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 강세황(1713~1791)은 그림이나 글씨 시 제발 인장뿐만 아니라 탁월한 서화감식과 비평으로 조선 후기 회화의 큰 흐름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문인서화가이다. 그는 79세의 장수를 누리며 다양한 화목(畵目)의 작품을 제작했는데 특히 말년에 천착했던 문인화류의 사군자화는 조선 말기 묵란화 유행의 바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는 조선시대 화가 중 처음으로 사군자화를 갖추어 그렸는데, 작품량이 많고 회화사적 연구 가치가 있는 '묵란화(墨蘭畵)'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논문은 강세황의 묵란화에 대한 기록과 작품 연구를 통해 그의 묵란화 인식과 지향을 살피고자 시도되었다. 먼저 강세황의 묵란화 기록에는 사생(寫生)과 고화(古畵)의 연습, 화보(畵譜)의 임방을 고루 중시했던 그의 작화태도가 나타나 주목된다. 18세기 예림의 종장 강세황은 고인(古人)의 뜻과 정신이 집약된 고화의 임방(臨倣)을 중시했으며 그림을 '우의(寓意)'와 '재도(載道)' 등의 수단으로 인식했다. 즉 그의 지속적인 화보임방의 작화방식에서 수기적(修己的) 가치관과 회화관을 읽을 수 있다. 다음으로 그의 이런 회화관이 녹아 있는 묵란화는 양식적 분석을 통해 30~40대의 전반기와 절필기를 끝내고 군자화에 몰두했던 60대~79세인 후반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전반기에 "개자원화전"을 주로 학습하였고, 후반기에는 "십죽재서화보"나 "매죽난국사보" 등의 화보를 학화(學畵)하였다.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의 묵란화는 전시기(全時期) 화보 의탁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묵란화를 다작했던 70대는 화보의 의고와 임방을 주지하면서도, 그것을 능숙하게 소화해 고아하고 단아한 '표암난'을 완성하여 조선 후기 묵란화 발전에 일조하였다. 마지막으로 강세황의 묵란화풍과 관련 있는 당시(當時) 화가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서화합벽첩을 만들며 서화로 교유했던 심사정이나 최북의 묵란화풍에서 강세황의 영향이 감지되어 앞서 언급한 문인들의 상찬과 아울러 18세기 조선 화단에서의 강세황 묵란화에 대한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소치 허련(小癡 許鍊,1808~893)은 조선 말기 대표적 남종 문인서화가이며 남도 문인화의 시조로,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문인의 학문적 면모와 화원의 능숙한 화법을 모두 체득해 '사의화(寫意畵)'를 이룬 직업형 문인화가였다. 허련의 산수화는 그의 화격을 높이 산 김정희의 지도에 의해 형성되었으나, 추사 사후 그의 나이 70세경에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묵란화는 '추사란(秋史蘭)'의 양식과는 관련이 없고, 전체적으로는 고법(古法)을 따르면서도 거칠고 호방한 필치의 사의성을 띠고 있어 주목된다. 허련의 묵란화는 사군자류 중 화란법(畵蘭法)을 남길 만큼 관심을 가졌던 분야임에도 전체적인 작품의 조사나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화란법과 제발(題跋), 인문(印文)에 나타난 난화관(蘭畵觀)을 통해 그의 묵란화 인식을 살피고, 화보를 임방하고 당대 화풍을 수용하면서도 개성적인 필묵의 운용으로 형성된 소치란(小癡蘭)의 면모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특히 허련은 당시 묵란화의 대가인 이하응이나 조희룡과 화우(畵友)로 지내지만 난 그림에 있어서는 김정희의 난화론을 바탕으로 삼아 초기 지두란(指頭蘭)을 그리는 등 자신만의 화란법을 형성하고 예술세계를 구축한다. 또한 난화는 유가적 전고(典故)를 바탕으로 그리지만 제발과 인장의 내용을 통해서는 유가적 성격뿐만 아니라 도가 불가적 의미까지 더해져 허련의 인생 지향과 사유세계를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다양한 철학과 심미의식이 반영된 허련의 묵란화는 시기에 따라 변화 과정을 거치며 만년에 사의 묵란화를 형성한다. 즉 그는 직업형 화가였음에도 말년에 더욱 활발히 제작했던 사의란을 통해 조선 사대부의 이상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음을 알 수 있고, 소치란은 문인의 표상을 실현하려는 사의적 시각과 의지의 발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병오(徐丙五, 1862-1936)는 서구적 '미술' 개념의 도입으로 일본화 내지 서양화로 기울던 일제강점기 시서화일치의 대구 문인화단이 형성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79년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의 만남을 계기로 서화계에 입문하였으나, 문인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세 시기로 구분되며, 학습기인 1879년부터 1897년까지는 관직 진출을 목표로 하였던 때문인지 중국 화보를 임모하거나 이하응의 영향 아래 사군자화를 여가에 그리는 정도였다. 