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Buddhist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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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백양사 소요대사탑의 비파괴 훼손도 진단과 입지환경 검토 (Nondestructive Deterioration Diagnosis and Environmental Investigation of the Stupa of the Buddhist Monk Soyo in Baegyangsa Temple, Jangseong)

  • 김유리;이명성;전유근;이미혜;좌용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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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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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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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장성 백양사 소요대사탑은 백양사 주지를 역임한 소요대사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범종의 세부양식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는 석종형의 승탑이다. 이 승탑은 담회색의 사암으로 구성되며, 탑신석의 전 후면에는 수직균열이 관찰되고 좌 우면에는 박리 박락으로 인해 조각의 상당부분이 유실되어 있다. 초음파측정 및 적외선 열화상 분석을 실시하여 물리적 손상도를 평가한 결과, 소요대사탑은 탑신석에 풍화양상이 집중되어 나타나며, 이미 박락이 발생한 영역의 주변으로 육안으로는 식별되지 않는 박리부가 좌면에서 6.1%, 우면에서 5.9% 확인된다. 또한 하이퍼스펙트럴 이미지 분석으로 생물학적 손상도를 평가한 결과, 승탑 좌 우면의 71.8%와 79.9%가 생물에 의해 피복되어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생물의 활력도는 우면, 후면과 지면에서 가까운 기단석에서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진단결과를 종합한 결과, 향후 지속적으로 훼손이 진행될 것으로 판단되는 박리영역과 생물에 대한 1차적인 보존처리와 함께 보존환경의 정비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의 보존 및 받침대 안정성 평가 (Conservation and Pedestal Stability Estimation of the Bukji-ri Stone Pensive Bodhisattva of Bonghwa)

  • 채우민;장민경;이용희;황현성
    • 박물관보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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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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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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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의 전시를 위해 운송과정을 거쳐 보존처리를 수행하였다. 석조반가상에는 표면에 오염물, 입상분해, 균열 등이 발생한 상태였으며 특히, 하단부가 사선으로 파손되어 단독으로 세울 수 없었으므로 전시 시 직립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받침대를 제작하였다. 또한 암석의 구성광물을 동정하고 오염물을 확인하기 위해 편광현미경 및 실체현미경 관찰, SEM-EDS분석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은 흑운모 화강암으로 구성된 것을 확인하였다. 새로 제작한 받침대에 원형의 우레탄수지로 만든 봉을 여러 군데 박아 넣었고 이에 대한 마찰력 실험으로 받침대 안정성을 평가하였다. 우레탄수지 및 에폭시수지의 마찰력 비교실험에서는 에폭시수지보다 우레탄수지가 높은 마찰계수 결과를 나타냈다. 따라서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은 우레탄봉을 사용한 받침대를 받침으로써 보다 안정적인 전시가 가능하였다.

인도 굽타시대 사르나트 불전도에 대한 일고찰 (A Study on the Buddha's Life Relief in the Gupta Period at Sarnath, India)

  • 고정은
    • 수완나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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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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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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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The Art of the Buddha's Life which depicts the life and before-life of Buddha flourished in Sanci and Bharhut in the ancient India and in Gandhara during the Kushan period. More than one hundred scenes from Buddha's life were represented in the form of relief sculpture or wall painting. They are found in Gandhara and Mathura during the Kushan period, Amaravati and Nagarjunakonda during the Satavahana period, in Mathura and Sarnath during the Gupta period, and during the Pala Period. They unfolded in various forms and styles according to the text(Buddhist scripture), layout, and expressive technique. In Mathura, where the Evolution of the Buddha image was made about the same time as in Gandhara during the Kushan period, the Buddha's life was presented in a number of scenes related to the sacred sites; in four or eight scenes. In the case of the Eight Great Events of the Buddha's Life, the four scenes out of eight were different from those that were represented in Sarnath during the Gupta period, manifesting a transitional period. The Gupta period is widely known as the time when the classic artistic style was established. The art of Buddha's Life was produced only in Sarnath during this period, and it was the time when the Eight Great Events of the Buddha's Life was established as iconography, providing a model for those of the Pala period. Also, it was the time when the single image of Buddha was produced such as the 'Buddha delivering his first sermon,' 'Buddha's Enlightenment,' and 'Buddha's Death,' thus showing the emergence of the single Buddha image from the narrative Buddha's life image. In this paper, a general introduction of the relief sculpture of the Buddha's life from Sarnath during the Gupta period was given. The art of Buddha's life gave great influences on that of China, Korea, Japan and Southeast Asia, and can be emphasized as an important subject in understanding the development of the Buddhist art in East Asia. A further study will be made on the art of Buddha's Life of Southeast Asia in the future, which will enhance the understanding of the art of Buddha's Life in East Asia as a w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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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瑞山) 보원사(普願寺)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고찰(考察) (A Study on the Iron Seated Buddha at Bowonsa Temple in Seosan)

