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Historical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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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의 기원과 옹중석 (The Origin of Changseung and Ongjung Stone)

  • 정승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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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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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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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우리가 '장승'이라고 부르는 조형물들은 그 기원이나 역사, 또는 기능이 서로 달라 엄밀한 구별이 필요하다. 이 글은 장승의 기원과 함께 역사적인 변화과정을 더듬어 이 구조물이 갖는 두 가지 다른 측면을 구분하고 이에 기초하여 소위 '석장승'의 다양한 기원과 기능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고려시기에 사찰에서는 장생, 또는 관련 석물을 세웠는데, 이 중 '통도사국장생석표'는 석표(石標)라기보다는 석비(石碑)의 기능을 갖는다. 석비에 음각된 명문을 보면 이전의 판아(判兒)처럼 다시 세우라고 하였는데, 판아란 역귀(疫鬼)를 쫓는다는 종규(鍾郡)를 말한다. 명문 내용은 통도사의 영역을 장생으로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허목의 "월악기(月嶽記)"에 실려 있는 한준겸(韓浚謙)의 기사를 보면 도갑사 국장생의 규모가 매우 커서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며 '국장생'이나 '황장생'이라고 새긴 입석은 장생이 아니라 표석, 즉 장생표(長生標)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정(里程) 기능을 하는 후를 장생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사찰 장생과는 달리 나무로 만들어 사찰 장생의 생(生) 자에 나무 목(木) 변을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요즈음과는 달리 조선시기에는 비보 성격을 갖는 사찰 석상이나 읍성풍수물을 장승이라고 부른 경우는 찾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제주도 '돌하르방'을 두고 장승이라고도 불렀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의하면 제주목사 김몽규(金夢奎)가 성문 밖에 옹중석(翁仲石)을 세웠다고 했는데, 옹중석은 대개 고대 제왕(帝王)이나 대신(大臣)의 능묘 앞에 세운 석인상(石人像)을 지칭하는 말이다. 옹중석은 엽승[壓勝]을 위한 풍수물로도 나온다. "광주읍지(光州邑誌)"(1899년간)에는 수구(水口)를 만들고 석옹중 2기를 마주 세워 그 기를 진압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전라북도 부안읍치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2기씩 세워진 석물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읍성풍수물인 이것 역시 석장생이나 장승, 또는 당산으로 불릴 이유는 없다. 도교적인 개념인 상원(上元)과 하원(下元)이 붙은 주장군이나 당장군은 이후 사찰 석상의 명문으로 자주 등장하고, 이후에는 이표 장승에도 붙는다. 사모를 쓴 북한산성 옹중석을 지금은 볼 수 없는 것처럼 많던 옹중석들은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제주의 옹중석과 부안 읍성의 석상은 위치 이동이 적어 옹중석의 기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석상들은 고려시기에 조성된 장생(長生)과 기능상 가장 관련이 깊은 듯하다. 즉, 과거의 장생처럼 18세기 초중반의 석상들은 읍성, 또는 사찰의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 석상의 설립시기는 양전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때이기도 하지만 속세에서는 산송(山訟)이 활발해지는 때라 사찰에서는 비보와 함께 영역 표시를 위해 석상들을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승으로 통칭되는 목인과 석상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유로 세워진 것들이다. 그 출발은 고려시기 사찰의 장생(長生)으로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석물, 또는 석상이었다.

역사적 도시환경의 보존형태 분석을 통한 유산적 가치 고찰 -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Heritage Value through the Analysis about the Preservation Status of Historic Urban Environment - Focusing in Suwon Hwaseong Fortress -)

  • 길지혜;황기원;손용훈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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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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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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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논문은 수원 화성 내 도시환경의 보존형태를 분석하여 보전가치가 있는 역사적 자원들을 도출하는데 목적이 있다. 도시환경 보전에 있어 시간의 지속성을 갖춘 자원의 보호와 장소적 특징이 남아있는 자원의 관리가 중요하기에, 보존형태 분석은 물리적 형태 보존과 이용 기능의 보존 측면에 중점을 두고 수행하였다. 연구는 세 단계로 진해하였다. 첫째, 성곽 내부의 도시환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자 1911년에 제작된 지적원도와 현재의 도면을 필지의 특성을 담고 있는 지형, 수공간, 가로, 대지의 네 가지 항목으로 구분하여 비교하였다. 둘째, 도면에 기초한 문헌연구, 현장답사, 인터뷰의 내용을 토대로 도시환경의 변화내용을 연구하였고, 이를 보존-일부 보존-소멸의 척도로 구분하여 보존형태를 고찰하였다. 셋째, 도시환경에서 오랜 기간 보존되고 있는 자원과 완전히 보존되고 있지는 않지만 장소적 특징이 남아있는 자원을 구분하여 도출하였다. 연구결과, 첫째, 지형과 수계의 자연적 요소와 가로와 같은 도시구조적 요소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변했더라도 지반환경의 속성을 보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과거의 도시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둘째, 지형, 수공간, 가로, 대지의 보존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을 보다 큰 맥락에서 통합적으로 관리해야 화성의 역사적 정취도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 현재 시점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자원에는 근대에 조성된 공공시설들이 많이 있어 화성 내 역사문화자원을 조선시대 외에도 다양한 시대적 켜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도시화 시기를 지나면서도 오랜 기간 보존된 필지와 가로가 최근의 역사문화복원사업으로 오히려 훼손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어 이들을 신중히 다룰 필요가 있겠다.

