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Grand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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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지역 초등학교 아동의 아동, 가정, 노인 관련변인에 따른 노인에 대한 인식조사 (A Study on the Perceptions Toward the Elderly of the Elementary School Children in Incheon Area According to the Related Variables)

  • 장영애
    • 한국지역사회생활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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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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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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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This study investigated the perceptions toward the elderly of elementary school children in Incheon area. The subject of this study were 264 elementary school children in grade 2, 4, 6 and their mothers. Instruments included the inventory of the perceptions toward the elderly. The main results obtained from this study were as follows The degree of children's perceptions toward the elderly differed according to children's sex, age, birth order, mother and father's education, income of the family, religion and the attitudes of parents toward the elderly. Also the degree of children's perceptions toward the elderly differed according to whether grand parents are alive or not, whether they live together in the same household or not, the age of grand parents, their financial ability, health of grand par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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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논의에서 '메타 프락시스'의 구조와 의미 (An Analysis on Meta-praxis in the Educational Discoyrse)

  • 김정래
    • 한국교육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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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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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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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교육활동의 성격과 교육이론의 실행성을 규명하고자 메타 프락시스의 의미를 검토하였다. 메타 프락시스의 중층구조는 다시 메타 프락시스의 되먹임구조를 드러낸다. 교육논의에서 메타 프락시스의 성격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이 되먹임구조가 교육현장에서 아이러니를 야기하고, 실행 지침 자체가 실행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인간 활동의 영역에서 교육은 단순히 포이에시스로 파악되어서 안 되며, 프락시스로 파악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육이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메타 프락시스의 속성을 지닌다. 그 결과 교육학의 독자성 확보를 정당화해 준다. 특히 메타 프락시스의 중층구조는 교육활동과 교사의 존재와 역할 등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교육에서 되먹임구조를 상즉(相卽), 상입(相入), 원증(圓證)과 관련하여 파악하였으며, 교사의 존재의의를 할아버지론(論)에 비추어 파악하였다.

아버지의 양육태도 및 관심도와 자녀의 인성과의 상관관계 (A Study on the Relation between Father's Child-Rearing Attitude or Child-Concern and Children's Personality)

  • 이행자
    • 대한가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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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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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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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1) to find out several factors which related to father's rearing attitude and father's concern influencing on children's personality development and 2) to examine closely the correlation between father and children's personality. For the study, cases of 914 children from Seoul and Chong-Ju were sampled to put their personality on test and to investigate on the father's attitude for child rearing and child -concern. The instruments used in this research are question aires, which the investigators made, to examine the father's attitude for child-rearing and child-concern, and the child-personality test performed by Ph. D.B.M.J eong. The results obtained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 1. Most fathers were found to be more affectionate to daughters then to sons in their attitude for child-rearing and child-concern , and fathers in Chong-Ju had the tendency to have morn concern about the first child. 2. The more educated fathers, public official or company employee, and Christian or Catholic , showed much more concern about their children, which was shown or Catholic ,showed much more concern about their children , which was shown in this study as statistically significant (P<.0.1, F-test). 3. There were no sex differences in correlations between father's child-rearing attitude or child-concern and child-personality. 4. Father's child-rearing attitude was highly related to child's birth order, That is : the first child showed the low coefficient in general activity and impulsiveness, and showed the high coefficient in emotional stability of personality traits when father's child-rearing attitude was high. 5. Regardless of sex, birth order, economic level, children showed high coefficient in dominance, reflectiveness, and sociability of personality traits when father's child-concern was high. 6. Children in Chong-Ju also presented high marks at percentile in emotional stability when they liked grand fathers and fathers. 7. Children who identify their fathers showed the high marks in emotional stability, specially cases of Chong-Ju were statistically more significant (P<0.5, F-test). 8. There were much difference in percentile marks of personality traits among children in Seoul and Chong -Ju ; the marks which children in Chong-ju made were average 13.71 score lower than those of Seoul in general -activity , dominace, impulsiveness reflectiveness, sociability only except emotional st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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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溥 《漂海錄》 经由地点古今对比研究 (A comparative study of the past and present locations of Cui Pu's "Piaohailu")

