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별곡(靑山別曲)>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가요이며, <강보(降寶)>는 조선 세종이 종묘, 조회, 공연에 사용하기위해 새로 창제한 <발상(發祥)> 11곡 중의 한 곡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발상>은 고취악과 향악에 의하여 창제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이 기록에 근거하여 이 논문은 <발상> 중 <강보>가 고려 향악인 <청산별곡>에 근거하여 창제되었음을 밝힌 논문이다. <강보>와 <청산별곡>의 선율을 비교 분석한 결과 48행의 <강보>는 10행의 <청산별곡>을 세 번 반복하였는데, 즉 <강보>의 1-16행, 17-32행, 33-48행에서 <청산별곡>이 세 번 반복하여 발췌되었고, <청산별곡>과 <강보>의 선율은 거의 같거나 유사함을 알 수 있었다. 세종 때 <발상> 중의 <강보>가 고려 향악인 <청산별곡>을 발췌하여 신악(新樂)으로 창제되었음을 이 연구에서 밝혀냈다.
본 연구에서는 고려시대의 천문 기상 기후 현상을 담고 있는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한국 중세(A.D. 936~1391)의 가뭄, 홍수, 상해 등의 자연재해와 흉년, 역질, 반란 등의 사회불안 현상과의 관련성을 비교 분석하였다. 고려시대의 여러 자연재해 중 가뭄은 4~5년에 최소 1회 이상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 자료를 포함한 고대와 중세 기간 중 대략 AD 286~335년, AD 786~835년, AD 1261~1320년 경에 가뭄의 발생빈도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고대와 중세 1,500년간의 가뭄 현상은 세 번의 주기가 인정되며, 대략 500년의 시간 간격으로 발생하였다. 고려 말기에 증가한 가뭄 발생빈도는 사회 혼란 요소로 볼 수 있는 흉년과 반란이 자주 발생한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기록들로 볼 때,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는 농업 중심 국가였던 고려의 멸망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Meoricho of Dancheong is a pattern that placed at the end of each elements. We call Dancheong which has Meoricho Moro-dancheong. Meorico is the pattern comes from the metal ornaments of ancient architecture. The most primitive forms of Meoricho is Saw-toothed Design. Since the influence of Buddhism in the Northern Wei dynasties Saw-toothed Design have changed Tied lotus Design. Tied lotus Design of the Unified Silla it becames Gak-yeop Design and Yeo-ui-doo Design Meoricho in Goryeo Dynasty. Since Goryeo Dynasty there's been great and small variations in the internal composition of Meoricho, but the outline has maintained as it was. Therefore the completed form of the outline of Meoricho could be regarded as the one that was formed in Goryeo Dynasty.
In this study, I investigated the function and the setting characteristics of 日type plan building ruins in the Hoe-amsa monastery site, that's renovated by Zen priest Na-ong(1320-76) in the later Goryeo Dynasty(918-1392), through the comparative research between China, Japan, and Goryeo in that time. The ruins of 日type plan building, located in the east side of Buddha hall ruins, is the ruins of Jungryo(衆寮). It was called as Jeondanrim, and the name can be seen from the record(天寶山檜巖寺修造記) of Yi-saek(李穡, 1328-96). It's name and the composition of plan is very similar to the Jungryo of Chinese and Japanese Zen monastery in 13th-14th century. And from it, we can see that, the priest Na-ong tried to introduce institution of Chinese Zen monastery, which he experienced during the time of study in China. But, the location of Jungryo in Hoe-amsa monastery is deferent from the Zen monastery of China and Japan, and it can be said as the setting characteristics of Hoe-amsa monastery in Goryeo Dynasty.
