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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란봉>(1958)과 음반 (1960) 수록 <춘향전>을 통해 본 1950년대 북한 창극의 실제적 양상 (The actual aspects of North Korea's 1950s Changgeuk through the Chunhyangjeon in the film Moranbong(1958) and the album Corée Moranbong(1960))

  • 송미경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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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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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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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영화 <모란봉>은 1958년, 아르망 가티, 크리스 마커, 클로드 란츠만, 프랑시스 르마르크, 장 클로드 보나르도가 조선필름의 초청으로 떠났던 북한 여행의 산물이다. 그러나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영화는 바로 개봉되지 못했고, 2010년에야 다시 발굴되어 주목을 받았다. 영화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란과 동일의 서사가 저 멀리 조선의 고전 춘향전 속 춘향과 몽룡의 서사와 포개어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때 조선의 고전은 두 주인공의 서사와 시간대를 공유하는 극중극 <춘향전>의 형태로 재현되며, 두 서사는 총 6개 장면에서 포개어진다. 영화에는 두 겹의 중층적인 액자가 존재하는데, 1950년대의 북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란과 동일의 서사가 가장 바깥에 있다면, 그 안에 창극 <춘향전>의 제작진과 배우들이 만들어 가는 서사가 있고, 가장 안쪽에 온전한 작품으로서의 창극 <춘향전>이 배치된다. 영화 가장 바깥의 액자에서는 동일이 주인공이지만, 안쪽 두 겹의 액자에서는 창극 <춘향전>과 함께 성장하는 배우이자 창극 <춘향전>의 등장인물인 영란이 중심이다. 다음 이 영화의 OST 음반으로는 프랑스에서 1960년 발매된 , 1970년 발매된 , 그리고 일본에서 1968년 발매된 <朝鮮の伝統音樂-唱劇 「春香伝」と伝統樂器-> 3종이 있다. 은 영화 <모란봉>의 음악으로만 구성된 반면, 이후 나온 두 음반은 평양국립방송을 통해 수집 및 녹음한 곡을 추가로 포함하였다. 다만 일본에서 발매된 음반에는 영화 <모란봉>에 관한 정보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정황상 음반사나 음반 해설지의 필자도 영화 <모란봉>의 존재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며, 영화의 개봉 자체가 금지되었던 배경 때문에 의도적으로 관련 내용을 배제한 것일 수도 있다. 본고에서 영화 <모란봉> 또는 OST 음반에 수록된 창극 <춘향전>의 세부 장면 <이별가>, <십장가>, <춘당시과>, <박석티>, <옥중가>를 분석한 결과를 1950년대 북한 창극계의 변화와 관련해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50년대 북한 창극 <춘향전>의 정립 과정을 확인하였다. 1955년에 『조선창극집』을 통해 정리된 희곡이 1956년~1958년 사이 『조선민족음악전집(창극 및 민족가극편)1: 창극 <춘향전>(초고)』에 이르러 실연 가능한 창극 형태로 정착하였고, 영화와 음반에 수록된 부분은 1950년대 말 그 완성판의 한 예시에 해당한다. 1960년대 이후 <춘향전>은 더 이상 기존의 판소리식 창극으로 공연되지 않았기에, 영화 <모란봉>과 음반 은 창극 <춘향전>과 그 음악을 오롯이 담아낸 거의 마지막 기록물이 된다. 둘째, 1950년대 북한 창극계의 탁성 논쟁과 관련한 창극 배우들의 대응 양상을 확인하였다. 1959년까지도 북한에서는 탁성을 둘러싼 비판의 목소리와 이것도 민족적 특징이라는 옹호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공존했다. 맑고 높은 성음의 구사로 탁성 제거에 일정한 성과를 보인 신우선, 분명한 변화를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발성을 달리한 공기남, 탁성을 적극적으로 제거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배역을 선택한 조상선, 당이 요구하는 발성법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자기 원 음색을 유지하고자 하였던 임소향, 이들의 판단과 대처는 영화 <모란봉>과 음반 속 소리에도 오롯이 반영되어 있었다. 한편 조상선과 임소향은 그들의 소리를 계속 해 나갈 수 있는 배역을 보장받았지만, 영화 <모란봉>에 나타난 선택/배제의 양상은 이와 별개로 1950년대 월북국악인들에게 요구되었던 탁성 제거 지침과 그대로 연결된다.

웹검색 트래픽 정보를 활용한 지능형 브랜드 포지셔닝 시스템 : 태블릿 PC 사례를 중심으로 (Intelligent Brand Positioning Visualization System Based on Web Search Traffic Information : Focusing on Tablet PC)

  • 전승표;박도형
    • 지능정보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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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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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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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최근 독감 예측이나 부동산가격 예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웹검색 트래픽이나 소셜 네트워크 등의 방대한 고객 데이터를 통해 사회 현상, 소비 트렌드 등을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증가하고 있다. 최근 구글이나 네이버 등의 인터넷 포털서비스 업체들은 온라인 사용자들의 웹검색 트래픽 정보를 구글 트렌드, 네이버 트렌드 등의 서비스로 공개하고 있는데, 이들이 제공하는 웹검색 트래픽 정보를 기반으로 온라인 사용자들의 정보 검색 행태에 대한 연구들이 학계 업계 등에서 주목받고 있다. 웹검색 정보를 기반으로 사회 현상이나, 소비 동향, 정치 투표 결과 등을 예측해 볼 수 있음을 실증하고 있는 분야는 많은 연구가 수행되고 있지만, 웹검색 트래픽 정보를 이용하여, 소비자의 제품에 대한 중요한 속성 도출 및 소비자의 기대 변화 관측 등의 온라인 사용자 행태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되고 있는 분야는 상대적으로 많은 연구가 수행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구글이나 네이버가 제공하는 소비자의 웹검색 트래픽을 활용해서 소비자가 생각하는 제품 포지션을 가시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브랜드 간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동시 검색 트래픽 정보를 활용하여 네트워크 모델링의 방법을 사용한 시스템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소비자들이 제품 간의 유사성을 어떻게 인지하고 형성하며, 새로운 혁신 제품 카테고리 내에서 제품 브랜드들이 소비자의 마음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의 브랜드 포지셔닝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안하였다. 또한 이를 태블릿 PC의 사례를 통해서, 미시적인 관점에서 소비자의 마음속에 위치한 태블릿 PC 개별 브랜드들의 위치 및 관계를 보여주었다. 기업은 소비자의 제품에 대한 인식 및 중요 속성 도출을 위해 많은 비용과 시간을 소요하여 소비자 조사를 행하게 되는데, 본 연구의 방법론을 활용하여 소비자의 제품에 대한 인식, 제품간 유사도, 제품에 대한 중요 속성의 변화 등을 일반에게 공개된 검색 트래픽 정보를 활용하여 비교적 쉽고 추가적인 비용 없이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 쌍룡문경(雙龍紋鏡) 유입(流入)과 독자성(獨自性) (Inflow at Ssangyongmun Gate During the Goryeo Dynasty and Its Identity)

