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출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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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푸난 목조불상에 대한 시론(試論) (A Preliminary research on Sixth-century Wooden Buddha Images from Funan)

  • 노남희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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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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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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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논문은 지금의 베트남 남부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 출토된 목조불상에 대한 시론적인 연구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는 약 서른여 점의 목조불상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옥 에오(Oc Eo) 등 동남아 최초의 국가였던 푸난(Funan)의 주요 유적지에서 발견되었고, 대개 6세기 무렵으로 추측되므로 푸난의 불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불상들은 석조불상과 함께 동남아 초기 불상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푸난 목조불상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과 양식적 특징을 종합하면 대부분 6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공개된 푸난 목조불상 가운데 형상을 비교적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8점에 대해 도상과 양식을 분석하였는데, 이들은 자세와 착의법, 수인에 따라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세장한 신체와 몸에 달라붙는 대의의 표현은 기본적으로 인도 굽타시대 사르나트 불상 양식을 공통적으로 따르고 있었으나, 유형에 따라서는 직립한 자세와 편단우견형의 착의법, 스리랑카 불상에서 주로 보이는 설법인(vitarka mudra)을 보이는 등, 남인도 불상 양식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푸난의 불교조각가들이 인도의 주요 불상 양식을 적절히 섞어 새로운 불상 양식을 창안했음을 알려준다. 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푸난 목조불상의 출토 현황이다. 같은 유적에서 발견된 비슷한 시기의 힌두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진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데 반해, 불상만은 유독 나무로 많이 만들어진 현상에 대하여 불상과 나무라는 재질 사이에는 단순한 제작상의 이유가 아닌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음을 상정해 보았다. 불교 문헌상 전해지는 최초의 불상은 바로 전단목이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우전왕상'이다. 우전왕상은 비슷한 시기인 6세기 무렵 중국 남조에도 알려져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남조에는 푸난에서 가져왔다는 '전단서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우전왕상에 대한 이야기가 푸난에도 공유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나아가 푸난에서 나무로 불상을 다수 제작하게 된 주요 동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출토의서에 보이는 '제상(諸傷)'과 전래문헌의 비교 고찰 (Comparison of Zhusang Between as Discovered in a Medical Book Excavated in China and Other Classical Books)

  • 이경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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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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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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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Objectives : This paper studies Zhushang, which is the name of a disease found in excavated books. Zhusang is the first disease listed in Wushierbingfang, which is a medical textbook excavated at Mawangdui, and Zhusang was followed by diseases such as Jinshang and Renshang. The paper studies what disease each of the word is refering to in terms of graphonomy, and compared the difference of their treatment from other classical texts. Methods : The scope of the study of this paper includes the excavated textbooks that seem to contain any disease related to Zhusang, and the two major text books of these are Wushierbingfang and Wuweihandaiyijian. Then Shennongbencao jing, which is the one of the earlier books on herbology, and Bencao gangmu, which was written based on the former, wer used to make comparisons. Parts in Donguibogam that seem to be related to the parts in the excavated texts were also compared. The study was done by first performing historical research on the names of the diseases in the excavated books, and compared them with the contents of the classical texts. Results : The Zhushang discovered in Wushierbingfang refers to wounds caused by metal or wood. It was interesting how they created a word for diseases depending on the cause. Only Jinshang is found in Wuweihandaiyijian, and the fact that different causes gave way to different names tells us that they had corresponding treatment. The categorization of Zhushang, Jinshang, and Renshang is corresponded better in Donguibogam than Chinese medical books.

도자기 수리복원 방법의 변천과정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Changes Process Repair and Restoration Method of Ceramic)

  • 양필승;서정호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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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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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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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손상된 도자기는 고대부터 여러 가지 방법과 재료를 사용하여 수리복원 되었다. 도자기 수리복원의 역사는 전통적인 수리방법을 이용해 실생활에서 활용 가능한 재료들을 사용하던 방식에서 새로운 재료의 도입과 다양한 처리기법의 시도 및 사용된 재료의 분석에 이르는 전문적인 분야로까지 그 영역을 넓히며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우리나라의 도자기 수리복원 방법의 변천과정은 출토유물과 문헌자료, 분석 등을 통해 조사한 결과, 동물이나 식물에서 추출된 접착제, 석회와 같은 복원제 등을 사용하여 수리 복원하던 천연재료 사용 시기(고대~일제 강점기 이전)와, 주사비 등 천연재료와 합성수지가 혼합되어 사용되는 시기(일제 강점기~1970년대), 새로운 처리기법과 재료가 도입되고 보존규범에 입각하여 수리복원이 이루어진 합성수지 사용 시기(80년대 이후)로 구분 할 수 있었다.

