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한양 도성(都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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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석재공급지 추정을 위한 고문헌 분석 및 암석학적 데이터베이스 구축 (Analysis of Ancient Document and Establishment of Petrological Database for Presumption of Stone Source Area of the Seoul City Wall, Korea)

  • 조영훈;이찬희
    • 암석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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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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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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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연구에서는 한양도성 석재공급지 추정을 위해 고문헌을 분석하고 산지탐색 지점에 대한 광역조사를 수행하여 암석학적 기초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였다. 고문헌 분석 결과를 종합하면 성돌은 조선 초기에 주로 도성과 인접한 석산에서 조달된 반면 후기로 갈수록 도성 외부의 고정 채석장으로부터 공급되었다. 따라서 고문헌에 기록된 채석 산지를 중심으로 암석학적 조사를 수행한 결과, 산지탐색 전역에 걸쳐 담홍색화강암과 우백질화강암이 분포하였으며, 이들 화강암류는 광물조성 및 지구화학적 거동특성이 거의 유사하였다. 그러나 담홍색화강암은 남산 북사면에서 불암산의 북동방향으로 갈수록 대자율 값이 증가하는 자철석 계열을 보였으며, 우백질화강암은 용마산을 시작으로 남산과 인왕산 등의 편마암 경계부에 주로 나타나고 티탄철석계열의 낮은 대자율 특성을 가졌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할 때, 한양도성 석재공급지 추정을 위한 중요한 암석학적 지시자는 색상과 대자율로 판단된다. 이와 함께 채석장의 석재 양, 운반거리 및 기술력 등을 고려하여 원산지 해석의 신뢰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치유적 모빌리티로서 서울 한양도성길 걷기 (Walking along Seoul City Wall as Therapeutic Mobilities)

  • 박향기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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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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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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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인간의 삶에서 치유는 떼어낼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최근 치유의 요구가 증가하면서 이를 위한 공간, 장소, 나아가 이동에 대한 지리적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본 연구는 서울 한양도성길 낙산구간 걷기를 사례로 걷기의 과정에서 어떠한 치유요소가 작용하며 그 지리적 함의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 '치유적 모빌리티' 개념과 틀을 바탕으로 181건의 블로그 텍스트를 연구 자료로 활용하였고 치유요소들을 분류한 결과, '기상 기후', '걷기 산책', 그리고 '야경'이 주요 요소로 분석되었다. 또한, 치유의 걷기 과정을 주요 요소들을 다룬 블로그 내러티브 분석으로 살펴본 결과, 치유의 장소만들기, 제한요인으로서 시간, 야경 속 사회적 신체라는 지리학적 함의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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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옛글을 통한 한양도성 연지(蓮池) 일대의 문화경관 고찰 (A Study on the Cultural Landscape around Lotus Ponds of Fortress Wall of Seoul through Old Writings in the Joseon Dynasty)

  • 길지혜;손용훈;황기원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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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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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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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한양도성의 연지인 동지, 서지, 남지 관련 옛글을 통해 연지에서의 개인의 행태와 감흥을 준 경관적 특성을 고찰해 당대의 문화경관으로서 연지의 가치를 이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각 연지의 경관을 묘사하고 있는 시문, 일기문, 기문 등의 옛글을 추출하여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첫째, 세 연지 모두 연꽃, 버드나무, 연못의 물을 아름다운 경관요소로 꼽고 있다. 둘째, 지역적으로 동지가 자연적 경관으로 인식되었다면, 서지는 자연적 경관과 도시적 경관으로, 남지는 도시적 경관으로의 성격이 강했다. 셋째, 이용행태 측면에서 동지가 이동 중 잠시 들리거나 멀리 조망하는 방식이었다면, 서지는 천연정 누정에서 긴 시간을 체류하며 다양한 행태가 이루어졌다. 남지는 임시로 장막을 편 곳이나 인접한 지인의 저택에서 모임을 가졌고, 번화한 주변 환경으로 인해 밤 시간이 연지를 즐기기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넷째, 세 연지가 한양도성과 인접하기에 주변 경관에서 성곽을 인상적으로 묘사하는 글이 많았다. 다섯째, 연지는 주변 환경과 통합적으로 체험되어 넓은 수공간과 자연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오픈스페이스 역할을 했다. 한양도성의 연지는 도성의 연접부에 위치해 도시의 문화적 기능을 보완하고, 오픈스페이스로서의 가치가 높으며 한양 고유의 경관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였다. 현재 이들 연지는 사라졌지만 고도의 수경관으로서 많은 의미와 잠재적 가치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8세기에 축조된 한양도성 치성의 형식과 위치 (Form and Location of Chiseong(square-shaped lookout) Constructed in Hanyangdoseong(Seoul city wall) of the 18th Century)

  • 김영수;송인호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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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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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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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search about the construction of Chiseong around the Heunginjimun Gate area in the 18th century. the conclusions derived from the historical evidence of the number, location, size, and form, and construction method of Chiseong was as follows. First, the Chiseong(Square-shaped lookout) of Hanyangdoseong was built in the 29th year of King Yeongjo(1753) and can be found in the national record. Five sites of the Chiseong are currently identified. It is assumed that the Foru was installed on top of some of the Chiseongs. Second, Chiseong was destroyed sequentially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Third, Chiseong is a rectangular in shape and six are constructed. Fourth, Sixth Chiseong could figure out through Hengryeopungsokdo, the drawing of Jeong Seon.