  • 최주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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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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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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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용(龍)은 동서양 전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 속 동물이다. 서양의 용은 대부분 공격적이고 부정적 의미로 표현되지만, 동양에서는 황제를 상징하거나 상서로운 의미를 갖고 있어 긍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또한 용은 물을 다스리는 신물(神物)로 여겨져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이를 형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고려시대 용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사"에서 다양한 주제로 등장하며, 크게 건국설화 기우제 신이(神異) 등과 관련되어 있다. 건국설화는 용을 통해 고려 왕권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왕(王)=용손(龍孫)'이라는 '용손의식(龍孫意識)'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용의 특징인 물을 다스리는 능력은 가뭄에 비를 바라는 기우제와 관련한 토용(土龍)으로 상징화된다. 이와 같은 용의 다양한 성격 중 용이 왕실의 상징이기에 용문(龍紋)의 사용은 민간에서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용을 소재로 한 용문경(龍紋鏡) 역시 그 제작 사용에 있어 왕실과의 연관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고려시대 쌍룡문경(雙龍紋鏡)은 종류 수량이 많은 편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동경(銅鏡)과 함께 국내에서 제작한 쌍룡문경이 혼재하면서 고려시대 쌍룡문경의 제작과 유통은 다른 동경에 비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본고에서는 10~14세기 중국에 존재한 다양한 쌍룡문경의 특징을 정리했다. 고려의 장인들은 쌍룡문경을 제작할 때 중국 쌍룡문경의 문양 구성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 쌍룡문경과 국적을 판별하기 어려운 예가 많으며, 그 차이 또한 면밀한 분석을 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는 유입된 쌍룡문경을 그대로 답습했던 것은 아니며, 자체적으로 제작하고자 했음을 국내 현존하는 쌍룡문경의 유형 분류를 통해 살펴보았다.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 쌍룡문경은 요대(遼代) 동경 계열인 I 유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외 II III 유형에서는 수량은 적으나 문양 구성이 독특한 쌍룡문경이 있어 고려에서 제작한 쌍룡문경으로 분석했다. 고려시대 쌍룡문경은 중국의 영향 하에서 제작된 만큼 고려에서 제작한 동경과의 구분이 어렵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다. 이중 평창 월정사 구층석탑에서 발견된 쌍룡문경은 그 제작지에 대한 의문점이 있으며, 동경의 문양 구성도 중국 쌍룡문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예이기에 이 동경에 대한 제작지를 검토했다. 이 쌍룡문경은 I 유형에 속하는 동경의 문양 구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세부 문양의 조합이 중국에서 찾기 힘든 예라는 점에서 요대 동경의 문양 구성을 차용하여 고려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과시된 효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연구 (Showing Filial Piety: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재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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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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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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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덕수5520)는 그림과 발문(跋文) 열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으로, 작가는 조중묵(趙重黙)(1820~1894 이후), 주문자는 박경빈(朴景彬)(생몰년 미상), 발문을 쓴 사람은 홍선주(洪善疇)(생몰년 미상), 제작연대는 1868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낱장으로 보관되어 온 <인왕선영도>를 병풍으로 복원하고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최초로 공개하였다. <인왕선영도>에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홍은동을 아우르는 인왕산 서쪽 실경이 묘사되어있고 원경에는 북한산 연봉이 그려져 있다. 화면 속에는 인왕산(仁旺山), 추모현(追慕峴), 홍재원(弘濟院), 삼각산(三角山), 대남문(大南門), 미륵당(彌勒堂)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있다. 이 지역을 나타낸 조선후기 지도와 비교해보면 지형 표현과 지명 표기에 유사성이 있다. 조중묵은 넓은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지도의 지리정보를 숙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경의 현장을 답사한 결과, 조중묵은 각각의 경물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였고 수평의 화면에 나열식으로 조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조중묵은 남종화풍 정형산수에 뛰어났던 화가로, <인왕선영도>의 세부 표현에서 사왕파(四王派) 화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도화서 화원들이 화보를 활용하여 가옥을 그리거나 토파에 호초점을 찍고 당분법(撞粉法)으로 꽃을 나타내는 등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한 경향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인왕선영도>에는 바위를 짙은 먹으로 쓸어내리듯 붓질한 기법, 산세의 괴량감, 가로로 붓을 대어 단순하게 그린 소나무 등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의 개성적 양식도 가미되어있다. 조중묵은 인왕산 실경산수로 유명한 정선의 양식과 권위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유기적 공간감과 현장의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연폭 화면이라는 매체도 조중묵의 개인 양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인왕선영도>는 발문의 텍스트와 화면의 이미지가 잘 조응하는 작품이다. 발문의 내용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①무덤의 주인공과 이장 경위, ②무덤의 입지와 풍수, ③묘제(墓祭)와 신이(神異)한 응답, ④무덤 관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 ⑤병풍 제작의 동기인 박경빈의 효성과 수묘(守墓), ⑥발문을 쓴 의의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용이한 ②의 내용은 화면에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인왕선영도> 제작의 직접적 동기인 ⑤를 보면 주문자 박경빈이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다."라 하여 <인왕선영도>에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경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듯 나열한 구도는 회화미는 떨어지더라도 무덤의 풍수지리를 전달하는 데는 더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산도(山圖)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목판본 선영도로서, 족보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기록에서는 족자 선영도를 첨배(瞻拜)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선영도 첨배는 현실적으로 수묘(守墓)가 곤란할 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의례로 인정되었다. 한효원(韓效元)(1468~1534), 조실구(曺實久)(1591~1658) 등이 선영도를 제작한 후 당대의 명사에게 서문을 요청하고 효심을 과시한 사례는 <인왕선영도>의 선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개인 소장),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선영도는 아니지만 계회도 형식의 족자이고 풍수를 도해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선영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인왕선영도>는 첨배라는 측면에서 초상화와도 의미가 비슷했다. 발문의 "부친의 기침소리를 직접 접하는 듯하고, 그 태도와 몸가짐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는 표현과 부친의 초상에 조석 문안을 올린 서효숙 고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경빈이 일반적인 선영도 형식이었던 족자나 목판화 대신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를 주문한 의도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사례(四禮) 의식에 다수의 병풍을 배설(排設)하였는데, 의례의 성격에 따라 그림의 주제를 반드시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인왕선영도> 또한 여러 의례에 두루 배설하거나 장식 병풍으로도 사용하기 위해서 선영 그림이라는 주제를 실경산수화 이미지 아래에 가렸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왕선영도>의 핵심 소재인 무덤 봉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것은 사산금표(四山禁標)의 금제 위반을 숨기기 위함일 가능성이 있다. <인왕선영도>에 묘사된 인왕산 서쪽 산기슭은 분묘 조성 금지구역이었다. 