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Independence Activ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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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가 장재성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Establishment of Digital Archives by Jang Jae-seong, a Gwangju Student Independence Activist)

  • 김문희;장우권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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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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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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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이 연구의 목적은 광주학생독립운동가 장재성 디지털 인물 아카이브 구축안을 제시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사용된 연구의 방법은 첫째, 장재성 관련 문헌연구를 하였다. 둘째, 국가기록원, 국가보훈처 등 장재성과 관련된 기록 현황을 조사하였다. 셋째, 장재성의 가족과 전문가 인터뷰를 실시하였다. 연구결과, 장재성 아카이브는 기록콘텐츠와 해설콘텐츠로 설계하였다. 또한 기록물 보유기관과의 콘텐츠별 매핑을 통해 연계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기록콘텐츠는 이용자가 검색을 통해 소장처별로 연결 된 상세 내용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또한 현재까지 광주학생독립운동가들의 아카이브가 구축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해당 사건에 대한 인물들을 함께 아카이브로 구축, 데이터를 제공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국내 학생운동에 표현된 저항 패션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Anti-Fashion Expressed in the Korean Student Movement)

  • 간문자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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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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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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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specifically, the external and internal characteristics of anti-fashion expression in the Korean student movement after the 1945 Liberation. The dress expressed in the student movement represented the purity of student and characterized resistance, and this character expressed strongly in 80s, faded from middle of 90s. Until the 60s, the student movement was not characterized by, so activist students wore dress and suits. It symbolized students as an elite group of society. They added on head-bands to express resistance. In the 70s, activist students wore school uniforms, school military training wear, blue jeans and loose shirts in demonstrations. They tried to express re-bellion against the government and the older gen-eration. In the 80s, the period was remarkably distingusihing by the economic growth at that time. Activist students wore T-shirts with Korean letters and popular paintings specially made, Korean costumes, wrapped in the Taggeuki (Korean national flag), and refused wear on jeans because of anti-Americanism. They also wore masks, muffled their faces, and got their heads shaved. These anti-fashions are very strong expressions for the national independence spirit, national traditional heitage, anti-foreign power and anti-American. In the early 90s, activist students wore reformed Korean costumes specially made group uniforms, after that they wore casual everyday clothes with caps. They tried to express remarkable resistance in the early 90s, but after the mid-90s expression of resistance weakened and faded, so there was no distinction between activist and non-activist. There are the reasons why the student movement changed after the peaceful transfer of political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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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가의 상징적 이미지를 반영한 컴퓨터 기계자수 가방디자인 개발 (The Development of Bag Design using Computer Mechanic Embroidery on the Symbolic Image of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 임정하;허승연
    • 한국의상디자인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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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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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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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This study aims to develop a mechanic embroidery bag design that reflects the symbolic image of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who sacrificed for the country so that today's Korea can exist. As a research method, the theoretical consideration and image collection of independence activists were conducted through a literature review and visits to the memorial halls of six independence activists. The bag design was developed using mechanic embroidery textile of 12 motifs manufactured in previous studies through the computer mechanic embroidery sewing machine, and the types were limited to totes, Boston, clutches, baskets, shoppers, hover bags, and hat boxes.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it was found that the dense light and shade and delicate color expression of each motif design were the most important and achieved through the proper selection and utilization of embroidery yarn according to the mechanic embroidery expression technique for developing in-depth textile materials. Second, unlike in the past, when machine embroidery was difficult to handle, the spread of embroidery CAD and computer machine embroidery sewing machines made it easier for individuals to develop embroidery products. Third, this study once again emphasized the symbolism of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who sacrificed for the nation to exist at a time when it needs to be recognized due to the lack of fashion and diversity in cultural products containing historical and cultural meaning and values of the country. This study was able to develop computer machine embroidery textiles and various bag designs using various mechanic embroidery expression techniques that can highlight the symbolic image of each motif.

영상매체에 나타난 이육사 표상 연구 -드라마 <절정>(2011)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Use Pattern of Lee Yuk-sa in the media -Focused on the drama "Climax"(2011))

  • 손미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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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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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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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드라마 <절정>(2011)을 통해서 드라마에서 시 텍스트가 삽입되는 방식과 시인의 표상화 방식을 검토한다. 이 드라마는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이육사를 중심인물로 내세우고, 그의 생애를 따라가는 서사 구조를 택하고 있다. 드라마는 시인의 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에 그의 시를 환상적인 이미지와 함께 삽입함으로써 드라마의 서정성과 영상미를 극대화한다. 시와 함께 제시되는 이미지는 이육사의 치열한 고난을 극대화하는 한편으로, 시를 이 고난의 결정체로 그려낸다. 이로써 드라마 <절정>은 이육사의 시를 활용함으로써 중심인물 이육사의 내면세계를 영상으로 형상화한다. 이육사의 시를 이미지와 함께 활용하여 시의 아름다움과 곧은 정신세계를 지닌 시인의 표상화를 동시에 꾀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이육사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균형감 있게 그려낸 결과이다. 드라마 <절정>은 영상을 통하여 시와 시인의 표상화를 진정성 있게 수행한 주요한 텍스트이다.

