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Lacq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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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근대역사관 소장 인력거 재질분석 연구 (Study on Material Characteristic of Daegu Modern History Museum Collection Rickshaw)

  • 이의천;이영주;김수철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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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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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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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에서는 대구근대역사관 소장 인력거의 재질별 분석을 통해 다양한 재질이 복합적으로 사용되는 근·현대문화재의 재료를 확인하고, 보존 및 관리의 기초 자료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금속, 목재, 섬유, 도료를 대상으로 P-XRF, 수종분석, 섬유동정, 도막층 분석(층상 구조, SEM-EDS, FTIR)을 실시한 결과, 금속은 구리(Cu), 아연(Zn), 황동(Brass)과 철(Fe)로 확인되었다. 목재는 상수리나무류, 삼나무, 대나무아과, 비자나무속이 식별되었으며, 이 중 삼나무는 일본 자생종으로 인력거 제작 당시 일본에서 목재를 수입하여 제작하고, 근대 일본 인력거의 제작 양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섬유는 면(Cotton)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일부는 가죽(Leather)도 확인되었다, 도막층은 캐슈(Cashew)를 사용하여 1회 이상 도포한 것으로 관찰되었으며, 특히 인력거 몸체부는 섬유층, 토회층, 도료층, 채색층이 중복되어 관찰되고, 성분이 다른 적색 안료(산화철 및 진사)층이 관찰된 점을 보아, 과거 일부 보수 및 보존처리가 진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캔 제품의 bisphenol A diglycidyl ether (BADGE), bisphenol F diglycidyl ether (BFDGE) 유도체 및 분해산물 분석법 (Determination of the Levels of Bisphenol A Diglycidyl Ether (BADGE), Bisphenol F Diglycidyl Ether (BFDGE) and Their Reaction Products in Canned Foods Circulated at Korean Markets)

  • 김희연;이진숙;조민자;양지연;백지윤;정소영;최선희;김영선;최재천
    • 한국식품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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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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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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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캔제품 중 Biphenol A diglycidyl ether(BADGE), bisphenol F diglycidyl ether(BFDGE) 및 그 분해산물인 BADGE $H_2O$, BADGE $2H_2O$, BADGE HCl, BADGE 2HCl, BADGE HCl $H_2O$, BFDGE $H_2O$, BFDGE $2H_2O$, BFDGE HCl, BFDGE 2HCl, BFDGE HCl $H_2O$ 등의 HPLC/FLD와 HPLC/APCI-MS에 의한 정성 및 정량방법을 확립하고 133개 캔 제품을 사용하여 분석방법의 재현성을 검토하였다. 수용성 식품의 경우 BADGE $2H_2O$가 13개 제품에서 0.400-0.888 mg/kg, BADGE HCl $H_2O$가 1개 제품에서 0.566 mg/kg, BFDGE $H_2O$가 3개 제품에서 0.489-0.664 mg/kg, BFDGE $2H_2O$가 3개 제품에서 0.455-0.846 mg/kg, BFDGE HCl $H_2O$가 2개 제품에서 0.455-0.752 mg/kg의 농도로 검출되었다. 지용성 식품의 경우에는 BADGE가 3개 제품에서 0.093-0.486 mg/kg, BADGE $H_2O$가 1개 제품에서 0.183 mg/kg, BADGE HCl이 1개 제품에서 0.097 mg/kg, BADGE 2HCl이 7개 제품에서 0.200-0.452 mg/kg, BFDGE가 3개 제품에서 0.438-0.506 mg/kg, BFDGE $2H_2O$가 1개 제품에서 0.295 mg/kg, BFDGE HCl 및 BFDGE 2HCl이 1개 제품에서 0.324 mg/kg의 농도로 검출되었다. 분석방법의 재현성은 우수하였고, 모니터링 결과는 EU 수준과 유사하거나 안전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CEPA 처리(處理)에 의한 옻나무 칠액(漆液) 채취법(採取法) 개량(改良)에 관(關)한 연구(硏究) (Improvement of Lacquer Collection Method by CEPA Application in Lactree(Rhus verniciflua Stokes))

