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Guardian De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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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라마계 천왕문의 수용 및 전개에 대하여 -천왕문의 배치와 사천왕 배열에 관한 문제- (The Emergence and Development of the Lamaist Gateway of $Lokap\bar{a}las$ during the $Jos\breve{o}n$ Dynasty - Some problems on the orientation of the Gateway of Lokapala and on the allocation of the Four Guardian Kings -)

  • 이대암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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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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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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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Lokap{\bar{a}}las$ are understood as the deities of four directions in Buddhism: $Dhrtar{\bar{a}}stra$ in the East, $Vir{\bar{u}}dhaka$ in the South, $Vir{\bar{u}}p{\bar{a}}ksa$ in the West and $Vai{\acute{s}}ravana$ in the North respectively. Their common name is, therefore, called as the "Four Guardian Kings", whose function is to prevent demonic forces from entering into its sacred world. Although the position of $Lokap{\bar{a}}las$ is to the lowest level in the hierarchy of the minor deities in Buddhism, the cult of $Lokap{\bar{a}}las$ was widely spread and prominent in the countries of Northern Buddhism. It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erms of the state-protecting Buddhism, on behalf of it's esoteric and magic power. More than 20 Gateways of the $Lokap{\bar{a}}las$ and $Lokap{\bar{a}}la$ statues were still well preserved in Korea, and they were believed to be constructed after the Japanese attack in 1592. After war, monks had concentrated on restoring ruined temples and building many new Gateways of the Four Guardian Kings over the Korean peninsular. Under such circumstances, even though the $Lokap{\bar{a}}las$ played a significant role as the subject of cult in Korean Buddhism. they might have a small chance to be taught traditional Lama iconography exactly.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examine the relation of orientation of the Gate way of $Lokap{\bar{a}}las$ and allocation of each Kings inside the 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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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조사당 신장 벽화를 통해 본 조사당 건립의 배경과 의미 (The History of the Josadang and Its Meaning as Seen Through the Murals of Josadang Hall in Buseoksa, Yeoungju)

  • 심영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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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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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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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이 글은 설산 천희(雪山 千熙, 1307~1382)가 영주 부석사에 조사당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의미를 조사당 벽화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조사당의 남벽(출입구 위치)에는 북벽에 위치한 의상 대사상을 마주 보며 6구의 신장(사천왕과 그 양 옆으로 제석천과 범천)이 그려져 있다. 이 신장 그림은 우리나라 사찰 벽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매우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사찰 전각의 내벽에는 경전에서 묘사하는 장면들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사당에는 이런 종류의 벽화는 없으며 신장들만 그려져 있다. 이는 유일한 예이며, 승려상과 마주보는 위치에 신장들이 그려진 예도 찾아볼 수 없다. 주인공인 승려(의상대사)를 외호하기 위한 신장의 배치와 부조상(浮彫像)을 그림으로 번안한 듯한 표현상의 특징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그 구성과 표현이 팔각의 탑신 표면에 신장상을 새긴 나말여초 선종의 석조승탑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도상 또한 나말여초기 신장과 유사성을 지닌 고식이다. 이중 동방과 서방천왕의 존명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는데 이 글에서는 나말여초 승탑의 사천왕 배치 순서에 근거하여 이들의 명호를 제시하였다. 한편, 해동 화엄의 초조 의상 대사를 기념하여 조사당을 건립하고 이를 외호하는 신장들을 배치했다는 것은 개산조에 대한 숭배 개념을 드러낸다. 따라서 조사당 건립의 목적 또한 선종 승탑 건립 이념의 연장선에서 찾았다. 문제는 설산 천희가 화엄종 승려이고 부석사는 대표적인 화엄 사찰이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조사당 건립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14세기 고려 불교계의 상황과 창건주 설산 천희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14세기에는 간화선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천희는 58세의 노령에도 원나라에 유학하여 간화선사의 인가를 받아온 뒤 국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결국 부석사로 밀려나 부석사 중창에 힘쓰게 된다. 천희는 아마도 사찰 중창을 통해 부석사의 위상을 높이고 선종에 위축되어 가던 화엄종의 발전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선종의 부상 아래 힘을 잃어가던 화엄종이 그 발전을 모색하는 시도 속에서 조사당을 건립하였고 이러한 염원이 벽화의 특징으로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조사당 벽화의 불교사적인 가치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가사의 상징성에 대한연구 -가사에 나타난 문양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Symbolical Significance in Korean Kasa - Focusing on the embroideries -)

  • 이순덕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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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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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9-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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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 Buddhism as one of alien thoughts has been developed conflicting and fusing with Korean Cultural bases. From these fusion process Korean Kasa (i.e, sacerdotal robe for Buddhist monk) also came into possession of different features from original Kasa which Buddhist Command- ment regulates or Kasa of South Asia which is the birthplace of Buddhism. 1. Original kasa was Pamsukula (i.e., a shabby, abandoned, muddy cloth), which did not permit special ornament or luxurious materal. However, we can find splendid colors, letters and embroideries in Korean Kasa. 2. These phenomenon originated from Three Treasures Faith, that is to say, the faith for three treasures, such as Buddha, Buddhist Commandment and Buddhist monk, which was formed by the fusion of Buddhism and conventional Shamanism. 3. Such letters as 천(Heaven), 왕(God). 영(om) stand for what shaped Guardian Deities protecting buddhist Sanctum. 4. The rmbroideries of three-legged bird, such as rabbit and toad, which symbolyze 일(sun) and 월(moon) stand for what shaped conventional divinities. 5. After Kasa possessing originally practical significance, such as Kasa Charity, was penetrated into Korea, it became the object of faith, possessing symbolical significance in ad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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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현리와 화천리 삼층석탑 연구 - 탑부조상(塔浮彫像)의 도상 분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f the Three-story Stone Pagodas in Hyeon-ri and Hwacheon-ri, Yeongyang - Focusing on Analysis of the Pagoda Reliefs -)

