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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루이지애나의 베트남 移民集團과 佛敎: 鎔鑛爐 속의 成分? 혹은 文化的 多樣性의 成分? (Vietnamese Immigrants and Buddhism in Southern Louisiana: Ingredients for 'Melting Pot' or for Cultural Diversity?)

  • 이영민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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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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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85-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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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1975년 베트남 공산화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베트남인들의 미국 이민은 짧은 기간동안 대규모로 진행되어 1991년 현재, 약 850,000명에 이르고 있다. 그들의 다문화사회로의 인구이동과 문화적 적응의 문제는 그 동안 사회과학계의 쟁점으로 부상하여 적지 않은 연구들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들은 베트남 이민집단을 단순히 미국 다문화사회의 여러 민족집단들 중 하나의 하위민족으로, 즉 주류집단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어떻게 하위민족으로서 미국사회에 편입되고 있는가?, 어떻게 새로운 장소에 정착하고 그 장소를 고유하게 창조해 나고 있는가? 등의 문제를 베트남인 자신의 입장에서 개진한 연구는 매우 적은 실정이다. 본 연구는 미국 루이지애나주 배톤루즈시 근교의 베트남 불교사원 신도들의 생활과 적응전략을, 즉 새로운 장소에서의 사회환경과 문화적 정체성 형성과정과의 관계를 민속지적 연구방법을 통하여 다루고 있다. 참여관찰과 인터뷰는 1992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실시되었다. 남부루이지애나, 배톤루즈시, 그리고 불교사원, Chua Tu-Bi(慈悲寺)는 베트남 이민집단과 주류문화집단과의 상호교류의 장으로서 일종의 공간적 텍스트이다. 불교사원은 베트남인들의 내적 평화를 연마하는 종교적 목적을 달성키 위해 그들 자신들의 손으로 건조되었다. 현세의 모든 고통을 부의 추구와 같은 인간 자신의 욕망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불교이념은 직관적 사고와 자기성찰을 통한 정신적 풍요를 추구한다. 이러한 불교의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이념에 바탕을 둔, 물질적 풍요를 위한 근로정신을 강조하는 미국적 가치와 어긋난다. 이러한 베트남 불교의 중교적 특징은 변화된 새로운 환경에서 재창조되어 오히려 그들의 적응전략으로서 기능한다. 사회, 경제적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경제적 부의 축적을 통한 계층상승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불교사원은 그들이 불교이념을 연마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세계에서 주류집단의 이념을 따르면서 겪게되는 정신적 피로를 위로 받는 장소이기도 하다. 불교의 정신적 풍요라는 가치가 주류사회의 가치와 전략적으로 혼합되어 변화된 현실에의 적응에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불교를 통한 동족집단의 결속망이 이중노동시장이라는 미국사회의 불평등한 경제 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류집단의 외부적 범주화에 의한 격리(segregation)를 그들은 내부적 범주화를 통한 응집(congregation)으로 승화시켜 계층상승의 도약대로 삼고 있다. 불교사원은 베트남 이민자들간의 상호 결속을 도모함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공고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불교사원은 주류집단이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하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도 미국사회에 통합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일종의 가시적 상징이다. 그러나 다문화사회로의 국제인구이동을 통한 권력관계의 변화가 그들로 하여금 하위집단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전응전략을 창출해 내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정체성의 변화는 필연적이라 하겠다. 민족정체성은 사회공간적 현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가변적 현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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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점은행제 학사학위과정 안경광학전공 학습자의 특성에 관한 연구 - 경기지역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tudents' Characteristics of Ophthalmic Optics under Bachelor's Degree Course in Academic Credit Bank System - Focus on the Educational Institutions in Gyeonggi Region -)