18세기 한양도성의 개축과 축성기법 (Repair and Construction Methods of Hanyangdoseong in 18th Century)

  • 송인호;김영수;문인식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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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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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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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Since its construction in the late 14th century, Hanyangdoseong had been carried out three major repairs and reconstructions during the 500 years of the Joseon Dynasty. In addition to the large-scale construction, small-scale construction continued until King Gojong era. In particular, in the 18th century, systematic construction management was implemented by the craftsmen and the military participated in the renovation of Hanyangdoseong in earnest, and the construction methods also developed rapidly. In the early 18th century, new construction techniques were attempted in various sections of the reconstruction work, and gradually became a common technology for repairing Hanyangdoseong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and period of changes in the 18th century's construction technique, when the rapid development of Hanyangdoseong took place. To this end, the excavation results related to Hanyangdoseong, the remaining city wall, and the inscribed stones were used to identify and demonstrate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 of the construction method.

환경사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궁궐에 범과 표범의 출몰 (An Emergence of Tigers and Leopards in the Palace During the Joseon Period from the Environmental Historical Perspective)

  • 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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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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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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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시대 한양 궁궐에 범과 표범 출몰에 대해 환경사적 관점에서의 고찰을 통해 궁궐 실체의 한 단면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실록" 등 사서에 실린 범과 표범 출몰 기록을 토대로 환경사의 세 가지 관심 즉, '환경', '환경에 미친 인간의 영향',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의식과 태도'를 주제로 고찰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시대에 궁궐은 물론 한양 도성 내외에도 수시로 범과 표범이 출몰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후원에서 호랑이가 먹이 활동을 하거나 번식도 했으며 사람을 해치기도 했다. 둘째, 이러한 상황은 한양 궁궐의 우수한 입지 특성, 조영철학과 기법 등 태생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궁궐이 입지한 '좋은 터'는 인간에게만 유용했던 것이 아니라 범과 표범의 활동에도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셋째, 우수한 입지 환경에 더해 궁궐과 도성 주변에 대한 산림 정책은 범과 표범의 출몰을 촉진했을 수도 있다. 즉 금송과 금장, 금산, 봉산 등의 관리 정책은 산과 산이 이어진 지형에 숲을 우거지게 했고 이는 범과 표범의 은신처이자 이동 통로의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 궁궐을 비롯해 한양 도성 내외에 범이 출몰하는 것에 대한 대처 방식은 역대 왕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중에서 특히 정조는 궁궐에 출몰하는 범과 표범에 대한 실제적인 현상 파악과 현실적인 대처 방법을 강구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다섯째, 이들을 종합해볼 때, 궁궐과 도성에 범과 표범의 빈번한 출몰은 역설적이지만, 피상적으로 언급되어온 조선 궁궐의 '친자연성' 혹은 '친환경성'을 보여주는 실증적 증거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추후 연구 과제로 궁궐의 문화사와 생태사 등의 관련 학제간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생태 변화 추이와 관련된 보다 과학적이고 심화된 후속 연구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정릉(貞陵) 이장과 광통교(廣通橋) 개수를 통해 본 조선 초기 지배 이데올로기의 대립 (Collision of New and Old Control Ideologies, Witnessed through the Moving of Jeong-regun (Tomb of Queen Sindeok) and Repair of Gwangtong-gyo)