1832년에 금표 내에 몰래 쓴 묘를 적발하여 즉시 파내고 관련자를 엄히 처벌한 사례로 볼 때, 19세기 중엽까지도 사산금표 내의 분묘 금제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장지를 얻기 위해 쏟은 정성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장지조성에 마을사람들의 협조와 묵인이 필요했던 것은 금표 구역 내에 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인왕선영도>와 비교 가능한 동시대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로 이한철(李漢喆)(1808~1880)이 그린 <석파정도(石坡亭圖)>(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를 들 수 있다. <석파정도> 제작시기를 전후한 1861년에 이한철과 조중묵은 철종어진도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조중묵이 이한철의 <석파정도> 제작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조중묵이 몇 년 후 <인왕선영도>를 주문받았을 때 <석파정도>의 인상적인 연폭 실경산수를 본 경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작품의 화풍 차이는 주문자의 취향과 제작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는 실경산수화와 선영도의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지식수준과 주문자와의 친분, 관람에 들이는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과 자호, 본관이 일체 작성되지 않은 채 '박공(朴公)'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주문자인 박경빈의 인적 사항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다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가계를 미루어 볼 때 재력이 있음에도 지배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발문을 쓴 홍선주 또한 사대부로 보기 어려우며, 『승정원일기』 기록에 나타나는 경아전 서리일 가능성이 있다. 박경빈은 상류 계층에 진입하고 싶은 욕망으로 보수적인 가치인 효(孝)를 강조하여 부친의 무덤을 명당으로 이전하고 <인왕선영도>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금제위반 적발에 대한 우려, 병풍의 다목적성 등의 이유로 본래의 제작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모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병풍이 제작된 지 47년 만에 각 폭이 분리된 채 미술상을 통해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이 된 상황을 보더라도, 박경빈이 <인왕선영도>에서 꿈꾸었던 명당 발복과 가문의 신분상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경복궁 건물 유형에 따른 적심 연구 (The Study on Foundation Remains(Jeoksim) According to Types of Buildings of Gyeongbok Palace)

  • 최인화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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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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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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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현재 경복궁에 대한 연구는 건축사 문헌사 미술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연구는 현전(現傳)하는 건물과 기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음으로 궁궐 전체를 연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양호한 상태로 잔존해 있는 경복궁 건물지 유구, 특히'적심(積心)'은 이러한 연구의 공백을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고고(考古)학 자료라 할 수 있겠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경복궁의 '적심'에 대하여 분석하여, 형태 규모 재료 축조방식에 따라 그 형식을 분류하고, 이것이 건물 기초로써 상부 건물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궁궐 건물 유형별 사용된 적심을 검토하고, 시기별 변천양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경복궁 건물지 적심은 총 21가지 형식으로 구분되는데, 각 건물 유형에 따라 건물의 기초 즉 적심도 달리 축조되며, 시기별로도 적심의 축조방식 및 재료 등이 변화하여, 특정 시기에 유행하는 적심의 형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복궁 적심은 평면 형태에 따라 원형(I), 말각방형(II), 세장방형(III), 방형(IV), 통적심(V)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다시 축조방식과 사용된 재료에 따라 21가지 형식으로 세분된다. 특히 조선전기 14~16세기에는 원형 잡석 적심(I-1), 말각방형 장대석(II-1), 말각방형 잡석+와전(II-2a) 세 가지 형식의 적심만 축조되다가, 조선후기 19세기에 들어 21가지 분류한 모든 적심이 다양하게 축조된다. 19세기 고종연간 내에서도 연대별로 각기 다른 형식의 적심을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재료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이 확인된다. 경복궁을 재건한 고종 2년(1865)~고종 5년(1868)에 축조된 적심 10가지 형식 중 무려 7가지가 와전편을 섞어 넣은 형식인 반면, 고종 10년(1873)과 고종 13년(1876) 혹은 고종 25년(1888)에는 축조된 5가지 형식 중 3가지가 강회를 섞어 넣은 사질토를 사용한 형식으로 대조를 이룬다. 궁궐 건물은 '주인의 신분과 용도'에 따라 건물의 서열이 정해지고, 건물의 이름 뒤에 가장 중요하고 격이 높은 순서대로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 등의 명칭이 붙어 그 유형이 구분되며, 그 격에 맞추어 건축물이 축조된다. 이 건물 유형별 사용된 적심을 검토한 결과, 건물의 유형(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에 따라 그 기초, 즉 적심도 달리 축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 자료의 한계 상'전', '당', '각', '방'등 일부 건물 유형만 확인되었는데, '전'과 '각'의 경우 장대석으로 축조한 방형 적심(IV)이, '당'과 '방'의 경우 기와와 잡석을 사용하여 축조한 말각방형 적심(II)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기타 건물명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대부분 조선전기 선대(先代) 건물지의 적심임으로, 조선전기에 원형 잡석 적심(I-1)이 많이 축조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주인의 신분이 높고 격이 높은 건물일수록 건축물도 격이 높듯이, 그 기초부, 즉 적심 또한 가장 견고하고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당'과 '방'은 같은 말각방형 적심이 사용되었지만, '당'은 잡석과 와전편을 주재료로 사용한 II-2a(잡석+와전편 말각방형 적심)형식이, '방'은 II-2a형식의 상면에 15~20cm 가량 와전편을 깐 II-2b(와전편+(잡석+와전편 말각방형적심)) 형식이 많아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건물 유형별 적심은 시기별로 축조되는 형식에 변화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과 '각'의 경우 모두 14~15세기 조선전기에는 I-1형식(원형 잡석)의 적심을 축조하다가, 19세기 조선후기에는 다양한 형식의 적심이 축조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방형 적심(IV)이 많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의 경우 조선후기의 변천양상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고종 4년(1867) 축조된 적심은 잡석과 와전편을 섞어 넣은 형식의 적심이 많이 축조되고, 이후 고종 13년(1876) 혹은 고종 25년(1888)에는 다른 건물 유형에서 확인되지 않는 강회사질토 및 탄축 적심이라는 독자적인 형식이 사용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 조선전기에 비해 후기에 적심의 다양한 축조방식과 재료가 개발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이는 당시 궁궐건물 기초 축조 기술 수준의 변화가 있었음을 대변해 준다. 또한 건물 유형별로 사용되는 적심의 형식이 다른 것이 확인되어, 건물의 기초를 축조할 때 미리 계산된 건축 공법을 적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선유(船遊)와 유산(遊山)으로 본 정수영(鄭遂榮)의 《한임강유람도권》 고찰 (A Study on Jeong Su-yeong's Handscroll of a Sightseeing Trip to the Hangang and Imjingang Rivers through the Lens of Boating and Mountain Outings)