  • 정세훈;박희경;이옥진
    • 한국안광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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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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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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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목적: 학점은행제 학사학위과정 안경광학전공 학습자를 대상으로 학습자 특성을 조사하여 안경사 계속교육으로서의 학점은행제 운영과 개선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방법: 학점은행제에 학습자로 등록한 전문학사 98명을 대상으로 학습자 특성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고 통계분석을 실시하였다. 결과: 학점은행제 선택 목적은 학사취득(51.0%)이 많았고, 정보경로는 학교 또는 직장선배(33.7%),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은 모교(31.6%)가 가장 많았다. 학점은행제 학습자에 대한 가족협조(72.4%)가 직장협조(46.9%)나 사회적 협조(39.8%)보다 높았다. 학점은행제 학사학위과정에 소요된 기간은 2학기(55.6%)가 가장 많았고 대학원 진학은 38.9%, 4년제 대학편입은 5.6%이다. 연령에 따라 학점은행제 정보경로(p<.05)와 교육기관 선택기준(p<.05), 직장협조(p<.01)에서 유의한 차이가 나타났다. 현재 근무처에 따라 학점은행제 선택 목적(p<.01)과 평균 등교일수(p<.05), 직장협조(p<.01), 어려운 점(p<.01)에서 유의한 차이가 나타났다. 출신 전문대학 학제에 따라 교육기관 선택기준(p<.01)과 가족협조(p<.05)에서 유의한 차이가 나타났다. 전문대학 졸업 후 학점은행제를 시작한 시기에 따라 정보경로(p<.05)와 교육기관 선택기준(p<.01), 직장협조(p<.05)에 유의한 차이가 나타났다. 결론: 안경사들의 계속교육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며 학습자의 특성을 고려한 학점은행제의 운영과 지원이 필요하다.

덕수궁 석조전 정원의 조성과 변천 (A Study on the Forming and the Transformations of Seokjojeon Garden in Deoksugung)

  • 김해경;오규성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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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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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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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연구는 석조전 정원 조성 과정과 변천을 사회적 배경에 따른 덕수궁 권역의 변천과 연계하여 분석하였다. 그 결과 정원의 변천 과정을 4단계로 구분하였다. 첫째, 개항기 말인 1896년에서 1914년이다. 1896년부터 1897년까지 경운궁은 법궁으로 조성되어 고종의 거처로 중화전과 석조전이 마련되었다. 석조전 건립 초기에는 브라운이 관여했고, 준공과 정원은 데이빗슨이 마무리했다. 정원 조성 과정에서 중화전 회랑이 훼철되고 돈덕전이 편입되었다. 정원은 중심부에 원형 기식화단과 축선을 겸한 동선을 지닌 단순한 형태였고 독수리 조각상을 세웠으나 곧 철거되었다. 둘째, 1915년에서 1932년으로 17년간 형태가 유지되었던 시기이다. 1911년 대한제국 말기 궁내부를 계승한 이왕직이 1915년에 주전과를 설치하여 덕수궁 내 건물들을 조사했다. 당시의 정원은 1차 조성 형태 요소 중 중심축선은 유지하였지만, 녹지대는 비대칭형으로 하였다. 세부화단은 원형이고 오픈 노트 기법과 경계부 식재를 했고, 세분된 동선을 조성했다. 셋째, 1933년에서 1937년까지로 석조전이 개방된 시기이다. 1932년 석조전을 상설미술관으로 개방하기 위해 많은 건물을 훼철했다. 새로 조성한 정원은 중심축과 연계된 동선 중심에 거북이 조각상이 놓인 직사각형 수반이 있는 형태이다. 넷째, 1938년에서 해방까지로 덕수궁이 공원화된 시기이다. 이왕가미술관을 건립하여 석조전과 브리지로 연결하였고, 정원은 선큰(sunken) 정원으로 변모했다. 분수대, 파고라가 도입되었고 이후 부분적인 변형이 있었으나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현재 남겨진 석조전 정원은 최초의 모습이 아니며, 따라서 본 연구는 석조전 정원에 대한 언설이 재작성되어야 함을 밝힌 것에 의의가 있다.

