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몽고와 바이칼(Baikal) 호 서부, 투바(Tuva), 카자흐스탄(Kazakhstan), 중국 황하 상류 지구 및 신강(新疆) 등 광대한 지역에 분포했던 흉노의 철기문화는 전체적으로 유목문화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철기제조기술 발생 이후 농업경제 위주의 중국 중원지구에서는 식량생산량의 증가가 명백하게 일어났다. 이것은 철제 농공구가 청동제 농공구에 비하여 내마모성과 인장강도가 강하며 파손 시 수리가 용이한 점 등 농경에 더욱 적합한 기계적 성능을 지녔기 때문이다. 때문에 농경지구에서는 다양한 철제 농경도구가 생산되었다. 그러나 흉노는 유목경제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제생산도구의 사용이 유발하는 식량 생산력의 증가와 생산구조의 변화 정도가 높지 않았다. 다만, 군사 무기 방면에서의 변화는 비교적 컸다. 철기제작기술 보급 이후 원사무기(遠射武器) 위주의 흉노 무기 체계의 위력이 눈에 띄게 강해졌다. 게다가 이 시기에 흉노가 말 위에서 활을 쏘며 돌격하는 기사전술(騎射戰術)을 적극 활용하면서 흉노의 철제무기의 위력은 더욱 배가되었다. 이처럼 철기가 생산도구의 생산성 향상에 미친 영향보다 전쟁무기의 성능 향상에 미친 영향이 더욱 컸던 것이 유목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흉노 철기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비록 중국 중원계 철기문화의 영향력이 강하기는 하나 두 지역의 자연환경과 경제구조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철기문화가 발생한 이후 중원지역과 흉노지역은 사회 발전 방향의 차이가 발생했으며, 이러한 점은 철기문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철기제작기술이 전래된 뒤에도 흉노는 자신들의 경제방식을 계속 유지하였다. 때문에 그들이 사용했던 철제 생산도구는 앞선 시기의 청동제 생산도구와 형태상의 변화가 거의 없으며 흉노의 영역 내에서 철기문화의 공통성은 광범위하게 유지되었다.
본 연구는 몽골 도르릭나르스 유적 2호, 3호 및 4호분에서 출토된 청동제 및 금제 유물에 대한 과학적 분석 결과로부터 각 유적 출토품의 특징을 알아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몽골의 흉노무덤인 도르릭나르스 유적 2호, 3호 및 4호분은 비교적 소형이고, 도굴 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출토 유물에는 중국계 유물과 북방계 유물이 공존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먼저 청동 용기류의 경우 중국제인 한경이나 일산살 꼭지의 성분 조성과는 달리 주석에 비하여 납의 함유량이 높은 특징을 보였는데, 특히 2호의 청동쟁반, 청동등잔 그리고 4호의 청동솥의 경우는 주석이 1wt% 정도로 적게 함유되어 있어 Cu-Pb의 2원계 합금 조성을 보였다. 금제품의 경우는 2호분 장식품의 제작에 비교적 높은 순도의 금이 사용된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금제 누금 장식의 금 알갱이의 접합에는 금과 구리를 합금한 금땜이 사용되었거나 확산접합(말라카이트나 산화구리 화합물 가루를 사용함)에 의하여 접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향후 몽골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흉노 무덤 출토품에 대한 과학적 조사 및 분석이 더 많이 진행된다면 흉노 문화에 대한 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Xiognu people were the first of the Central-Asian nomads to establish a nation in 209 B.C. They always moved around looking for places to breed their animals and fertile grounds, so they wore clothes made of fur and leather and covered their tents with felt from the livestock. This research studies on the literatures, costumes and the achievement of archaeological excavation. Furthermore, to investigate on costumes excavated of Xiongnu, we visited the Mongolian National Museum and the Hermitage Museum. A corn-hat made of felt, a felt hat with ear flaps and a golden crown with a bird on the top were unearthed from a tomb of Xiongnu in Inner mongolia. Women usually wore pigtails, and men wore pigtails or ponytails but they cut their hair short when holding a funeral. Many pigtails discovered in Noyon uul tombs can be considered as their funeral customs. The Xiongnu wore a round or v-neck caftan attached straight sleeves reaching knees in the left folded style, and because they always rode horses, having the length of the caftan not go past their buttocks would have made it more convenient for them. During the period of Western Han, Ho refered to Xiongnu and it became a common name for northern races. They used leather belts and an animal-designed buckle was found. Women commonly rouged their cheeks for a vivid and cute look, and many ornaments were excavated including bracelets, rings and decorations made of gold, silver, copper and jade, among which there were hair ornaments used to identify one's class. A horse pattern with wings and a horn of Golmod T20 was substitution for the Schythian use of deer. Patterns or shape of unearthed articles present in the Xiongnu culture in Noyon uul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Altaic, Greek and Persian cultures. The Xiongnu clothing was made of animals' skin and fur, woolen textiles and felt. It was folded to the left for upper garments, and the pants were adjusted using a belt and shoes were made of leather, which was very suitable for protection against the cold and horse riding. Mobility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ir clothing.