  • 최태봉;현정오;김만조;나천수;김갑태;이재호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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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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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8-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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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본 연구는 노동집약적인 옻나무 칠액채취방법을 개선하고자 인위적인 CEPA 처리가 칠액분비촉진 및 산칠량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하여 수행되었다. 10% CEPA(에틸렌 유도물질) 처리시, 5주 후의 수피두께와 수피내 옻산함량은 처리부위로부터 상하 20-40cm 정도까지 대조구에 비해 유의하게 증가하였고, 아래쪽보다 윗쪽이 더 많은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처리부위로부터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처리효과가 더욱 뚜렷하였다. 처리시기에 있어 8월말에 처리한 것은 수피두께와 옻산함량에 변화가 없었으나 6월초에 처리한 것은 수피두께에서 2.5배, 옻산함량에서 3배 정도 증가하였다. 또한 CEPA의 처리 후 1주째 부터 수피내 옻산함량이 증가되었고, 4주째 정점을 이룬 후 5주째는 감소하였다. 이상의 결과를 토대로 인위적인 CEPA 처리를 살소법에 적용하여 산칠량을 조사하였다. 채칠 초기에 CEPA 처리구가 대조구에 비해 3-4배 정도 높았지만, 상대적인 비율이 점차 감소하여 7회 채칠 이후에는 대조구의 산칠량이 약간 많아졌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 대하여 고찰하였고, 전통적인 살소법의 개량 가능성 여부를 토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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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독화 옻 추출물로 제조한 발효식초의 품질 특성 (Quality characteristics of fermented vinegar prepared with the detoxified Rhus verniciflua extract)

  • 백성열;이충환;박유경;최한석;문지영;여수환
    • 한국식품저장유통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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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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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4-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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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연구에서는 옻의 활용과 부가가치 증대를 위해 우루시올 성분이 제거된 무독화 옻 추출물을 첨가한 식초제조 조건 및 품질 특성을 조사하였다. 종초 접종량을 달리하여 무독화 옻 추출물 첨가한 식초의 초산 발효에서는 발효 후반 종초 접종량에 따른 산도는 4.8~4.9%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초기 알코올 농도에 따른 초산 발효에서는 초기 알코올 농도가 높을수록 산도가 높은 경향을 나타내었으며, 초산 수율은 82.8%, 84.4%, 77.7% 및 69.5%로, 초기 알코올 농도 6% 시험구에서 가장 높았으며, 알코올 8% 시험구에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무독화 옻 추출물 농도에 따른 초산 발효에서는 옻 추출물 첨가한 식초의 산도는 5.3~5.9%로 무첨가 식초의 산도 5.5%에 비해 0.4% 높았으며, 옻 추출물 농도에 따른 차이는 크지 않았다. 무독화 옻 추출물 농도에 따른 갈색도는 무첨가 식초가 옻 추출물 첨가 식초보다 갈색의 정도가 높았으며 색도는 옻 추출물 2% 첨가 식초의 명도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무독화 옻 추출물 농도에 따른 주요 유기산은 acetic acid로 분석되었으며 함량은 53.3~65.8 mg/mL의 범위를 나타내었다. 무독화 옻식초의 주요 아미노산은 arginine($190.3{\sim}333.3{\mu}g/mL$), proline($125.6{\sim}290.8{\mu}g/mL$), alanine($126.1{\sim}270.9{\mu}g/mL$), glutamic acid($159.0{\sim}262.4{\mu}g/mL$)이며, 무첨가 식초에 비해 높은 유리 아미노산은 alanine과 glutamic acid로 나타났다.

