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oseo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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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읍치시설(邑治施設) 복원 및 활용을 위한 조선시대 지방관의 일기류(日記類)분석 기초 연구 (An Elementary Analysis of Local Governors' Diaries for the Restoration and Utilization of Official Facilities of Local cities in Joseon Dynasty)

  • 여상진
    •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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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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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76-2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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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그동안 지방 읍치시설의 분석과 복원 및 활용 논의에는 자료의 부족이 큰 문제점으로 대두되어 왔다. 본고는 특히 지방 읍치시설이 복원된 뒤 다양한 문화적 기반을 갖는 바람직한 활용이라는 측면에 주목하면서 이를 위한 기초자료서 조선시대 지방관이 작성한 일기류를 수집 분석하였다. 조사 결과 총 56종의 일기가 수집되었으며 이를 시기 및 내용별로 구분하여 개관하였다. 또한 일기류 자료를 활용하여 분석할 수 있는 조선시대 지방 읍치시설의 활용 양상을 사례를 통하여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지방관 작성 일기류 활용의 장점과 그에 내재된 한계를 검토하였다.

조선시대 활자본 한지의 특성 (제1보) - 기본 물성 및 해부학적 특성 - (Characteristics of the Hanji for Movable Types Printing Volumes of the Joseon Dynasty (Part 1) - Physical and Anatomical Properties of the Hanji -)

  • 윤용현;이승철;최태호
    • 펄프종이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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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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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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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This study was carried out to investigate the characteristics of the Hanji which had been used for movable types printing volumes of the Joseon Dynasty. A total 29 volumes which had printed with metal and wooden movable types, were examined on the physical properties, fiber morphology, and color reactions. The grammage of all of the Hanji which had been used for movable types printing volumes were $13.10-51.65g/m^2$ and on the average was $25g/m^2$. The apparent density of the Hanji was $0.23-1.65g/cm^3$ and on the average was $0.4g/cm^3$. In almost all movable types printing volumes, the Hanji had undergone Dochim which is a processing of printability improvement. Through the examination on fiber morphology and color reactions, Hanji was investigated into that all of those were made from paper mulberry bast fiber.

백두산 화산지형에 관한 연구사 (A History of Geomorphological Researches on Baekdusan Volcano)

  • 박경
    • 한국지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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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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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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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Few studies have dealt with the question of when Mt. Baekdusan became known as a volcano. Attention has been focused rather on the issue of establishing the boundary between the Joseon Dynasty and the Qing Dynasty than the scientific nature of Baekdusan as a volcano. It is only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at Park Jong (1764), who was the scholar of the Gwanbuk region, authored the first travel journal on Mt. Baekdu and described poseok. Due to the scientific curiosity of Westerners on the existence of mysterious snow peak on the border, it was first introduced to the Royal Geographical Society by a British man, H.E.M. James in 1887, who revealed for the first time that Mt. Baekdu is a dead volcano, and that the white color on the top is due to wide-spread pumice. Russian expedition teams including Strel'bitskii (Стрельбицкий, 1894, and Garin (Гарин-Михайловский, 1898), also explored this mountain seeking natural resources and territory of East Asia and the Manchurian region in pursuit of Russian Imperial interests explored and described Baekdusan as a volcano.

조선시대 녹각성과 수중목책의 조성 및 활용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reation and Use of Nokgakseong and Underwater Wooden Fence)

