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Early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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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20세기 초 불화에 보이는 민화적 요소와 수용배경에 대한 고찰 -16나한도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factors of Minhwa(民畵) and accepted background that are appeared at Buddhist paintings from late 19th to early 20th century - focused on Sixteen Lohans painting -)

  • 신은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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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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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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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일반적으로 산수표현을 많이 하는 불화 장르로는 십육나한도를 비롯하여 팔상도, 감로도, 관음보살도 등과 조선후기에 특히 많이 조성된 독성도나 산신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불화는 대체로 산수를 비롯하여 다양한 배경을 갖추고 있는데, 18세기 이후 수묵적 전통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지만 화려한 채색과 산수를 비롯한 다양한 경물의 표현으로 복잡해지는 경향이 강해지며, 19세기에는 흔히 말하는 민화적 요소가 등장하여 시대적인 경향을 보여 준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제작된 16나한도는 이러한 경향 중에서도 배경묘사에 있어서 전통적인 요소도 있지만 그보다는 채색이나 제재면에서 시대적인 예술경향을 반영하는 민화적인 배경이 가장 다양하고 뚜렷하게 부각되어 배경표현의 주된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다른 불화와 차별된다. 즉 조선후기 16나한도에는 당시 유행하던 민화풍과 궁중화풍 등에서 보이던 청록산수식의 배경묘사가 두드러지며 십장생(十長生) 운룡(雲龍) 맹호(猛虎) 괴석(怪石) 화조(花鳥) 책가(冊架) 등과 같은 새로운 배경표현이 등장하여 폭넓은 수용 태도를 보여준다. 대체로 제재면에서는 수명장수, 부귀, 기복과 관련된 길상 상징물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서민불교로의 전환이라는 불교계의 동향, 특히 도교와 민간신앙과의 습합이라는 불교계의 자구적 모색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는 16나한도나 당시 불화에 표현된 다양한 도교인물들의 모습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주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제작된 16나한도에 정형화된 양식의 민화풍이 등장한다는 것은 현존 민화의 제작연대를 추론하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하며, 불화승들이 민간의 수요와 요청에 의해 민화의 작가로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후기 불화에서의 민화적 요소의 고찰은 그 제재나 형태상의 유사점에서 출발했지만, 극단적인 희화화라든가 파격미 등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궁중의 장식그림과 유사한 양식의 표현이 많다는 점은 종교화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는 불화라서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 언어유희의 역사적 변천과 현재적 의의 - 한국 재담(才談)과 중국 상성(相聲)을 중심으로 - (The Historical Transition and Current Meaning of Traditional Language Plays - Focusing on Korean Jaedam and Chinese Xiangsheng -)

  • 강소천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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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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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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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한국과 중국 전통 언어유희 가운데 하나인 재담(才談)과 상성(相聲)의 역사적 변천과 현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한국의 재담과 중국 상성은 모두 웃음을 주기 위한 대표적인 언어유희이며 전통적인 공연예술이다. 재담과 상성의 기원은 우희(優戱)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희는 가장 전통적인 언어유희이며 우희를 전승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공연물이 파생되었다. 그 중에서 한국 재담과 중국의 상성은 비교적 우희의 전통을 잘 이어간 공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국 재담은 독립적인 공연물로써 자리를 잡았고 그 뒤로 박춘재 등 전문적인 재담 연희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공연하였다. 20세기 초 유성기 음반을 취입하면서 재담은 주로 극장 무대와 라디오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때 재담에서 새로운 공연물인 만담이 파생되었는데 만담은 재담보다 시사를 풍자하고 세태를 비판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만담은 한참 동안 인기를 끌었다가 21세기에 들어와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현재까지 한국에 전승하고 있는 재담은 가면극 같은 전통연희에만 남아 있다. 한편 한국 재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19세기 중후반에 구축된 중국 상성은 처음에는 천민의 비속한 기예로 여겨졌으나 20세기 초에 인기가 많아지면서 드디어 공연예술로써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20세기 중반 상성은 개혁을 통해서 사회를 칭송하고 교과하는 내용이 주로 다루는 신상성이 형성되었으나, 신상성에는 세태를 풍자하고 해학적인 내용이 축소되어 재미가 없어졌으므로 얼마 후 인기를 잃었다. 21세기 초 상성은 만담과 똑같이 소멸될 지경에 처했지만 전통을 부흥시키려는 젊은 상성 배우들의 노력을 통해 '전통'과 '소극장'으로 회귀하자는 또 한 번의 상성 개혁이 일어났다. 전통으로 돌아온 현재의 '전통 상성'은 다시 중국 관중들의 애호와 성원을 받고 있다. 한국 재담과 중국 상성은 역사와 연행양상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지만 현재 서로 다른 운명에 처해 있다. 두 공연물의 내용이나 형식 측면에서 공통점도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중국 상성의 경우 전통 곡예 장르 가운데 하나로 현재까지도 중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중요한 전통 공연물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독립적인 공연예술로써의 재담이 소멸되어 가고 이제는 가면극 같은 전통연희에만 재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국 재담과 중국 상성은 전승과정에서 유사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 재담이 사라진 반면 중국 상성은 잘 보존되고 전승되어 있는 이유를 본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회화에 나타난 18세기 스페인 마호(majo), 마하(maja) 서민복식의 상향전파 사례연구 (A Study on the Upward Flow of the Majo and Maja Costumes in 18th Century Spain, Observed in the Paintings of Francisco de Goya)

