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Late Chosun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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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機張) 장안사(長安寺) 대웅전(大雄殿)의 조영기문(造營記文)과 건축형식(建築形式)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onstructional Records and Architectural Type of Jangan - sa's Daeoong - jeon in Gijang)

  • 서치상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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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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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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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Jangan-sa is one of the Buddhist temples in the southeastern seaside district, which was restored directly after the termination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Recently we could find out 4 records on the constructions of Daeoong - jeon in J angan-sa. These are written in the 12th year of Emperor Soonchi, written in the 8th year of Emperor Geonryung, written in 1947 Buddha Era and written in 1951 Buddha Era. Until the revelation of these records, the present building has been considered to be built in 1657, the 8th year of King Hyojong, based upon Kim Bang - han's "Jangan - sa Daeoong - jeon - gi". Because the gongpo of Daeoong - jeon was finished with the type of the late period of Chosun Dynasty, we doubt of the correction on it's building date, just in the year of 1657. Now we are able to examine the building date and the alteration date, based upon the actual measurement and constructional records of Daeoong - jeon. So to speak, the building destroyed in 1592, had been restored in 1658, the 9th year of King Hyojong and was reconstructed in 1744, the 20th year of King Youngjo. Afterward it was repaired on small scales in 1947 and in 1951. Though this building is considered to be lack of the completeness owing to the later alterations, it is still worthy heritage for the research on the building type at the directly after the termination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부평의 노무자주택을 통해 본 전시체제기 주택의 특징과 산업유산으로서의 가치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Wartime Period Housing and its Value as industrial heritage, focused on workers housing of Bupyeong)

  • 이연경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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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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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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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Since 1939, Bupeyong was rapidly urbanized and industrialized for the purpose of constructing military logistics base of the empire of Japan. Based on Kyungin urban planning of 1940 and industrial land development plan of Kyeonggido, many military factories and arsenal were constructed, and great amount of housing were also built for their workers from 1939 to 1944. Although the initial urban planning was unfinished, urban change from rural area to military industrial city in the late Japanese colonial era, made identity of city of Bupyeong. Workers houses which built during five years vary in different size and type, and somewhat reflects discussions about housing attempts to solve the housing shortage. This study aims to analyz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workers housing related with discussions of housing, and to evaluate its value as an industrial heritage which constitute the urban landscape of the industrial city of Bupyeong. Workers houses in Bupyeong were constructed by military factories, construction company, and Chosun housing administration, with land readjustment planning. As the war became serious, workers housing became smaller and simpler. Construction of workers housing was essential part of modern military industrial city, bupyeong, and many of workers housing are still remained whereas most of factories were demolished, thus workers housing of bupyeong has significant meaning as industrial heritage of Bupyeong.

경복궁(景福宮) 향원정(香遠亭)의 조성시기(造成時期)와 취향교(醉香橋)의 원형(原形) (A Study on the Original Form of the Chwihyanggyo Bridge and the Creation of the Hyangwonjeong in Gyeongbokgung Palace)

  • 남호현;김태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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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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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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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경복궁의 후원에 위치한 향원정과 취향교는 고종 연간의 관련 사료와 조선 후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도면에 의지하여 연구되고 있었다. 현재의 취향교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소된 것을 종전 후 임시적으로 재건한 것이기 때문에 형태를 비롯하여 재건 위치도 정확한 고증을 거친 것이 아니다. 구한말~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과 이를 묘사한 그림엽서 따위가 일부 남아있지만 촬영 주체나 시기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여 어떤 사진이 취향교의 원모습을 담은 것인지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2017년 취향교 복원에 필요한 기초자료 확보를 위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조사를 통해 취향교의 원위치와 교각 주춧돌의 형태가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취향교의 변화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취향교는 상판이 약한 아치를 그리는 3렬의 교각열을 가진 형태였으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교각열이 늘어난 평교형태로 변화한 것이 밝혀졌다. 또한 향원지 내 가도(假島)의 성토층에 대한 AMS연대측정을 통해 향원정이 임란 이후에 조성되었음이 판정되어 기존에 제기되던 '조선 전기 취로정 전신설'은 근거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및 사료검토 결과를 토대로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면 취향교와 향원정의 조성 시기는 조선 후기 건청궁의 건립연대와 평행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속화(俗畵)(민화(民畵))에 표현된 식물의 상징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Plant Symbolism Expressed in Korean Sokwha (Folk Painting))