  • 강건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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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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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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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보원사(普願寺)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북쪽에 위치한 사찰로, 경내에는 나말여초에 조성된 문화재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충청남도의 고적 조사를 계획했고, 1916년(대정 5) 보원사지에 가서 현지 조사를 진행했다. 현지 조사 과정에서 소옥(小屋)에 안치된 철조여래좌상(무릎너비 7척, 두께 5척 5촌)을 확인했고, 이듬해에 경복궁으로 해당 철조여래좌상을 이운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보원사지에 2m가 넘는 대형 철조여래좌상 1구만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철조여래좌상은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900~975)이 955년에 조성하였을 것이다. 탄문은 광주 고봉의 유력가문 출신으로 태조의 보살핌 속에 화엄종의 중심인물로 성장했고, 연이어 혜종(惠宗)(재위기간 943~945)과 정종(定宗)(재위 945~949)대에도 왕실의 불교행사를 주관했다. 이후 탄문은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의 후원을 받은 균여(均如)(923~973)의 등장으로 개경에서 떨어진 보원사로 이주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충주 유씨의 후원을 받아 지지 세력의 결속을 다지고 한편으로는 광종(光宗)(재위 949~975)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대형의 철조여래좌상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탄문의 비문에 나오는 '주금상지삼존(鑄金像之三尊)'도 보원사에서 철조여래좌상이 주조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철조여래좌상의 원(原) 봉안처는 보원사지 내 '건물지3'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현재의 금당지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건물지로 드러났기 때문에, 철조여래좌상은 조성 당시 다른 장소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건물지3은 다른 건물지에 비해 고려시대 기와와 자기의 출토 빈도가 높고, 무엇보다도 정방형에 가까운 불단 유구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철조여래좌상은 조성 당시 고려시대 전각인 건물지3에 봉안되었다가 조선시대 중창불사를 통해 지금의 금당지로 이운되었을 것이다.

감산사(甘山寺) 아미타불상(阿彌陁佛像)과 미륵보살상(彌勒菩薩像) 조상기(造像記)의 연구 (Dedicatory Inscriptions on the Amitabha Buddha and Maitreya Bodhisattva Sculptures of Gamsansa Temple)