최근 북방유목민족인 사르마티아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들이 증가하면서 사르마티아인들의 활동 양상과 그 실체들이 조금씩 규명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사르마티아인들의 동서 교역의 활동 양상을 사르마티아식 검집의 확산 지역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사르마티아인들의 검은 스키타이나 페르시아인들이 사용한 아키나케스(Akinakes)의 계보를 잇는 것이지만 손잡이나 패용 방식에서 손쉽게 칼을 뺄 수 있도록 변화되었다. 즉 양 측면에 달린 4개 돌기에 끈으로 연결한 검집을 허벅지에 부착시키는 패용 구조로 변한 것이다. 사르마티아식 검은 기원전 5세기 파지리크시기 알타이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사르마티아인들의 활동 중심지인 남시베리아, 박트리아, 파르티아, 로마로 확산되었다. 이 글에서는 동서 교섭의 요충지인 박트리아지역에 속하는 아프가니스탄 틸랴 테페 4호묘에서 출토된 검집에 관심을 두었다. 사르마티아식 검을 패용한 채 매장되었던 틸랴 테페 4호묘의 묘주는 당시 쿠샨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던 박트리아에서 상당한 위치의 인물로 파악된다. 묘주가 2자루의 사르마티아식 검을 패용하고 있었던 것은 박트리아에 사르마티아의 영향이 상당이 수용된 사실을 의미한다. 사르마티아인들이 동서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국산 물자를 실크로드에 공급하였던 이들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다. 이에 사르마티아인들이 활동한 북방 초원 루트에 중국 한대 동경, 메론형 구슬, 수정구슬 등의 장식구슬, 금환연접구슬 등 중국 특히 비단이 생산되었던 남중국의 공예품들이 출토되는 경위에 관심을 가졌다. 모자이크 구슬은 당시 남중국 그리고 사르마티아와의 관계에 의한 것으로 살펴보았다. 거리적으로 먼 사르마티아와 남중국이 교섭할 수 있었던 중간 매체로는 흉노가 주목된다. 이와 관련하여 흉노의 유적에서 남중국에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는 금환연접구슬이 발견되는 점을 참고하였다. 남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유행한 금환연접구슬이나 모자이크구슬이 아프카니스탄의 틸랴 테페 유적에는 없는 반면 같은 초원길로 연결되는 사르마티아 유적이나 흉노의 몽골 유적에서 등장하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이는 남중국과 사르마티아, 흉노와의 연결 루트를 상정하게 한다. 한편 사르마티아인들의 중심연대인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사이 초원루트와 남중국을 잇는 교통로로는 운남에서 미안마를 지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인도 동부로 들어가는 서남실크로드로 판단된다. 1세기 동서교섭의 루트에는 북방 초원 루트, 남해 루트, 오아시스 루트 등 다양한 루트가 존재한다. 이들 루트들은 운반, 집산되는 물자의 특성이나 당시 정치적 관계에 의해 다양하게 사용되고 형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남중국을 잇는 최단거리의 길인 서남루트가 북방 유목민들인 사르마티아인들에 의해 사용되고 개척된 상황을 살펴본 것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동서를 연결하던 고대 교통로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증대하고 있다. 국내 학계에서 유라시아 동서 문명 교섭에 대한 연구는 아직은 그다지 활발할 편이 아니지만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 민속학, 복식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연구를 진행시켜 왔다. 북방 초원길을 통한 교섭사는 한민족과 한국문화의 기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는데, 몽골과 카자흐스탄지역의 유적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가 꾸준히 이루어지면서 흉노, 쿠르간 문화 등으로 연구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사막과 오아시스의 길을 통한 교섭은 미술사 분야에서 연구를 주도해왔다. 