'파산서당'의 영건과정과 조경식물 변화상 탐색 (The Search for Study on the Construction Process and Changes in the Landscape Plants of the Pasanseodang)

  • 주빈;최하영;신상섭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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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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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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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1874년 박규현이 기술한 '파산서당기'를 중심으로 분석한 파산서당의 영건과정과 조경식물의 변화상을 추적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구 달성의 하빈면 묘리 파회에 자리한 살림집 삼가헌과 별당(파산서당)은 사육신 박팽년(1417~1456)의 11대손 박성수로부터 14대손 박규현에 이르기 까지 약 90년간(1783~1874)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풍수적 회룡고미형(回龍顧尾形)으로 회자되는 길처이다. 둘째, 파회마을은 박성수가 1769년(영조 45)에 벗들과 교우하기 위해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삼가헌(三可軒))를 당호로 삼은 것으로부터 유래하는데, 둘째아들 박광석이 분가(1783)한 후 사랑채(1826)와 안채(1869)를 지었고, 박광석의 손자 박규현이 1874년에 연을 심어 가꾼 연못과 정자(하엽정)를 추가했으며, 파산서당 명칭은 삼가헌 뒷동산 지명과 연계된다. 셋째, 네모꼴 연못은 길이 21m, 너비 15m 규모로 연꽃을 심었는데, 못 가운데 원형 섬을 두어 조선시대의 보편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파산서당에 부가된 정자(하엽정)의 명칭, 동쪽 방 이연헌(怡燕軒), 서쪽 방 몽양재(蒙養齋) 등은 군자적 삶의 염원, 그리고 자손들의 밝은 미래를 염원하는 뜻을 담았다. 넷째, 성리학적 규범(소나무, 연꽃, 대나무), 안빈낙도의 생활철학(버드나무), 은일사상과 태평성대의 염원(대나무), 그리고 구휼목적과 실용성(밤나무, 상수리나무, 가래나무, 옻나무 등)에 비중을 둔 식재수종의 반영을 추적할 수 있는데, 이는 서당이라고 하는 장소성과 상징성, 절제미학 등을 고려한 조경법이라 하겠다. 다섯째, 조영초기 식재수종은 회화나무와 연꽃을 제외하고 대부분 고사하여 다른 수종으로 대체되었는데, 서당 기능의 상실과 풍수적 가치(홍동백서 상징수종), 벽사기능(엄나무와 탱자나무), 심미성 및 실용적 가치(해당화, 매화, 배나무, 복숭아나무, 굴참나무), 가문의 번영과 변화지 않는 청백의 삶(자귀나무, 배롱나무, 주목), 심미관 등 후손들의 확장된 작정관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경주지역 목관·목곽묘의 전개와 사로국 (Development of Wooden Coffin(木棺) and Chamber(木槨) Tombs in Gyeongju(慶州) and Sarokuk(斯盧國))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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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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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6-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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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는 경주지역에서 발굴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대까지의 목관묘와 목곽묘에 대한 구조분석과 그 변화양상을 추적하여 사로국의 정치, 사회적인 동향과 성장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가 기원전 2세기 후반 무렵 영남지방으로 파급되면서 경주지역에서도 철기가 부장된 군집묘(群集墓)가 조성되기 시작하며 이후 기원전 1세기 후반에는 한군현(漢郡縣)의 설치에 따라 대동강유역의 유이민이 진한(辰韓)으로 남하, 정착하면서 전한경(前漢鏡)과 와질토기(瓦質土器)가 부장된 중소형의 단순목관묘(單純木棺墓)가 경주지역에 등장하게 된다. 청동유물을 다량 부장한 독립묘(獨立墓)의 주인공은 군집묘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최상위 계층의 것으로 사제왕(司祭王)일 가능성이 높으며 경주의 각 곡간지역을 범위로 하는 지역집단의 수장묘(首長墓)로 추정된다. 기원후 2세기에 접어들면서 단순목관묘는 규모가 확대되고 부장유물의 종류와 양이 풍부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사라리 130호묘이다. 이것은 피장자의 주관 옆에 부장품을 넣은 목갑(木匣)을 설치하여 칠기(漆器)나 동경(銅鏡) 등의 위신재(威信財)를 부장한 것으로, 이와같은 구조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낙랑지역의 목곽묘에서 보이고 있다. 기존의 목관묘와 구조상에서 차이가 보이는 이러한 목관계목곽묘(木棺系木槨墓)의 출현은 변 진한의 철(鐵)을 매개로 한 낙랑과 이 지역과의 활발한 교섭관계를 대변해 주는 것이며 지리적으로 물류의 집산지 역할을 한 사라리 집단은 외부와의 유통과 교역을 장악하여 경주지역의 정치와 사회문화적인 거점으로서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2세기 후반대 이후 정치체의 규모가 크게 성장한 경주지역의 분묘시설에는 부장유물의 안정적인 공간을 위한 곽(槨)이라는 개념이 정착하게 되었고, 소형묘와 입지상에 있어 차별성을 가진 대형의 장방형목곽묘가 3세기 전엽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지배집단 내 계층분화의 양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대형묘가 소재하는 지역이 소국의 중심지로써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후 이 지역 목곽묘의 평면구조가 점차 길어지는 경향은 묘곽 내에 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결국, 3세기 후반대 부곽이라는 시설을 갖춘 경주식목곽묘(慶州式木槨墓: 동혈주부곽식목곽묘)의 등장을 가져온다. 소형의 부곽은 점차 길이가 길어져 4세기대에는 주곽의 크기에 이르는데, 이는 집단 내 계급의 분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권력의 집중화가 표면화된 것으로 경주와 주변지역 대소집단간의 통합이 진전되는 분위기 속에서 집단 내의 질서를 일원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A Case Study of Shanghai Tang: How to Build a Chinese Luxury Brand