  • 한상윤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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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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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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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문은 지우재(之又齋) 정수영(鄭遂榮)(1743~1831)의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이 한양 근교 지역의 여러 곳을 선유(船遊)와 유산(遊山) 여행하면서 화가의 주관적인 시각이 잘 담긴 사적인 여행 기록이라는 점을 밝힌 연구이다. 이 작품은 정수영이 1796년 무렵, 각 지역을 여행하고 총 16m 길이의 긴 화권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독립된 경관으로 나뉜 작품을 긴 두루마리의 형태로 계속 이어 붙인 점은 《한임강유람도권》이 특별한 여행이 아닌 여행에서 마주한 주관적 경험을 담았음을 보여준다. 《한임강유람도권》은 장소에 따라 선유와 유산의 두 가지 여행 형태로 구분된다. 선유 여행 지역은 넓게 한강과 임진강 수계에 포함되며, 유산 여행 장소는 북한산과 관악산 일대, 도봉산 지역이다. 정수영은 넓은 범위의 장소를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에 걸쳐서 여행했음이 확인된다. 특히 한강 수계의 장소에서 그려진 순서가 실제 위치와 다른 점은 이곳이 다른 시간대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한강변 및 남한강변은 두 차례에 걸쳐 여행한 후, 제14장면까지 그렸다. 이 중 1차 선유 여행은 첫 장면에서 제8장면까지, 2차 선유 여행은 제9장면부터 제14장면까지인 점이 확인된다. 화권의 전체 길이 상 절반을 차지하는 양으로 한양에서 가까운 근교 지역이 많이 남겨진 것을 알 수 있다. 한강 수계의 1차 선유 여행은 잘 알려진 곳보다 자신의 여행 과정에서 눈으로 직접 마주한 풍경을 표현하였다. 용문산이나 청심루, 신륵사와 같이 여주 팔경에 속하는 곳도 그렸으나 흔히 명소를 표현하는 방식이 아닌, 자기의 눈에 들어온 잘 그려지지 않았던 장소를 수평시점으로 묘사하였다. 2차 선유 여행에서는 친구의 별업을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한 순간을 담았다. 이에 더해 1차 여행에서 그린 청심루와 신륵사를 시점과 구도를 달리해 표현하였다. 정수영은 이미 그린 장소도 다른 시점과 각도에서 그리고자 했다. 한강 수계의 1, 2차 선유 여행은 길을 그대로 표현한 곳이 많아 현장감 있는 표현이 돋보이며, 배에서 경물을 수평적 바라보는 정수영의 시선이 잘 느껴진다. 임진강 수계에서는 영평천과 한탄강의 장소가 먼저 그려지고, 화권의 가장 마지막 부분은 임진강 물길에 있는 곳이 그려졌다. 이곳은 다양한 시점으로 표현되었는데, 여기서만 나타나는 특징적인 점이다. 정수영은 영평천에 있었던 장소에서 이어지는 물길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부감시점으로 표현했지만, 백운담에서 수평시점으로 바위의 모습을 나타낸 것은 바위에 대한 관심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에 따라 자유롭게 시점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탄강변에 위치한 화적연은 주변의 모습과 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부감시점이 사용되었다. 임진강변에서는 우화정 주변의 모습이 부감시점과 파노라마 형식으로 잘 드러나며, 이보다 상류에 위치한 토산의 삼성대와 낙화암은 위로 올려다보는 시점[앙시(仰視)]으로 표현되었다. 유산 여행의 장소에서는 주로 정자와 암자가 그려졌다. 먼저 북한산의 재간정은 한강 수계의 선유 여행 경로와 이어지지 않으며, 다른 유산 여행과도 화권에서 분리되어 있기에 이전까지 정확한 장소가 밝혀지기 어려웠다. 필자는 한양 근교 중 재간정이라는 이름을 찾아 북한산 우이동구곡 중 한 곳과 손가장의 재간정으로 추정해보았다. 몇몇 기록들의 재간정에 대한 묘사가 비슷한 것은 두 곳 모두 북한산의 계곡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관악산 일대는 취향정과 일간정 두 정자와 관악산 줄기인 검지산이 그려졌다. 일간정은 관악산에서 잘 알려진 신위의 정자였으나, 정수영은 신위와 연관시키지 않고 객관적인 지리정보만 표기하였다. 취향정과 검지산에서는 담장이 묘사되어 있다. 정수영은 담장을 그리면서 <취향정>에서는 담장 안을 주제로, <검지산>은 담장 밖을 중심으로 다르게 그렸다. 도봉산에서는 망월암과 옥천암 두 암자를 담았다. 이 부분도 어느 곳을 그린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임천상의 『궁오집』을 통해 도봉산을 그린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화가들이 그린 도봉산은 도봉서원과 만장봉을 부각시켜 드러낸 것에 반해 정수영은 암자 두 곳을 표현했다. <망월암>에는 영산전과 천봉탑비가 그려지고, <옥천암>에서는 대웅전이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정수영은 화면에 암자 건물과 함께 도봉산의 봉우리 모습을 그렸으나 봉우리의 명칭은 적지 않았다. 이를 통해 도봉산의 봉우리를 배경으로만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 간취된다. 《한임강유람도권》은 정수영의 개인적인 시각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그가 지나온 여행의 흔적들을 담고 있는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용주사(龍珠寺)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의 축원문(祝願文) 해석(解釋)과 제작시기(製作時期) 추정(推定) (Interpretation of Praying Letter and Estimation of Production Period on Samsaebulhoedo at Yongjusa Temple)

  • 강관식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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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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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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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용주사 <삼세불회도>는 유교적 이념과 불교적 이념, 궁중화원 양식과 산문화승 양식, 고유한 전통화법과 외래적 서양화법 같은 다양한 이원적 요소들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이룩된 기념비적 걸작으로서 조선 후기의 회화 발달과 혁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의 하나이다. 그러나 화기(畫記)가 없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와 작가를 비정하고 양식 특징을 분석하는 문제를 놓고 연구자마다 견해 차이가 심해 지난 50여 년 간 논쟁이 끊이지 않음으로써 회화사적 의미와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모든 논의의 기본적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화기(畫記)가 없고, 작가에 대한 기록이 문헌마다 다르며, 화승들의 전통적인 불화 양식과 화원들의 혁신적인 서양화법이 혼재되어 있어 작가와 양식을 일치시켜 이해하는 문제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특히 논란이 많은 쟁점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현존 <삼세불회도>는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수미단 중앙에 왕실(王室) 존위(尊位)의 축원문(祝願文)을 써놓아 주목되며, 애초에 썼던 "주상전하(主上殿下), 왕비전하(王妃殿下), 세자전하(世子邸下)"의 삼전(三殿) 축원문을 지우고 '자궁저하(慈宮邸下)'를 '왕비전하(王妃殿下)' 앞에 추가해서 고쳐 써넣어 더욱 주목된다. 따라서 이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객관적 단서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최근에 새롭게 제시된 19세기 후반 제작설은 1790년의 용주사 창건 당시에는 순조(純祖)가 '원자(元子)' 신분이었고 1800년 1월 1일에야 '세자(世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세자(世子)'라는 존호가 쓰여있는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세자 책봉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하며, 형식과 도상이 19세기 후반기 화승들이 그린 청룡사나 봉은사의 <삼세불회도>와 유사하고 서양화법은 후대에 개채된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는 19세기 후반기의 화승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불화(佛畫) 화기(畫記)의 축원문을 광범위하게 조사해보면, 불화 제작 시점에 왕실에 실존한 인물의 신분(身分)과 생년(生年), 성씨(姓氏)까지 구체적으로 쓰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에 19세기 후반에는 용주사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처럼 수십 년 전에 승하한 사람들을 생전의 존호(尊號)로 고쳐 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1790년 전후에는 원자(元子)나 세자(世子)의 유무(有無)와 무관하게 의례적으로 "주상전하(主上殿下), 왕비전하(王妃殿下), 세자저하(世子邸下)"의 삼전(三殿) 축원문을 쓰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에 '세자저하(世子邸下)'의 존호가 쓰여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왕실 위계와 달리 '자궁저하(慈宮邸下)'가 '왕비전하(王妃殿下)'보다 앞에 쓰여있는데, 이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극으로 인한 정조와 혜경궁(자궁(慈宮)), 왕비 세 사람의 특수한 관계로 인해 정조가 혜경궁의 왕실 위상을 왕비 앞에 오도록 하여 정조대에만 사용된 특별한 왕실 전례였기 때문에 현존하는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정조대에 