한·중·일 삼국의 고대 나막신 연구 (Ancient Wooden Shoes Research of Korea, China and Japan)

  • 인병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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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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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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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첫 번째 장에서는 도구로서의 나막신을 다루었다. 일본과 중국에는 있었고 한국에는 없었던 도구로서 나막신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발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소극적이기는 하나 형태나 기능에 있어 나막신의 요소를 갖추었고 아직 밝혀지진 않았으나 어쩌면 도로서의 나막신이 신발로서의 나막신의 전단계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앞머리에 언급했다. 두 번째 장에서는 신발로서의 나막신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최근 경산시 임당동과 부여군 능산리에서 각각 신라, 백제 나막신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최근 경산시 임당동과 부여군 능산리에서 각각 신라, 백제 나막신이 출토되었다. 동시대 인접한 국가인데도 두 나막신의 형태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반면 백제 나막신과 일본 고대 나막신은 놀랄 만큼 동일하다. 이 동일성의 원인을 여러 가지 문헌자료를 통해 고대 한 일 정치, 외교관계로 규명하려 노력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와당을 모티브로 한 주얼리장식용 문양 연구 (A Study on the Jewelry decorative pattern based on Wa-Dang in Unified Silla period)

  • 김경태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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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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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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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는 문화 & 소프트 파워(soft power)가 주도하는 지식정보사회에 있어서 전통문화의 유물자산을 활용한 문화상품 개발을 전제로 진행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전통건축에서 출토된 와당 유물의 문화콘텐츠 상품 가능성을 탐색하고 주얼리 디자인에 활용성이 높은 상품화 모티브의 확장성을 넓히는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먼저 문헌과 매체 연구를 통하여 와당의 원형과 소재, 용도, 크기, 의미, 조형적 심미성을 파악하였다. 고찰된 와당중에서 카테고리별 대표성과 모듈·패턴화 가치가 있는 10종류의 와당을 선택하여 '형태적 단순화 기법'으로 원형이미지를 추출·모듈화하였다. 문양구성 배열형식 체계화 방법인 '수학적 대칭성 분석기법'에 근거하여 문화콘텐츠산업 및 주얼리디자인 개발시에 활용할 수 있는 평면적 조형요소를 도출하였다. 향후 주얼리산업에서의 활용성 확대를 위하여 2D 디지털이미지로 제시하였다. 향후에도 전통문화를 매개로 하는 다양한 문화콘텐츠산업에 관한 연구가 더한층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조선시대 회격·회곽묘 출토 삽(翣)에 대한 고찰 (A Study on the Excavated Sab(a funeral fan) from Lime-filled Tomb and Lime-layered Tomb during the Joseon Dynasty)

