되면서도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가 가옥을 둘러싸고 있는 구성이 주요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매화서옥도는 매화 애호경향의 발생 이후에 그려진 관련 회화처럼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되지 않았다. 조선에서 매화와 관련된 회화는 세한삼우(歲寒三友)내지 사군자 일종의 매화도를 비롯해 탐매도(探梅圖) 같은 맹호연(孟浩然)고사에 기초한 산수화가 고려 이후 전 시기에 걸쳐 골고루 제작되었다. 그러나 매화서옥도만은 19세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중국의 경우는 조선보다 빠른 17세기부터 성행하였다. 이같은 상황은 매화서옥도라는 유형의 회화가 특정 시기의 문화현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려준다. 조선의 19세기에 매화서옥도가 집중적으로 제작된 원인은 바로 김정희가(金正喜家) 및 신위(申緯)와 오숭량(吳嵩梁)을 비롯해 그의 회화 제작 주문을 전담하여 받았던 장심(張深) 간의 교유 때문이다. 이 교류 속에는 두 종류의 매화서옥도류가 제작되어 오고갔다. 청에서는 부춘산(富春山)아래 동강(桐江)가의 구리주(九里洲) 풍광을 담은 구리매화촌사도가 그려졌다. 구리주는 오숭량이 은거하려고 했던 곳으로, 수십만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오숭량의 매벽(梅癖)과 그의 시를 기념하는 '매감공양(梅龕供養)' 행위가 일어났고 그 모습을 담은 매감도가 제작되었는데, 이 매감도는 구리매화촌사도류에 보인 '만매(萬梅)형식'을 적용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신위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은 <매감시불도(梅龕詩佛圖)>이다. 이 그림은 북경에 소개되어 장심이 그린 매감도들의 구성상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매감도류는 19세기에 조희룡 등에 의해 '만매서옥도(萬梅書屋圖)'라고 별칭되는 매화서옥도의 유행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19세기 후반에 성행한 만매서옥도의 발생을 파악하기 위한 선행단계에 해당된다.

서울지역 공동체신앙 전승과정 고찰 조선시대 각사(各司) 신당(神堂)의 존재양상과 변화를 중심으로 (A Study of the Transmission of Community Religion in Seoul Focussing on the Shrine of the Authorities and the Change)

  • 오문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1권2호
    • /
    • pp.5-25
    • /
    • 2008
  • 서울 공동체 신앙은 조선시대 각 관서에 속한 신당의 제사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각 관서(官署)의 부속공간으로 존재하던 신당의 제사 주체는 하급관리들이었다. 이러한 신당은 대개 부군당(府君堂)으로 불리웠다. 기록에 등장하는 부군당은 대개 1~3칸 정도의 규모이며, 내부에는 신앙의 대상인 부군을 그림으로 그려 봉안하였다. 역사기록에는 부군당의 제사대상이 최영장군이나 송씨부인으로 등장하는데, 실제 부군당의 제사대상은 각각 달랐다. 부군당의 제사 대상 가운데는 왕건, 단군, 남이장군, 제갈공명, 김유신, 임경업, 공민왕, 태조 이성계, 조선의 개국공신인 조반, 남한산성 일대의 지역에 전승되는 설화의 주인공인 홍씨대감과 처첩, 임진왜란 이후 신으로 모셔지기 시작했던 관우와 제갈공명 등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조선시대 각 관서 신당의 의례를 오늘날 서울지역 마을굿의 양상과 정확하게 비교해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록을 통해 볼 때 굿과 고사의 형태가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관서 신당 의례는 점차 민(民)의 공동체신앙으로 자리잡아, 서울의 문화적 변동 맥락 속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다. 본고는 조선시대 관서에 속한 신당의 존재양상을 살펴 보고, 관서 신당의 의례가 민간화되는 전승의 맥락을 장충동 관성묘, 방산동 성제묘, 서빙고 부군당의 사례를 통해 살펴 보았다. 방산동 성제묘가 민간화 되어가는 과정은, 군인들의 신으로 인식되던 신령 관우가 역사적 변화과정 속에 놓이게 되면서 군인들의 신에서 상인들의 신이 되었고, 이후 특정지역 상인들의 공동체적 신앙 대상이 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충동 관성묘는 남영 군인들의 부군당으로서, 관성묘 주변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영신사(永信社)라 불리는 제사집단에 의해 제사가 전승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구성원이 된 이 일대 마을의 공동체신앙으로의 전승이 자연스럽게 계승되었다. 서빙고 부군당의 민간화 과정은 조선 후기 장빙역(藏氷役)의 변화와 맞물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조선왕릉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도상(圖像) 원류와 전개 과정 (On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Iconography of the Twelve Zodiac Signs of Royal Tombs of Joseon Dynasty)