개서(改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애초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불화 축원문처럼 의례적인 삼전(三殿) 축원문을 썼다가 이를 지우고 다시 '자궁저하(慈宮邸下)'라는 특별한 존호를 넣어 개서(改書)하는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는 현륭원(顯隆園)의 재궁(齋宮현륭인 용주사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 부인인 혜경궁(惠慶宮)(자궁(慈宮))임에도 불구하고 축원문에 의뢰적인 삼전(三殿)만 쓰여있고 혜경궁이 빠져있는 것을 보고 정조가 지시하여 개서(改書)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개서(改書)는 정조가 현륭원과 용주사가 준공된 뒤 처음으로 현륭원에 원행(園幸)하여 원소(園所)를 두루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용주사에 들러 <삼세불회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견했던 1791년 1월 17일에 정조가 지시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이 특수한 내용과 형태로 이루어진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가 1790년의 창건 당시에 그려진 원본 진작임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객관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고증파(考證派)' 의학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Kao Zheng Pai'(考證派) of The Traditional Medicine of Japan)

  • 박현국;김기욱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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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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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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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1. The 'Kao Zheng Pai(考證派) comes from the 'Zhe Zhong Pai' and is a school that is influenced by the confucianism of the Qing dynasty. In Japan Inoue Kinga(井上金娥), Yoshida Koton(吉田篁墩) became central members, and the rise of the methodology of historical research(考證學) influenced the members of the 'Zhe Zhong Pai', and the trend of historical research changed from confucianism to medicine, making a school of medicine based on the study of texts and proving that the classics were right. 2. Based on the function of 'Nei Qu Li '(內驅力) the 'Kao Zheng Pai', in the spirit of 'use confucianism as the base', researched letters, meanings and historical origins. Because they were influenced by the methodology of historical research(考證學) of the Qing era, they valued the evidential research of classic texts, and there was even one branch that did only historical research, the 'Rue Xue Kao Zheng Pai'(儒學考證派). Also, the 'Yi Xue Kao Zheng Pai'(醫學考證派) appeared by the influence of Yoshida Kouton and Kariya Ekisai(狩谷掖齋). 3. In the 'Kao Zheng Pai(考證派)'s theories and views the 'Yi Xue Kao Zheng Pai' did not look at medical scriptures like the "Huang Di Nei Jing"("黃帝內經") and did not do research on 'medical' related areas like acupuncture, the meridian and medicinal herbs. Since they were doctors that used medicine, they naturally were based on 'formulas'(方劑) and since their thoughts were based on the historical ideologies, they valued the "Shang Han Ja Bing Lun" which was revered as the 'ancestor of all formulas'(衆方之祖). 4. The lives of the important doctors of the 'Kao Zheng Pai' Meguro Dotaku(目黑道琢) Yamada Seichin(山田正珍), Yamada Kyoko(山田業廣), Mori Ritsi(森立之) Kitamura Naohara(喜多村直寬) are as follows. 1) Meguro Dotaku(目黑道琢 1739${\sim}$1798) was born of lowly descent but, using his intelligence and knowledge, became a professor as a Shi Jing Yi(市井醫) and as a professor for 34 years at Ji Shou Guan mastered the "Huang Di Nei Jing" after giving over 300 lectures. Since his pupil, Isawara Ken taught the Lan Men Wu Zhe(蘭門五哲) and Shibue Chusai, Mori Ritsi(森立之), Okanishi Gentei(岡西玄亭), Kiyokawa Gendoh(淸川玄道) and Yamada Kyoko(山田業廣), Meguro Dotaku is considered the founder of the 'Yi Xue Kao Zheng Pai'. 2) The family of Yamada Seichin(山田正珍 1749${\sim}$1787) had been medical officials in the Makufu(幕府) and the many books that his ancestors had left were the base of his art. Seichin learned from Shan Ben Bei Shan(山本北山), a 'Zhe Zhong Pai' scholar, and put his efforts into learning, teaching and researching the "Shang Han Lun"("傷寒論"). Living in a time between 'Gu Fang Pai'(古方派) member Nakanishi Goretada(中西惟忠) and 'Kao Zheng Pai' member Taki Motohiro(多紀元簡), he wrote 11 books, 2 of which express his thoughts and research clearly, the "Shang Han Lun Ji Cheng"("傷寒論集成") and "Shang Han Kao"("傷寒考"). His comparison of the 'six meridians'(3 yin, 3 yang) between the "Shang Han Lun" and the "Su Wen Re Lun"("素問 熱論) and his acknowledgement of the need and rationality of the concept of Yin-Yang and Deficient-Replete distinguishes him from the other 'Gu Fang Pai'. Also, his dissertation of the need for the concept doesn't use the theories of latter schools but uses the theory of the "Shang Han Lun" itself. He even researched the historical parts, such as terms like 'Shen Nong Chang Bai Cao'(神農嘗百草) and 'Cheng Qi Tang'(承氣湯) 3) The ancestor of Yamada Kyoko(山田業廣) was a court physician, and learned confucianism from Kao Zheng Pai 's Ashikawa Genan(朝川善庵) and medicine from Isawa Ranken and Taki Motokata(多紀元堅), and the secret to smallpox from Ikeda Keisui(池田京水). He later became a lecturer at the Edo Yi Xue Guan(醫學館) and was invited as the director to the Ji Zhong(濟衆) hospital. He also became the first owner of the Wen Zhi She(溫知社), whose main purpose was the revival of kampo, and launched the monthly magazine Wen Zi Yi Tan(溫知醫談). He also diagnosed and prescribed for the prince Ming Gong(明宮). His works include the "Jing Fang Bian"("經方辨"), "Shang Han Lun Si Ci"("傷寒論釋司"), "Huang Zhao Zhu Jia Zhi Yan Ji Yao"("皇朝諸家治驗集要") and "Shang Han Ja Bing Lun Lei Juan"("傷寒雜病論類纂"). of these, the "Jing Fang Bian"("經方辨") states that the Shi Gao(石膏) used in the "Shang Han Lun" had three meanings-Fa Biao(發表), Qing Re(淸熱), Zi Yin(滋陰)-which were from 'symptoms', and first deducted the effects and then told of the reason. Another book, the "Jiu Zhe Tang Du Shu Ji"("九折堂讀書記") researched and translated the difficult parts of the "Shang Han Lun", "Jin Qui Yao Lue", "Qian Jin Fang"("千金方"), and "Wai Tai Mi Yao"("外臺秘要"). He usually analyzed the 'symptoms' of diseases but the composition, measurement, processing and application of medicine were all in the spectrum of 'analystic research' and 'researching analysis'. 