  • 길금선;김재식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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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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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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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속화(俗畵 또는 민화(民畵)) 속의 도입요소를 대상으로 식물의 상징성을 추적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우리 민족의 토속성 짙은 그림이자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속화(俗畵)'라는 용어는 고려시대 이규보(12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리고 조선시대 초기 '속 동문선'과 강희맹(1424~1483)의 '사숙재집', 조선시대 후기의 '일성록(1786)', 유한준(1732~1811)의 '자저(自著)', 이규경(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서 다양하게 추적할 수 있다. 특히,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인사편 서화(書畵)의 제병족속화변증설에 의하면 "민간에서 속화라고 불렀다"라는 기록이 발견된다. 2. 시대사적으로 한국의 속화는 농경문화의 자연관을 원초적으로 반영한 선사시대를 거쳐, 우주관을 반영하고 영혼불멸의 사상을 채색화 형태로 표현한 삼국시대, 추상적인 도형과 초자연적인 무늬를 공간 속에 상징화시켜 종교적으로 표현한 고려시대, 그리고 자연관, 심미적 가치, 상징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대중화되고 한국 고유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한 조선시대 등 시계열적 변화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3. 한국의 속화 1,009점을 대상으로 분석한 소재는 식물요소 35종, 동물요소 37종, 자연요소 6종, 기타요소 5종등 총 83종이 출현하고 있다. 4. 속화에 표현된 식물 요소의 미학적 분석에 따른 형태미의 경우 모란도는 음양오행의 원초적 세계관을, 매화도는 역동적인 운치와 생태적인 조화원리를, 구도미의 경우 책가도는 복합 다시점 구도이면서도 강한 주목성을, 병화도는 역원근법에 의한 색의 강한 대비를, 독서여가도는 직선과 사선을 이용하여 자연과 인공요소의 질서정연한 균제미를 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 색채미의 경우 오방색(동(東), 서(西), 남(南), 북(北), 중앙(中央)) 또는 오채색(적(赤), 청(靑), 황(黃), 백(白), 흑색(黑色))의 경우 주술적 또는 종교적으로 활용하거나 자연법칙과의 상관관계를 상징적으로 대입시키고 있다. 5. 한국 속화에 등장하는 각 요소들의 도입방식은 단순한 자연계 형태 모방을 뛰어 넘어 우주 내에 존재하는 본질의 의경을 통해 회화적 예술성을 바탕으로 자연관과 접목된 '상징성'으로 승화시켰다. 즉, 한국의 속화에서 추적할 수 있는 동 식물의 '상징성'은 종교적, 사상적, 생태적, 철학적 측면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자유 분망하면서도 독특한 표현으로 과학적 인식체계가 아닌 상징적 인식체계로,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우리 민족의 집단적 문화 정체성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한국의 속화(또는 민화)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생활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든 자연관이자 토속성 짙은 의미경관요소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생활문화 속에 뿌리 깊게 배어 있었던 속화는 시대적 변천과정을 거쳐 그 의미와 감정이 현격히 퇴색되었다. 오늘날 주거생활이 아파트문화로 전이되고 가치관의 혼돈이 심화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속화가 갖는 미학적, 상징적 가치는 정신적 풍요를 건전하게 지켜주는 상징 자산으로 전승되어 우리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한상룡 가옥(현 가회동 백인제 가옥)의 원형과 조영개념 (A Study on the Original Form and Planning Concept of Han, Sang Ryong's Hanok)

  • 박상욱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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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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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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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The founder of the 'Paik In - Je House in Ga Hui Dong' in the Bukchon Hanok Village was found as Han Sang- Ryong (1880.11.14. ~ 1947.?) and the time when it was built was by the late June in 1913. Han Sang Ryong was the director of the HanSung Bank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he was the industrialist in the management committee and the economy coordinator in the economic area. The way how he could accumulate the huge amount of money was because his Uncle Lee Yoon Yong and Lee Wan Yong brothers were participating in various concessions under the protection of the colony government such as Chosun colonial government. Through seven years of preparation for building the mansion, the social function he presented to his house was 'the house built for the banquet hall'. He invited many celebrities of politics and economy to this house and built his fundaments for his social activity through interactions. To solve the construction concept, he used the way of 'duplicity and juxtaposition', and his mansion was reborn as a modernized urban Hanok through the reinterpretation by his program out of the old Confucian rules. Han Sang Ryong's mansion is significant and valuable in the period since it was a pioneer in challenging the creative housing in the developing stage of Hanok in early modern era, and the highest social level people were trying to show off through the Hanok as a product.