King and Crown Prince's Gwanbok (冠服) written in "Goryeosa" Yeobokji was the bestowment of robes and crowns by the Son of Heaven who yielded hegemony over East Asia. It designated the King and Crown Prince of Goryeo as real and authentic as well as confirmed the political status of Goryeo in East Asia. In "Goryeosa" Yeobokji, the King's Gwanbok is of higher stature than the adornments of the King's ritual robes (祭服) and court robes (朝服) which held a domestic political significance. In East Asia, bestowment of voiture (車) and robe (服) usually appeared in the multistate system. In the $10^{th}$ century, the Later Jin (後晋) spread the idea of investiture and bestowment to Khitan (契丹). The Liao (遼) or Khitan and the Jin (金), the Conquest Dynasties, endeavored to establish the legitimacy of the Son of Heaven by imitating Sinocentrism by means of investiture and bestowment. In the reign of XingZong (興宗) and DaoZong (道宗) of Liao, the ritual of investiture and bestowment for Goryeo was in the making, adding titles and bestowments in the occasion of the elevation of Emperor Liao's honorific title. King Munjong (文宗) of Goryeo reached 9-bestowment which symbolized the first of the feudal lords in East Asia. This exceptional respect for Goryeo went on to Jin's investiture and bestowment. From then, 9-bestowment was defined as an international decorum (禮) toward Goryeo. This historical study of Gwanbok (冠服) of "Goryeosa", indicates: First, the King's Ceremonial Robe with Nine-symbol Design were designated from the early to middle of the Goryeo Dynasty by investiture and bestowment from the Conquest Dynasties. Second, the bestowed King's Robe and Crown had simultaneous functions for domestic order and international order. Goryeo did not follow ideological Sinocentrism but followed practical interest by accepting Confucian Li (禮) philosophy passed on through the Conquest Dynasties.
용(龍)은 동서양 전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 속 동물이다. 서양의 용은 대부분 공격적이고 부정적 의미로 표현되지만, 동양에서는 황제를 상징하거나 상서로운 의미를 갖고 있어 긍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또한 용은 물을 다스리는 신물(神物)로 여겨져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이를 형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고려시대 용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사"에서 다양한 주제로 등장하며, 크게 건국설화 기우제 신이(神異) 등과 관련되어 있다. 건국설화는 용을 통해 고려 왕권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왕(王)=용손(龍孫)'이라는 '용손의식(龍孫意識)'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용의 특징인 물을 다스리는 능력은 가뭄에 비를 바라는 기우제와 관련한 토용(土龍)으로 상징화된다. 이와 같은 용의 다양한 성격 중 용이 왕실의 상징이기에 용문(龍紋)의 사용은 민간에서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용을 소재로 한 용문경(龍紋鏡) 역시 그 제작 사용에 있어 왕실과의 연관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고려시대 쌍룡문경(雙龍紋鏡)은 종류 수량이 많은 편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동경(銅鏡)과 함께 국내에서 제작한 쌍룡문경이 혼재하면서 고려시대 쌍룡문경의 제작과 유통은 다른 동경에 비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본고에서는 10~14세기 중국에 존재한 다양한 쌍룡문경의 특징을 정리했다. 고려의 장인들은 쌍룡문경을 제작할 때 중국 쌍룡문경의 문양 구성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 쌍룡문경과 국적을 판별하기 어려운 예가 많으며, 그 차이 또한 면밀한 분석을 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는 유입된 쌍룡문경을 그대로 답습했던 것은 아니며, 자체적으로 제작하고자 했음을 국내 현존하는 쌍룡문경의 유형 분류를 통해 살펴보았다.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 쌍룡문경은 요대(遼代) 동경 계열인 I 유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외 II III 유형에서는 수량은 적으나 문양 구성이 독특한 쌍룡문경이 있어 고려에서 제작한 쌍룡문경으로 분석했다. 고려시대 쌍룡문경은 중국의 영향 하에서 제작된 만큼 고려에서 제작한 동경과의 구분이 어렵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다. 이중 평창 월정사 구층석탑에서 발견된 쌍룡문경은 그 제작지에 대한 의문점이 있으며, 동경의 문양 구성도 중국 쌍룡문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예이기에 이 동경에 대한 제작지를 검토했다. 이 쌍룡문경은 I 유형에 속하는 동경의 문양 구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세부 문양의 조합이 중국에서 찾기 힘든 예라는 점에서 요대 동경의 문양 구성을 차용하여 고려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글은 삼국~고려시대에 이르는 우리 민족어시가의 전개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논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국~나말여초의 이른바 "사뇌가"의 전형적 모습은 고승의 깨달음의 내용을 표현하는 견고한 짜임의 3단구조였다. 사뇌가는 같은 시대의 다른 민족어시가에 비해 문학적 특성이 두드러진 시가 양식이었다. 이는 당대의 10구체 향가가 한시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시적 수준을 고양해간 결과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이런 문학사적 구도 내부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사뇌가가 쇠락하고 4행시가 문학사의 전면으로 부상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 4행시의 발전은 삼국~나말여초와 달리 우리의 민족어시가가 시보다는 노래적 특성을 강화해 나간 결과였다. 그것은 이 시대 한시가 보편화되면서 우리말 시가가 그것과 시로서 경쟁하는 대신 노래로서 위상을 조정함으로써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나아간 결과였다. 