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oseo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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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민중사상과 도교이미지, 그리고 도교서 언해 (Folk Ideas, Daoist Images, and Daoist Texts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 이봉호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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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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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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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조선후기에 민중사상은 도교적 요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정감록』을 중심으로 한 민중사상은 '해도기병설'과 '남조선신앙', '미륵하생' 등으로 구체화되고, 이는 『정역』에 의해 개벽이라는 형태로 발전한다. 이들 민중사상에는 풍수와 도참의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도교의 방술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철종 때부터 도교서들이 번역되기 시작하고, 고종에 의해서 국가의 국역사업으로 많은 도교서들이 번역, 간행된다. 이들 도교서의 성격은 선서류(善書類)이거나 보권류(寶卷類)이다. 문제는 이들 선서와 보권류의 도교서들이 청대 민란의 주요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사업으로 진행된 도교서들의 번역은 민란이나 변혁을 바라는 민중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것인데, 왜 고종은 도교서 번역 사업을 국가적으로 시행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 후기의 민중사상을 정리하고, 그 내용들이 도교와 밀접한 관계임을 해명하였다. 또한 한국의 역사에서 도교는 국가적 위기에서 진호(鎭護)의 성격으로 등장해왔던 사실들을 정리하고, 임진왜란 당시에 도교가 호출되는 상황을 정리했다. 아울러 『홍길동전』과 『홍길동전』과 거의 동일한 서사를 갖는 야담(野談)의 내용들 속에 도교적 요소들이 있음을 해명하였다. 고종이 국권을 잃을 상황에서 도교 선서와 보권을 국역하고 보급한 것은 도교의 국가 진호적 성격을 인식하고, 도교를 통해 국권을 지키고자 한 의도임을 해명했다. 아울러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도교적 풍습과 관례는 고종의 도교 선서와 보권의 보급과 관련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일제강점기 북한지역 고건축물 목록을 통해 본 조선총독부 학무국 고건축 조사의 성격 (A Study on Characteristics of the Survey for Architectures by Joseon Government-General through its List of Architectural Heritages in North Korea)

  • 서효원
    •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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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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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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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analyze the "朝鮮古建築物", the list of architectural heritages in Korea during the early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list included architectural heritage of the region of North Korea in the colonial era. A process of listing was showing the meaning of an architectural heritage for the Japanese General Government through the criteria of selecting buildings registered on the list. This study revealed the process of a survey for making list and explored the criteria of the list. The result of this effort will contribute to determining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North Korea's architectural heritage in the early days.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가구 탁자(卓子)류 가구 조형 디자인의 유사성 연구 (Research on the Similarity of Furniture Design of Table Furniture in the Later Joseon Dynasty and Ming-style Furniture)

  • 소양;김기수;이양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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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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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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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조선 왕조는 명나라, 청나라와 여러 차원의 긴밀한 교류를 가졌으며, 가구 조형 디자인의 발전 과정에서 같은 문화적 원천과 상호 왕래, 동일한 요소들이 서로의 가구 조형에서 나타나고 있다. 본 논문은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를 연구 주제로 탁자(卓子)류 가구를 구체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아 양국 교류사의 연구를 결합한 '유사성'의 시각에서, 전체적 디자인과 부분적 디자인 두 가지 측면에서 양국 전통 가구의 조형 디자인을 검토했다. 구체적인 사례 분석에서 조선시대 소반(小盤), 경상(經床), 연상(硯床) 등의 탁자(卓子)류 가구는 명청시대의 항탁(炕桌), 방탁(方卓), 주탁(酒桌) 등 탁자(卓子)류 가구와 전체적인 조형 디자인에서 유사성을 나타냈다. 부분적인 디자인은 비슷한 두 나라의 가구의 안면(案面), 운각(雲角), 두루마리(卷筒), 다리(足) 등에서 유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 논문은 '풍혈(風穴)' 조형물의 연원(淵源)을 추정함으로써 한국 전통가구 문화에 대한 연구의 폭을 넓히고자 했다. 한중간에 다방면에 걸친 교류가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전통가구에서 유사성을 탐색하는 것은 양국의 문화교류 과정을 분석하고 교류를 활성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고문헌 기록에 나타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지질자원 조사활동 연구 (Study on Survey Activities for Geology and Mineral Resources in the Goryeo and Joseon Dynasty Based on the Records of Ancient Literatures)

  • 원병호;이성록;김성용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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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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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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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연구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역사서 중 객관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이용하여 지질자원과 관련된 역사 기록들을 발췌하고 당시의 국가적인 인식과 사회 상황을 파악하였다. 기록 발췌를 위해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시스템을 이용하였고 키워드(화산, 채광, 온천, 운석) 검색을 통해 관련 기록들을 수집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화산과 운석과 같은 지질 현상을 실록에 기록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국가의 관리들이 현장에 파견되어 현상을 조사하였다. 온천의 경우, 왕의 명령으로 온천 탐사를 진행하고 발견된 유망한 지역을 개발하는 현장에 관한 기록이 있다. 지질자원에 관련된 기록 중 채광에 관련한 기록이 가장 많은데, 발견된 광물의 종류와 지역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채광 역사를 통해서 지질자원 개발의 자본주의적인 흐름과 개발을 위한 근대적인 조직 개설 등의 지질자원 발달사를 파악할 수 있다.

