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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경제아카이브즈의 형성과 유형 (The Formation and Types of Business Archives m Germany)

  • 김영애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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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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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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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The term 'Business Archives' is not familiar with us in our society. Some cases can be found that materials are collected for publishing the history of a firm on commemoration of some decades of its foundation. However, the appropriate management of these collected materials doesn't seem to be followed in most of companies. The Records and archives management is inevitable in order to maximize the utility of Information and knowledge in the business world. The interest in records management has been grown, especially in the fields of business management and information technology. However, the importance of business archives hasn't been conceived yet. And also no attention has been paid to the business archives as social resources and the responsibility of the society as a whole for their preservation. The company archives doesn't have a long history in Germany although the archives of the nation, the aristocracy, communes and churches have a long tradition. However the company archives of Krupps which was established in 1905, is regarded as the first business archives in the world, It means that Germany has taken a key role to lead the culture of business archives. This paper focuses on the process of the establishment of business archives in Germany and its characteristics. The business archives in Germany can be categorized in three types: company archives, regional business archives and branch archives. It must be noted here that each type of these was generated in the context of the accumulation of the social resources and its effective use. A company archives is established by an individual company for the preservation of and use of the archives that originated in the company. The holdings in the company archives can be used as materials for decision making of policies, reporting, advertising, training of employees etc. They function not only as sources inside the company, but also as raw sources for the scholars, contributing to the study of the social-economic history. Some archives of German companies are known as a center of research. A regional business archives manages materials which originated m commerce chambers, associations and companies in a certain region. There are 6 regional business archives in Germany. They collect business archives which aren't kept in a proper way or are under pressure of damage in the region for which they are responsible. They are also open to the public offering the sources for the study of economic history, social history like company archives, so that they also play a central role as a research center. Branch business archives appeared relatively late in Germany. The first one is established in Bochum in 1969. Its general duties and goals are almost similar with ones of other two types of archives. It has differences in two aspects. One is that the responsibility of the branch business archives covers all the country, while regional business archives collects archives in a particular region. The other is that a branch business archives collects materials from a single industry. For example, the holdings of Bochum archives are related with the mining industry. The mining industry-specialized Bochum archives is run as an organization in combination with a museum, which is called as German mine museum, so that it plays a role as a cultural center with the functions of exhibition and research. The three types of German business archives have their own functions but they are also closely related each other under the German Association of Business Archivists. They are sharing aims to preserve primary materials with historical values in the field of economy and also contribute to keeping the archives as a social resources by having feed back with the public, which leads the archives to be a center of information and research. The German case shows that business archives in a society should be preserved not only for the interest of the companies, but also for the utilities of social resources. It also shows us how business archives could be preserved as a social resource. It is expected that some studies which approach more deeply on this topic will be followed based on the considerations from the German case.