한성부 동촌(東村) 어의동지(於義洞池) 일대의 환경 특성과 장소적 의미 (A Study on Environmental Traits and Significance of Eouidongji Pond(於義洞池) Area in Dongchon(東村), Hanseong-bu(漢城府))

  • 길지혜;손용훈;황기원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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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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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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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고지도에서 한성부 성내 동쪽인 '동촌(東村)'에 표기된 못의 환경 특성과 장소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여러 문헌과 지도 자료를 검토하여 못의 명칭을 정리하였고, 연구에서는 그중 국가 공식기록과 지리적 명칭을 따라 '어의동지(於義洞池)'로 명명하였다. 연구 결과, 첫째, 입지 및 환경 특성을 보면 어의동지 일대는 도성 내에서 전원적 정취가 있는 지역이었다. 산자락 계곡부 물이 많이 모이는 지대에 있었고, 약 2천 평 정도의 필지 안에서 수위에 따라 못 경계가 변화하였다. 둘째, 조성 배경을 볼 때 어의동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못을 국초 도성 내 수체계를 관리하면서 함께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유수지 역할과 함께 연(蓮) 관련 부산물을 진상하는 연지(蓮池)로 운영되었고, 인근에 별궁이 활발히 이용되면서 함께 관리된 것으로 판단한다. 20세기 초 이미 매몰된 상태였고, 연지를 다시 수축하고자 했으나 식민지기 학교 부지로 편입되며 소멸하였다. 셋째, 어의동지는 개인이 완상하거나 멀리서 조망하며 자연경관 일부로 감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동촌에 진입하는 가로 가까이 있는 진입경관이었고, 주변 다른 행락지와 연계해 방문하기 좋았다. 어의동지의 입지 및 환경 특성, 조성 및 소멸 배경과 시대별 운영 관리, 당대의 이용과 경관 감상의 특성을 고찰한 결과, 어의동지는 국가적으로는 도성 내 수체계를 보완하면서 국용 연 수확물을 제공할 수 있는 실용적 가치가 높은 못이었다. 또한, 도시환경 차원에서는 넓은 면적으로 펼쳐진 수평적 랜드마크이자 효과적인 경계지물이었다. 그리고 한성부 지역민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열린 장소였고, 접근성이 높아 공공적 가치도 높았다.

한국의 기록물 둥록 및 기술에 대한 기록관리적 접근 (Registration and Description of Public Records in Korea : A Comparative Analysis of Korean Recordskeeping System with the International Standards)

  • 시귀선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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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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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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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기록물의 등록과 기술은 기록물의 생산배경과 업무행위 관련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 이용을 가능하게 하고 검색을 편리하게 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항목이다. 전자문서체제에서는 기록물이 일정기간 생산기관에서 활용되다가, 준활용단계가 되거나 비활용단계가 되어 기록물을 처리할 때에도 등록시 입력되었던 data 요소들이 그대로 활용되기 때문에, 전자기록체제 하에서 기록물의 등록사항은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본고에서는 한국에서의 기록물 등록 및 기술사항을 국제표준과 비교 분석하여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우선 등록부분에서는 기본등록단계에 내용기술을 넣어, 첨부여부 쪽수 결재사항 등을 기술하도록 하고, 각기 항목으로 되어 있는 첨부번호, 결재권자, 확인란 등은 생략한다. 세부등록단계에서는 발송방법, 발송등록 분류등록 전체 수정, 특수목록 등을 생략하되, 등록할 필요가 있는 것은 내용기술에서 서술한다. 다음으로 체제 판본 문서링크 적요 등 기록물의 구조와 등록된 체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보 즉 생산맥락 및 링크 등을 등록항목에 넣도록 한다. 기술부분에서는 우선 다층기술을 채택하되, 퐁과 시리즈 계층의 기술을 도입한다. 국제표준정리기술규칙인 ISAD(G)와 ISAAR(CPF)를 적용하여 전거통제 정보 및 비고영역과 마찬가지로 체계와 구조에 관한 정보, 예컨대 기록물의 범위 및 내용, 기술단위의 한도 및 매체, 행정 기관연혁 검색도구 등과 아키비스트의 주기 및 기록물 이력 기록물처리 기록(Documentation)을 기술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표준을 마련하되, 전자기록물 관리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항목들을 편입한다. 또한 제안된 사항을 실행하기 위해 법령개정이나 통합적으로 자동화도니 영구보존기록물관리 시스템을 조정하며, 등록과 기술을 수행할 훈련받은 전문인을 배치한다.