  • 배수정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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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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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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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This thesis investigated majo and maja costumes of depicted in Francisco de Goya's paintings from the middle of 18th to the early 19th century, and presented the costumes defined as the upward flow from the lower classes to the upper classes. The study methodology selected those describing the maja and majo among the figure paintings, portraits and genre paintings by Goya that identify unique characteristics with the qualitative analysis of the cases of the upward flow with that affect the costume of the upper classes. The influence of the majo and maja costumes were outstanding in the shape of the outfits while the French style gown of the upper class women were one-piece dresses in shape, those of the maja were two-piece dresses that consisted of the upper and gather skirts. The costume was perfected by use of the mantilla or head kerchief, instead of the headdresses prevalent at those times. The majo's costume affected the men's costume of the upper classes in the shape of the outfits. Short coat and tight breeches were preferred to the loose ones as well as instead of a long coat. Rather than the wigs or tri-corn hat, the head kerchief and sash belt applied, which could be evidence of the upward flow as well as shows proof of the influence of majo and maja costumes.

프랑스와 동아시아의학과의 만남 - 18세기, 19세기, 20세기 대표적 인물과 저서의 관점 비평 - (Meeting of the West with the Far East Asia medicine in Fance : Insufficiency of principle)

  • 갸바 마리;김남일;릴 피에르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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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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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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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What is the fundamental cause of the broader gap between East and West medicine? This is a very long story that began in the late Renaissance and still continues today. Why it took so long time from the end of the XIIth century when acupuncture was firt imported to Europe to XX century when it was finally settled in France? We present three cases which caused the delayed establishment : A "blisters" article from Diderot and D'Alembert in the eighteenth century, the practice of acupuncture by Dr. Berlioz in Paris in early 19th century, and the reception of the works of Georges Soulie de Morant in France in the 1930's. We attempt to show the misunderstanding that has always prevailed between the East and West medicines because of different viewpoint : the West has not understood the richness and subtlety of the approach of East asian thought and wanted to "align" the Asian medical modality to west medicine with inappropriate and insufficient "experiments" without enough explanation of the principles and philosophical backgrounds. It was not the matter of technology but the mutual incomprehension of history and culture.

옛 시문과 그림으로 살핀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형상화 및 정착시기 (A Study on the Formation Process and the Settling Period of the Gwandong-Palkyung by the Thematic Exploration of Joseon Landscape Poetry and Paintings)