백제정원을 주제로 한 리조트 외부 공간 계획 (Outdoor Landscape Design Proposal for a Resort using the Baekje Traditional Garden as a Theme)

  • 김연금;김해경;김영모;진양교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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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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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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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롯데 부여리조트의 외부공간 중 백제 테마정원을 대상으로 한다. 리조트는 백제역사재현단지 내에 있으며, 이 사업은 '백제문화권 특정지역 종합개발 계획' 중의 하나이다. 백제정원은 역사적으로 유구할 뿐만 아니라 고대 일본에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양식에서도 뛰어났다고 할 수 있는데,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백제정원의 재현 방식을 공간적으로 구현했다. 구체적 내용으로는 첫째, 백제정원을 롯데 부여리조트에 조성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백제정원의 공간적 구현 방식을 설정하는 것이다. 둘째, 백제 정원의 조경사적 의미와 함께 현재까지 문헌연구와 발굴을 통해 밝혀진 백제 정원의 양식적 특성에 대한 것이다. 셋째, 리조트 외부공간에서 백제정원 재현의 공간적 실현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내용에서 재현은 구조 적용과 구성요소 차용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구조 적용에서는 임류각 공간을 주진입공간으로 하여 관북리 백제 유적을 재현한 월선정 공간을 인접하여 배치하였다. 이 두 공간을 통해서는 건축과 정원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주력했다. 후면에는 후원 성격을 지닌 익산 왕궁리 정원의 곡수로와 석조원, 비폭원을 재현하였다. 구성요소 차용은 식재계획과 건축물을 비롯한 시설물 계획에서 이루어졌다. 이외 정원주변으로는 금동대향로와 산수문전에서 표현되는 대표적 경관인 신선계의 모습과 삼산오봉(三山五峰)형 봉우리, 산 사이 맑은 시냇물, 소나무 숲(송림(松林)) 경관을 형상화하였다. 본 연구의 의의는 먼저 백제정원이라는 주제 자체가 새로운 시도라는 것이다. 백제정원에 대한 선행연구와 실제적인 공간에 구현된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백제시대에 대한 심도 있는 고증을 토대로 백제정원을 개념적 차원뿐만 아니라 계획적 설계적 차원에서 적용 재현하고자 시도했다는 것이다. 전통의 적용이나 재현을 다루는 기존 연구가 사례 중심으로 분석과 평가에 치중해왔던 것과 차별성을 갖는다. 한계는 백제정원의 사실에 대한 선행 연구가 많지 않고, 현재 관련 유적에 대한 발굴 및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진행된 연구이기 때문에 추후에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다면 본 연구에서 제시한 재현에 대한 진정성의 문제와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지 못했다는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전통의 재현과 계승의 화두는 어느 시점에서의 완결성보다는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시도가 요구되는 진행형이라는 측면에서 본 연구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발굴된 유적을 그 자리에 '원형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리조트의 외부공간에 '재현'하다 보니 그 자체로 체험의 다양성과 완결성까지 부여되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보길도 윤선도원림(명승 제34호) 낙서재지역 원형복원과 귀암(龜巖) 발굴의 성과 (Achievement of Excavation of Gwiam(Turtle Rock) and Nakseojae Restoration in Bogil-do Yun,Seondo Wonlim)