  • 김지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2권4호
    • /
    • pp.198-221
    • /
    • 2009
  • 조선왕릉은 조선왕조의 역사, 이념, 문화, 미술, 건축, 제례 등이 종합적으로 융합되어 만들어진 결정체이며, 500년 왕조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산물로서 그 상징적 의의가 매우 크다. 왕릉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 중에서도 특히 능침 주변에 배치된 석물들은 능침을 수호하는 상징적 기능으로서 중요한 요소였으며, 그 중에서도 봉분 가장 가까이에 표현된 십이지는 그 기능의 가장 중심에 놓여져 있는 대상물이었다. 통일신라시대 능묘에서부터 시작된 십이지신상은 전해지는 규모나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능묘 축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과 위치를 차지했었음이 확실하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왕릉에 이르러서는 규모나 형태에서 매우 간소화된 경향을 띠게 되면서 다른 석물들에 비견하여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 왔다. 십이지신상은 무덤을 수호하는 역할과 방위의 개념으로서 능묘를 장식했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으며, 시대별로 다양하게 변화되어 나타나며, 조선왕릉까지 그 전통성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역사성과 상징성은 간과할 수 없다. 본고에서는 조선왕릉에 표현된 십이지 도상(圖像)을 크게 3가지로 형식 분류하여 그 원류와 시기별 전개 과정을 고찰해 보았다. 십이지 도상은 사람의 몸과 얼굴을 표현한 인신인수형(人身人首形), 관에 십이지 동물을 표현한 인신인수관형(人身人首冠形), 십이지와 십간 팔괘의 혼합 문자형으로 분류된다. 조선왕릉의 이 3가지 십이지 도상은 그 원류를 중국으로부터 볼 수 있으며, 조선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 교체되면서 왕릉을 장식하는 주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서 애용된다. 조선왕릉 십이지신상은 통일신라 이래 이어온 우리나라 능제의 고유성과 전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산 증거로서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한중 목조건축 도리 결합방식 변천(變遷)에 관한 비교연구 (A Comparative Study on the Transition of Purlin Coupling Method of Korean and Chinese Ancient Wooden Constructions)

  • 차주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7권4호
    • /
    • pp.22-47
    • /
    • 2014
  • 본 연구는 한중 고건축 내부 가구(架構) 중 소슬재의 위치와 도리와 보의 결합 형태를 분석하여 동아시아 목조구조 체계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연구이다. 동아시아 국가인 한국과 중국의 고대 목조건축은 서까래와 도리, 그리고 보를 결합하여 건물의 윗부분을 구성하고 기둥과 결합하여 건물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목조 구조 체계의 원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세부적인 기법상의 차이가 지역성과 시대성, 국가성을 띠고 있다. 중국건축 내부 가구 중 도리와 보의 결합 형태와 차수(叉手), 탁각(托脚)의 지지점 위치가 시대에 따라 차이점을 보이고, 역사적으로 다양한 왕조에 따라 세부 수법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이후 건축에서는 차수와 탁각이 없어지는 현상을 보이며 특히, 탁각은 명대 관식건축에서는 완전히 없어졌으며 주된 이유는 도리와 보의 결합 방식의 차이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세기 이전에는 도리와 보가 서로 떨어져 결합되고 있었으나, 15세기 이후는 도리와 보가 서로 결합하고 보의 단면적이 비약적으로 커져 도리 좌굴을 방지하는 수법이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탁각의 경우 당 오대 시기에는 탁각의 상부 위치를 봤을 때 도리와 직접적인 결합은 없으며, 도리의 좌굴을 방지하는 부재보다 내부 가구의 안전성을 유지하는 부재라고 볼 수 있다. 송대 이후 원대까지도 송 "영조법식"의 기록과 다른 건축물이 많은 것으로 보아 탁각의 적용 여부는 지역, 혹은 장인의 수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원대 이전 우진각 지붕의 측면 도리 부근과 팔작 지붕 합각 아래 구조에서도 탁각이 있는 것 보아 종단면과 횡단면에서 모두 볼 수 있는 부재이며, 지지점의 위치를 보아 도리를 직접 지지하는 부재라기 보다 우진각 지붕의 측면 구조나 팔작 지붕의 측면 합각 구조의 안전성에 기여하는 부재로 보인다. 