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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조대장경 각판의 발원 장소 및 일자에 관한 연구 (A Research on the Place and Date of Praying for the Engraving of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 김성수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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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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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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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논문은 고려 초조대장경 각판(刻板: 雕造)과 관련한 발원(發願)의 장소(發願地) 및 그 일자(發願日)의 문제를 규명한 연구이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의 단서는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서 '초조대장경의 초창지단(初創之端)'의 내용에 입각하였다. 2) 거란군이 침략하고, 현종이 남순(南巡: 몽진)하다가 다시 개경(開京)으로 환궁하기까지의 기간 사이에, 군신(君臣)이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물리치기 위한 대규모 행사의 개최 또는 신명(神明)이 보답하는 제사(報祠)를 올린 기록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검색하였다. 그 결과,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2년(1011) 2월 정사일(丁巳: 13일)'條의 내용이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의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의 내용과 일맥상통함을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의 내용 또한 역사적 진실(史實)을 담고 있는 기록임을 파악하였다. 3) "고려사절요" 현종 2년(1011) 2월 13일의 기록 즉,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가도록 신명(神明)이 보답할 수 있는 제사를 올렸다'는 사항은 바로 2월 15일에 청주 행궁(行宮)에서 거행된 <연등회(燃燈會)>의 의식 및 제사를 말하는 것이며, 이 연등회의 제례(祭禮)에서 신명께 기고(祈告)한 내용은 곧 '초조대장경 각판의 발원'이었을 것임을 입증하였다. 4) 그리하여 초조대장경 각판의 발원장소는 청주행궁(淸州行宮)이며, 그 발원일자(發願日)는 1101년(현종 2) 음력 2월 15일임을 규명하였다.

용주사(龍珠寺)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의 축원문(祝願文) 해석(解釋)과 제작시기(製作時期) 추정(推定) (Interpretation of Praying Letter and Estimation of Production Period on Samsaebulhoedo at Yongjusa Temple)

  • 강관식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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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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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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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용주사 <삼세불회도>는 유교적 이념과 불교적 이념, 궁중화원 양식과 산문화승 양식, 고유한 전통화법과 외래적 서양화법 같은 다양한 이원적 요소들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이룩된 기념비적 걸작으로서 조선 후기의 회화 발달과 혁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의 하나이다. 그러나 화기(畫記)가 없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와 작가를 비정하고 양식 특징을 분석하는 문제를 놓고 연구자마다 견해 차이가 심해 지난 50여 년 간 논쟁이 끊이지 않음으로써 회화사적 의미와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모든 논의의 기본적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화기(畫記)가 없고, 작가에 대한 기록이 문헌마다 다르며, 화승들의 전통적인 불화 양식과 화원들의 혁신적인 서양화법이 혼재되어 있어 작가와 양식을 일치시켜 이해하는 문제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특히 논란이 많은 쟁점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현존 <삼세불회도>는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수미단 중앙에 왕실(王室) 존위(尊位)의 축원문(祝願文)을 써놓아 주목되며, 애초에 썼던 "주상전하(主上殿下), 왕비전하(王妃殿下), 세자전하(世子邸下)"의 삼전(三殿) 축원문을 지우고 '자궁저하(慈宮邸下)'를 '왕비전하(王妃殿下)' 앞에 추가해서 고쳐 써넣어 더욱 주목된다. 따라서 이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객관적 단서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최근에 새롭게 제시된 19세기 후반 제작설은 1790년의 용주사 창건 당시에는 순조(純祖)가 '원자(元子)' 신분이었고 1800년 1월 1일에야 '세자(世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세자(世子)'라는 존호가 쓰여있는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세자 책봉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하며, 형식과 도상이 19세기 후반기 화승들이 그린 청룡사나 봉은사의 <삼세불회도>와 유사하고 서양화법은 후대에 개채된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는 19세기 후반기의 화승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불화(佛畫) 화기(畫記)의 축원문을 광범위하게 조사해보면, 불화 제작 시점에 왕실에 실존한 인물의 신분(身分)과 생년(生年), 성씨(姓氏)까지 구체적으로 쓰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에 19세기 후반에는 용주사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처럼 수십 년 전에 승하한 사람들을 생전의 존호(尊號)로 고쳐 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1790년 전후에는 원자(元子)나 세자(世子)의 유무(有無)와 무관하게 의례적으로 "주상전하(主上殿下), 왕비전하(王妃殿下), 세자저하(世子邸下)"의 삼전(三殿) 축원문을 쓰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에 '세자저하(世子邸下)'의 존호가 쓰여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왕실 위계와 달리 '자궁저하(慈宮邸下)'가 '왕비전하(王妃殿下)'보다 앞에 쓰여있는데, 이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극으로 인한 정조와 혜경궁(자궁(慈宮)), 왕비 세 사람의 특수한 관계로 인해 정조가 혜경궁의 왕실 위상을 왕비 앞에 오도록 하여 정조대에만 사용된 특별한 왕실 전례였기 때문에 현존하는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정조대에 개서(改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애초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불화 축원문처럼 의례적인 삼전(三殿) 축원문을 썼다가 이를 지우고 다시 '자궁저하(慈宮邸下)'라는 특별한 존호를 넣어 개서(改書)하는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는 현륭원(顯隆園)의 재궁(齋宮현륭인 용주사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 부인인 혜경궁(惠慶宮)(자궁(慈宮))임에도 불구하고 축원문에 의뢰적인 삼전(三殿)만 쓰여있고 혜경궁이 빠져있는 것을 보고 정조가 지시하여 개서(改書)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개서(改書)는 정조가 현륭원과 용주사가 준공된 뒤 처음으로 현륭원에 원행(園幸)하여 원소(園所)를 두루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용주사에 들러 <삼세불회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견했던 1791년 1월 17일에 정조가 지시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이 특수한 내용과 형태로 이루어진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가 1790년의 창건 당시에 그려진 원본 진작임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객관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초조대장경 조조의 가치와 의미에 관한 연구 (A Research on the Significance of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 김성수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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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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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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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논문은 고려 초조대장경 조조의 가치와 의미를 도출하기 위하여 시도된 연구이다. 연구의 방법은 1) 초조대장경의 조조(雕造)는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즉 '진병대장경(鎭兵大藏經): 거란과의 전쟁을 진압한 대장경'이라는 측면에서의 구체적인 증거와 발원지(發源地) 및 발원일(發願日)을 규명함으로써 그 가치와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부여하고자 하였다. 2) 형태서지학적인 측면에서의 초조대장경 판본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초조대장경의 목판 판각에 있어서 중국 개보칙판대장경의 인쇄본을 단순하게 복각(復刻)한 것이 아닌, 이른바 독창적이고 탁월한 예술성(藝術性)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형태서지학적인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3) 체계서지학적인 측면에서의 초조대장경의 편성 내용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초조대장경의 편성에는 중국 역대의 모든 불전목록을 빠짐없이 편입한 것으로 보아, 문종시대 이후의 초조대장경의 편성에는 개개 불전 또한 목록학적(目錄學的)인 철저한 검증을 거쳐서 대장경에 편입시켰을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포괄성(包括性)과 누적성(累積性)을 지닌 체계서지학적인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파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