고려시대 사뇌가가 쇠퇴하고 이를 이어 시조가 문학사에 등장한 것은 민족어시가가 대중들로부터 더욱 사랑받을 수 있는, 그리고 보다 일상적인 정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가 형식으로 발전해 나간 결과였다. 이는 4행시 형식의 민족어시가가 한시와의 위상 조정을 통해 노래로서의 특성을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높여간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Hoe-amsa temple was renewed by Zen priest Na-ong(1320-76) in the later Goryeo dynasty(918-1392), and he introduced the institution of Zen Buddhism temple of Yuan dynasty(1271-1368) in China. And in 13-14 century, many Zen Buddhism temple were built in east Asia, like China, Japan, Korea and so on. Hoe-amsa temple became to be ruined in the middle years of Joseon dynasty(1392-1910), and the ruin was excavated recentl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make a searching examination the history of Hoe-amsa temple by analyzing the historic records and excavation relics, and to clarify the function of Jeongcheong, east Bang-jang and west Bang-jang of Hoe-amsa temple, by comparative analysis with Bang-jang architecture of Zen Buddhism temple of Yuan dynasty. As the result of this study it can be said like follow. Hoe-amsa temple maintained the form made by priest Na-ong in spite of several times of repair in Joseon dynasty, and it was reflected in excavation relics of now. The Jeongcheon of Hoe-amsa temple was the space called Chimdang where the chief priest performed lectures and ceremony, the west Bang-jang was the living space of chief priest, and the east Bang-jang was lodging for honored guest. The architecture composed by Jeongcheong, east Bang-jang and west Bang-jang was the adaptation of institution of Bang-jang architecture of Zen Buddhism temple in Yuan dynasty, on the base of general architecture form of Goryeo dynasty.
This paper aims at researching on the substantial characters of the memorial address, namely the mookseo-myeongs(墨書銘), written at the members of the wooden buildings in the late period of Goryeo Dynasty and the early period of JoseonDynasty. In this paper, I pursued to declare the systematic origins by the comparison the Buddhist buildings with the other buildings, on the focused the written patterns. Furthermore, I tried to examine the transitional trends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Dynasty. The results are as follow: First, it is supposed that the mookseo-myeongs of the Buddhist buildings were not used for the a memorial address for the ceremony of putting up the ridge beam, so to speak the sangryang-muns(上樑文), but the prayer address(發願文) to memorize the donations of the believers for the constructions. Second, it is supposed that 'the short sangryang-muns' were originated in the mookseo-myeongs of Buddhist buildings and the other ancient prayer address. In the late period of JoseonDynasty, those were established in the formal literary styles. Third, to the early period of JoseonDynasty, 'the long sangryang-muns' were partially used in the several royal palaces. In the late, those were widely used not only in the royal palaces but also in Buddhist buildings, but those literary patterns were rarely changed from the former types.
향을 피우는 행위는 불교 의례나 관습에서 유래되었으나 점차 일상의 습속(習俗)이 되어 향문화를 형성하였다. 고려는 종교나 국가적인 의례 외에도 일상 속에서 향을 폭넓게 향유하였는데, 특히 고려의 문인들은 연거분향을 통해 삶의 고아한 정취를 즐겼다. 이러한 분위기는 동아시아 향문화의 일환으로 분향방식 역시 동시기 중국과 같은 방식을 공유하였는데, 이는 고려 문인들의 문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분향방식은 향로의 크기나 형태 등에 영향을 주었는데, 일상화된 분향 문화에 적합한 간소화된 소형의 향로들이 널리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소형 향로로 배(杯) 형태의 향완이 대표적이다. 향완은 종교적 용도의 금속제 거향로로 인식되어 왔지만, 송대에는 소형 향완이 도자로 활발히 제작되면서 일상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송과 같은 향문화, 분향방식을 공유했던 고려에서도 도자 향완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하였다. 이는 개경에서 발견된 다수의 송대 백자향완, 그와 유사한 형태로 제작된 고려의 청자향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2~13세기에 제작된 청자 향완은 고려 내부의 적극적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중국 백자향완과 유사한 형태의 청자향완 외에도 금속기를 모방하거나 고려청자의 기법과 문양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고려만의 청자향완들이 제작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고려시대 향로는 기본적으로 각종 의례·의식의 필수품이었지만, 개인 향문화의 확산으로 아취를 위한 기호품으로도 사용되었다. 금속제 향로나 고급 청자 향로들이 주로 국가나 종교의 의례·의식에 사용되었다면, 비교적 생산이 용이한 간소화된 도자 향로는 개인적인 수요에 부응하며 향문화의 확산에 기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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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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