이란,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에 대한 현지조사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진행되면서 신라의 황금문화, 유리의 전래, 불교문화의 동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고 있다. 바닷길에 대한 연구는 다른 분야에 비해 부진한 편이다. 동남아시아에 소재하는 불교와 힌두교 사원에 대한 관심은 적지 않았으나 이 유적들을 연결하는 바닷길의 복원과 그 의미에 대한 연구로 확산되어야 한다. 베트남의 돈 손 문화와 싸 후인 문화 유적을 국내 연구자들이 직접 조사하게 됨으로써 앞으로 이 분야 연구가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는 한국사, 한국 문화와 직접 관련이 없는 주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류 공동의 문명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것도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AD 1세기로 추정되는 몽골 도르릭나르스 흉노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는 파단면을 따라 검은색의 유기물로 접합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부착된 검은색 유기물의 특성을 확인하기 위해 GC-MS를 이용하여 성분분석 한 결과, 자작나무 껍질 타르의 특성 성분으로 알려진 루페올(Lupeol) 및 베툴린(Betulin) 등을 포함한 Triterpenoid 화합물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고대 몽골에서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타르를 사용하여 토기를 접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 고고자료에 잔존하는 유기물에 대하여 체계적인 과학적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과거의 생활 모습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Archaeological research on the Xiongnu began in the late 19th century by a Russian archaeologist Talko-Grinchevich. The Xiongnu culture has been reported in the northern steppe of China and eastern part of Eurasian steppe. Mainly, Xiongnu sites, dated from the late 2nd century B.C. to the 1st century A.D., are reported on the east side of Baikal Lake(Zabaikal), east Mongolia, and the Inner Mongolia of China. Based on the historical records and the archaeological remains, the North Xiongnu culture is defined to be the remains of Zabaikal, and the South Xiongnu culture the archaeological remains of Nothern China. The expelled North Xiongnu, while fleeing to the western part of Eurasia, left traces of their own archaeological remains in the Southern Kazakhstan, Xinjiang of China, Altai, and finally appeared in the Europe as Huns. The most characteristic archaeological materials of the Xiongnu are bronze plaques and ceramics made by handicraft, and highly developed iron weapons. After the power of the Xiongnu was dissolved in 1st c. A.D., previously subordinated peoples such as Xianbi, Wuhuan, Wusun rised in the Eurasia steppes and opened medieval age in Eurasia. The "northern type" materials found in Korea are dated to the period of Xiongnu or slightly later, we need to pay more attention to the contemporary Xiongnu. research.