  • 남동신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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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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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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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논문에서는 감산사(甘山寺)의 아미타불상(阿彌陁佛像)과 미륵보살상(彌勒菩薩像)의 광배(光背)에 각각 새겨진 조상기(造像記)를 재검토함으로써, 통일신라기 불상을 대표하는 걸작이자 기준작인 두 상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I장에서는 '근대적 발견' 이래 지난 100년간의 연구 성과를 네 시기로 나누어 검토한 다음, 필자의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II장에서는 기왕의 미륵보살상>아미타불상의 위차(位次)를 비판하고 조상기를 재검토한 후 두 상의 배치와 외관에 근거하여 아미타불상>미륵보살상의 위차가 옳음을 논증하였다. III장에서는 마지막까지 판독 불능으로 남았던 두 글자를 처음으로 판독하고, 이를 포함하여 기존에 의미가 불분명하였던 몇몇 구절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아울러 아미타불상조상기와 미륵보살상조상기의 문장 구조를 비교하고 조상기의 찬자와 서자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으며, 서체(書體)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두었다. 끝으로 IV장에서는 조상기의 내용을 조상주(造像主)와 조상(造像) 및 발원(發願)으로 나누어 재검토하였다. 특히 필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라는 조상기의 구절이 상투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의미가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부모를 모두 화장해서 동해 바닷가에 산골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부모를 추모하려 해도 그 마음을 의지할 물질적 표지(標識)가 없었다. 그래서 만년의 김지성은 감산전장(甘山田莊)을 희사하여 절로 삼고, 여기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돌로 각각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을 조성하되, 부모님의 실제 모습을 투영하여 상(像)의 존용(尊容)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고 그 정혈(頂穴)에 부모의 상징물을 안치하였다고 해석하였다. 두 상 가운데 특히 미륵보살상은 관(冠)에 화불(化佛)이 있는 입상(立像)인데, 미술사학자들이 지적하였듯이, 이러한 도상(圖像)의 미륵보살상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워서, 도상적 특징만 본다면 십중팔구 관음보살상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반대로 조상기만 읽는 사람들에게는 의심할 여지없이 미륵보살상이다. 김지성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내세(來世)에는 도솔천에 상생(上生)하기를 기원하였기에 도솔천을 주재하는 미륵보살상을 만들기로 하되, 그 상에 자모(慈母)의 이미지를 투영하기 위하여 자비(慈悲)의 화신인 관음보살상의 도상을 취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미타불상도 마찬가지여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희구하여 아미타불상을 조성하되 모든 불교도의 자부(慈父)인 석가여래상의 도상을 차용하였다고 유추된다. 후대의 추모자들이 정면에서 상[Image]을 친견하고 뒤로 돌아가서 조상기[Text]를 읽었다면, 그들은 김지성의 부모님을 향한 추모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였을 것이다.

전라도지역 조선후기 목조불상의 수종 (Species of Wooden Buddhist Statues of the Late Joseon Dynasty in Jeollado, South Korea)

  • 박원규;오정애;김요정;김상규;박서영;손병화;최선일
    • 한국가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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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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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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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e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species of 17 wooden Buddhist statues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e 17th and 18th century) in Jeollado, southwestern region of Korea. The bodies of statues were made of Ginkgo (Gingko biloba L.: 88%) and alder (Alnus spp.: 12%). The hands of statues were alder(64%), willow (Salix spp.: 27%) and Ginkgo(9%). The bottoms of hollow bodies were covered all with Japanese red-pine (Pinus densiflora S. et Z., 'sonamu') panels. The main species of statue body, Ginkgo tree was known to be introduced to Korea from China with Buddhism. The results indicated that Ginkgo trees of Korea in the 17th century had already become large and rich enough to be used for most of statues. Ginkgo wood has low shrinkage and even texture, which are crucial for carving sculptures. Alder and willow woods used for statue hands have fine and firm textures. The pedestals for these statues were also made of red pine wood. Red pine woods have rather high shrinkage and low hardness, but it is versatile woods strong enough to support heavy stat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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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지역 나말여초 불교조각과 굴산선문 (Buddhist Sculpture of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 at Myeongju and the Gulsan School of Seon Buddhism)