  • 최창원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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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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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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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崔溥韓國朝鮮時期官員, 公元1487年赴濟州島執行公務, 後因其父去世, 於1488年閏正月初三奔喪回家, 途中不幸遭遇風暴, 而在海上漂流了近半個月後, 終於在 「大唐國浙江台州府臨海縣界」 (今三門縣) 登陸。崔溥從台州走陸路至杭州, 後經杭州, 乘船沿京杭大運河至北京, 再由北京走陸路過山海關, 經鴨綠江返回了祖國。我們將其走過的路程分段整理, 將他所經過的地點的當今情況進行整理。並希望通過重走其所走過的重要地點, 對這些地點的變遷進行新的記錄。本研究通過對崔溥所經由的地點的古今對比研究, 探尋崔溥的足跡, 回顧歷史。

崔溥 《漂海錄》 行程與其拍攝意義研究 (A study on the deeds of Choi Bu and its filming significance)

  • 최창원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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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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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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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崔溥(公元1454~1504),字淵淵,號錦南。曾任李氏朝鮮弘文館副校理(五品官員),1487年赴濟州島執行公務,期間因其父亡故,故於1488年閏正月初三回家奔喪,卻不幸在途中遭遇暴風雨,所乘船舶受損,致其在海上漂流了近半月之久。後其在「大唐國浙江台州府臨海縣界」(今三門縣)登陸後經陸路到達杭州,後於杭州乘船沿京杭大運河經水路至北京。明朝弘治皇帝親自接見並賞賜了崔溥後,從北京走陸路過山海關,經鴨綠江返回了自己的國家。崔溥在中國滯留了4個半月,136天,行程將近9000里地。回國後,他用漢文寫出了《漂海錄》一書,這部以日記體形式的著作共5萬余字,一定程度上記錄了明朝弘治初年中國京杭運河流域的地理,城市,民俗等方面內容,為後世研究明朝時期的政制,司法,運河,城市,地志,民俗以及海防提供了重要的文獻記錄。

의사인력 배출의 사회적 관련요인 (Social Factors in Recruiting Physicians and Dentist)

  • 유승흠;박종연
    • Journal of Preventive Medicine and Public 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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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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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8-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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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 This study was designed to investigate whether recruitment of physicians and dentists has been restricted to a social network, such as familial or kinship groups. The data was collected through a self-administered questionnaire survey distributed to a sampling of general physicians, specialists (internists, surgeons, other specialists), and dentists in August 1990. The major findings are as follows : 1) Total number of respondents was 405 ; of these, general physicians made up 48.9%, internists 10.4%, surgeons 15.8%, other specialists 4.9%, and dentists 20.0%. 2) 38.5% of the respondents had physicians or dentists in their immediate family or were related in some way to one. Those from urban areas, whose parents were highly educated, and whose father was a professional had more physicians or dentists in their family or kinship. 3) Parents of 7.1% of the respondents, brothers or sisters of 10.1%, grand parents of 1.7%, uncles or aunts of 7.9%, and cousins of 22.0% were physicians or dentists. 4) The majority of physicians or dentists in familial or kinship network specialized n surge, 32.3%, followed by internal medicine ; current worksites were noted as clinics by 30.8%, followed by general hospital, university hospital, and so on. The respondent's ma discipline tended to follow familial or kinship example. Consequently, it was concluded that physicians and dentists have been recruited within restricted familial or kinship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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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기록영화 연구: 영화문헌의 의미생성 구조 (Studies on North Korean Documentary Films: Structures as to How Meanings of Film Literature are Made)

  • 김승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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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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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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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글에서는 북한의 중요한 정치적 해였던 2015년에 제작된 영화문헌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동지께서 인민군대사업을 현지에서 지도>의 의미생성 구조를 파악하여, 북한이 영화문헌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북한 주민을 선동하고, 설득시키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분석 결과, 분석대상의 서사구조는 서론, 본론, 결론의 논증구조를 통해 이미 제시된 주제를 확증시키고 있다. 영상기법은 대중적 투쟁정신을 고취시키고 있고, 사운드는 대중에 응집력을 추동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영화문헌의 의미체계는 첫째, 영상 실록의 형태를 띠며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구조를 택하고 있다. 둘째, 당의 선군영도를 따라 주체위업을 이루어 내자는 주제의식을 명확히 논증해 내고 있다. 셋째, 혁명 활동에 대한 수령의 근면성을 기록영상을 통해 착상, 배치함으로 늘 깨어 일하는 지도자상을 구축하고 있다. 북한에서 영화문헌은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무기이다. 이에 따라 모든 기록영화 창작가들은 영화문헌을 수령과 당의 영화문헌이 되게 해야 했다. 김정은 체제가 '사회주의문명국'이라는 사회적 비전을 내세워 영화문헌이라는 선전도구를 통해 통치력을 강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춘추』 경문에서의 묘(廟)·궁(宮) 언급을 통한 주대(周代)의 그 쓰임 사례 일고찰 - 주대의 묘수제(廟數制) 실재 여부에 대한 궁구 과정에서 【1/2】- (A Study on the Usage of Miào(廟) and Gōng(宮) in Zhou Dynasty through the Mentions to Them in the Scripture Sentences of 『Chūn-qiū(春秋)』 - In the Process of Investigating the Existence of Zhou Dynasty's System to Regulate the Number of Zōng-miào(宗廟) 【1/2】)