제주도 지역 성곽 유산 연구 현황과 보존·정비 방향 (The Status of Studies on Historical Wall Relics in the Jeju Area and the Strategic Direction for Their Preservation and Maintenance)

  • 변성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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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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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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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제주도는 지정학적 위치상 동아시아 해로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였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주변국의 외침을 빈번하게 받아왔다. 특히 쓰시마에 거점을 둔 왜구들이 중국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제주를 정복하기 위한 왜구의 침략이 고려 말 이후 계속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제주도 곳곳에는 외침에 대비한 방어시설들이 설치되었고, 특히 소수의 인원으로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성곽이 곳곳에 축조되었다. 이는 내륙과 떨어져 있어 유사시 신속한 지원을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관계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성곽은 해당 지역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였던 만큼 그 지역의 역사와 지리적 특성을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런 이유로 성곽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성곽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다른 지역의 성곽 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제주도의 경우는 1970년대 들어서야 조사되기 시작했다. 이는 제주도 성곽의 중요성을 빨리 인식하지 못했고 성곽을 연구하는 전공자가 제주지역에 없었던 것이 원인일 것이다. 제주도에 대한 고고학조사가 본격화되면서 성곽에 대한 연구도 점차 진전되었으나 아직도 그 수준은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제주도 성곽 유적에 대한 연구 현황과 보존 정비 현황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려시대 성곽 유적 2개소와 조선시대 성곽 유적 13개소의 성곽 유적 현황과 연구 현황을 분석하여 제시할 수 있었다. 성곽 유적의 보존 정비 현황에서는 잔존하는 성벽과 부속시설 현황을 제시하였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정비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곽 유적의 정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언급하여 향후 복원 정비에 참고할 수 있는 개선방안을 간단하게 제시하였다.

구한말${\sim}$일제강점기 한강 중류지역에 있어서 교통기관의 발달에 따른 유통구조의 변화 (Changes of Periodic Markets by Transportation Facilities Development in the Middle Stream Region of Han-River during the Late Chosun dynasty and Japanese Colony Period)

  • 김재완;이기봉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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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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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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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구한말과 일제시기 동안 조선 후기의 유통구조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는데, 한강 중류지역의 변화를 통해 그 변화 모습의 대강을 찾아볼 수 있었다. 구한말과 1900년대 초반 원거리 운송은 주로 한강 수운에 의해, 단거리 운송은 소와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포구가 원거리 운송의 결절점으로서 물자 이출입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1905년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1911년부터 대대적으로 벌어진 신작로 개설 및 우마차의 본격적인 사용은 한강 원거리 유통구조에 일대 혁신을 불러왔다. 이출부분에서 경부선 철도의 개통으로 현재의 이천시와 용인시 안성시의 행정적 경계가 경부선과 남한강 수운 영향권의 경계선으로 등장하였다. 이입부분에서는 경부선 철도의 개통으로 철도역과 관계되어 있는 안성장, 오산장, 수원장 등이 고차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르고, 우마차의 본격적인 사용으로 중 단거리 운송비가 1/4 정도로 절감됨에 따라 서울 한강변 포구와의 경쟁력이 급속히 강화되어 남한강 서쪽지역의 대부분까지 그 영향권을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1927년 천장선(天長線)(천안${\sim}$장호원), 1932년 수려선(水驪線) 철도(鐵道)가 개통(開通)됨으로써 원거리 유통구조는 다시 한번 변화를 겪게 된다. 이들 노선의 개통으로 이출부분에서 여주 이천 남쪽 지역의 대부분을 철도가 장악함으로써 남한강 수운에 대한 결정적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이입부분에서는 한강 중류지역으로부터 유입되던 물자가 경부선 철도역 장시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들어오게 됨에 따라 안성장, 오산장, 수원장의 한강 증류지역에 대한 고차중심지적 성격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양평 지역은 1930년대까지도 철도의 영향권 밖에 있었기 때문에 남한강 수운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앙선이 1939년 양평까지, 1942년 원주까지 개통됨에 따라 비슷한 변화가 나타났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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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삼각주의 경관변화에 관한 연구 -명지동을 사례로- (A Study on the Landscape Change in Nakdong River Delta The Case of Myeongjidong)