  • 이승해;안보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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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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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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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삽(?)은 유교 예법에 따른 상장례(喪葬禮) 도구로 나무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백포(白布)나 두꺼운 종이를 붙여 그림을 그린 후, 자루를 달아 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례기(禮記)"에 따르면 삽은 주대(周代)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나타난 삽의 용례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본고에서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회격 회곽묘에서 발견되는 삽의 발굴 사례 및 문헌 기록을 통해 그 용례와 제작방식, 시기에 따른 유물의 특징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삽은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개수와 그리는 문양이 다른데, 사대부가에서는 주로 '아(亞)'형의 불삽 1쌍과 구름 문양을 그린 화삽 1쌍을 사용하였다. 삽의 크기는 너비가 2자[척(尺)], 높이 2자[척(尺] 4치[촌(寸)]로 만들었는데 초주지나, 저주지로 두 번 싸고, 세 번째는 연창지로 쌌다. 그리고 나서 백저포, 마포, 무명, 공단 등으로 덮었다. 그 양면에 보불을 그리고 구름 변아(邊兒)에 운기를 그리는데 대개 주사 또는 진사를 사용하였다. 사대부가 회격 회곽묘에서 출토되는 삽은 광중에 부장된 것으로, 삽자루와 분리된 형태이다. 즉, 출토되는 삽은 발인행렬시 삽을 매달았던 5자 길이의 삽자루는 태워 없애고, 관의 좌우에 세워 넣은 것이다. 출토 유물의 검토를 통해서도 제작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출토된 유물은 각(角)의 개수에 따라 각이 3개 달린 것과 2개 달린 것으로 대별된다. 먼저 각이 3개 달린 것(유형 I) 중에는 나무 통판을 사용하거나 대나무를 납작하게 갈라, 바구니처럼 엮은 것도 있다. 각이 3개인 삽은 비교적 조선 전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에 비해 그 제작방식이 다양한 편으로 생각된다. 반면 각이 2개 달린 삽의 경우에는 비교적 정형화된 제작방식이 보인다. 직사각형이나 역사다리꼴로 몸통부분을 만든 후, 2개의 각이 달린 삽의 윗부분을 연결한 형태이다. 다만 상단면을 곡선(유형 II) 또는 직선(유형 III)으로 처리하는 것이 다르다. 이러한 제작방식은 각이 3개 달린 것에 비해 간단하며, 제작기법 상의 차이는 크지 않다. 특히 상단면을 직선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분석에 사용된 30건 중 묘주의 몰년, 즉 삽의 제작 연대가 명확한 것만 선택하여 분석한 결과, 유형 I은 16세기 전반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유형 II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후반, 유형 III은 17세기 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요컨대 삽의 형태는 유형 I에서 유형 II로, 다시 유형 II에서 유형 III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는 변화의 시기로 유형 II III이 혼재되어 있다. 유형을 크게 3가지로 구분하였으나 유형 II III은 각이 2개인 측면에서 그 형태가 유사하다고 볼 때 주목할 만한 전환기는 16세기 중반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유형 I은 유형 II III에 비해 제작 과정상 공이 더 많이 들어갈 것으로 생각되며, 후대로 내려올수록 경제성의 원리에 따라 삽의 형태 및 제작방법도 간소해진 것으로 보인다. 상장례의 간소화 경향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예장(禮葬)이 몇 차례 중지되는 사건들을 통해 임진왜란 이후에 가속화된 변화로 볼 수 있다. 삽의 경우 이미 16세기 후반부터 간소화되고 있었으며, 심지어 18세기에는 삽을 따로 제작하지 않고 구의(柩衣) 및 관(棺)에 직접 그리는 현상까지 초래하였다. 그러나 형태적으로 단순화 되는 과정에도 "례기(禮記)"의 삽 사용 규정은 지켜지고 있어, 그 의례의 형식은 합리적으로 간소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지역(湖南地域)의 왜계자료(倭系資料)와 전방후원형고분(前方後圓形古墳) (The Relics of Wae Lineage and the Keyhole-Shaped Mounds in the Honam Area)