  • 남호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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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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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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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정릉(신덕왕후릉)의 축조와 이장에 얽힌 논란은 조선 초기, 신구(新舊)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의 충돌이 잘 드러난 사례이다. 태조의 경처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은 도성 안에 조성되지만 태조 사후, 태종에 의해 도성 밖으로 이장되고 그곳에 남아 있던 석물들은 청계천의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쓰인다. 야사에서는 태종이 강씨를 저주하기 위해 도성 밖으로 능을 옮기고 남은 석물들로 광통교를 만들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고 전한다. 태조 말년, 강씨와 태종은 대립하던 관계였으나 태조가 왕으로 옹립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정치적 동반자에 가까웠다. 정릉이나 광통교와 관련된 실록의 기록은 더 담백하다. 정릉의 천장은 능묘가 도성 안에 있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정부의 상언을 따른 것이다. 광통교 개수를 위해 정릉을 격하하고 이장시켰다는 주장에는 사실 관계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논자는 광통교 개수에 정릉의 석물이 재사용된 것에 대해 당시 도성 안팎에서 건축자재소요량이 급증하여 효율적인 조달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였다. 정릉이 도성 안에 조성되었다가 다시 도성 바깥으로 이장된 원인은 태조와 태종이 가졌던 사상적 배경의 이질성에서 찾았다. 태조는 유교국가의 통치자였으나 죽은 왕비를 위해 도성 내에 원찰과 무덤을 조성한다. 여기에는 불교의 힘을 빌려 죽은 신덕왕후의 권위를 위의하고 지지세력을 규합하고자 한 노림수가 있었다. 원의 다루가치 집안에서 태어나 지방군벌로 성장한 이성계는 높은 유학적 소양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호불적 성향을 띄는 구체제의 인물이었다. 반면 태종 이방원은 고려 말 과거시험에 급제했던 엘리트 유생이었으며 주자학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유교국가에서 도성이 가지는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더 깊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 율령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시스템이 정립된 이래로 도성 바깥에 무덤을 만드는 경외매장의 원칙은 거의 예외 없이 지켜져 왔다. 정릉은 태조 개인의 강한 의지로 도성 내부에 조성되지만 왕 이전에 유학자였던 태종에게 이러한 모습은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태종은 즉위 후, 주도적으로 도성 재정비를 추진하는데 이는 '예치'를 강조하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한양도성의 경관에 명확하게 구현하고자 한 의지의 발현으로 보여진다. 정릉의 이장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진행되었던 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 청계천 가산(假山)의 버드나무 수책(樹柵)에 관한 연구 (A Case Study on the Willow Tree Fence(樹柵) in Gasan(假山) of Cheonggyecheon, Hanyang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 심순희;김충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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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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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8-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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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본 연구는 고문헌(古文獻) 기록과 도상자료(圖像資料)를 조사·분석하여 조선시대 수해 방지를 위해 계획적으로 조성된 한양도성(漢陽都城) 내 청계천(淸溪川) 가산(假山)에 식재된 버드나무 수책(樹柵)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동안 버드나무에 관련된 연구 사례는 있었으나 버드나무의 구체적인 활용사례와 그 역사적 배경을 조사·분석하여 그 원형적 가치를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진행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본 연구는 조선시대 청계천에 조성된 버드나무 수책의 사례를 확인하고 조성 배경과 지역적 특징을 조명함으로써 그 가치를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수재(水災)는 제일 큰 위해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6~18세기 조선은 홍수로 인한 피해가 심각하였다. 영조 시기에 이르러서는 도성의 사산(四山)이 모두 민둥산이 되었는데, 이는 잦은 홍수의 원인이 되었다. 1760년(영조 36)에 영조는 준천사업(濬川事業)을 통해 장마 때마다 넘치는 청계천 바닥을 준설하고 오간수문 양안에 조성된 가산에 버드나무 수책을 조성하여 수해를 예방하고 토양의 유실을 방지하는 조치를 시행하였다. 영조 시기인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광여도(廣輿圖)》 속의 <도성도(都城圖)>에는 오간수문(五間水門) 앞에 조성된 가산이 보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서 1760년(영조 36)에 버들을 양쪽 가산에 심었다는 기록을 검증하였으며, 1770년(영조 46) 제작된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를 통해 18세기 후반에는 오간수문 근처의 가산 위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어 우거졌던 사실도 확증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등의 고문헌 기록을 통해 청계천 준천사업과 버드나무 수책의 조성이 조선 전기인 15세기부터 조선 후기인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본 연구는 홍수 및 수해 방지는 물론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하는데 큰 바탕이 되었던 조선시대 버드나무 수책의 조성사례와 그 활용성을 조사함으로써 버드나무가 고유한 문화유산이자 전통 경관자원이었음을 알리고, 버드나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데 의의가 있다.

18·19세기 한양도성(漢陽都城) 안 궁묘(宮廟)의 입지와 위상 (The Location and Topology of the 'Gungmyo' in Hanyang Doseong during the 18th and 19th Century)

  • 송인호;조은주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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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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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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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is study was aimed at analyzing the location and topology of the 'Gungmyo(宮廟)' and in Hanyang Doseong(漢陽都城) during 18th and 19th century. Based on the changes of royal processions(行幸) which had been done between the Gungmyo and the Palace, the Gungmyo can be a barometer of cognition where the city center was. Hanyang Doseong was the the capital of Joseon(朝鮮) which had established by king Taejo(太祖). The city had been organized with Gyeongbok-gung(景福宮) as the center. However, after the Imjin War(1592), Gyeongbok-gung was destroyed and urban space was reorganized with Changduk-gung(昌德宮) which reconstructed first. As most kings in late Joseon dynasty had mainly stayed in Changduk-gung, lots of Gungmyos where a memorial service for king's relatives had been held were established in and around the palace and the frequency of visiting the Gungmyo varied by political purpose. Therefore, the location of the Gungmyo and the rounte of parade were important to impress on the center of urban space. In 18th century, lots of King's procession had been done with Changduk-gung as departure point. The king used to start from Donwha-mun(敦化門), and the routes included main street around Changduk-gung. It shows that the urban center focused on the east of the city. On the other hand, when the king lived in Kyeonghee-gung(慶熙宮), a secondary palace in late Joseon dynasty, the parade started from Hungwha-mun(興化門) and the urban center was expended to the west. Since Gyeongbok-gung had reconstructed in 1865, recognition scheme of urban space had changed from Changduk-gung to Gyeongbok-gung as the center. When the Gungmyo relocated western side of Gyeongbok-gung, spatial proximity of the palace and relation with facilities around downtown fed into changing the route of king's par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