  • 서정화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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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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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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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의에서는 주대(周代) 묘수제(廟數制)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방편으로 "춘추"의 기록 속에 나타나는 '묘'와 '궁'에 대한 집중적인 고찰을 시도하였다. 경문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은 부분들은 "좌전"의 글과 기타자료들을 통해 사건의 맥락을 확인하였다. "춘추" 경문에서의 '묘(廟)'자의 쓰임 사례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다. 노나라의 태묘에서는 범국가적인 행사[事]와 제왕의 정치적인 제사 의례인 체(?) 의례를 이행하였고, 또 그와 같은 의례에 쓰이는 화려한 예기(禮器)를 구비하였다. 당대 군주의 종묘에서는 조정 의례인 조(朝)의례를 이행하였다. '궁(宮)'자의 쓰임 사례는 다음과 같다. 군주 개인의 가족이 기거했던 궁에서 그를 위한 가족 제사를 이행하였다. 노나라 삼환씨(三桓氏)의 정치적 거점이라 할 수 있는 환궁(桓宮)을 화려하게 장식한 기록이 눈에 띈다. 희공(僖公) 재위 시에 있었던 서궁(西宮)과 성공(成公) 3년에 화재로 소실된 신궁(新宮) 등은, 그것이 예궁(?宮)일 것이라는 한대 이후에 형성된 관점과는 달리, 양공(襄公)이 좋아했던 초궁(楚宮)과도 같은 군주의 또 다른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궁을 세우고'[立武宮] '양궁을 세웠다'[立煬宮]고 하는 기록은, 어떠한 건축물에 '무(武)'와 '양(煬)'이라고 하는 상징성을 부여해 설립하여 제후가 그곳의 위(位)에 서는 행사가 이어진 것임을 논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무공(武公)이나 양공(煬公) 등의 선군을 위한 당대 군주의 효성스러운 제사 이행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그 의례를 통해 얻는 특정의 정치적 상징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징성은 환궁(桓宮)과 희궁(僖宮)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경문에서의 모든 묘와 궁들은 일정 부분 사당(祠堂)의 기능이 있긴 하지만, '천자7묘'나 '제후5묘'라는 묘수제의 규정에 맞추기 위해 사당으로서 조성한 건축물이 결코 아니었음을 확인하였다.