가노지고로의 조선관 연구: 무도사상을 중심으로 (A Study of Kano Jigoro's Philosophical Viewpoint of Joseon: Focusing on Martial Art Philosophy)

  • 유성연
    • 한국체육학회지인문사회과학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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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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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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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연구는 유도의 창시자이며 무도 사상을 전 세계에 전파한 가노지고로의 조선관을 연구하여 한국에 보급된 무도 사상의 근원적 본질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상의 관점에서 진행된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국학자들에게 역사 교육을 받고 성장한 가노지고로는 전설 속의 인물인 진구 황후가 신라, 백제, 가야를 정복하였다는 정한론에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이 정한론은 일제강점기 임나일본부설의 기반이 되었고 가노지고로가 완성한 정력선용, 자타공영의 무도 사상 역시 조선에 유입될 당시 이 정한론이 투영되어 유입되게 된다. 둘째, 가노지고로는 메이지 유신이후 국체라는 설화를 무도 사상의 프리즘에 넣어 분산 확대시켰다. 이는 자신이 만든 무도 사상을 일본의 국체와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가노지고로의 무도 사상은 전 세계에 평화사상으로 적용된 것과 달리 조선에서는 내선일체의 논리로 무도가 사용되게 된다. 셋째,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유입된 가노지고로의 무도 사상은 문화변용현상을 거치면서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모순을 보이게 된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내선일체의 수단으로 무도를 활용하는 반면 한민족 선각자들은 가노지고로의 국가관을 배제시킨 후 민족주의적 특성을 내제시키면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무도를 수련하였다.

19세기 공주감영 측우기 강우량 18년 복원 (Restoration of 18 Years Rainfall Measured by Chugugi in Gongju, Korea during the 19th Century)

  • 부경온;권원태;김상원;이현정
    •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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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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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3-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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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The rainfall amount measured by Chugugi at Gongju was found in "Gaksadeungnok". Gaksadeungnok is ancient documents from governmental offices in Joseon dynasty. Rainfall data at Gongju are restored for 18 years of 19th century. In 1871, total rainfall amount is 1,338 mm. It is different by about 11% in the amount compared with Seoul Chugugi rainfall in 1871 and Daejeon modern raingauge measurement result during the 30 years (1971-2000). Annual march of monthly rainfall data at Gongju is similar with that of Seoul. Based on the results, restored rainfall at Gongju is consistent with Seoul Chugugi rainfall data. The rainfall amount restored in this study is measured by Chugugi which was installed at Gongju, in Chung-Cheong province. Furthermore, Gaksadeungnok includes rainfall amount reports by agricultural tool measurement in addition to Chugugi measurement. These facts prove a network of rain gauge in Joseon dynasty.

십왕도(十王圖)의 보존처리(保存處理) (Conservation of Buddhist Painting "Ten Kings of Hell")

  • 천주현;장은지;김우현
    • 박물관보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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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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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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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전 『조선시대 불교회화와의 만남 -영혼의 여정-』을 준비하면서 보존처리한 조선시대 불화 "시왕도"의 손상상태와 손상원인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육안으로 확인이 쉽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는 현미경, X-ray, 적외선 등의 조사도 이루어졌다. 이에 보존처리 전에 실시한 과학적인 조사결과를 소개하고 시왕도의 보존처리 과정을 정리하였다.

조선 15~17세기 수륙재(水陸齋)에 대한 유신(儒臣)의 기록과 시각 매체 (The Joseon Confucian Ruling Class's Records and Visual Media of Suryukjae (Water and Land Ceremony) during the Fif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

  • 정명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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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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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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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조선 개국 후 유교적 가치관으로 성장한 통치 계급에게 불교 의례는 이른바 '위험한 축제'로 인식되었다. 의례는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다음 단계로의 이행을 도왔고, 제의를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했다. 의례 공간에는 도량을 신비로운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다양한 공양구와 기물이 장엄되고 범음구와 범패가 어우러졌다. 그 중에서도 불교 회화는 기층민에게 강한 효력을 지닌 시각 매체로 적극 활용되었다. 생사의 인과응보를 담은 <시왕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의식이 마련된 도량에 불화를 헌괘하고 이를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관청(觀聽)'에 대한 수요로 불화의 기능은 더욱 확대되었다. 천도 의례 장면을 담은 <감로도>에는 왕실과 종친의 모습이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중국의 수륙화에서 이 도상은 수륙재에 봉청(奉請)하는 존귀한 대상 중 한 그룹이었으나 16세기 <감로도>에는 왕실의 후원을 상징하며 국행 수륙재의 역사성과 전통을 입증하는 존재로 도해된다. 왕실 후원은 불교 의례에 대한 사회적 공인과 같았고, 이러한 메시지를 드러내고 싶은 흔적이 <감로도>에 남아있다. 의례에 대한 위정자(爲政者)들의 경계는 표면적으로는 군중이 참여하는 의례 공간에 승속(僧俗), 남녀, 신분의 귀천(貴賤)이 함께 어우러지기에 예의가 무너지고 풍기가 문란해질 것이라는 우려였다. 또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금기로 부터의 해방이라는 축제의 요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각 매체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인식되었기에 그 힘을 이용하고자 하는 측과 위험성을 우려하는 시선이 공존했다. 실록(實錄)의 기록에서 위험성을 강조하며 불화를 불태우고 불화를 그린 자를 잡아오도록 하는 일련의 조치나, 도성이 텅 비도록 군중들이 모여든 기록은 역설적이게도 불교 의례가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축제의 장으로 인식됐음을 반증한다. 불교 의례는 생의 순환 단계에서 유교가 대체할 수 없는 종교적 기능을 지니고 있기에 쉽게 사라질 수 없었고, 공동체를 통합하는 축제의 요소는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 후기 <감로도>에는 17세기부터 본격화되는 사당패나 연희패가 도해되고 의례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반영되었다. 불행한 죽음을 위로하던 불교 의식은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마련되어 일상의 고단함을 털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축제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유교 국가의 정책적 탄압에 '위험한 축제'로 인식되던 불교 의례가 정례적인 세시풍속이자 공동체의 축제로 수용되는 과정을 불교 회화에 재현된 시선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