함양상림 식생의 생태적 특성 변화 연구 (A Study on Ecological Characteristics and Changes of Vegetation in Hamyangsangrim)

  • 김동욱;이승주;이수동;김지석;한봉호
    • 한국환경생태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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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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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7-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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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함양상림 및 주변지역의 보다 효율적인 보존 관리방안 수립을 위한 기초연구로서 대상지의 현재 생태계 특성을 파악하고 과거 연구 자료와의 비교를 통한 생태계 변화 양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수행되었다. 생태계 특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대상지의 토지이용 및 현존식생, 식물군집구조, 토양의 이화학적 특성을 분석하였으며 과거 연구자료와 비교하여 생태계변화 경향을 파악하였다. 조사 분석결과 연구대상지의 토지이용 및 현존식생 유형은 수림지, 조성녹지, 광장 및 오픈스페이스, 나지 및 포장지, 수면, 시설물, 경작지, 기타 등 8개 유형으로 대분류 되었으며 세부 특성에 따라 총 38개 유형으로 세분되었고 이 중 수림지를 구성하는 식생군락은 총 15개 유형으로 구분되었다. 현존식생 변화를 살펴보면 2003년과 2010년 모두 졸참나무-개서어나무군락(2003년 48.3%, 2010년 48.1%)이 가장 넓었으며 졸참나무군락(22.0% ${\rightarrow}$ 7.9%)이 크게 감소하였고, 개서어나무-졸참나무군락(11.6% ${\rightarrow}$ 23.2%), 졸참나무-느티나무군락(2.2% ${\rightarrow}$ 7.9%)이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림지 주변의 경작지가 조성녹지지역으로 변화하였으며 수면, 나지 및 포장지 등이 증가하였고 수림지 내부의 훼손지가 복원되면서 시가화지역의 면적은 감소하였다. 대표적인 6개 유형의 식생군락에 대한 식물군집구조 변화를 파악한 결과 주로 아교목층을 형성하던 수목의 교목층 편입과 아교목성상 수목의 세력 확장 및 신규 출현, 관목층의 발달로 인한 관목층 출현 개체수의 급격한 증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또한 전체적으로 졸참나무의 세력이 감소하였으며 개서어나무 및 느티나무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2003년 이후 이루어진 주변 정비사업 및 수림지 내부 출입제한 등의 관리에 따른 건전성 회복 및 식생천이의 결과로 판단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향후 교목층은 개서어나무, 느티나무가, 아교목층은 개서어나무, 느티나무, 나도밤나무, 사람주나무, 쪽동백나무, 당단풍나무 등이 우점하는 군락으로 변화될 것이다.

현장의 시각으로부터 구조화된 자활 개념 탐색 연구 : 자활사업 실무자의 이해를 중심으로 (An exploratory study on practice-oriented reconceptualization of self-sufficiency : Service providers' reflections on their own experiences from the field)