  • Heine, Klaus;Phan, Michel
    • Asia Marketing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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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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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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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This case focuses on Shanghai Tang, the first truly Chinese luxury brand that appeals to both Westerners and, more recently, to Chinese consumers worldwide. A visionary and wealthy businessman Sir David Tang created this company from scratch in 1994 in Hong Kong. Its story, spanned over almost two decades, has been fascinating. It went from what best a Chinese brand could be in the eyes of Westerners who love the Chinese culture, to a nearly-bankrupted company in 1998, before being acquired by Richemont, the second largest luxury group in the world. Since then, its turnaround has been spectacular with a growing appeal among Chinese luxury consumers who represent the core segment of the luxury industry today. The main objective of this case study is to formally examine how Shanghai Tang overcame its downfall and re-emerged as one the very few well- known Chinese luxury brands. More specifically, this case highlights the ways with which Shanghai Tang made a transitional change from a brand for Westerners who love the Chinese culture, to a brand for both, Westerners who love the Chinese culture and Chinese who love luxury. A close examination reveals that Shanghai Tang has followed the brand identity concept that consists of two major components: functional and emotional. The functional component for developing a luxury brand concerns all product characteristics that will make a product 'luxurious' in the eyes of the consumer, such as premium quality of cachemire from Mongolia, Chinese silk, lacquer, finest leather, porcelain, and jade in the case of Shanghai Tang. The emotional component consists of non-functional symbolic meanings of a brand. The symbolic meaning marks the major difference between a premium and a luxury brand. In the case of Shanghai Tang, its symbolic meaning refers to the Chinese culture and the brand aims to represent the best of Chinese traditions and establish itself as "the ambassador of modern Chinese style". It touches the Chinese heritage and emotions. Shanghai Tang has reinvented the modern Chinese chic by drawing back to the stylish decadence of Shanghai in the 1930s, which was then called the "Paris of the East", and this is where the brand finds inspiration to create its own myth. Once the functional and emotional components assured, Shanghai Tang has gone through a four-stage development to become the first global Chinese luxury brand: introduction, deepening, expansion, and revitalization. Introduction: David Tang discovered a market gap and had a vision to launch the first Chinese luxury brand to the world. The key success drivers for the introduction and management of a Chinese luxury brand are a solid brand identity and, above all, a creative mind, an inspired person. This was David Tang then, and this is now Raphael Le Masne de Chermont, the current Executive Chairman. Shanghai Tang combines Chinese and Western elements, which it finds to be the most sustainable platform for drawing