공개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기록시스템 구축가능성 연구 ICA AtoM을 중심으로 (A Study on Usability of Open Source Software for Developing Records System : A Case of ICA AtoM)

  • 이보람;황진현;박민영;김형희;최동운;최윤진;임진희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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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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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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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최근 우리나라는 공공의 기록관리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민간 아카이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설립된 민간 아카이브는 설립 및 관리 주체가 상이할 뿐만 아니라 목적, 형태, 기록의 유형 등이 다양하고, 예산과 인력의 부족, 전문적인 기록관리 담당자가 부재하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기록을 관리하기는 쉽지 않다. 시스템에 대한 요구는 계속해서 증대되고 있으나,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인력과 예산의 부족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이에 민간 아카이브의 시스템에 대한 부담감의 돌파구로서 공개 소프트웨어 기록시스템이 가지는 의미와 동향을 소개하고, AtoM 기능을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공개 소프트웨어인 AtoM은, 웹 기반의 시스템으로서 웹 브라우저를 통해 접속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비교적 사용법이 간편하고 웹 서비스 또한 데이터베이스 서버에 요청하는 방식을 통해 가능하다. 무료로 이용가능하다는 장점을 비롯하여 특정 운영체제나 애플리케이션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고 설치와 운영이 편리하며 호환성, 확장가능성 등이 높아 예산과 인력의 부족을 겪고 있는 민간 아카이브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 관리의 측면에서도 공유와 검색, 활용 등에 대한 상호운용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향후 민간 아카이브 및 기관 간의 네트워크를 통한 기록물 활용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추가로, Omeka와의 연계를 통한 전시서비스 기능 확장, Archivematica를 통한 장기보존 등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그간 공공중심으로 이루어지던 기록관리가 민간으로 그 저변이 확대되어 균형을 이루게 될 수 있는 초석으로 공개 소프트웨어로서의 기록시스템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남농(南農) 허건(許楗) '신남화(新南畵)'의 회화심미 고찰 (A Study on the Painting's Aesthetic of Namnong Heo Geon's NewNamhwa)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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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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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7-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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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광복 이후의 한국 화단은 일본화풍의 탈피와 전통회화의 재인식 및 재창조를 통한 한국적 미의식을 확립하고 자 탐구하였다. 조선 후기 호남 화단의 실질적 종조(宗祖)라 불리었던 소치(小癡)의 손자로 태어난 남농(南農) 허건(許楗)(1908~1987)은 이러한 한국 화단의 현실을 직시하고 한국 남종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이를 변유적으로 재인식·재창조하여 현대적 서구양식과 실경을 융합한 파격적 구도로 '신남화(新南畵)'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등 한국 남종화를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한국화단의 거목이다. 남농(南農)의 회화세계는 관지(款識)를 근거로 하여 1930년대 '남농산인(南農山人)' 시기, 1940년대 중반~50년대 초반 '남농외사(南農外史)' 시기, 그 이후의 '운임산방주인(雲林山房主人)' 시기 등 총 3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남농산인(南農山人) 시기는 소치(小癡)와 미산(米山)의 전통 남화의 가전화풍을 온전히 습득하고, 선전(鮮展) 출품을 위한 일본화풍의 반영으로 향토적 실경을 많이 다루어 가전화풍과 일본화풍의 혼재기이다. 남농외사(南農外史) 시기에는 해방 이후 새로운 조형성을 전통 남화풍에서 탐색하였다. 특히 남도의 풍경과 정감을 기반으로 하여 자유분방한 농담 조절과 함께 속필과 독필, 갈필로 대상을 표현하면서 서정성과 향토애 짙은 실경향토화와 산수화에 주력하였다. 운임산방주인(雲林山房主人) 시기는 현대미술의 흐름에 어느 정도 부합하면서도 전통 회화에 걸맞는 사의적 문향이 넘치는 구도로 차츰 생략화되면서 개성적 화법을 강하게 드러낸 갈필, 독필, 속필의 적절한 운용을 통해 수묵담채의 서정적인 산수와 소나무를 많이 그렸다. 그의 산수화와 향토화는 누구에게나 체험적인 친근감과 정감을 자아내게 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향수애와 자연애를 담고 있다. 남농(南農)은 이를 '신남화(新南畵)'로 명명하였다. 남농(南農)은 '남화연구원'을 설립,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는데, 이곳에서 임인(林人)의 아들인 許文과 남농(南農)의 장손자인 허전(許塡) 등이 수련하여 5대째 운림산방의 화맥을 계승하고 있다.

과시된 효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연구 (Showing Filial Piety: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재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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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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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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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덕수5520)는 그림과 발문(跋文) 열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으로, 작가는 조중묵(趙重黙)(1820~1894 이후), 주문자는 박경빈(朴景彬)(생몰년 미상), 발문을 쓴 사람은 홍선주(洪善疇)(생몰년 미상), 제작연대는 1868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낱장으로 보관되어 온 <인왕선영도>를 병풍으로 복원하고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최초로 공개하였다. <인왕선영도>에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홍은동을 아우르는 인왕산 서쪽 실경이 묘사되어있고 원경에는 북한산 연봉이 그려져 있다. 화면 속에는 인왕산(仁旺山), 추모현(追慕峴), 홍재원(弘濟院), 삼각산(三角山), 대남문(大南門), 미륵당(彌勒堂)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있다. 