한국건축 중 고려시대에 반 'ㅅ'자형 소슬재(중국명: 탁각[托脚])가 유행하지 않은 이유는 도리의 좌굴을 방지하는 기법(도리 받침재)이 널리 유행하여 반 'ㅅ'자형 소슬재를 사용하지 않아도 도리가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을 선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도리는 도리+장혀+도리 받침재+보의 구성을 보여 도리가 직접 보와 결구되지 않는 특징이 있으며, 조선시대 이후 도리가 보의 단면적의 범위에 속해 도리가 좌굴 되는 현상을 방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5세기 이후 중국건축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이며, 15세기 이후 도리 좌굴에 대한 세부 기법이 한중 양국의 지역성과 국가성을 뛰어 넘어 보편성을 가진 예라 생각된다. 조선중 후기 건축에서 지붕부의 하중을 줄여 주는 방법인 덧걸이 수법이나 덧서까래 사용은 도리에서 보로 전달되는 하중을 줄여주어 도리 좌굴을 감소시켜 주는 효과가 있으며, 이는 조선시대에 건물을 영조하는 장인들의 도리 좌굴을 방지하는 또 다른 기술이라 할 수 있다. 한중 고건축 도리와 보의 결합 구조와 소슬재의 연구는 고려시대 이전 건축을 복원, 설계하는 연구에 기초적인 연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백동의 재료 구성과 변화 (Material composition and change of baekdong alloy in the late Joseon period)

  • 공상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2권3호
    • /
    • pp.38-55
    • /
    • 2019
  • 백동(白銅)은 구리에 다른 금속을 섞어 녹여 만든 합금으로, 현재 구리와 니켈의 합금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 대상과 시기에 따라 백동은 구리에 일정 비율 이상의 주석을 더한 금속으로 정의되기도 하고, 구리에 주석과 아연과 납을 합금한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백동은 그 정의에 차이가 있어 용어의 해석과 표기에 혼란이 있어 왔다. 본 연구는 문헌 기록을 토대로 시론적으로나마 백동의 구성 재료를 정리하고 그 흐름을 살피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먼저 백동 합금의 바탕 재료가 되는 구리의 이용과 구리 합금의 종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문헌의 백동 기록을 통해 그 사용과 인식을 정리해 보았다. 삼국시대 문헌에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백동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기까지 꾸준히 보이는데 관직의 상징물부터 교역품, 생활기물, 화폐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쓰였다.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백동의 합금 재료는 현재 합금의 재료로 정의되고 있는 구리와 니켈뿐이 아닌데,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구리를 합금의 바탕 금속으로 이용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구리 외의 합금 재료로는 주석, 비석 및 비상, 아연, 납 등이 등장하며, 그 과정에서 합금을 의미하는 백동과, 백색의 금속을 의미하는 백동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정의되고 있는 백동의 합금 재료인 니켈은 비교적 발견 시기가 정확한 금속으로 현대 공업과 산업 분야의 소재로 폭넓게 쓰이고 있다. 니켈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조선 말기에서 근대기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 이용과 사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근대기 신문기사와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니켈의 수용과 그 이용을 함께 살피고, 장인들의 증험을 토대로 니켈을 이용한 백동 합금이 공예품에 사용된 시기를 추정해 보았다. 재료는 기술의 발전과 퇴보에 직접적인 요인이 되며, 기술의 발달은 문명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토대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시론적으로나마 합금의 재료를 중심으로 백동을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니켈이라는 재료의 이용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조선 초기 용준(龍樽),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의 특징과 성격 (A Research on Buncheong Jar with dragon and cloud patterns(龍樽) in the early the Joseon Dynasty with priority given to Buncheongsagisanggamunryongmunho, National treasures)

  • 오영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5권1호
    • /
    • pp.85-110
    • /
    • 2022