발전기는 1898년부터 1920년까지로 그는 애국계몽운동 등 사회적 지도자로 활동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삶의 방향을 문인화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중국 여행에서 다시 만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운미란과 포화(蒲華, 1830-1911)의 묵죽법을 근간으로 새로운 화풍을 적극 모색함과 동시에 산수, 화훼, 기명절지 등의 화목도 다루었다. 완숙기인 1921년부터 1936년까지는 대구와 한양을 오가며 근대 한국 화단의 서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묵란과 묵죽에서 윤묵의 호방한 필법을 특징으로 하는 개성적 화풍을 완성하였다. 특히 학습기의 경우 관련 기록이나 현전작품이 드물어 서병오의 창작활동이나 화풍 등에 관한 것은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석죽도 11점은 학습기의 화풍 연원이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889년작 난죽석도 가운데 묵란도는, 이하응이 1882년 7월 청군에 의해 체포되기 이전에 그린 초기 군란도와 석란도에서 영향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묵죽도는 한양에 널리 알려진 양주화파 정섭(鄭燮, 1693-1765)과 김정희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2)의 화법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하응의 석란도 형식을 응용하여 변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석도의 경우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청나라의 괴석화가 주당(周棠, 1806-1876)과 여항화가 정학교(丁學敎, 1832-1914) 등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죽석도는 학습기에 그려진 것으로 운현궁을 찾았던 허련과 정학교 같은 동시기 화가들이나, 한양에 작품이 유입되었던 정섭과 주당 등의 중국 작품을 실견하며 이들의 화풍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석 황종하(우석(友石), 인왕산인(仁王山人) 황종하(黃宗河) 1887-1952), 우청 황성하(又淸, 黃成河, 1891-1965), 국인 황경하(菊人, 黃敬河, 1895-?), 미산 황용하(美山 黃庸河, 1899-?)는 네 살 터울의 형제들이며 모두 서화가로 이름을 남겼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특별한 교육기관에 몸담지 않고 중국에서 유입된 화보나 선배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지만 각자 선호하는 기법과 잘 그리는 소재가 달랐다. 즉 황종하는 호랑이 그림을, 황성하는 지두화를, 황경하는 인삼도를, 황용하는 사군자화를 잘 그린 것이다. 각종 전람회나 전시회에 참여하는 태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사형제전을 함께 개최하거나 합작도를 자주 제작하면서 형제간의 우의를 쌓아 나갔다. 특히 1922년에 그들의 고향인 개성에서 창립한 ${\ll}$송도서화연구회${\gg}$는 후배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자 스스로의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문화의 장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이렇듯 황씨 사형제는 서로의 생각과 취미를 공유할 수 있었던 친구들이였고, 동시에 각자 개성 있는 작품세계를 펼쳤던 예술가였다. 그리고 구한말에 태어나 역사의 격변시기를 경험하면서도 전통 한국화의 맥을 지켜왔고, 타계할 때까지 평생 지필묵을 고집하면서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며 화제를 썼던 작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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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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