고려인 민 타찌아나의 생애 이야기 재구성 (The Reconstruction of Life Story of Koryo-saram Min Tatyana)

  • 윤희진;김영순;아이고자에바 아이게림;백보예바 아이굴
    • 예술인문사회 융합 멀티미디어 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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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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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9-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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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카자흐스탄 고려인인 민 타찌아나의 생애를 연구하여 이를 생애담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재외동포, 특히 고려인의 생애담 연구는 그들의 이민 시점, 강제이주라는 특별한 사건, 그리고 소비에트와 카자흐스탄 국민으로서의 삶, 한민족으로서의 삶이 담긴 다층적인 정체성을 담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카자흐스탄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고려인인 민 타찌아나의 삶에 나타난 한민족의 결을 확인하였다. 민 타찌아나의 이야기는 결혼을 기점으로 '다문화사회에서 고려인으로 성장하기'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의 삶을 사는 법' 두 가지 이야기로 재구성되었다. 그녀는 역사적으로 고려인 집단 거주지역인 크질오르다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 알마티에 거주하고 있다. 또한 그녀의 부모님은 지역인들에게 존경받는 분들이었으며 그녀의 시조부는 알려진 독립운동가였다. 이러한 점들이 그녀가 지금까지도 고려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민 타찌아나의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이면서도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이 살아온 사회 문화적 배경을 보여주는 질적 텍스트이다. 본 연구는 고려인이 가진 한민족적 특성과 함께 다층적인 삶의 면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간호대학생의 국외독립운동사적지 탐방 경험 (The experience of nursing students' exploring historic sites of independence movement overseas)

  • 송미숙;배수진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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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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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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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간호대학생의 국외독립운동사적지 탐방경험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수행된 질적 연구이다. 본 연구의 참여자는 경상북도 C군 일개 대학에 국외독립운동사적지 탐방프로그램에 참여한 간호 대학생 1.2학년 24명을 대상으로 하였다. 자료수집기간은 2017년 12월23일부터 12월 25일까지였으며, 자료 수집은 개방형 자기보고서식 성찰일지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수집된 자료는 Krippendorff[13]의 질적내용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하였다. 간호대학생의 국외독립운동사적지 탐방 경험을 분석한 결과, 19개의 하위주제, 10개의 주제, 그리고 4개의 범주로 도출되었다. 4개의 범주는 '독립운동의 흔적 앞에서 각인된 우리의 역사', '투영되는 독립운동가의 발자취', '끓어오르는 분노 그러나 남아있는 희망', '반성 속에 애국심의 꽃이 피다' 이다. 본 연구 결과는 간호대학생의 독립운동사적지 탐방 경험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였으며, 간호 대학생들이 독립운동역사에 대한 인식제고, 애국심 고취 그리고 간호사로서의 자세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를 가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독립운동 사적지의 보존에 대한 정책이 미비해 민간에 의지하고 있는 현실임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노력과 자원이 뒷받침되어야 하겠다.

임시정부 수립 후 1920년대에 전개된 경호 활동 고찰 (The Investigate of Security Service History focused on 1920s after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Korea)

  • 김은정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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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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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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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각종 활동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의 초기 정책이나 기관 등을 구성하는데 기틀로 작용되었기 때문에 경호 분야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에 임시정부 수립부터 1920년대의 경호와 관련된 내용을 다각도로 살펴보았으며, 기존의 연구에서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발굴할 수 있었다. 첫째, 임시정부에서 경호는 '정부 수호'의 역할로 인지되었다. 이에 김구는 독립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경호원들의 훈련까지 관여할 정도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임시정부에서 경호는 "임시정부지방연통제관련법령집" 중에 '통신원 급 경호원'이란 언급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경호과(警護科)'의 등장과 함께, 그 업무를 규정한 "도사무분장규정", "부군처무규정"을 통해서도 당시 임시정부 내 경호임무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셋째, 1920년대 국내외 각종 독립운동단체들에서 나타난 '경호부(警護部)'의 활약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의열 및 항일무장 투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넷째, 1920년대 대중들의 일상생활에서 경호는 각종 행사의 질서유지, 주요 인사들의 신변 보호 및 안전을 위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경호 사례를 통해서 볼 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경호가 정착하는데 있어 1920년대의 시대적 정황이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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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의 역사적 중층성과 상징성을 이용한 스토리텔링 (Storytelling using Hyochang Park's historical middle layer and symbolism)