4) The ancestors of Mori Rits(森立之 1807${\sim}$ 1885) were warriors but he became a doctor by the will of his mother, and he learned from Shibue Chosai(澁江抽齋) and Isawaran Ken and later became a pupil of Shou Gu Yi Zhai, a historical research scholar. He then became a lecturer of medical herbs at the Yi Xue Guan, and later participated in the proofreading of "Yi Xin Fang"("醫心方") and with Chosai compiled the "Jing Ji Fang Gu Zhi"("神農本草經"). He visited the Chinese scholar Yang Shou Jing(楊守敬) in 1881 and exchanged books and ideas. Of his works, there are the collections(輯複本) of "Shen Nong Ben Cao Jing"(神農本草經) and "You Xiang Yi Hwa"("遊相醫話") and the records, notes, poems, and diaries such as "Zhi Yuan Man Lu"("枳園漫錄") and "Zhi Yuan Sui Bi"("枳園隨筆") that were not published. His thoughts were that in restoring the "Shen Nong Ben Cao Jing", "the herb to the doctor is like the "Shuo Wen Jie Zi"("說文解字") to the scholar", and he tried to restore the ancient herbal text using knowledge of medicine and investigation(考據). Also with Chosai he compiled the "Jing Ji Fang Gu Zhi"("經籍訪古志") using knowledge of ancient text. Ritzi left works on pure investigation, paid much attention to social problems, and through 12 years of poverty treated all people and animals in all branches of medicine, so he is called a 'half confucianist half doctor'(半儒半醫). 5) Kitamurana Ohira(喜多村直寬 1804${\sim}$1876) learned scriptures and ancient texts from confucian scholar Asaka Gonsai, and learned medicine from his father Huai Yaun(槐園). He became a teacher in the Yi Xue Guan in his middle ages, and to repay his country, he printed 266 volumes of "Yi Fang Lei Ju("醫方類聚") and 1000 volumes of "Tai Ping Yu Lan"("太平禦覽") and devoted it to his country to be spread. His works are about 40 volumes including "Jin Qui Yao Lue Shu Yi" and "Lao Yi Zhi Yan" but most of them are researches on the "Shang Han Za Bing Lun". In his "Shang Han Lun Shu Yi"("傷寒論疏義") he shows the concept of the six meridians through the Yin-Yang, Superficial or internal, cold or hot, deficient or replete state of diseases, but did not match the names with the six meridians of the meridian theory, and this has something in common with the research based on the confucianism of Song(宋儒). In clinical treatment he was positive toward old and new methods and also the experience of civilians, but was negative toward western medicine. 6) The ancestor of the Taki family Tanbano Yasuyori(丹波康賴 912-955) became a Yi Bo Shi(醫博士) by his medical skills and compiled the "Yi Xin Fang"("醫心方"). His first son Tanbano Shigeaki(丹波重明) inherited the Shi Yao Yuan(施藥院) and the third son Tanbano Masatada(丹波雅忠) inherited the Dian You Tou(典藥頭). Masatada's descendents succeeded him for 25 generations until the family name was changed to Jin Bao(金保) and five generations later it was changed again to Duo Ji(多紀). The research scholar Taki Motohiro was in the third generation after the last name was changed to Taki, and his family kept an important part in the line of medical officers in Japan. Taki Motohiro(多紀元簡 1755-1810) was a teacher in the Yi Xue Guan where his father was residing, and became the physician for the general Jia Qi(家齊). He had a short temper and was not good at getting on in the world, and went against the will of the king and was banished from Ao Yi Shi(奧醫師). His most famous works, the "Shang Han Lun Ji Yi" and "Jin Qui Yao Lue Ji Yi" are the work of 20 years of collecting the theories of many schools and discussing, and is one of the most famous books on the "Shang Han Lun" in Japan. "Yi Sheng" is a collection of essays on research. Also there are the "Su Wen Shi"("素問識"), "Ling Shu Shi"("靈樞識"), and the "Guan lu Fang Yao Bu"("觀聚方要補"). Taki Motohiro(多紀元簡)'s position was succeeded by his third son Yuan Yin(元胤 1789-1827), and his works include works of research such as "Nan Jing Shu Jeng"("難經疏證"), "Ti Ya"("體雅"), "Yao Ya"("藥雅"), "Ji Ya"("疾雅"), "Ming Yi Gong An"("名醫公案"), and "Yi Ji Kao"("醫籍考"). The "Yi Ji Kao" is 80 volumes in length and lists about 3000 books on medicine in China before the Qing Dao Guang(道光), and under each title are the origin, number of volumes, state of existence, and, if possible, the preface, Ba Yu(跋語) and biography of the author. The younger sibling of Yuan Yin(元胤 1789-1827), Yuan Jian(元堅 1795-1857) expounded ancient writings at the Yi Xue Guan only after he reached middle age, was chosen for the Ao Yi Shi(奧醫師) and later became a Fa Yan(法眼), Fa Yin(法印) and Yu Chi(樂匙). He left about 15 texts, including "Su Wen Shao Shi"("素間紹識"), "Yi Xin Fang"("醫心方"), published in school, "Za Bing Guang Yao"("雜病廣要"), "Shang Han Guang Yao"(傷寒廣要), and "Zhen Fu Yao Jue"("該腹要訣"). On the Taki family's founding and working of the Yi Xue Guan Yasuka Doumei(失數道明) said they were "the people who took the initiative in Edo era kampo medicine" and evaluated their deeds in the fields of 'research of ancient text', 'the founding of Ji Shou Guan and medical education', 'publication business', 'writing of medical text'. 5. The doctors of the 'Kao Zheng Pai ' based their operations on the Edo Yi Xue Guan, and made groups with people with similar ideas to them, making a relationship 'net'. For example the three families of Duo Ji(多紀), Tang Chuan(湯川) and Xi Duo Cun(喜多村) married and adopted with and from each other and made prefaces and epitaphs for each other. Thus, the Taki family, the state science of the Makufu, the tendency of thinking, one's own interests and glory, one's own knowledge, the need of the society all played a role in the development of kampo medicine in the 18th and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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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증파(考證派)' 의학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Kao Zheng Pai'(考證派) of The Traditional Medicine of Japan)