  • 심순희;김충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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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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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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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방어시설로 추정되고 있는 목책(木柵)은 조선시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까지 군사적인 방어기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城)이나 병영(兵營) 외부에 설치되는 성책(城柵), 영책(營柵)의 개념으로 정립되면서 방어를 위한 필수시설로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본 연구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문헌조사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관방시설로 이용되었던 목책을 연구한 결과로, 녹각성(鹿角城)과 수중목책(水中木柵)의 용도와 기능 그리고 설치 방법 그리고 목책의 소재 등을 집중적으로 고찰하였다.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여말선초 외적의 침략이 빈번해짐에 따라 목책은 주요 성외 방어시설(防禦施設)로써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목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관방정책, 입지 환경에 따라 목책성, 녹각성 그리고 수중목책 등 다양한 유형으로 변용(變容)되어 설치되었다. 둘째, 목책은 요충지(要衝地)의 산성(山城)이나 영(營), 진(鎭), 보(堡), 성(城) 등 군사적 목적의 관방시설(關防施設)에 설치되었으며, 유사시 방어의 시급성에 따라 농번기(農繁期)를 피해 인력의 동원이 수월한 농한기(農閑期)에 맞춰 설치되었다.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조선시대 목책의 규모는 포백척(布帛尺)으로 환산한 결과 그 둘레가 4,428척(2,066m)부터 55척(25m)까지 매우 다양한 규모였다. 또한, 목책의 재료는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주로 사용되었다. 셋째, 녹각성은 일반적인 목책보다 공격성을 겸비한 효율적인 전투 지원시설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녹각성기록은 세종대에 20회로 가장 많은 기록이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4군 6진 지역인 평안·함길도(12) 등 변방(邊防) 험지(險地)에 주로 설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 15세기 초반 조정에서 남해안 연해지역(沿海地域)의 해상 방어 전략을 수립하게 되면서부터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본격적으로 읍성(邑城)을 비롯한 주요 치소(治所)나 진, 보 등 여러 관방시설 주변에 왜적의 병선(兵船)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시설로서 수중목책의 설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다섯째, 삼포왜란을 전후한 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 남해안과 강화도에 수중목책이 설치되었다. 특히 15세기에 제포와 같은 경남 해안 요해처(要害處)에 수중목책이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 수중목책의 재료는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주종을 이루지만 이 밖에도 합다리나무, 서어나무류, 칠덩굴도 목책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인골에 대한 생화학적 분석의 유용성: 서천군 옥남리 회곽묘 출토 인골을 중심으로 (Usefulness of Biochemical Analysis for Human Skeletal Remains Assigned to the Joseon Dynasty in Oknam-ri Site in Seocheon, Korea)

  • 강소영;권은실;문은정;조은민;서민석;김윤지;지상현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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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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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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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충청남도 서천군 옥남리 일대(갓재골, 우아실)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출토된 4개체의 인골을 대상으로 조직학, 분자유전학, 골화학 분석 등 종합적인 생화학적 연구를 수행한 결과이다. 실체현미경과 주사전자현미경 분석에 의한 대퇴골의 조직학적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 하였으며, 생화학적 분석이 가능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아밀로제닌 유전자 분석과 미토콘드리아 DNA에 대한 피장자들의 모계 계통형 분석 결과 여성 1명은 B4a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다른 여성 1명과 남성 2명의 피장자는 하플로그룹 D4b1으로 나타났는데 이들 3명은 가까운 모계 혈연관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갓재골에 합장된 두 피장자는 전통적인 매장방식으로 볼 때 부부합장묘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콜라겐의 탄소-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 결과 피장자들은 주식으로 쌀, 보리, 콩 등의 $C_3$ 식물을 섭취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를 통하여 조선시대 회곽묘를 조성할 수 있었던 경제적 계층의 유전학적 특징, 관습적인 매장방식, 식생활 정보를 규명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조선시대 출토 인골에 대한 생화학적 연구의 잠재적인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신법보천가(新法步天歌) 연구 (A Study on New Song of the Sky Pacers)