이 지역을 나타낸 조선후기 지도와 비교해보면 지형 표현과 지명 표기에 유사성이 있다. 조중묵은 넓은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지도의 지리정보를 숙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경의 현장을 답사한 결과, 조중묵은 각각의 경물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였고 수평의 화면에 나열식으로 조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조중묵은 남종화풍 정형산수에 뛰어났던 화가로, <인왕선영도>의 세부 표현에서 사왕파(四王派) 화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도화서 화원들이 화보를 활용하여 가옥을 그리거나 토파에 호초점을 찍고 당분법(撞粉法)으로 꽃을 나타내는 등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한 경향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인왕선영도>에는 바위를 짙은 먹으로 쓸어내리듯 붓질한 기법, 산세의 괴량감, 가로로 붓을 대어 단순하게 그린 소나무 등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의 개성적 양식도 가미되어있다. 조중묵은 인왕산 실경산수로 유명한 정선의 양식과 권위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유기적 공간감과 현장의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연폭 화면이라는 매체도 조중묵의 개인 양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인왕선영도>는 발문의 텍스트와 화면의 이미지가 잘 조응하는 작품이다. 발문의 내용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①무덤의 주인공과 이장 경위, ②무덤의 입지와 풍수, ③묘제(墓祭)와 신이(神異)한 응답, ④무덤 관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 ⑤병풍 제작의 동기인 박경빈의 효성과 수묘(守墓), ⑥발문을 쓴 의의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용이한 ②의 내용은 화면에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인왕선영도> 제작의 직접적 동기인 ⑤를 보면 주문자 박경빈이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다."라 하여 <인왕선영도>에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경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듯 나열한 구도는 회화미는 떨어지더라도 무덤의 풍수지리를 전달하는 데는 더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산도(山圖)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목판본 선영도로서, 족보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기록에서는 족자 선영도를 첨배(瞻拜)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선영도 첨배는 현실적으로 수묘(守墓)가 곤란할 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의례로 인정되었다. 한효원(韓效元)(1468~1534), 조실구(曺實久)(1591~1658) 등이 선영도를 제작한 후 당대의 명사에게 서문을 요청하고 효심을 과시한 사례는 <인왕선영도>의 선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개인 소장),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선영도는 아니지만 계회도 형식의 족자이고 풍수를 도해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선영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인왕선영도>는 첨배라는 측면에서 초상화와도 의미가 비슷했다. 발문의 "부친의 기침소리를 직접 접하는 듯하고, 그 태도와 몸가짐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는 표현과 부친의 초상에 조석 문안을 올린 서효숙 고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경빈이 일반적인 선영도 형식이었던 족자나 목판화 대신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를 주문한 의도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사례(四禮) 의식에 다수의 병풍을 배설(排設)하였는데, 의례의 성격에 따라 그림의 주제를 반드시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인왕선영도> 또한 여러 의례에 두루 배설하거나 장식 병풍으로도 사용하기 위해서 선영 그림이라는 주제를 실경산수화 이미지 아래에 가렸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왕선영도>의 핵심 소재인 무덤 봉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것은 사산금표(四山禁標)의 금제 위반을 숨기기 위함일 가능성이 있다. <인왕선영도>에 묘사된 인왕산 서쪽 산기슭은 분묘 조성 금지구역이었다. 1832년에 금표 내에 몰래 쓴 묘를 적발하여 즉시 파내고 관련자를 엄히 처벌한 사례로 볼 때, 19세기 중엽까지도 사산금표 내의 분묘 금제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장지를 얻기 위해 쏟은 정성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장지조성에 마을사람들의 협조와 묵인이 필요했던 것은 금표 구역 내에 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인왕선영도>와 비교 가능한 동시대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로 이한철(李漢喆)(1808~1880)이 그린 <석파정도(石坡亭圖)>(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를 들 수 있다. <석파정도> 제작시기를 전후한 1861년에 이한철과 조중묵은 철종어진도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조중묵이 이한철의 <석파정도> 제작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조중묵이 몇 년 후 <인왕선영도>를 주문받았을 때 <석파정도>의 인상적인 연폭 실경산수를 본 경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작품의 화풍 차이는 주문자의 취향과 제작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는 실경산수화와 선영도의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지식수준과 주문자와의 친분, 관람에 들이는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과 자호, 본관이 일체 작성되지 않은 채 '박공(朴公)'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주문자인 박경빈의 인적 사항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다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가계를 미루어 볼 때 재력이 있음에도 지배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발문을 쓴 홍선주 또한 사대부로 보기 어려우며, 『승정원일기』 기록에 나타나는 경아전 서리일 가능성이 있다. 박경빈은 상류 계층에 진입하고 싶은 욕망으로 보수적인 가치인 효(孝)를 강조하여 부친의 무덤을 명당으로 이전하고 <인왕선영도>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금제위반 적발에 대한 우려, 병풍의 다목적성 등의 이유로 본래의 제작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모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병풍이 제작된 지 47년 만에 각 폭이 분리된 채 미술상을 통해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이 된 상황을 보더라도, 박경빈이 <인왕선영도>에서 꿈꾸었던 명당 발복과 가문의 신분상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