  • 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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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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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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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논문은 조경학분야의 주도로 수행된 원림유적의 문화재발굴 사업에 대한 일련의 성과를 다룬 것으로, 보길도 윤선도 원림(명승 제34호)의 낙서재 복원에서 귀암(龜巖) 발굴이 시사하는 역사적 가치와 발굴의 성과를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발굴결과, 귀암은 낙서재 정북쪽으로 14.6m 지역에 매몰되어 있었고, 매몰면의 깊이는 10~50cm 정도의 표토층이 낙서재 쪽으로 오르막 경사를 두고 피복되어 있었다. 귀암 실측결과, 길이 360cm, 너비 270cm, 높이 95cm의 화강암으로 암석의 형태는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는 북서편 모서리부분이 삼각형을 띄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로 $45^{\circ}$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머리 뒤쪽에는 귀갑 형태로 양쪽 홈이 파여 넓은 등판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남동방향으로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돌출되어 있었다. 이 화강암은 거북의 머리와 꼬리부분이 인위적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확연한 거북의 형상을 지니며 규모상으로 위치 변동 등의 교란 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낙서재 복원에 중요한 요소가 되는 거북 형상의 바위인 귀암은 윤위의 보길도지(甫吉島識)와 고산유고(孤山遺稿)에 기록된 사령(四靈)의 하나이며, 달 구경(玩月)의 장소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동안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 귀암은 낙서재(樂書齋) 일원의 중요 지형지물로써 보길도지에 소은병(小隱屛)-낙서재(樂書齋)-귀암(龜巖)이 축선(軸線) 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산의 손자인 이관(爾寬)의 건물 개축 시에도 앞 기둥을 이곳에 지지한 기록이 남아있어, 그동안 난항을 겪었던 낙서재 지역의 원형복원에 중요한 지표물로 그 가치가 있다. 또한, 원지반 확인결과, 표토층 135cm 아래 암반하단부에 단단한 원토양이 발견되어 현, 낙서재 지역의 원지반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확인되었다. 귀암은 이관의 건물 개축 당시 묻혔다는 기록을 끝으로 그동안 3차례 낙서재 지역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되지 않았으나, 금번 연구의 결과로 최소한으로 보더라도 260여년 만에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는 낙서재 지역의 원형복원과 조경학분야의 중요성을 제고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향후 귀암의 보존처리와 고산의 시문에 나오는 사령의 의미해석 등에 대한 공간추정 등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마오리族 傳統 服飾과 文身 考察 (A Study on the Traditional Costumes and Tattoo of the Maori)