이 글은 기존에 알려진 구들의 기원지를 검증하기 위한 연구이다. 구들의 기원지는 2006년 송기호에 의해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였다는 다원설이 제기되었으며, 현재까지 가장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나 이 가설이 나오고 10년이상 지나면서 다원설은 오히려 구들의 계통과 발달 과정을 밝히는데 혼란을 야기할 뿐 아니라 확대 재생산되고있다. 다원설에서 구들의 기원지로 제시된 곳은 중국 동북-한반도 서북한지역(세죽리-연화보유형문화), 한중러 삼국의 국경이 접하는 지역 일대-연해주 남부지역(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 자바이칼-몽골 북부지역(흉노문화) 등 세곳이다. 이들 지역은 서로 거리가 멀고 문화적으로도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동안 독자적인 발생지로 이해되어왔다. 물론 세죽리-연화보유형문화,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 흉노문화 사이에 상호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된다. 하지만 다원설에서 주장하듯, 구들이 여러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달했다고 보기에 이들 지역에서 나타나는 구조와 형태는 물론이고 결합되는 물질자료까지 대체로 일치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점이다. 게다가 출현 시기와 지역 역시 기원전 3~2세기의 동아시아지역에만 한정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구들의 구조와 기술적 특징은 열효율을 높여주는 폐쇄 구조의 아궁이, 축열을 해주는 고래, 연기를 외부로 배출시켜주는 배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충분한 기술적 이해 없이 아무나 독자적으로 만들 수 없는 복합적인 기술 구조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들은 아궁이, 고래, 배연구조 중 하나라도 갖춘 시설을 사용하던 곳에서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구들의 기원지로 알려진 지역에서 선행하는 폐쇄 구조의 아궁이나 배연시설을 갖춘 노(爐)가 존재하거나 발달과정이 나타나는지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원설에서 기원지로 알려진 세 곳 모두 이러한 구조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들 지역에서 구들은 기존에 없던 토기 기종, 철제 농공구류 등 새로운 물질문화 요소와 함께 급격히 등장할 뿐이다. 결국 이들 지역은 구들을 발명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로부터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세지역 모두 구들의 기원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본고는 독석(獨石) 황혁(黃赫)의 생애와 시세계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 본고가 황혁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황혁이 문학적으로 상당한 재능이 있었음에도 우리 문학사에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황혁의 시세계를 탐색하는 일은 유배시의 외연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2장에서 황혁의 생애를 검토하였다. 황혁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점은 황혁이 해동강서시파로 평가받는 부친 황정욱의 문재를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문과에 장원급제를 한 후 10년간 빠르게 진급하여 통정대부까지 오른 사실은 황혁의 뛰어난 문재를 방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황혁의 생애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임진왜란 때 작성한 항복권유문으로 인해서 20여 년의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배의 배경으로서 기존의 그것과 변별되는 지점이고, 이는 황혁의 독특한 시세계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3장에서는 2장을 바탕으로 황혁의 시세계를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호(豺虎)의 현실(現實), 소무(蘇武)의 이미지'이다. 임진왜란은 황혁의 뇌리 속에 강하게 자리 잡은 나쁜 기억이었다. 왜냐하면 황혁이 긴 유배에 처하게 된 발단이 임진왜란 때 항복권유문을 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황혁은 임진왜란 때의 현실을 '시호(豺虎)가 우글거리는 혐오스런 현실로 인식했으며, 결백한 자기 자신을 흉노에게 사신 갔다가 억류된 소무(蘇武)로 비유하였다. 둘째, '장사(長沙)의 현실(現實), 굴원(屈原)의 이미지'이다. 황혁은 암담한 유배지에 놓인 자신을 굴원으로 비유하였다. 이는 항복권유문을 모함한 북인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된 자신을, 간신들의 모함을 받고 배척된 굴원(屈原)과 동일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독특한 점은, 황혁이 굴원의 이미지를 가져오되, 장사(長沙)라는 공간으로 한정했다는 것이다. 장사(長沙)는 굴원이 투신자살한 멱라수가 있는 곳이다. 황혁은 굴원이 최후를 맞이한 장사를 통해 항복권유문이라는 치명적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자신의 암담한 처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고려 말에 삶을 영위한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의 현실인식을 고찰하는 데 있다. 민사평은 당시 여러 학자들과 활발한 교섭을 통해 학문적 교류가 가능했다. 그는 21세 때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수행해 오면서 행동이 바르고 지조가 변하지 않았다. 민사평은 이제현, 백문보, 이색 등과 자주 만남을 가지며 생각을 주고 받았다. 가끔 백문보는 모여서 술 마실 때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색은 민자평이 현묘한 시법을 깨달은 자라고 높게 평가한 바 있으며, 그의 시는 후세까지 계속 전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민사평이 활동했던 시대는 고려 말로서 국내외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때였다. 국외적으로 고려 말은 당시 빈번했던 왜구와 흉노의 침입으로 인해 피폐해진 국토와 고통 받는 백성들로 온 나라가 불안정했다. 국내적으로는 당시 위정자들의 부패와 백성들의 고통이 심각했다. 그는 당시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며 애민적 현실인식을 보였다. 그는 의리가 없는 삶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만약 욕심이 있다면 부귀영화도 언젠간 쇠퇴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당시 백성의 심정을 깊이 동정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구제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여기서 민사평의 애민적 현실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살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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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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