  • 안상현
    • Journal of Astronomy and Space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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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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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89-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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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조선(朝鮮)의 보천가(步天歌) 가운데 가장 나중인 1862년에 간행된 신법보천가(新法步天歌)를 연구하였다. 청(淸)에서 들어온 신법천문학(新法天文學)의 영향으로 구도보천가(舊圖步天歌)의 성도(星圖)만을 고쳐서 새로 신도보천가(新圖步天歌)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옛 가결(歌訣)이 새로운 성도(星圖)와 맞지 않았고, 이에 따라 천문학자를 뽑는 과거 시험에 혼란이 일어났다. 이것을 극복하고자 조선(朝鮮)의 관상감(觀象監)은, 1845년에 청(淸)에서 간행된 흠정의상고성속편(欽定儀象考成續編)의 권(卷)3인 성도보천가(星圖步天歌)를 전재하고 주석을 달아, 1862년에 신법보천가(新法步天歌)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중인(中人)인 이준양(李俊養)이 편찬하고 토대부(土大夫)인 남병길(南秉吉)이 교정(校正)하였다. 우리는 이준양(李俊養)의 열대기를 처음으로 재구성하였다. 신법보천가(新法步天歌)에는 기존의 조선(朝鮮) 보천가(步天歌)들이 갖는 특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즉, 각 숙(宿)의 제목이 기존의 형식을 따르고 있고, 또한 기존의 조선(朝鮮) 보천가(步天歌)들에 천하기몰(天河起沒)이 있음을 의식하고 흠정의상고성속편(欽定儀象考成續編)의 권(卷)31과 권(卷)32의 천한적도경위도표(天漢赤道經緯度表)를 바탕으로 천한계도(天漢界度)를 저술하였다.

『각사등록』에 의한 조선시대 경기도지역 측우기 우량 관측자료 복원 및 분석(1830~1893) (Restoration and Analysis of Chugugi Rainfall Data by 『Gaksadeungnok』 for Gyeonggi Province During the Lat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1830~1893))

  • 조하만;김상원;박진;김진아;전영신
    •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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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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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9-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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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Chugugi and Wootaeck rainfall data of Gyeonggi Province from 1830 to 1893 were restored from the "Gaksadeungnok" that is the government records between the central government and the local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restored data periods were 27, 10, 9 and 14 years for Kwangju, Suwon, Ganghwa and Gaeseong, and the total number of restored data was 655 for the Chugugi and 427 for the Wootaek, respectively. The variation pattern of monthly rainfall by Chugugi was investigated and it showed that the monthly rainfall more than 300 mm was recorded 25 times with 18 times in July, 5 times in August and 3 times in June. The cases of more than 500 mm were also recorded 8 times with the maximum 787 mm at the Kwangju in July 1862, showing the similar pattern to Seoul. The monthly mean rainfall for the Gyeonggi Province were 259 mm in July, 204 mm in August and 121 mm in June, which were about one third of that of Seoul. The correlation analysis between the Chugugi and Wootaek data was carried out to derive the quantitative values of Wootaek observations. It revealed that 1 'Ri' of Wootaek observation was equal to approximately 1 'Chon (Chugugi unit)' or 20 mm, while 1 'Seo' was very variable between 2 and 6 'Boon (Chugugi unit)' with the median value approximately 3 'Boon' or 6 mm. Recalculated Wootaek data showed that the monthly rainfall in July, August, and June were 289 mm, 154 mm, and 124 mm, respectively. Through this study, some features of the rainfall variation pattern during 1830~1893 were figured out, and quantitative interpretation of Wootaek data became possible based on the restored rainfall data from the "Gaksadeungnok". Though many pages of the book have been lost during the last hundreds years, "Gaksadeungnok" is still very meaningful and of practical use, for it contains plenty of the local data throughout the whole country during the latter part of Joseon Dynasty. Therefore, further studies are strongly recommended on the restoration of climate related data and on the climatic tendency of 19th century of Korean peninsular.

조선왕조실록의 적조(HABs) 고찰 (A Study of Red Tide(HABs)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aynasty)

  • 민승환;서영상;박종우;황재동
    • 한국지리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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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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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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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14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적조(HABs) 발생상을 분석하였다. 적조기사는 모두 81건으로 표로 정리하고, 적조지도를 구축하였다. 해역별 발생횟수는 남해 62건, 동해 50건 그리고 황해 22건으로 나타났다. 남해와 동해에 접한 경상도에서는 82건으로 가장 많았다. 경상남도에서 함경북도까지의 적조발생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 번째는 3월 강원도에서 시작되어 4월 함경남도에서 발생이 증가하고 5, 6월에는 중심이 함경북도로 북상하는 형태이다. 두 번째는 8월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발생하다 9월에는 경상북도에서 발생이 증가하는 형태이다. 월별 발생 수는 8월이 가장 높았다. 그 외는 대부분 4~9월에 나타났다. 그 중 조개류를 먹고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례는 2~6월 진해, 거제, 통영에서 나타났다. 수산물 피해는 7~9월 경상도연안 전반에서 나타났다. 적조가 대규모로 발생한 시기는 1394~1451년, 1654~1706년으로 나타났고, 적조의 소규모 발생은 1493~1534년, 1588~1609년 이었으며, 공통적으로 홀수 해(1399, 1403, 1413, 1681년)에 대발생을 보였다.