  • 최상미;홍송이
    • 사회복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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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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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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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자활은 지난 이십년간 우리나라의 대표적 근로연계복지제도로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에 대한 합의 없이 정책, 학계, 현장에서 제각기 이해되고 사용되어 왔다. 이는 최근 자활사업의 다양한 환경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자활의 정체성 위기를 초래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자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현장 실무자들의 자활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반영하여 자활 개념 정립을 시도한다. 총 35명의 자활사업 실무자들에 대한 6번의 집단심층인터뷰를 통해 자활 개념에 대한 심층적인 질적 자료를 수집하였다. 연구 결과 자활사업 실무자들은 '취창업을 통한 노동 시장에의 편입', '소득창출을 통한 수급 탈피'와 같은 정책 목적과 성과에 부응하기 위해 '경제적 측면의 성과'에 초점을 두고 정책지향적으로 자활을 이해하는 동시에 실천가의 관점을 반영하여 '이용자의 역량강화와 삶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자활을 이해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구체적으로 본 연구는 자활실무자들이 근로기회 제공과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과정으로서 경제적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정서적 역량강화와 동기부여, 근로장벽 극복과 같은 정서적 측면, 사회적 관계 형성과 회복을 통한 사회통합과 같은 사회적 측면, 그리고 삶의 회복과 주체적 삶을 위한 통합적 지원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자활에 대한 상반된 이해는 실천가들이 사회복지라는 직업적 미션과 성과지향적인 조직의 운영 사이에서 이용자의 역량강화 과정에 초점을 둘지, 아니면 단기적으로 성과평가를 위하여 취창업률과 탈수급률이라는 가시적 실적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등 현장의 혼란과 왜곡된 자활 운영을 부추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연구 결과로부터 본 연구는 결과이자 과정이며, 경제적, 정서적, 사회적, 일상생활 측면을 포함하는 다차원적 개념으로 자활을 이해할 필요성과 함께 이러한 자활의 특성을 반영한 실천 현장의 재설계의 필요성과 함의를 제안한다.

일본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 개념 - 최고재판소 판례법리를 중심으로 - (A Definition of an Employee under the Trade Union Act in Japan)

  • 송강직
    • 법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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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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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7-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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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고는 신국립극장운영재단사건 및 INAX메인트넌스(メンテナンス)사건(事件)에서의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을 소재로 하여 이른바 개인도급계약형식에 따라 노무제공을 한 자의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성을 검토한 것이다.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관한 연구결과는 세 가지의 문제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근로자성을 인정한 결론에 있어서는 평가할만하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판례법리, 즉 독립된 계약자 형태의 노무제공에 대하여 지나치게 법적인 관점에서 파악함으로써 그 판단결과는 노무제공의 실태와는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성 판단에서와 같이 노동관계법에서도 완화된 종속성 내지는 실태에 입각한 판단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둘째,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성 판단에 대한 일반법리가 전개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종래의 CBC관현악단사건에서와 같은 종합적인 판단이라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사례판단에 한정되어, 명확성 및 예측가능성이 결여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노동조합법 제3조의 근로자 개념과 동법 제7조 2호의 고용하는 근로자 등과의 단체교섭문제에 있어서 최고재판소는 이들 두 규정의 관계에 대하여 명확한 입장을 밝힌 바가 없다. 학설상 다수의 입장은 동 법 제3조의 근로자와 동 법 제7조 2호의 근로자는 전자가 넓은 의미로 보아야 하고, 후자는 자회사 근로자의 모회사와의 관계 등을 포함하여 일정한 고용관계가 형성되는 경우에는 부당노동행위의 구제신청과 관련하여 이를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재판소는 수급인 근로자들의 도급인에 대한 단체교섭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에벤키족 씨족명 분포 현황 및 의미 분석: 바이(Baj), 킴(Kim), 샤마/사마(Shama/Sama)를 중심으로 (The Analysis of the Distribution and Meaning of the Evenki's Clan Name: Centering on Baj, Kim, and Shama/Sama)