  • 최성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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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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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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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굴산사(?山寺)는 신라하대에 통효대사 범일(梵日, 810~889)에 의해 개창된 이래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파(??山派)의 본산으로서 크게 융성하였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위치한 굴산사지에는 거대한 당간지주를 비롯해서 고려시대 석조부도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2구 전해오고 있으나, 범일과 그의 제자인 개청(開淸, 854~930), 행적(行寂, 832~916)이 활동했던 나말여초기 굴산사를 알려주는 불교조각은 전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나말여초기 굴산선문의 불교미술을 살펴보기 위한 시도로서 굴산선문의 영역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강릉, 오대산, 동해시 등지로 범위를 넓혀 나말여초기 명주지역 불교미술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범일과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 굴산선문의 불교미술을 유추해 보았다. 강릉지역의 석조물 가운데 강릉시 오죽헌박물관에 옮겨진 무진사지(無盡寺址) 석탑의 부조 사방불상과 사천왕상은 신라 중앙이나 양양 진전사지, 선림원지 석조미술과 양식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말여초기 명주지역 불교미술이 당시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범일의 제자인 개청이 주석했던 보현산 지장선원[普賢寺]에 전해오는 석조대좌의 부재(部材)는 팔각연화대좌의 하대 복련좌(覆蓮座)를 받치고 있던 팔각의 받침석으로 안상(眼象)에 사자(獅子)가 새겨져 있어 나말여초기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지권인 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국립춘천박물관과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 한송사지(寒松寺址) 석조보살좌상 2구는 대리석이라는 재료를 비롯해서 머리 위에 쓴 원통형의 고관(高冠), 양손의 검지를 곧게 뻗은 수인(手印), 다리를 편히 놓은 서상(舒相)의 좌세 등, 독특한 밀교계 요소를 보여준다. 이러한 밀교계(密敎系) 도상(圖像)은 굴산선문 승려들의 당 유학(遊學)을 통해 명주지역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활발했던 굴산선문 승려들의 국제적 활동은 지역 미술에 큰 영향을 주면서, 선진성을 고양하였을 것이다. 동해시 삼화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시무외 여원인의 수인을 결(結)한 화엄계 노사나불상 표현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인 도상으로서 명주지역 미술이 전통성을 고수했던 면도 있었음에 주목하게 한다. 굴산선문 불교미술은 중앙지역과 같이 하는 양식 수준, 활발한 대당(對唐) 교류의 결과로 나타나는 선진문화의 수용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선진성과 국제성은 나말여초기 굴산선문 불교미술의 기본 성격으로 생각된다.

석조문화재의 암석에 관한 지질학적 조사 연구 (I)-원주시, 원주군, 횡성군 및 홍천군 지역을 중심으로 (Geological Study on the Rocks of the Stone-Monuments-at the around the weonju City, Weonju-gun, Hwoengseong-gun and Hongcheon-gun)

  • 이상헌
    • 보존과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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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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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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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 The investigation has been made on the rocks consisting the pagoda(12), Buddhist Statues(9) Buldaejwa and cakra(2, rewpectively), stele(5), and Flagpole wupport and stupa(6) which are stood in Weonju city, Weonju-gun, Hwoengseong-gun and Hongcheon-gun, Kangweondo. These rock-monuments range mostly in age from late Shilla Kingdom to middle Korye Kingdom. The geology around this region is mainly composed of Precambrian metamorphic rocks and mesozoic granitic rocks. The granitic rocks are largely divided into Jurassic and cretaceous ones which are slightly different in rock phase. The main rock phase consisting the monumentsare are coarse biotite granite with minor amount of hornblende in Jurassic age. Variation in rock phase is abserved even in part of the stone used in the monuments. Inclusions composed of biotite and hornblende, porphyritic texture with microcline phenocryst, igneous lineation and exfoliation according to weathering are observable in all rocks in these monuments. In the case of stele whose a body and a capstone is remained, one is composed of black slate and the other white limestone. But the turtle shaped pedestal is constituted of coarse biotite granite. These stone-monuments are strongly weathered and exfoliated out about 1∼2mm.In case of exfoliated weathering along igneous lineation, some are taken off about 3∼5mm thick. In some monuments, the degree of weathering is somewhat different according to position, grade of sculpture, and biological ac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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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의 조성 배경 (A Study on the Background of the Rock-cut Sculpture of Two Buddhas Seated Side-by-Side in Wonpung-ri, Goesan)