시조와 가사의 향유방식과 그 관련양상 (The enjoyment of way on Si-jo and Ga-sa in Joseon Dynasty)

  • 류해춘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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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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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5-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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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시조와 가사는 한국의 시가문학을 대표하는 갈래이다. 우리의 시가문학에서 시조는 3장 6구 12음보의 형식을 갖추고, 한 수의 노랫말은 45자 내외의 길이를 지닌 정형시를 의미한다. 조선후기의 사설시조는 시조의 변화를 수용하여 대체로 3장의 기준만을 채택하고 그 내용과 형식을 확대하여 표현하고 있다. 한편 가사의 정의는 1행 4음보의 율격을 바탕으로 100행 내외로 연속하는 장시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가사는 내용적으로 다양한 소재를 이야기로 연결하여 행수가 훨씬 많아지는 경향을 수용하여 대상과 사물의 총체성을 읊어내고 있는 장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선시대의 시조와 가사는 정형시와 장시로 고전시가의 두 산맥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두 갈래의 노래가 서정을 기조로 하여 시조는 정형시의 양식을 계승했고, 가사는 장시라는 장르의 양식을 차지하여 시가문학을 융성하게 했다. 16세기 후반부터 두 갈래의 문학을 표현하는 방식의 변화와 함께 향유하는 계층이 늘어나면서 점차 이질성을 많이 드러내게 되었다. 시조는 시조창의 변화로 사설시조가 등장하며, 가사는 현실의 체험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이야기를 수용하여 길이가 길어지는 변화를 수용하여 규방가사와 서사가사가 성행했다. 그러나 단형의 정형시인 시조와 장시인 가사는 1행 4음보를 기준으로 창작되는 동질성을 조선후기까지 공유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시조와 가사에 나타난 향유방식과 그 상관성을 정형성과 비정형성, 은유의 수사학과 환유의 수사학, 가창의 문학과 음영하는 문학 등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조선시대의 시조와 가사에 나타난 향유방식을 살펴보는 작업은 오늘날 21세기 문화의 향유자들이 추구하는 문화콘텐츠의 다양한 글쓰기를 아우르며 화합과 소통의 새로운 세계를 항해하는 문화의 나침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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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 향원정(香遠亭)의 조성시기(造成時期)와 취향교(醉香橋)의 원형(原形) (A Study on the Original Form of the Chwihyanggyo Bridge and the Creation of the Hyangwonjeong in Gyeongbokgung Palace)

  • 남호현;김태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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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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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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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경복궁의 후원에 위치한 향원정과 취향교는 고종 연간의 관련 사료와 조선 후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도면에 의지하여 연구되고 있었다. 현재의 취향교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소된 것을 종전 후 임시적으로 재건한 것이기 때문에 형태를 비롯하여 재건 위치도 정확한 고증을 거친 것이 아니다. 구한말~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과 이를 묘사한 그림엽서 따위가 일부 남아있지만 촬영 주체나 시기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여 어떤 사진이 취향교의 원모습을 담은 것인지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2017년 취향교 복원에 필요한 기초자료 확보를 위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조사를 통해 취향교의 원위치와 교각 주춧돌의 형태가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취향교의 변화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취향교는 상판이 약한 아치를 그리는 3렬의 교각열을 가진 형태였으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교각열이 늘어난 평교형태로 변화한 것이 밝혀졌다. 또한 향원지 내 가도(假島)의 성토층에 대한 AMS연대측정을 통해 향원정이 임란 이후에 조성되었음이 판정되어 기존에 제기되던 '조선 전기 취로정 전신설'은 근거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및 사료검토 결과를 토대로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면 취향교와 향원정의 조성 시기는 조선 후기 건청궁의 건립연대와 평행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