  • 박현국;김기욱
    • 동국한의학연구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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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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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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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1.The 'Kao Zheng Pai'(考證派) comes from the 'Zhe Zhong Pai(折衷派)' and is a school that is influenced by the confucianism of the Qing dynasty. In Japan Inoue Kinga(井上金峨), Yoshida Koton(古田篁墩 $1745{\sim}1798$) became central members, and the rise of the methodology of historical research(考證學) influenced the members of the 'Zhe Zhong Pai', and the trend of historical research changed from confucianism to medicine, making a school of medicine based on the study of texts and proving that the classics were right. 2. Based on the function of 'Nei Qu Li'(內驅力) the 'Kao Zheng Pai', in the spirit of 'use confucianism as the base', researched letters, meanings and historical origins. Because they were influenced by the methodology of historical research(考證學) of the Qing era, they valued the evidential research of classic texts, and there was even one branch that did only historical research, the 'Rue Xue Kao Zheng Pai'(儒學考證派). Also, the 'Yi Xue Kao Zheng Pai'(醫學考證派) appeared by the influence of Yoshida Kouton and Kariya Ekisai(狩谷掖齋). 3. In the 'Kao Zheng Pai(考證派)'s theories and views the 'Yi Xue Kao Zheng Pai' did not look at medical scriptures like the "Huang Di Nei Jing"("黃帝內經") and did not do research on 'medical' related areas like acupuncture, the meridian and medicinal herbs. Since they were doctors that used medicine, they naturally were based on 'formulas'(方劑) and since their thoughts were based on the historical ideologies, they valued the "Shang Han Ja Bing Lun" which was revered as the 'ancestor of all formulas'(衆方之祖). 4. The lives of the important doctors of the 'Kao Zheng Pai' Meguro Dotaku(目黑道琢) Yamada Seichin(山田正珍), Yamada Kyoko(山田業廣), Mori Ritsi(森立之) Kitamura Naohara(喜多村直寬) are as follows. 1) Meguro Dotaku(目黑道琢 $1739{\sim}1798$) was born of lowly descent but, using his intelligence and knowledge, became a professor as a Shi Jing Yi(市井醫) and as a professor for 34 years at Ji Shou Guan(躋壽館) mastered the "Huang Di Nei Jing" after giving over 300 lectures. Since his pupil, Isawara Ken(伊澤蘭軒) taught the Lan Men Wu Zhe(蘭門五哲) and Shibue Chusai(澀江抽齋), Mori Ritsi(森立之), Okanishi Gentei(岡西玄亭), Kiyokawa Gendoh(淸川玄道) and Yamada Kyoko(山田業廣), Meguro Dotaku is considered the founder of the 'Yi Xue Kao Zheng Pai'. 2) The family of Yamada Seichin(山田正珍 $1749{\sim}1787$) had been medical officials in the Makufu(幕府) and the many books that his ancestors had left were the base of his art. Seichin learned from Shan Ben Bei Shan(山本北山), a 'Zhe Zhong Pai' scholar, and put his efforts into learning, teaching and researching the "Shang Han Lun"("傷寒論"). Living in a time between 'Gu Fang Pai'(古方派) member Nakanishi Goretada(中西惟忠) and 'Kao Zheng Pai' member Taki Motohiro(多紀元簡), he wrote 11 books, 2 of which express his thoughts and research clearly, the "Shang Han Lun Ji Cheng"("傷寒論集成") and "Shang Han Kao"("傷寒考"). His comparison of the 'six meridians'(3 yin, 3 yang) between the "Shang Han Lun" and the "Su Wen Re Lun"("素問 熱論") and his acknowledgement of the need and rationality of the concept of Yin-Yang and Deficient-Replete distinguishes him from the other 'Gu Fang Pai'. Also, his dissertation of the need for the concept doesn't use the theories of latter schools but uses the theory of the "Shang Han Lun" itself. He even researched the historical parts, such as terms like 'Shen Nong Chang Bai Cao'(神農嘗百草) and 'Cheng Qi Tang'(承氣湯). 3) The ancestor of Yamada Kyoko(山田業廣) was a court physician, and learned confucianism from Kao Zheng Pai's Ashikawa Genan(朝川善庵) and medicine from Isawa Ranken(伊澤蘭軒) and Taki Motokata(多紀元堅), and the secret to smallpox from Ikeda Keisui(池田京水). He later became a lecturer at the Edo Yi Xue Guan(醫學館) and was invited as the director to the Ji Zhong(濟衆) hospital. He also became the first owner of the Wen Zhi She(溫知社), whose main purpose was the revival of kampo, and launched the monthly magazine Wen Zi Yi Tan(溫知醫談). He also diagnosed and prescribed for the prince Ming Gong(明宮). His works include the "Jing Fang Bian"("經方辨"), "Shang Han Lun Si Ci"("傷寒論釋詞"), "Huang Zhao Zhu Jia Zhi Yan Ji Yao"("皇朝諸家治驗集要") and "Shang Han Ja Bing Lun Lei Juan"("傷寒雜病論類纂"). of these, the "Jing Fang Bian"("經方辨") states that the Shi Gao(石膏) used in the "Shang Han Lun" had three meanings-Fa Biao(發表), Qing Re(淸熱), Zi Yin(滋陰)-which were from 'symptoms', and first deducted the effects and then told of the reason. Another book, the "Jiu Zhe Tang Du Shu Ji"("九折堂讀書記") researched and translated the difficult parts of the "Shang Han Lun", "Jin Qui Yao Lue"("金匱要略"), "Qian Jin Fang"("千金方"), and "Wai Tai Mi Yao"("外臺秘要"). He usually analyzed the 'symptoms' of diseases but the composition, measurement, processing and application of medicine were all in the spectrum of 'analystic research' and 'researching analysis'. 