  • 엄순천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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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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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3-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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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논문에서는 알타이어족, 예니세이어족, 고립어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에벤키족 씨족명 어근 바이, 킴, 사마를 중심으로 해당 씨족명의 기원과 의미, 분포현황, 이동경로, 해당 씨족명이 존재하는 시베리아 제 민족 사이의 친연 관계를 규명했다. 씨족명 '바이'의 기원에 대해 아직 명확하게 규명된 바는 없지만 그 의미를 둘러싸고 '북쪽', '흰색', '풍요로운' 혹은 '자연의'라는 세 가지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씨족명 '바이~'는 시베리아 제민족 사이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먼저 알타이제어 만주-퉁구스어파에 속하는 에벤키, 에벤, 나나이, 울치, 오로크, 오로치, 만주족 그리고 몽고어파와 투르크어파에 분포되어 있으며 예니세이어족이나 고립어족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이 어근의 씨족명이 에벤키족 사이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이 씨족명은 프리바이칼리예의 에벤키족에서 기원하여 인근의 부랴트, 몽골, 야쿠트족 사이로 넓게 전파된 뒤 이후 동쪽으로는 아무르강의 닙흐족, 북쪽으로는 유카기르와 케트족 같은 예니세이 고아시아제어권 민족, 서쪽으로는 엔츠족과 셀쿠프족 같은 사모예드제어권 민족에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씨족명 '킴~'은 먼 고대에 기원하며 만주-퉁구스어파에 존재하는 유사한 단어, 에벤키족 씨족명 어근 '킴~'과 음성학적으로 유사한 중국인의 성 '김', 에벤키족의 설화를 바탕으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씨족명 '킴~'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금, 쇠, 돌과도 일정정도 관련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 씨족명 '킴~'은 시베리아 소수민족 사이에 널리 분포되어 있지만 에벤키족 사이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중국 인근과 페르시아에도 분포되어 있었다. 씨족명 '킴~'의 기원은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지만 먼 고대 바이칼 인근의 에벤키족에 편입된 후 만주-퉁구스의 제민족 사이에 널리 전파되었고 더 나아가 투르크제민족 사이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씨족명 '샤마/사마~'는 알타이어족의 만주-퉁구스제어권, 투르크제어권, 우랄어족의 사모예드어제어권 민족 등 시베리아의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음성적 형태도 무척 다양한데 에벤키족 사이에 가장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씨족명이 알타이어족과 우랄어족의 제민족 사이에서 발견된다는 점은 이 두 어족의 민족들이 아주 먼 과거에 관련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 씨족명은 오로크족을 제외한 만주-퉁구스제어권의 모든 민족 사이에서 발견되는데 이에 대한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

동궐(東闕) 추경원(秋景苑)의 조영과 변천에 관한 고찰 (A Study of the Construction and Change of Chugyeongwon in Donggweol)

  • 오준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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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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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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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동궐(東闕)에 실존했던 추경원(秋景苑)의 조영과 변천 양상을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세부적으로는 추경원의 조영 위치와 범위, 조영 배경과 의도, 소속 체제와 공간적 변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추경원은 창경궁 함인정(涵仁亭) 주변 또는 시민당(時敏堂)과 진수당(進修堂) 사이의 공간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관련 사료에 따르면 추경원은 도총부(都摠府) 서쪽, 협상문(協祥門) 안쪽, 숭문당(崇文堂) 인근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동궐도형(東闕圖形)"을 통해서도 각각의 조건에 부합하는 추경원의 조영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적 실측도 형식의 "창경궁배치도(昌慶宮配置圖)"에 따르면 오늘날 추경원은 창경궁 문정전(文政殿)과 숭문당 남쪽의 녹지공간에 해당한다. 둘째, "동궐도(東闕圖)"에서 추경원은 담장으로 한정된 대지에 수목들이 생육하던 녹지공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부에 일체의 인공적 시설은 도입되지 않았다. 또한 추경원은 주변 대지보다 표고(標高)가 높은 지형에 입지했다. 특히 추경원의 구성 형식과 입지 특성은 한양에 소재했던 궁궐 외원(外苑)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궁궐 외원의 운영 양상을 고려하면 추경원 역시 지세(地勢)의 보존과 배양(培養)을 위해 조영되었다고 판단된다. 셋째, 조선 후기에 걸쳐 추경원은 동궁(東宮)과 함께 창덕궁 또는 창경궁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추경원은 동궁 영역에 포함된 왕실정원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본래 담장과 협문(夾門)으로 구성되었던 추경원의 서쪽 경계부는 이후 담장과 행각(行閣)이 결합된 형식으로 변모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추경원은 각종 개발행위로 인해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소실(消失)되어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