  • 황춘섭;정현주
    • 복식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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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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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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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The Maori's traditional clothing materials, basic forms of dress, and the pattern and technique of tatoo were examined in the present study in order to deepen the appreciation of the cultural heritage of the Maori. The research method employed was the analysis of written materials. And a fild-trip was also made for the study. The study was limitted to the traditional culture of body adornment of the Maori including the clothing which is preserved and practicing by them at the present day, and the origin and the process of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those are not included in the scope of the present study. Followings are the results of the study: (1) By far the most widely used fiber for Maori clothing is abtained from what is commonly called New Zealand Flax. The fiber of kiekie(Freycinetia baueriana) and cabbage trees(Cordyline spp.) may also be used. The strong, long-lasting fiber of toi(cordyline indivisa) is used for a prestige warrior's cloak. Flat strips of ti kauka(Cordyline australi) are also used as thatch on rain cloaks. (2) Regardless of technique used, Maori weaving is always worked horizontally from left to right. Traditionally the work was suspended between two upright turuturu or weaving sticks. As the work progressed a second pair of uprights was used to keep the work off the ground. These uprights were moved forward as required. Because the weaver sat on the ground, the working edge was kept at a height that was comfortable to reach. No weaving tools are used, the wefts(aho) being manipulated by the fingers. The two main Maori weaving techniques are whatu aho patahi(single-pair twining) and whatu aho rua(double-pair twining). (3) The Maori wore two basic garments - a waist met and a cloak. The cloth of commoners were of plain manufacture, while those of people of rank were superior, sometimes being decorated with feather or dyed tags and decorated borders. Children ran more-or-less naked until puberty, being dressed only for special events. Some working dress consisted of nothing more than belts with leaves thrust under them. Chiefs and commoners usually went barefoot, using rough sandals on journeys over rough country (4) The adornment of men and women of rank was an important matter of tribal concern as it was in chiefly persons that prestige of the group was centred, The durable items of Maori persons adornment were either worn or carried. Ornaments of various kinds were draped about the neck or suspended from pierced earlobes. Combs decorated the head. Personal decorations not only enhanced the appearance of men and women, but many had protective magical function. The most evident personal ornament was the hei-tiki made of jade or other material. Maori weapons were treasured by their owners. They served on bottle and were also personal regalia. A man of rank was not fully dressed without a weapon in hand. Also weapons were essential to effective oratory. (5) No man or woman of rank went without some tattoo adornment except in extremely rare instances when a person was too sacred to have any blood shed. The untattooed were marked as beeing commoners of no social standing. This indelible mark of rank was begun, with appropriate rite and ritual, at puberty. And tattoo marked the person as being of a marriageable age. Maori tattoo was unlike most traditional tattoo in that its main line were 'engraved' on the face with deep cuts made by miniature bone chisels. The fill-in areas were not tattooed with cuts but with the multiple pricks of small bone 'combs' that only lightly penetrated the skin surface. The instrument of tattoo consisted of small pots of pumice or wood into which was placed a wetted black pigment made from burnt kauri gum, burnt vegetable caterpillars or other sooty materials. A bird bone chisel or comb set at right angles on a short wooden handle was dipped into the gigment, that a rod or stick was used to tap head of this miniature adze, causing penetration of the skin surface. Black pigment lodged under the skin took on a bluish tinge. A full made facial tattoo consisted of major spirals with smaller spirals on each side of the nose and sweeping curved lines radiating out from between the brows over the forehead and from the nose to the chin. The major patterns were cut deep, while the secondary koru patterns were lightly pricked into the s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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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관람지(觀纜池)의 조영과 실체에 관한 재고(再考) (A Re-discussion on the Construction and Identity of Gwallamji Pond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 오준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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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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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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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창덕궁 후원의 관람지(觀纜池)를 대상으로 그동안 곡해된 정보로 수용되었거나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조영 양상과 역사적 실체를 재조명하였다. 주요 논제는 원지(苑池)의 조영 시기와 재정비, 가설(架設) 목교의 변화, 접안시설의 실재(實在), 평면형태의 변형 여부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관람지는 고종 연간 발발한 갑신정변 이전에 이미 완결된 상태로 조영되었다. 이후 주변 시설을 비롯한 관람지 일원은 한동안 황폐한 상태로 방치되다가 1900년대 초반에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기존 논의에서 제시된 '관람지 조영 공사의 중단과 재개' 과정은 뚜렷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둘째, 관람지에는 형태와 구조가 다른 세 가지 종류의 목교가 순차적으로 가설되었다. 특히 관람지 정비 이후 가설된 두 번째 목교는 동궐도형 에 묘사된 '주교(舟橋)'로 판단되며, 난간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장식도 가미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세 번째 목교는 일본풍으로 제작된 교량이었다. 셋째, 관람지의 동쪽 호안에는 승선(乘船)과 하선(下船)을 위한 접안시설이 실존하였다. 접안시설은 「동궐도형」에도 묘사되어 있으며, 일제강점기까지도 잔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관람지 정비공사가 여러 차례 시행되면서 접안시설은 점차 훼손되었고, 현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넷째, 관람지는 애초부터 현재와 유사한 한반도 모양의 평면형태로 조영되었다. 호리병 모양으로 조영된 관람지가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모양으로 개축되었다는 통설은 재고가 필요하다. '반도지'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에도 일제가 의도적으로 관람지를 변형시켰다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과 기록자료로 본 황해도 성불사(成佛寺)의 불교조각 (Buddhist Sculptures from Seongbulsa Temple in Hwanghae-do Province as Seen through Gelatin Dry Plates and Archival Materials from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허형욱
    • 박물관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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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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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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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일제강점기의 유리건판 사진과 조선총독부박물관 공문서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북한 지역 소재 문화유산이 큰 피해를 입기 전의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이에 최근 유리건판과 총독부박물관 문서를 활용한 북한 지역 불교조각 연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본고에서는 황해도의 대표적 사찰 중 하나인 황주 성불사의 불교조각에 대해 기존 성과를 바탕으로 몇 가지 새로운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문헌기록을 토대로 성불사의 연혁을 정리하고 현황을 짚어본 후, 유리건판 속 존상별 제작시기와 조성배경 등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성불사 불교조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1945년 해방 이전 성불사의 불교조각은 보살상 2건, 여래상 4건, 삼존상 1건의 총 7건이 확인된다. 제작시기에서는 고려 전기 2건, 고려 후기 1건, 조선 전기 3건, 조선 후기 1건의 분포를 보인다. 이 가운데 오늘날 실물이 남아있는 2건이 주목된다. 먼저 성불사 응진전에서 촬영되었다는 고려 전기 석조약사여래좌상이다. 이 상의 당시 대좌 실측도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현재 정방산 내금강 골짜기의 옛 상원암 터에 전하는 머리없는 석조약사여래좌상 및 대좌 부재와 일치함을 알 수 있었다. 이 판단이 맞다면 북한 지역에 전하는 고려 전기 불교조각의 작례를 새롭게 확보하는 것으로서 의의가 크다. 다른 하나는 성불사 극락전에서 발견된 조선 1454년(단종2) 작 금동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이 상은 현재 사리원력사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조선 전기 이북 지역에서 확인되는 소형 금동불의 기년작으로서 중요하다. 본고는 성불사라는 단일 사찰에 초점을 맞추어 북한 지역 불교조각을 고찰한 사례 연구이다. 앞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자료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면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의 연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