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Summary/Keyword: 초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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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상업용 3차원 치료계획시스템인 Plunc의 임상적용 가능성에 대한 연구 (A Study of a Non-commercial 3D Planning System, Plunc for Clinical Applicability)

  • 조병철;오도훈;배훈식
    • Radiation Oncology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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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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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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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 목적 : 비 상업용 3차원 컴퓨터치료계획시스템인 Plunc의 구축 사례를 소개하고 이의 임상적용 가능성에 대하여 검증하고자 한다. 대상 및 방법 : 미국 North Carolina 대학에서 개발된 3차원 치료계획시스템인 Plunc의 소스코드를 제공받아, PC용 Unix인 Linux 환경의 Pentium Pro 200MHz(128MB RAM, Millennium VGA)에서 설치하였다. 본과의 6MV 광자선(Siemens MXE 6740)에 대한 출력인자, 최대산란비, 최대산란인자, 쐐기의 모양 및 감쇄인자 등의 빔데이터를 입력한 후, 일반적인 치료조건인 loom 깊이의 회전중심점에서의 심부선량백분율, 선량측면도, oblique 입사빔 및 공기간격 하에서의 선량계산 결과를 물팬톰에서의 측정치와 비교, 분석하였다. 결과 : Plunc는 원래 CT 영상데이터를 이용한 모의치료기로써 개발되어, 빔 설계가 매우 편리하도록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구성되어 있으며, BEV, DRR 및 영상합성 등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선량계산은 10초 정도가 소요되는 3차원 선량분포나 선량체적히스토그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실시간으로 실행되었다. Plunc에 의한 선량 계산 값을 측정값과 비교한 결과, 심부선량백분율의 경우, 선량증가영역을 제외하고는 $1\%$이내에서 일치하였다. 또한, 선량측면도의 경우, $5\%$가량의 선량감소를 나타내는 치료영역 크기 밖의 저선량 영역을 제외하고는 $2\%$ 이내에서 일치하였다. Oblique 입사 빔의 경우, 빔 중심축을 포함하는 평면상의 선량분포가 선량이 $30\%$ 이하인 영역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잘 일치하였다. 공기간격을 통과한 빔에 대한 선량측면도의 비교 결과, 중심 축에서의 선량 값에 대해 $5\%$의 오차를 보였다. 결론 : Plunc의 광자선량계산의 정밀도는 일반적인 치료조건하에서 약 $2-5\%$ 내외의 오차로써, 측정치에 대한 보정에 근거한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일반 치료계획시스템과 비슷한 수준이라 사료된다. 현재로서는 전자선에 대한 선량계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완전한 형태의 치료계획시스템이 되기 위해서는 향후, 전자선에 대한 계산모듈의 개발과 광자선 선량계산 또한 보다 정밀한 선량계산이 가능한 컨벌루션 방법과 같은 3차원 선량계산모듈의 개발도 필요하다. Plunc는 상업용 3차원 치료계획 시스템의 사용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여건의 병원에서 2차원 치료계획시스템과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한다면 2차원 치료계획시스템이 갖는 많은 제약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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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 4단지 문지 출토 소조편(塑造片)을 통해 본 회암사 사천왕상 (Four Heavenly Kings Statues of Hoeamsa in the Early Joseon Dynasty: Seen Through Clay-Fragments Excavated From the Yangju Hoeamsa Site)

  • 심영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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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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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8-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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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1997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된 회암사지 발굴조사 중 2001년에는 4단지 문지에서 사천왕상을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소조편들이 출토되었다. 회암사 사천왕상은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있었던 여말선초에 4단지 문이 건립되면서 조성되었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회암사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양주 회암사지 4단지 문에 봉안되었던 사천왕상의 특징 및 도상과 조성 시기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우선 출토 소조편을 천왕문에 봉안된 조선시대 사천왕상들과 비교하여 각 편의 대략적인 위치와 기능을 밝혔다. 또한 4단지 문지의 크기와 평면 형태를 조선시대의 다른 천왕문과 비교하여 회암사 사천왕상은 입상이었을 것이며 그 크기는 또 다른 입상인 법주사 천왕문의 사천왕상과 비례했을 것으로 보았다. 회암사 중창의 역사를 고려했을 때 4단지 문의 건립 완공 시기는 1376년과 1473년의 두 시기 중 하나로 볼 수 있고 회암사 사천왕상의 조성 시기 역시 이와 연동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출토 소조편 가운데 화염형 장식편은 조선시대 사천왕상 보관의 일반적인 장식 요소로서 고려시대에는 나타나지 않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 편의 존재는 회암사 사천왕상의 조성 시기가 고려시대보다는 조선시대일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유구 분석을 통한 건축사 연구에서도 4단지 문의 건립 시기를 대체로 15세기 후반으로 보는 의견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1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회암사 사천왕상은 이후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도상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새로운 전통으로서 정립되었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는 또한 거꾸로 4단지 문지의 건립 시기를 15세기 후반으로 보는 건축사학계의 의견에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十六世紀)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 이해의 확장 : <경포대도(鏡浦臺圖)>, <총석정도(叢石亭圖)>를 중심으로 (Broadening the Understanding of Sixteenth-century Real Scenery Landscape Painting: Gyeongpodae Pavilion and Chongseokjeong Pavilion)