  • 土田純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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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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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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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호남지역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일 고고 고대사학 연구자 사이에서 항상 큰 관심을 받았던 지역이다. 근래 이 지역에서 왜계 고고자료 발견 사례가 양적 질적으로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선행 연구와 견해를 재검토할 필요가 커지고 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기존에 13기로 알려졌지만 최근 발견 사례가 17기까지 증가했다. 한 곳에서 3기가 조영된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으며, 또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를 특징짓는 형상식윤(形象埴輪)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호남지역 출토 왜계 고고자료에 대한 선행연구는 특정 자료나 특정 유적 유구에 한정된 사례가 많았다. 본고에서는 호남의 모든 왜계 고고자료를 대상으로 수량 고고자료의 종류 출토 위치를 파악한 후 그 변천을 추적하였다. 시기별 특징이나 변화상 등을 바탕으로 왜와 마한세력의 관계 의도 동향을 문헌 자료 등과 관련시켜 검토하였다. 호남지역 출토 왜계 고고자료는 5세기 전엽부터 증가 및 광범위한 분포를 보여주며 7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4세기 말~5세기 전엽에는 왜계 무구와 왜계 매장주체부, 5세기 중엽~후엽에는 수혜기(須惠器)(계(系)), 5세기 말~6세기 전엽에는 전방후원형 고분과 왜계 횡혈식석실, 6세기 중엽~7세기 초에는 왜계 무구 석침이 중심을 이루어 시기마다 양상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4세기 말~5세기 전엽의 왜계 고고자료에 대해서는 이 시기에 집중된 백제와 왜의 왕래 기사를 근거로 외교 사절단을 수행했을 무인계층과의 관련성을 상정했다. 5세기 중엽~후엽에는 수혜기(須惠器)(계(系)) 토기가 호남 내륙부로 확산되었다. 물자의 집적에 유리한 지점에서 주로 출토되는 경향이 엿보인다. 전방후원형 고분의 피장자를 북구주(北九州) 제세력에 속한 왜인을 중심으로 한 교역자 집단으로 해석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대체로 기본적으로 기존 수장묘가 조영되지 않던 지역에서 특별한 세력 기반 없이 돌연 출현했다. 그러나 재지인의 협조 없이 전방후원형 고분을 축조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일본 현지와 호남지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구축 기술 차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한편 일부 전방후원형 고분은 재지 수장묘와 동시기 아니면 직후에 조영되었다는 점에서 재지 집단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추정할 수 있다. 5세기 초 금관가야가 몰락하자 왜 제국(諸國)은 새로운 교섭 상대로 호남지역을 선택하였다. 그 배경에는 왜에서 구하기 어려운 (지하)자원이나 물자를 확보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약 200년에 걸쳐서 사용되고 매장된 호남지역의 왜계 고고자료는 왜인의 다양한 교섭 노력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신안선 출수 청자과형소주자(靑磁瓜形小注子)의 용도에 관한 시론 (A study on the small melon-shaped celadon ewer found in the Sinan shipwreck)

  • 이명옥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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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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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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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고는 신안선에서 출수된 소형의 청자과형주자가 주자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크기가 작고 형태적인 특성상 일반적인 '주자'의 용도인 다구(茶具), 주구(酒具)로는 기능적으로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는 것에 착안하여 용도를 밝히고자 하였다. 따라서 신안선에서 출수된 청자과형소주자를 비롯하여 함께 출수된 소형의 자기제 주자를 대상으로 형태적인 특징을 분석하고 중국과 일본의 출토품, 문헌자료, 회화작품 등에서 용례를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신안선에서 출수된 소형 청자과형소주자는 생산지와 유적 출토품을 통해 남송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원대까지 나타나는 기형임을 알 수 있었다. 또 신안선에서 함께 출수된 소형의 여러 자기제 주자와 비교해볼 때 주구, 뚜껑, 손잡이 등의 형태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주구, 다구로서 송·원대 다법(茶法)과 당시 술의 종류에 따른 용도를 검토해본 결과, 신안선 출수 청자과형소주자의 형태는 당시의 다법과 술의 종류의 변화와 관련성이 적었으며 다구, 주구로서의 실용성은 낮았을 것으로 보았다. 셋째, 용도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중국과 일본의 각종 문헌기록, 회화, 출토 유물 자료를 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송대 이후 문인들의 문방용구 애호와 더불어 연적이 유행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연적이 만들어졌다. 또한 송대와 명대의 문헌사료에서 연적의 형태에 대해 과형, 주자 형태 등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명대 회화작품에서 소형 주자가 벼루와 함께 연적으로 추정되는 문방용구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일본 중세시대의 회화에서 주로 확인되는 다구, 주구의 기물로는 소형 주자는 보이지 않고 손잡이가 달린 냄비, 탕병(湯甁) 등이 주로 나타난다. 당시 일본 중세시대 가마(窯)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기물 중 연적으로 알려진 것도 있었다. 이와 함께 일본의 15세기 화전서(花傳書)에는 책상 위에 놓인 문방용구 중 소형 주자가 보이고 주자에 작은 꽃가지가 꽂힌 모습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신안선 출수 소형 청자과형주자가 문방용구인 연적과 함께 화기로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영남지역 출토 금제 귀걸이의 성분 조성에 따른 유형 분류와 금속 재료 특성 (Type Classification and Material Properties by the Composition of Components in Gold Earrings Excavated from the Yeongnam Region)