  • 허민석;손일;탁한명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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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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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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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요인에 의해 공간적 변화가 이루어진 명지동을 사례로 낙동강 삼각주의 거시적 공간 변화와 지역주민들의 적응과정을 미시적 관점에서 파악하였다. 명지동의 공간적 변화는 1910년 발행된 구한말 지도집, 지형도, 지지(地誌), 시사(市史) 등에서 지도를 수집하고 GIS 프로그램의 지리참조 기능을 이용해 좌표를 부여한 후, 각 지역의 시계열적 변화를 확인하였다. 조선총독부, 김해수리조합, 국가의 계획이나 정책에 의해 추진된 공간변화는 이전과 다른 환경적, 인문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지역과 주민들의 토지이용, 주택, 산업 등에 다양한 적응과정을 불러왔다. 이러한 적응과정은 문헌을 수집하고 비교한 후, 현지조사에서 실시한 지역주민들과의 면담을 통해 자료를 보충하였다. 연구지역은 1935년 낙동강제방과 명지방조제 축조를 시작으로 1940년대 후반 김해수리조합의 구역확장공사가 이루어진 이후 형성된 농업적, 전원적 경관이 1970년대 이후 국가, 지방자치단체의 발전계획에 따라 상업적, 도시적 경관으로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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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방산 칠전리 출토 백자의 성분분석을 통한 원료특성 연구 (Study of Material Characteristics by a Componential Analysis on the Whiteware from the Kiln of Chiljeon-ri, Bangsan-myeon, Yanggu-gun)

  • 안송이;황현성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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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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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1-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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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에서는 양구 방산 칠전리 1, 2호 가마터에서 출토된 백자의 특성을 성분분석을 통하여 양구지역 백자 및 원료와 분원 백자의 연관성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제작시기에 따라 칠전리 1, 2호 백자의 유형을 분류하였으며, 칠전리 백자는 태토 조성 및 유약 성분에서 이 유형 분류와 관련하여 구분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미량원소 분석 결과, 칠전리 백자는 지질학적인 특성이 동일한 원료로 제작되었으며 제작시기별로 원료의 정제 및 조합에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소성온도는 $1,100{\sim}1,200^{\circ}C$ 정도로 추정되어 칠전리 백자의 소성온도가 일반 백자에 비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화 안료의 성분분석에서는 전이금속원소나 희토류원소가 소량 함유된 이질적인 청화 안료의 특성을 보였다. 한편 문헌 기록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조선 후기 분원리 요지 백자와 양구지역 원료 사이에 연관성이 보이나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는 분원의 다양한 원료 사용 및 조합 때문으로 여겨진다.

전통의 현대화 원칙 및 전략 수립을 위한 전통 재조명 (Review of Traditional Concepts for Modernization of Tradition and Strategy of Modernization)

  • 한성구;지준호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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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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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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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우리는 근대의 본질과 수용의 타당성에 대해 성찰하기 전에 이미 일본이라는 타자에 의해 이식된 근대 속에 던져졌으며, 이로 인해 근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유보되거나 정서상 회피, 또는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구한말 전통 문화와 사상의 무기력함으로 인해 야기된 망국의 상황도 사람들이 근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근대란 연속되는 역사 시간 속에서 전통과 현대라는 상대적 개념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규정받는다. 따라서 회피하거나 망각하고 싶은 근대라 할지라도 현대를 이해하고 그 원류가 된 전통 시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근대에 대한 정면적인 직시가 필요하다. 근대의 실패는 전통 계승의 실패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통 계승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 가다보면 우리가 근대를 실패한 시기로 인식하는 원인의 일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과거와의 단절을 꾀하는 반전통주의는 서구 교육의 전래와 깊은 연관이 있다. 신교육은 반전통주의를 서구화 교육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였다. 서구문화를 추종하는 개화론자들은 조선이 뒤처지게 된 원인을 전통교육에서 찾았다. 따라서 조선이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전통과의 단절, 그리고 급격한 서구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전통주의는 근대교육으로의 진전이라기보다는 서구교육에 대한 일방적인 예속이라고 볼 수 있다. 신교육의 일각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반전통적 입장은 기존의 교육 체제를 철저히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천 년간 계승되어 내려온 교육 내용과 형식마저도 도외시함으로써 문화적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서구 교육의 수용이 지닌 양면성을 고려할 때, 전통교육을 부정하는 모든 신교육을 곧 근대교육으로 파악하는 단선적 이해 방식은 재고되어야 한다. 본 논문에서는 구한말 발간된 잡지와 신문의 전통 교육 계승 관련 글들을 중심으로 근대 지식인들이 전통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한다. 아울러 전통 단절 원인과 그것의 결과로 야기된 교육적 병폐의 양상을 논함으로써 오늘날 새롭게 조명해야 할 전통적 요소를 찾아 교육적 참고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