  • 노재현;손희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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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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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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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관동팔경의 형성과정에 주목하여, 문헌 및 도상자료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관동 명승의 집경에 따른 팔경 형상화 및 정착시기를 탐색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이란 최초 용례(用例)는 이황의 "답홍응길(答洪應吉)"로 볼 때, 관동팔경은 이미 16세기 이전 당시 인들의 인식 속에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지리지 분석 결과, 관동팔경은 16세기 초 중반에 관동십경으로의 확장 또한 이루어졌다. 최초의 관동팔경에 대한 집경은 신즙의 "영관동팔경(詠關東八景)"으로 확인됨에 따라 관동팔경이라는 용어는 문학 분야에서는 최소한 16세기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며 현재의 세트화된 관동팔경으로 정착된 시기는 늦어도 17세기 초반이라 추정된다. 관동 명승의 출현빈도 분석 결과, 시문에 등장한 관동 명승은 관동팔경 경물에 대한 집중현상이 뚜렷하였다. 한편 회화 분야에서 오로지 관동팔경만을 모은 그림은 허필의 "관동팔경도병(關東八景圖屛)"에서 최초로 확인되는데 실경산수화에서 표현된 관동팔경은 시문에서의 집경 양상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지만 화제 출현률 순위로 볼 때 시각적 결속력과 응집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이는 일정한 관념체계 상 특정 의의를 지닌 회화의 도상(圖像)을 중요시하는 특성이 반영된 결과로 판단된다. 더불어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들어 제작된 다수의 민화 형식의 팔폭병풍(八幅屛風)은 관동팔경의 문화현상이 보편적 수용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증좌이다. 또한 조선후기 성행한 남승도놀이 등 명승유람놀이에 등장하는 강원도내 13개의 명승에는 관동팔경이 오롯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조선 말기 관동팔경은 놀이문화 속에서도 확고하게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결과를 종합할 때, 관동팔경의 인식은 15세기 전반 이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 보이고, 16세기 형상화 과정의 지속적 전개를 통해 17세기 정착되었으며 18세기에 들어 관습화 보편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궁극적으로 관동팔경은 고려시대부터 별개의 경물로 명성을 얻은 지역 명승이 17세기 후반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동 명승 중에 관동팔경은 오랜 기간 여러 사람의 탐승과 유람문화 향유(享有)를 통해 오직 여덟 개의 최상의 명소만을 추리기 위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배태된 국내 대표적 팔경임을 일깨워준다.

근대 연길도심지구의 형성과 발전과정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Process of Yanji Urban Area in Modern Ages(1870-1949))

  • 박세영;김태영
    • 한국농촌건축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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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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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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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This study is to find out formation and development process of urban area in modern ages(1870-1949) focused Yanji city in the east-northern area in china. After the discharge of confinement in the late 19 century, the settlements were formed around east area, that is, the present Yanji urban area. The japanese consular office had been moved in east area since the beginning of the early 20 century, and so, the existing residents moved to west area. And the military and administrative facilities were located on the urban outskirts. After the September 18th Incident on 1932, Yanji had been constructed with the strategic center area under the urban planning. The administrative facilities of those days had been altered to he functional branches and educational facilities, and become the basis of development of Yanji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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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전라도 임실현 향리층의 존재양태 - 『운수연방선생안(雲水?房先生案)』을 중심으로 - (The Existence Aspects of the Hyangri Class in Imsilhyeon, Jeolla Province in the Latter Half of Joseon - With a focus on Woonsuyeonbangseonsaengan)

  • 권기중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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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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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7-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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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운수연방선생안"을 통해 조선후기 전라도 임실현 향리층의 존재양태를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운수연방선생안"에는 경종 4년(1724)부터 작성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반까지 작성한 임실현 향리들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운수연방선생안"에는 모두 704명의 향리들이 확인된다. 김씨 119명, 엄씨 103명, 진씨 103명, 박씨 87명, 문씨 86명, 이씨 66명, 백씨 31명, 황씨 27명, 태씨 17명 등이다. 이외에도 12개의 성씨가 확인되는데, 10명 미만의 향리를 배출할 따름이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향리 성씨를 전체 점유율 순으로 추정해본다면, 김씨, 엄씨, 진씨, 박씨, 문씨, 이씨 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전씨와 양씨가 19세기에 들어와서 전혀 향리를 배출하지 못한 반면, 황씨가 19세기에 들어와 5%대의 향리를 배출하고 있으며, 진씨가 10%이상대의 점유율을 보이며 약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몇 몇 향리 성씨가 향리 사회를 주도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에는 약간의 변화들이 늘 상존했음을 보여준다. 이들 성씨들의 본관을 "노소계안"을 통해 살펴본 결과, 이들은 경주 김씨, 영월 엄씨, 남원 진씨, 함양 박씨, 남평 문씨, 경주 이씨였다. 다음으로 "운수연방선생안"에 호장 직역을 역임한 것으로 기재된 76명의 호장 성씨를 통해 상층 향리를 배출한 성관도 위의 성관과 동일한 지 살펴보았다. 향리의 최상층 직임인 호장을 다수 배출한 성관과 향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성관은 전체적으로 보면 거의 일치하나, 시기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 18세기에는 6개 성관이 비슷한 비율로 호장을 배출했다면, 19세기에 와서는 남원 진씨에서 13명, 남평 문씨 9명, 영월 엄씨 6명 등 3개 성관만이 10명 이상의 호장을 배출하고 있다. 19세기의 주목할 만한 또 다른 변화는 한 명의 호장이 두 번 이상 호장을 역임하는 빈도수가 18세기에 비해 급격히 늘어났고, 특정 성관으로 집중된다는 사실이다. 이같이 조선후기 임실현의 향리 사회는 6개 성관이 다수의 향리를 배출하며 공존하는 양상이나, 내부적으로는 시기에 따른 상층 향리 성관의 변화가 일부 확인되며, 특정 성관이 향리 사회를 주도하는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유상의 고금경험활유방 연구 - 내용상의 특징을 중심으로 - (A Study on YU Sang's [柳瑺] Book on Smallpox, the GogeumGyeongheomHwalyubang [古今經驗活幼方])