  • 전익환;강정무;이재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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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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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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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영남지역에서 출토된 6~7세기 신라 금제 귀걸이 23점에 대한 성분 분석을 실시하고, 금판에 포함된 은(Ag) 함량을 기준으로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I 유형(20~50wt%), II 유형(10~20wt%), III 유형(10wt% 이하)으로 구분하였는데, I II 유형의 귀걸이 금판은 금(Au) 함량이 상대적으로 높은 부분에서 미세한 기공이 집중적으로 분포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금판 표면의 성분 차이 발생 원인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1) 표면 처리, 2) 제작 과정에서 열 확산, 3) 사금의 성분 차이, 4) 금의 정련 방법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금판 표면의 금 함량이 상대적으로 높은 부분에서는 미세한 기공이 집중적으로 관찰되며, 이와 관련하여 금 합금 표면에 의도적으로 금을 제외한 금속 성분을 제거하면서 금 함량을 높이는 고갈 도금(depletion gilding)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의도적인 표면 처리와 더불어 제작 과정에서 금판과 금속 봉 사이에 열 확산이 일어나 금판의 구리 함량이 높아진 사례를 세환이식의 분석 결과로 확인되었다. 금판의 재료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금판에 포함된 은(Ag)이 자연금에 포함된 것인지, 합금에 의해 추가된 것인지를 국내에서 채취된 사금 분석을 통해 살펴보았다. 분석 결과 평균적으로 13wt% 정도의 은이 포함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II 유형은 자연금의 범주에 포함되고, III 유형은 정련 과정을 거친 금, I 유형은 자연금에 은이 합금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III 유형의 경우 정련 과정을 거쳐 순수한 금을 만든 뒤 은을 합금했을 가능성에 대해 국내외 고대 문헌에 소개된 금 정련 방법을 조사하였다. 고대 정련 방법은 자연금에 포함된 은이 염화물 또는 황화물과 반응하여 결합됨으로써 제거되는 방법이었는데, 이러한 방법을 통해 순수한 금을 얻기 위해서는 장시간의 노력과 기술이 요구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정련 과정을 통해 순금을 만든 후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소량의 은을 첨가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원주지역 조선백자가마터의 성격 (A Study of Chosun White Porcelain Kiln Site in Wonju, Kangwondo)

  • 김경중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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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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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5-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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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현재까지 원주지역에서 확인된 백자가마터는 모두 12곳으로 지정면 판대리와 귀래면 귀래1리 등지에서 조선 전기 백자가마터 6곳, 귀래면 귀래2리와 손곡3리 등지에서 조선 후기 백자가마터 6곳으로 조선시대 전${\cdot}$후기에 걸쳐서 가마가 설치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원주지역에서 조선시대 전${\cdot}$후기 백자가마가 설치 운영될 수 있었던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원주지역에서는 양질의 태토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중앙관요인 경기도 광주 분원에서 원주지역의 태토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원주지역에 양질의 백토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주지역 백자가마는 광주 분원처럼 양질의 백토를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가마 운영시 필요한 땔나무가 풍부했다. 경기도 광주 분원에서도 땔나무가 부족하여 가마를 10년마다 한번씩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데 이런 사실을 통해서도 땔나무가 가마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광주 분원에 비해 원주지역의 경우에는 땔나무를 확보하는데 훨씬 유리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귀래2리 백자가마터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가마가 광주 분원에 비해 비교적 장기간 운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소규모생산체제였기 때문이기도 하게만 땔나무 때문에 가마를 이동해야 될 필요성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원주지역 백자가마터의 구조와 유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발굴조사된 귀래2리의 경우, 가마의 구조는 조선 후기 백자가마터인 순천 문길리${\cdot}$승주 후곡리${\cdot}$곡성 송강리${\cdot}$안성 화곡리${\cdot}$대전 장안동${\cdot}$보령 늑전리${\cdot}$ 충주 미륵리${\cdot}$무안 피서리, 그리고 중앙관요인 광주 분원리 2호가마와 동일한 평면형태로 후기 백자가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백자의 형식적 특정은 경기도 광주 중앙관요의 대량생산용 백자 기본형과 같은 형태를 지닌 지방백자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 분원과 원주지역은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상호교류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형과 태토, 유색면에서 경기도 광주 분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원주지역은 가마를 설치${\cdot}$운영하는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귀래2리 백자가마터의 예를 볼 때 가마의 구조는 조선 전${\cdot}$후기의 전형적인 백자가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유물에서는 광주분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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