  • 본 논문은 조선 초기 용준(龍樽)의 실례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에 주목하여 제작과 용도, 그리고 전개양상에 주목한 것이다.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는 높이 50cm에 달하는 대형의 입호로 전체적인 기형에서 안정감을 주고, 동체 외면에는 상감 및 인화상감기법으로 시문된 문양으로 유려한 장식성을 갖추었다. 입호의 기형과 문양 소재, 제작수법은 중국 원·명대 자기를 연상시켰고, 세종연간에 제작된 왕실 자기로 그 가치가 인정되었다. 다만, 조선 초기의 도자사 연구에 있어 우수한 자기 제작수준을 보여주는 실례로 단편적인 기술 외에 생산유적이나 사용실태, 소멸 등 일련의 전개과정에 대한 논의가 미진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 초기 왕실 자기로서의 성격과 의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다.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는 세종연간 왕실 행사의 화준으로 사용된 용준이었다. 1420~1430년대라는 한정된 기간상주목 일대 특정 상품자기소에서 제작된 용준으로서 원·명대 백자 청화 운룡문 호와 기형 및 문양 구성에서의 친연성뿐만 아니라 문양면에서 고려청자의 전통성, 기형 및 문양면에서 조선 자기의 시대성을 모두 보여주었다. 조선 왕실은 개국의 당위성과 문물 정비의 근간을 명으로부터 찾았고, 어기 또한 백자 및 청화백자를 선택함으로써 지향대상이 명 황실임을 보여주었다. 왕실 의례에 사용할 용준 역시 명 황실로부터 사여 받은 '청화운룡백자주해'를 기준으로 삼았고, 분청사기가 아닌 백자로 제작된 용준이 오랜 기간 왕실 의례에 화준과 주준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조선 초기 왕실에서 화준으로 사용되어온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는 명 황실로부터 '청화운룡백자주해'가 전해진 1430년을 기점으로 점차 왕실의 용준으로서 가졌던 의미와 용도를 백자 청화 운룡문 호에 일임하였고, 제작과 사용의 중단으로 이어졌다.

16세기(十六世紀)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 이해의 확장 : <경포대도(鏡浦臺圖)>, <총석정도(叢石亭圖)>를 중심으로 (Broadening the Understanding of Sixteenth-century Real Scenery Landscape Painting: Gyeongpodae Pavilion and Chongseokjeong Pavilion)

  • 이수미
    • 미술자료
    • /
    • 제96권
    • /
    • pp.18-53
    • /
    • 2019
  •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을 받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2019년)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작품인 <경포대도>와 <총석정도>는 조선시대 회화사 이해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지대하다. 두 작품이 1557년의 관동 유람을 계기로 그려진 병풍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어서 16세기 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밝히기 위해서 본고에서는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에 담긴 경물의 내용을 살펴보고 제작시기와 양식상의 특징을 분석한 후,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 작품에 담긴 회화사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작품의 제작 배경은 <총석정도>의 발문으로 알 수 있다. 본고에서 박충간(朴忠侃)(?~1601)으로 비정한 정상일로(商山逸老)가 1557년 봄에 홍연(洪淵)(?~?)과 함께 금강산(풍악산)과 관동 지역을 유람하고 유산록(遊山錄)을 작성하였으며 시간이 흐른 뒤 그중 몇몇 명승지를 그려 병풍을 만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연은 자가 덕원(德遠)으로 1551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84년까지는 생존했던 인물이다. 박충간은 호가 남애(南崖)로서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을 고변하여, 그 공으로 형조참판으로 승진되고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된 후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 글로 작품의 제작 시기를 1557년의 유람 후이자, 발문을 쓴 박충간이 50대 이상이 되는, 1571년 이후 곧 16세기 후반경으로 보았다. 산수나 나무 표현 등의 화풍을 기준으로도 16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과 부합한다. 전술한 발문의 내용으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가 병풍의 일부였던 것을 알수 있으며, 발문이 써 있는 <총석정도>가 마지막 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포대도>를 보면 구도면에서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편파(偏頗) 3단 구도의 요소를 찾을 수 있으나 실경(實景)을 대상으로 하여 그 배치와 화법이 현실화된 양상을 볼 수 있다. 시점(視點)에 있어서도 여러 경물간의 관계나 경관의 특징이 효과적으로 표현되도록 사선각(斜線角)의 부감시(俯瞰視), 정면시(正面視) 등을 활용하여 경포대의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다각적(多角的)인 관점(觀點)을 보여준다. 