과시된 효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연구 (Showing Filial Piety: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재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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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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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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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덕수5520)는 그림과 발문(跋文) 열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으로, 작가는 조중묵(趙重黙)(1820~1894 이후), 주문자는 박경빈(朴景彬)(생몰년 미상), 발문을 쓴 사람은 홍선주(洪善疇)(생몰년 미상), 제작연대는 1868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낱장으로 보관되어 온 <인왕선영도>를 병풍으로 복원하고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최초로 공개하였다. <인왕선영도>에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홍은동을 아우르는 인왕산 서쪽 실경이 묘사되어있고 원경에는 북한산 연봉이 그려져 있다. 화면 속에는 인왕산(仁旺山), 추모현(追慕峴), 홍재원(弘濟院), 삼각산(三角山), 대남문(大南門), 미륵당(彌勒堂)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있다. 이 지역을 나타낸 조선후기 지도와 비교해보면 지형 표현과 지명 표기에 유사성이 있다. 조중묵은 넓은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지도의 지리정보를 숙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경의 현장을 답사한 결과, 조중묵은 각각의 경물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였고 수평의 화면에 나열식으로 조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조중묵은 남종화풍 정형산수에 뛰어났던 화가로, <인왕선영도>의 세부 표현에서 사왕파(四王派) 화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도화서 화원들이 화보를 활용하여 가옥을 그리거나 토파에 호초점을 찍고 당분법(撞粉法)으로 꽃을 나타내는 등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한 경향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인왕선영도>에는 바위를 짙은 먹으로 쓸어내리듯 붓질한 기법, 산세의 괴량감, 가로로 붓을 대어 단순하게 그린 소나무 등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의 개성적 양식도 가미되어있다. 조중묵은 인왕산 실경산수로 유명한 정선의 양식과 권위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유기적 공간감과 현장의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연폭 화면이라는 매체도 조중묵의 개인 양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인왕선영도>는 발문의 텍스트와 화면의 이미지가 잘 조응하는 작품이다. 발문의 내용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①무덤의 주인공과 이장 경위, ②무덤의 입지와 풍수, ③묘제(墓祭)와 신이(神異)한 응답, ④무덤 관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 ⑤병풍 제작의 동기인 박경빈의 효성과 수묘(守墓), ⑥발문을 쓴 의의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용이한 ②의 내용은 화면에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인왕선영도> 제작의 직접적 동기인 ⑤를 보면 주문자 박경빈이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다."라 하여 <인왕선영도>에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경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듯 나열한 구도는 회화미는 떨어지더라도 무덤의 풍수지리를 전달하는 데는 더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산도(山圖)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목판본 선영도로서, 족보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기록에서는 족자 선영도를 첨배(瞻拜)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선영도 첨배는 현실적으로 수묘(守墓)가 곤란할 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의례로 인정되었다. 한효원(韓效元)(1468~1534), 조실구(曺實久)(1591~1658) 등이 선영도를 제작한 후 당대의 명사에게 서문을 요청하고 효심을 과시한 사례는 <인왕선영도>의 선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개인 소장),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선영도는 아니지만 계회도 형식의 족자이고 풍수를 도해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선영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인왕선영도>는 첨배라는 측면에서 초상화와도 의미가 비슷했다. 발문의 "부친의 기침소리를 직접 접하는 듯하고, 그 태도와 몸가짐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는 표현과 부친의 초상에 조석 문안을 올린 서효숙 고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경빈이 일반적인 선영도 형식이었던 족자나 목판화 대신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를 주문한 의도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사례(四禮) 의식에 다수의 병풍을 배설(排設)하였는데, 의례의 성격에 따라 그림의 주제를 반드시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인왕선영도> 또한 여러 의례에 두루 배설하거나 장식 병풍으로도 사용하기 위해서 선영 그림이라는 주제를 실경산수화 이미지 아래에 가렸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왕선영도>의 핵심 소재인 무덤 봉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것은 사산금표(四山禁標)의 금제 위반을 숨기기 위함일 가능성이 있다. <인왕선영도>에 묘사된 인왕산 서쪽 산기슭은 분묘 조성 금지구역이었다. 1832년에 금표 내에 몰래 쓴 묘를 적발하여 즉시 파내고 관련자를 엄히 처벌한 사례로 볼 때, 19세기 중엽까지도 사산금표 내의 분묘 금제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장지를 얻기 위해 쏟은 정성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장지조성에 마을사람들의 협조와 묵인이 필요했던 것은 금표 구역 내에 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인왕선영도>와 비교 가능한 동시대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로 이한철(李漢喆)(1808~1880)이 그린 <석파정도(石坡亭圖)>(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를 들 수 있다. <석파정도> 제작시기를 전후한 1861년에 이한철과 조중묵은 철종어진도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조중묵이 이한철의 <석파정도> 제작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조중묵이 몇 년 후 <인왕선영도>를 주문받았을 때 <석파정도>의 인상적인 연폭 실경산수를 본 경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작품의 화풍 차이는 주문자의 취향과 제작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는 실경산수화와 선영도의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지식수준과 주문자와의 친분, 관람에 들이는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과 자호, 본관이 일체 작성되지 않은 채 '박공(朴公)'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주문자인 박경빈의 인적 사항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다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가계를 미루어 볼 때 재력이 있음에도 지배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발문을 쓴 홍선주 또한 사대부로 보기 어려우며, 『승정원일기』 기록에 나타나는 경아전 서리일 가능성이 있다. 박경빈은 상류 계층에 진입하고 싶은 욕망으로 보수적인 가치인 효(孝)를 강조하여 부친의 무덤을 명당으로 이전하고 <인왕선영도>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금제위반 적발에 대한 우려, 병풍의 다목적성 등의 이유로 본래의 제작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모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병풍이 제작된 지 47년 만에 각 폭이 분리된 채 미술상을 통해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이 된 상황을 보더라도, 박경빈이 <인왕선영도>에서 꿈꾸었던 명당 발복과 가문의 신분상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