  • 김동율;조학준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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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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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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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GogeumGyeongheomHwalyubang [古今經驗活幼方] is a medical book dedicated to Smallpox, written by YU Sang [柳瑺] in the Joseon Dynasty (late 17th century to the early 18th century). As a smallpox specialist for the Joseon royal family, YU Sang was well-reputed after successfully treating smallpox of three of the 27 Joseon kings. There are four features of this book. First, the causes for smallpox are roughly recorded. Second, YU Sang emphasized the distinction between patients who could or could not be cured. Third, the herbs related to the treatment of smallpox are selected and organized separately. Fourth, YU Sang discusses the contents of diverse medical books and his own experiences. Conclusion : YU Sang's significant knowledge of smallpox treatment is well presented in his book, GogeumGyeongheomHwalyubang and this wealth of experience would have an important role in understanding the development of smallpox treatment in the late Joseon Dynasty.

고조리서에서 살펴본 조선시대($15{\sim}19C$) 국의 조리과학적 고찰 I -맑은 국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Cooking Science of Guk(Korean Soup) from Old Cookbooks from the Chosun Dynasty($15{\sim}19C$) -Focused on Malgunguk -)

  • 김귀영;이춘자
    • 동아시아식생활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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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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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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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Guk has been a very important part of the Korean table service for a long time. To study the historical transition of traditional Guk, an analysis of old cookbooks from the Chosun dynasty ($15{\sim}19C$) was conducted based on cooking science. The following is the results of 52 types of Malgunguk from representative old cookbooks such as Sangayorok (1450), Suunjabbang (early 1500s), Eumshikdimibang (1670), Jeungbosallimgyungje (1766), Gyuhabchongsu (1815), Juchan (mid 1800s), Sieuijunsu(late 1800s). The ingredients for Malgunguk contain 30, 35, and 12 types of animal foods, plant foods, and seasonings, respectively. Fish and two to three meats are combined for the main ingredients of Guk, to harmonize the taste. Notably, deer and birds such as pheasants along with parts of beef (short ribs, marrow, Holdaegi) were used. Moreover,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meat such as pork and chicken were favored to beef, which is contrary to preferences of today. There are only a few Malgunguks that have been passed down before the 16th century those after the 17th century have mostly been reported, but the ingredients have been simpl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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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체위치측정기기의 구조 혁신 - 소간의, 일성정시의, 적도경위의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TRUCTURE INNOVATION OF ASTRONOMICAL INSTRUMENTS IN JOSEON DYNASTY - FOCUSING ON THE SOGANUI, THE ILSEONGJEONGSIUI, AND THE JEOKDOGYEONGWIUI -)

  • 김상혁;민병희;이민수;이용삼
    • 천문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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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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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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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e Ganui (簡儀, simplified armillary sphere) is a representative of astronomical instruments in Joseon Dynasty of Korea, as well as Yuan Dynasty and Ming Dynasty of China. In early 15th century, Joseon's scientists and engineers uniquely developed the Soganui (小簡儀, small simplified armillary sphere) and the Ilseongjeongsiui (日星定時儀, sun-and-star time determining instrument) from the structural characteristic of Ganui. These two astronomical instruments had a new design by the miniaturization and felt convinced a similar performance of Ganui in the harmony with Korean Astronomy and Astrology Cultures. Since mid-18th century after the enforcement of shixian-li (時憲曆), the Soganui and Ilseongjeongsiui handed over the Jeokdogyeongwiui (赤道經緯儀, equatorial armilla) by a change of the observational framework such as the time and angle measures. The Jeokdogyeongwiui made by Gwansanggam (觀象監, Bureau of Astronomy in Joseon Dynasty) adopted the new observational framework. We studied the structural characteristics and scientific values of these 3 astronomical instruments with theirs observation metho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