  • 한재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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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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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0-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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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경상북도 영양의 <화천리 삼층석탑>(보물 제609호)과 <현리 삼층석탑>(보물 제610호)은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 양식을 계승한 석탑이다. 두 탑은 이중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양식이나 기단부 결구(結構) 방식 등을 고려하면 늦어도 9세기 중·후반 무렵에는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석탑의 탑신부와 기단부의 탑부조상으로도 확인된다. 사천왕상과 십이지상 부조는 8세기 후반의 <원원사지 삼층석탑>에서 처음으로 조합되어 나타났고, 팔부중상도 9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유행한 탑부조 신중상이다. 그런데 영양석탑 두 기는 사천왕상(탑신)-팔부중상(상층기단)-십이지상(하층기단)이 조합되는 특징적인 장엄을 갖추었고, 또한 석탑에 사용된 석재도 일반적인 화강암이 아닌 영양 지역 지질층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사암 계통의 퇴적암이다. 이렇게 세 종류 도상의 신조합과 팔부중상이 좌상에서 입상으로 변화한 점 등은 지역 자생적인 재료로 석탑을 구축한 사실과 함께 영양의 불교 신앙과 문화적 위상을 드높이려는 의도로 읽힌다. 영양석탑의 팔부중상은 기존 팔부중 석탑의 두 가지 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일부 도상을 새로운 방위로 재배치하였다. 동면에는 아수라-건달바, 남면에는 용-마후라가, 서면은 천-가루라, 북면에 긴나라-야차로 구성된 이 형식은 영양 지역만의 독특한 '팔부중 제3형식 배치'로 분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팔부중상 배치 형태와 자세의 변화는 탑부조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건달바상과 야차상이 각각 동면과 북면에 조각된 것은 이들이 지국천왕(동)과 다문천왕(북)의 권속이기 때문이며, 용상과 마후라가상이 남면에 조각된 것은 반변천 북변이라는 두 탑이 처한 지리적 위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통일신라 전형 양식 석탑의 '구조'와 새로운 형식의 탑부조상 '장엄'을 함께 갖춘 <현리 삼층석탑>과 <화천리 삼층석탑>은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는 한편 지역적 특성도 뚜렷한 9세기의 중요한 방계(傍系) 석탑으로 평가된다.

제주의 불교미술과 자복미륵 (A study of Jeju Buddhist art and Bok-sin Maitreyas)

  • 이경화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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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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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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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제주 불교미술에 대한 관심은 한국미술에서 조금 소외되어 있는 편이다. 이 글은 주요 제주 불교미술에 대한 서술과 자복미륵에 중점을 두어 분석하였다. 제주의 불교문화는 고려후기에 흥기하였다. 법화사는 원 황실의 원찰이자 고려의 비보사찰이었다. 묘련사에서는 1296년에 고려 조정에서 내린 불전을 받들어 제주도판을 다시 새겼고 이는 제주의 지식문화를 시사한다. 수정사 청석탑 부재에 새겨진 금강역사상은 고려 후기의 회화로 주목된다. 불탑사 오층석탑은 제주 현무암으로 만들어졌고 14세기 전반경의 체화된 제주불교미술이다. 제주의 조선시대 불교미술에서 자복미륵은 민간신앙화된 미륵의 세 유형을 합성하여 독특한 모습이다. 자복미륵은 원정모와 관복을 착용하였으며, 석인상형 미륵처럼 좌우에 놓여 지역을 살피고 지키며, 튀어나온 눈으로 호위하는 역사(力士)인 신장상형 미륵의 특징을 수용하였다. 따라서 자복미륵은 조선시대 세속화된 미륵의 유형을 분석하는 데에 의미 있는 형식이다. 자복미륵을 이해하는 데에 특기할 불상이 1471년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병립상, 1491년경 옥천 대성사 석불, 광주 십신사지 석불 등이다. 원정모형 보개를 지닌 불상은 조선전기에 집중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미륵을 조선으로 끌어들여, 조선을 건설한 신진사대부의 모습에 기인하여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 진다. 공교롭게 옥천 대성사 석불입상의 조성에 제주목사를 역임하는 육한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복미륵은 그러한 불상들의 지역에 따른 변형에도 불구하고 연결고리를 확인하여 주었다.

조선왕릉 봉분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일고 - 문헌에 기록된 석실과 회격의 구조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tructural Features of the Joseon Royal Tomb Tumulus)

  • 전나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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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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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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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사료를 통하여 조선왕릉의 내부와 외부 구조를 분석한 후 시각적으로 구성하고, 조선왕릉의 특징을 고려 왕릉, 조선 사대부 무덤과 비교하여 본 논문이다. 조선왕릉은 구조적으로 견고한 건축의 성격을 지닐 뿐만 아니라 내부와 외부에 수호를 상징하는 미술 장식을 넣어 오래도록 왕과 왕후를 수호하도록 기원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는"세종실록 오례의"와 "국조오례의"가 남아 있어 이 사료를 통하여 조선왕릉의 내부는 석실이고, 외부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조가 자신의 능에 석실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 이후로 조선왕릉의 내부는 모두 회격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조선왕릉의 조성 과정을 작성한 사료는 영조 때 편찬한 "국조상례보편"이 있다. 이 책에는 조선왕릉을 회격으로 조성하는 구체적인 과정이 나타나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한 왕릉의 병풍석은 십이지상을 새겼던 기존과 달리 모란을 새겨 넣는다. 모란은 궁궐의 장식화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조선왕릉에 모란이 나타난 점은 조선왕릉이 왕의 일상 공간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점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