  • 정성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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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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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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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괴산 원풍리 마애불병좌상은 보물 제97호로 지정되어 있는 초대형 마애불이다. 이불병좌상은 발해에서 동경용원부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불상이나 신라나 고려에서는 조성 사례가 매우 희박하다. 본문에서는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의 조성 시기를 10세기 후반기인 광종 집권기로 파악할 수 있었다.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이 소백산맥을 넘는 주요 교통로 입구에 조성된 이유는 진천과 청주 세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진천과 청주는 광종에 앞서 재위하였던 고려 2대, 3대 왕인 혜종과 정종의 처가 세력들의 세거지였다. 이들은 광종이 가장 경계했던 호족들이었다. 마애이불병 좌상의 제작에는 중앙 정부의 후원 하에 충주와 문경 지역 장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문경 지역 장인들의 경우 발해 유민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의 제작에 발해 유민들이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마애불이 발해에서 유행하였던 이불병좌상인 점, 협시보살 보관의 특징이 발해적 요소가 확인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각연사 비로자나불좌상 광배 후면의 불패형 불탑이 발해적 요소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고려시대 발해 왕실 후예로 추정되는 대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개 태씨로 기록되어 있으며 태씨들의 집단 거주지가 문경이라는 점을 통해 발해 유민들이 고려초 문경에 정착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은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북부와 충청도 중부 지역을 왕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려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그 권위는 한 때 광종에 대항하여 권력 투쟁을 벌였던 진천과 청주의 호족 세력들을 직접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거대한 이불병좌상을 주요 교통로에 조성한 이유는 후삼국 시기 이후 고려에 내투한 수만의 발해 사람들이 광종을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 또한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은 10세기 후반 경 광종대의 시대적 상황과 조각사의 흐름이 잘 반영되어 있는 의미 있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정릉(貞陵) 사각 장명등(四角長明燈) 양식의 원류와 전개 -사찰 석등과의 비교를 통해 - (The Origin of the Square-Shaped Jangmyeongdeung of Jeongneung Royal Tomb and Its Stylistic Development -In Comparison with the Buddhist Temple Stone Lanterns-)

  • 김지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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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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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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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장명등은 능묘의 능침 앞 중앙에 놓여 사자(死者)를 지키고 밝혀주는 상징적인 기능과 함께 뛰어난 조형성으로 능역을 장식하는 역할도 담당했던 중요한 석물로서, 석등의 한 범주에 속한다. 정릉 장명등은 조선왕릉 장명등 중 최초로 조성된 장명등이며, 조선 전 중기 왕릉 장명등 가운데 유일한 사각 장명등(四角長明燈)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석, 화사석, 옥개석 형식이 기본적으로 사각을 이루고 있어 팔각 장명등(八角長明燈)형식과는 완연하게 구분된다.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을 1매의 통석으로 마련하고, 화사석은 1매의 통석으로 전후로 화창을 표현하였다. 정릉 장명등은 고려 현 정릉 장명등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으나, 이보다 뛰어난 조형성을 보이고 있어 조선 개국 이후 최초로 조성되었던 왕릉 장명등으로서의 격조를 무리없이 보여준다. 본고에서는 정릉 사각 장명등 양식의 원류를 파악하는 데 연구 목적을 두고 고려 왕릉 장명등과 더불어 사각 장명등의 연원이 되는 사찰 사각 석등과의 비교 고찰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고려 말 회암사지 지공선사 석등 및 나옹화상 석등, 조선 초 회암사지 무학선사 석등 및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석등과 다음의 공통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대석, 화사석, 옥개석 등이 기본적으로 사각을 이루고 있는 점, 둘째, 간주석이 낮아지면서 대석부분이 안정적인 형태를 이루는 점, 셋째, 화사석의 경우 대석 위에 양측으로 석재를 세워 자연스럽게 전후로 화창을 구성하는 방법, 넷째, 옥개석이 사모지붕 형태를 하고 있는 점 등이다. 한편 정릉 장명등에는 불교적 요소가 다분히 내제되어 있는데, 간주석의 삼주문(三珠文)표현이 그것이다. 삼주문은 밀교와 관련된 상징물의 하나로서,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불화 및 조선 초기 보살상의 보관에 표현된 예가 확인된다. 정릉 장명등은 이후 묘 사각 장명등 조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15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점차로 정릉 장명등의 영향에서 벗어나 팔각 장명등 형식이 보다 많이 가미된 경향으로 변모해 나간다. 정릉 사각 장명등은 고려왕릉에서 조선왕릉으로의 능제 계승, 사찰 사각 석등 양식의 수용, 그 시대 불교사상의 반영 등 당대의 시대상과 문화의 흐름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담겨진 산 증거물로서 의의가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