산의 형태나 태점(苔點)의 사용은 1557년작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와 매우 유사하다. 16세기 안견파의 특징인 짧은 선이나 점으로 질감을 내는 단선점준(短線點皴)과 구름 모양 운두준(雲頭皴)은 현장감 있게 변모되었다. 조선 초기 산수화의 전통적인 구도와 연결성을 찾을 수 있는 <경포대도>와 달리 <총석정도>는 그 구도가 매우 파격적이다. 화면에 중심축을 두고 돌기둥들이 첩첩이 도열하여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데 근경(近景)의 돌기둥, 중앙의 사선봉(四仙峯), 절벽 위의 사선정(四仙亭)을 삼단계 정도의 깊이감으로 배치하여 화면에 공간감을 조성하였다. 중앙의 사선봉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비중을 점하고 있으나 수직적인 돌기둥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분질적(分節的), 평면적(平面的)인 양상으로 그려져 아직 입체적이고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조성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기둥의 아랫부분은 희게 하고 윗부분은 어둡게 하여 고원(高遠)의 상승감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각 기둥을 묘사하는 준법을 보면 기둥으로 설정된 면에 담묵을 바르고 그 위에 농묵의 가는 선들을 그어 총석의 질감과 쪼개짐을 묘사하였다. 붓끝을 사선으로 누르며 수직으로 내려 긋고 있어서 부벽준(斧劈皴)의 초기적 양상을 보인다. 일관되게 보이는 이러한 흑백의 대조, 수직적 준법의 구사는 앞으로 전개될 절파계(浙派係) 화풍의 유행을 예시해준다. 한편 기둥의 윤곽 및 균열문이 각각 다 달라서 실제의 특징을 살리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에 올라앉은 새들의 묘사, 파도와 흰 거품의 표현 등에서 반복적인 붓질을 찾을 수가 없고 매우 생생한 묘사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경물 배치는 이후 변화를 보인다. <경포대도>는 아래쪽에 죽도(竹島)를 두고 경포호를 넘어 위쪽에 위치한 경포대 건물과 오대산 일대를 올려보는 구도였다. 이러한 배치는 경포대를 화면 아래쪽에 두고 위쪽의 바다를 향하는 18세기 이래의 전형적인 구성과 차이를 보인다. 바다 쪽에서 총석을 바라보며 그린 <총석정도> 역시 이후의 작품에서는 내륙에서 바다를 향하는 것으로 관점의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정선(鄭敾)(1676~1759)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의 작품이 제작된 이후, 두 사람의 구도를 따라 관동도의 유형이 정착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라진 듯 했던 16세기 <경포대도>의 구도가 조선 말기 <강릉 경포대도>에서와 같이 민간 회화에서 전승된 것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관동 지역의 명승도는 이른 시기부터 그려져 고려 김생(金生)(711~?)의 관동도(關東圖), 조선 초 안견(安堅)(15세기 활동)의 낙산사도(洛山寺圖) 등 여러 화가가 단폭이거나 여러 폭의 관동도를 병풍이나 첩 형태로 그렸던 것을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록은 많으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는데 본고에서 고찰하는 이 두 점은 현존하는 관동도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예로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관동도(關東圖) 병풍(屛風)의 제작 양상을 알게 해주어 회화사적인 의미가 크다. 특히 발문의 내용에 따라 8폭 병풍일 것으로 생각되어 16세기 후반에 이미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형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성격에 있어서 현존하는 16세기 실경산수화의 예로 거론되는 작품들이 모두 실용적, 공적인 목적의 계회도나 기록화로 제작되어 실경산수화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실제 경관을 대상으로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발문을 쓴 박충간은 유람할 때 지었던 감상시를 곁들여 자연의 진면목을 반추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기존에 알려진 실경산수화의 성격과 그 양상을 달리하는 것으로 순수 감상을 목적으로 한 본격적인 실경산수화의 예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 이처럼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두 작품은 유람의 결과를 시화(詩畫)로 제작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존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예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지대하다. 또한 그간 확인할 수 없었던 16세기 실경 산수화의 다양한 형태와 구도 및 시점의 면모를 보여주어 한국 실경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한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