  • 강혜경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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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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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7-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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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효창공원은 조선시대 문효 세자와 생모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와 영온 옹주의 묘가 있었던 왕실 묘역이었다. 고종대에 효창묘에서 효창원으로 격상되었다. 일제는 왕실묘역이었던 효창원을 훼손하여 공원으로 만들었으며, 1944년에는 효창원의 왕실묘역을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 해방 후 중경에서 돌아온 김구는 효창공원의 비어있던 공간에 독립운동자 묘역을 조성하였다. 삼의사묘, 임시정부 요인 묘가 그것이다. 김구 자신도 1949년 서거 후 효창 공원에 묻혔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시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묻혀있는 효창공원에 대한 정체성 변화시도가 끊이지 않아 효창운동장, 원효대사 동상, 북한반공투사위령탑 등이 세워졌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효창공원의 독립운동가 묘역은 다시 의미를 부여받기 시작했다. 6공화국 헌법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으며, 이후 효창공원에 대한 국립묘지화와 독립공원화가 시도되었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효창공원의 역사적 중층성과 상징성에 주목하여 '독립의 길'이라는 주제로 스토리텔링을 하여 그 의미를 부각시키고, 효창공원의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나가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독립운동가 신홍균 한의사에 대하여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Hong-Kyun Shin)

  • 이상화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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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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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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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Shin Hong-gyun was born on August 20, 1881. The second son of Shin Tae-geom (申泰儉) in Sangsang-ri, Sinbukcheong-myeon, Bukcheong-gun,Hamgyeongnam-do. His family had been practicing East Asian medicine as a family business. At that time, the families of East Asian doctors who passed the general examination of the Joseon Dynasty had been continuing the East Asian medicine business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Starting with exile in North Gando in 1911, he was located in Wangga-dong, 17 Doo-gu, Changbaek-hyeon. In 1915, he met General Choi Un-san in Bongo-dong, treated the soldiers suffering from cellulitis, and participated in the training process to prepare for the upcoming anti-Japanese war. However, because of a growing difference of opinion with General Choi Woon-san, Shin Hong-gyun left Bono-dong after a year and mets Sorae Kim Jung-geon and joined the founding of Wonjonggyo and Daejindan, an anti-Japanese armed group. It is said that Shin Hong-gyun established many schools in Korean villages destroyed by the Gyeongshin disaster and 14 schools were established under the names of Wonjonggyo and Daejin. After the Japanese established the puppet Manchukuo in 1931, the Manchurian Defense Forces were formed. Koreans and Chinese immigrants to Manchuria worked together to carry out a joint Korean-Chinese anti-Japanese operation towards the Japanese Empire. In 1933, 50 of the Daejindan members joined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and among them, Shin Hong-gyun began to work as a medical doctor in earnest. During an ambush in Daejeonryeong Valley, he could not get a proper meal and, to make matters worse, got wet in the rainy season, so the situation was a challenge in various ways. At this time, Shin Hong-gyun showed his knowledge of herbal medicine, picked black wood ear mushrooms that grew wild in the mountains, washed them in rain water, and provided food to the independence fighters and relieved them of hunger. After the Battle of Daejeon-ryeong, the Japanese army's suppression of the independence forces intensified, and most of the independence fighters escaped from the Chinese army's encirclement and were scattered. Ahn Tae-jin and others led the remaining units and continued the anti-Japanese armed struggle in the forest areas of Yeongan, Aekmok, Mokneung, and Milsan.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의 현실인식과 대응 (The awareness and response to reality of Yoon Hee Soon, a female fighter for independence)

  • 신성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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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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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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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문은 강원도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이, 항일투쟁 과정에서 현실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그에 따른 대응은 어떠했는지 살피는 데에 목적이 있다. 윤희순은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 그리고 아들 유돈상까지 3대가 독립운동에 앞장선 집안의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어머니였다. 화서학파였던 고흥 유씨 일가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들은 새로운 세계의 건설보다는 아름다운 과거로의 복귀와 복원을 염원했고, 의병을 일으킨 것 또한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을 중심으로 구축된 기존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친정과 시가 모두 화서학파였던 윤희순 역시 그들과 동일한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고,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에 참여하게 된 동인 역시 충 효 열과 같은 중세적 가치였다. 특히 집안의 안사람이자 여성으로서의 명확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에 대응했다. 그녀는 보다 효과적인 독립투쟁을 위해서는 안사람으로 대변되는 여성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 하에 그녀는 '교육'을 통한 '계몽'을 자신의 과제로 인식했고, 이 과정에서 의병가와 포고문 등은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