4) The ancestors of Mori Ritsi(森立之 $1807{\sim}1885$) were warriors but he became a doctor by the will of his mother, and he learned from Shibue Chosai(澁江抽齋) and Isawaran Ken(伊澤蘭軒) and later became a pupil of Shou Gu Yi Zhai(狩谷掖齋), a historical research scholar. He then became a lecturer of medical herbs at the Yi Xue Guan, and later participated in the proofreading of "Yi Xin Fang"("醫心方") and with Chosai compiled the "Jing Ji Fang Gu Zhi"("經籍訪古志"). He visited the Chinese scholar Yang Shou Jing(楊守敬) in 1881 and exchanged books and ideas. Of his works, there are the collections(輯複本) of "Shen Nong Ben Cao Jing"("神農本草經") and "You Xiang Yi Hwa"("遊相醫話") and the records, notes, poems, and diaries such as "Zhi Yuan Man Lu"("枳園漫錄") and "Zhi Yuan Sui Bi"(枳園隨筆) that were not published. His thoughts were that in restoring the "Shen Nong Ben Cao Jing", "the herb to the doctor is like the "Shuo Wen Jie Zi"(說文解字) to the scholar", and he tried to restore the ancient herbal text using knowledge of medicine and investigation(考據), Also with Chosai he compiled the "Jing Ji Fang Gu Zhi"("經籍訪古志") using knowledge of ancient text. Ritzi left works on pure investigation, paid much attention to social problems, and through 12 years of poverty treated all people and animals in all branches of medicine, so he is called a 'half confucianist half doctor'(半儒半醫). 5) Kitamurana Ohira(喜多村直寬, $1804{\sim}1876$) learned scriptures and ancient texts from confucian scholar Asaka Gonsai(安積艮齋), and learned medicine from his father Huai Yaun(槐園), He became a teacher in the Yi Xue Guan in his middle ages, and to repay his country, he printed 266 volumes of "Yi Fang Lei Ju"("醫方類聚") and 1000 volumes of "Tai Ping Yu Lan"("太平禦覽") and devoted it to his country to be spread. His works are about 40 volumes including "Jin Qui Yao Lue Shu Yi"("金匱要略疏義") and "Lao Yi Zhi Yan"(老醫巵言) but most of them are researches on the "Shang Han Za Bing Lun". In his "Shang Han Lun Shu Yi"("傷寒論疏義") he shows the concept of the six meridians through the Yin-Yang, Superficial or internal, cold or hot, deficient or replete state of diseases, but did not match the names with the six meridians of the meridian theory, and this has something in common with the research based on the confucianism of Song(宋儒). In clinical treatment he was positive toward old and new methods and also the experience of civilians, but was negative toward western medicine. 6) The ancestor of the Taki family Tanbano Yasuyori(丹波康賴 $912{\sim}955$) became a Yi Bo Shi(醫博士) by his medical skills and compiled the "Yi Xin Fang"("醫心方"). His first son Tanbano Shigeaki(丹波重明) inherited the Shi Yao Yuan(施藥院) and the third son Tanbano Masatada(丹波雅忠) inherited the Dian You Tou(典藥頭). Masatada's descendents succeeded him for 25 generations until the family name was changed to Jin Bao(金保) and five generations later it was changed again to Duo Ji(多紀). The research scholar Taki Motohiro was in the third generation after the last name was changed to Taki, and his family kept an important part in the line of medical officers in Japan. Taki Motohiro(多紀元簡 $1755{\sim}1810$) was a teacher in the Yi Xue Guan where his father was residing, and became the physician for the general Jia Qi(家齊). He had a short temper and was not good at getting on in the world, and went against the will of the king and was banished from Ao Yi Shi(奧醫師). His most famous works, the "Shang Han Lun Ji Yi"("傷寒論輯義") and "Jin Qui Yao Lue Ji Yi"("金匱要略輯義") are the work of 20 years of collecting the theories of many schools and discussing, and is one of the most famous books on the "Shang Han Lun" in Japan. "Yi Sheng"("醫勝") is a collection of essays on research. Also there are the "Su Wen Shi"(素問識), "Ling Shu Shi"("靈樞識"), and the "Guan Ju Fang Yao Bu"("觀聚方要補"). Taki Motohiro(多紀元簡)'s position was succeeded by his third son Yuan Yin(元胤 $1789{\sim}1827$), and his works include works of research such as "Nan Jing Shu Jeng"(難經疏證), "Ti Ya"("體雅"), "Yao Ya"("藥雅"), "Ji Ya"(疾雅), "Ming Yi Gong An"(名醫公案), and "Yi Ji Kao"(醫籍考). The "Yi Ji Kao" is 80 volumes in length and lists about 3000 books on medicine in China before the Qing Dao Guang(道光), and under each title are the origin, number of volumes, state of existence, and, if possible, the preface, Ba Yu(跋語) and biography of the author. The younger sibling of Yuan Yin(元胤 $1789{\sim}1827$), Yuan Jian(元堅 $1795{\sim}1857$) expounded ancient writings at the Yi Xue Guan only after he reached middle age, was chosen for the Ao Yi Shi(奧醫師) and later became a Fa Yan(法眼), Fa Yin(法印) and Yu Chi(禦匙). He left about 15 texts, including "Su Wen Shao Shi"("素問紹識"), "Yi Xin Fang"("醫心方"), published in school, "Za Bing Guang Yao"("雜病廣要"), "Shang Han Guang Yao"("傷寒廣要"), and "Zhen Fu Yao Jue"("診腹要訣"). On the Taki family's founding and working of the Yi Xue Guan Yasuka Doumei(矢數道明) said they were "the people who took the initiative in Edo era kampo medicine" and evaluated their deeds in the fields of 'research of ancient text', the founding of Ji Shou Guan(躋壽館) and medical education', 'publication business', 'writing of medical text'. 5. The doctors of the 'Kao Zheng Pai' based their operations on the Edo Yi Xue Guan, and made groups with people with similar ideas to them, making a relationship 'net'. For example the three families of Duo Ji(多紀), Tang Chuan(湯川) and Xi Duo Cun(喜多村) married and adopted with and from each other and made prefaces and epitaphs for each other. Thus, the Taki family, the state science of the Makufu, the tendency of thinking, one's own interests and glory, one's own knowledge, the need of the society all played a role in the development of kampo medicine in the 18th and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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