consumers. Deepening: A major objective of the next phase is to become recognized as a luxury brand and a fashion or design authority. For this purpose, Shanghai Tang has cooperated with other well-regarded luxury and lifestyle brands such as Puma and Swarovski. It also expanded its product lines from high-end custom-made garments to music CDs and restaurant. Expansion: After the opening of his first store in Hong Kong in 1994, David Tang went on to open his second store in New York City three years later. However this New York retail operation was a financial disaster. Barely nineteen months after the opening, the store was shut down and quietly relocated to a cheaper location of Madison Avenue. Despite this failure, Shanghai Tang products found numerous followers especially among Western tourists and became "souvenir-like" must-haves. However, despite its strong brand DNA, the brand did not generate enough repeated sales and over the years the company cumulated heavy debts and became unprofitable. Revitalizing: After its purchase by Richemont in 1998, Le Masne de Chermont was appointed to lead the company, reposition the brand and undertake some major strategic changes such as revising the "Shanghai Tang" designs to appeal not only to Westerners but also to Chinese consumers, and to open new stores around the world. Since then, Shanghai Tang has become synonymous to a modern Chinese luxury lifestyle br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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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 불좌상에 대한 고찰 (A Study on the Wooden Seated Vairocana Tri-kaya Buddha Images in the Daeungjeon Hall of Hwaeomsa Temple)

  • 최성은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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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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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0-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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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정유재란을 겪으며 전소(全燒)된 화엄사는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의 주도 아래 재건이 이루어졌다. 대웅전에는 목조비로자나삼신불상이 봉안되었는데, 1634년에 완성하여 1635년에 점안·봉안되었다. 2015년에 석가불상 복장 <시주질>과 노사나불상 대좌 내부 판재(板材)에 적힌 <묵서명>이 조사되고, 2020년에 노사나불상의 복장 <시주질>이 조사되어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에 참여한 청헌, 응원, 인균을 포함한 열여덟 명의 조각승들이 밝혀졌고 선조(宣祖)의 아들 의창군 이광(李珖)을 비롯한 왕실과 종친, 천명이 넘는 승속(僧俗)의 시주자들이 동참한 대규모 불사였음이 알려졌다. 비로자나삼신불상의 본존은 높이 2.76m의 장육불상으로 당시 불교조각에서 널리 유행하던 장신형의 비례감이 아닌 두부가 크고 어깨가 좁은 고식(古式)의 단구형(短軀形) 비례감을 보인다. 주먹 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과 보관을 쓴 보살형의 노사나불상은 북송대에 고려로 전해진 전통적인 도상(圖像)이며, 석가불상이 결한 독특한 항마촉지인의 형식은 명(明)에서 전래된 경(經) 변상도에 나타난 도상이 불교조각에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에서 나타나는 신구(新舊) 양식과 도상의 혼재는 화엄사 불사(佛事)를 맡았던 조각승들이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귀족적 전통을 계승한 조선초기 불교미술에서 화엄사 삼신불상의 범본을 구하려했던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전란으로 소실된 고려시대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원(原)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기를 바라는 화엄사 산중대덕(山中大德)들의 기대가 불상조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화엄사 삼신불상의 노사나불상은 고려시대 비로자나삼신불상과 도상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화엄사에 이와 유사한 도상과 양식의 비로자나삼신불상이 봉안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만우 휘헌의 『화엄사지』(1924)에 따르면, 화엄사는 고려 왕실의 축성의례를 거행해온 사찰로 여겨지는데, 이 전통이 조선후기까지 이어져 화엄사 재건 불사에서 새로 조성된 대웅전 비로자나삼신불상 역시 조선왕실의 축성의례를 위한 예배대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화엄사 재건에 왕실과 종친이 시주자로 참여한 점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