  • 이수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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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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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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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을 받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2019년)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작품인 <경포대도>와 <총석정도>는 조선시대 회화사 이해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지대하다. 두 작품이 1557년의 관동 유람을 계기로 그려진 병풍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어서 16세기 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밝히기 위해서 본고에서는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에 담긴 경물의 내용을 살펴보고 제작시기와 양식상의 특징을 분석한 후,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 작품에 담긴 회화사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작품의 제작 배경은 <총석정도>의 발문으로 알 수 있다. 본고에서 박충간(朴忠侃)(?~1601)으로 비정한 정상일로(商山逸老)가 1557년 봄에 홍연(洪淵)(?~?)과 함께 금강산(풍악산)과 관동 지역을 유람하고 유산록(遊山錄)을 작성하였으며 시간이 흐른 뒤 그중 몇몇 명승지를 그려 병풍을 만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연은 자가 덕원(德遠)으로 1551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84년까지는 생존했던 인물이다. 박충간은 호가 남애(南崖)로서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을 고변하여, 그 공으로 형조참판으로 승진되고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된 후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 글로 작품의 제작 시기를 1557년의 유람 후이자, 발문을 쓴 박충간이 50대 이상이 되는, 1571년 이후 곧 16세기 후반경으로 보았다. 산수나 나무 표현 등의 화풍을 기준으로도 16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과 부합한다. 전술한 발문의 내용으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가 병풍의 일부였던 것을 알수 있으며, 발문이 써 있는 <총석정도>가 마지막 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포대도>를 보면 구도면에서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편파(偏頗) 3단 구도의 요소를 찾을 수 있으나 실경(實景)을 대상으로 하여 그 배치와 화법이 현실화된 양상을 볼 수 있다. 시점(視點)에 있어서도 여러 경물간의 관계나 경관의 특징이 효과적으로 표현되도록 사선각(斜線角)의 부감시(俯瞰視), 정면시(正面視) 등을 활용하여 경포대의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다각적(多角的)인 관점(觀點)을 보여준다. 산의 형태나 태점(苔點)의 사용은 1557년작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와 매우 유사하다. 16세기 안견파의 특징인 짧은 선이나 점으로 질감을 내는 단선점준(短線點皴)과 구름 모양 운두준(雲頭皴)은 현장감 있게 변모되었다. 조선 초기 산수화의 전통적인 구도와 연결성을 찾을 수 있는 <경포대도>와 달리 <총석정도>는 그 구도가 매우 파격적이다. 화면에 중심축을 두고 돌기둥들이 첩첩이 도열하여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데 근경(近景)의 돌기둥, 중앙의 사선봉(四仙峯), 절벽 위의 사선정(四仙亭)을 삼단계 정도의 깊이감으로 배치하여 화면에 공간감을 조성하였다. 중앙의 사선봉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비중을 점하고 있으나 수직적인 돌기둥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분질적(分節的), 평면적(平面的)인 양상으로 그려져 아직 입체적이고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조성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기둥의 아랫부분은 희게 하고 윗부분은 어둡게 하여 고원(高遠)의 상승감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각 기둥을 묘사하는 준법을 보면 기둥으로 설정된 면에 담묵을 바르고 그 위에 농묵의 가는 선들을 그어 총석의 질감과 쪼개짐을 묘사하였다. 붓끝을 사선으로 누르며 수직으로 내려 긋고 있어서 부벽준(斧劈皴)의 초기적 양상을 보인다. 일관되게 보이는 이러한 흑백의 대조, 수직적 준법의 구사는 앞으로 전개될 절파계(浙派係) 화풍의 유행을 예시해준다. 한편 기둥의 윤곽 및 균열문이 각각 다 달라서 실제의 특징을 살리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에 올라앉은 새들의 묘사, 파도와 흰 거품의 표현 등에서 반복적인 붓질을 찾을 수가 없고 매우 생생한 묘사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경물 배치는 이후 변화를 보인다. <경포대도>는 아래쪽에 죽도(竹島)를 두고 경포호를 넘어 위쪽에 위치한 경포대 건물과 오대산 일대를 올려보는 구도였다. 이러한 배치는 경포대를 화면 아래쪽에 두고 위쪽의 바다를 향하는 18세기 이래의 전형적인 구성과 차이를 보인다. 바다 쪽에서 총석을 바라보며 그린 <총석정도> 역시 이후의 작품에서는 내륙에서 바다를 향하는 것으로 관점의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정선(鄭敾)(1676~1759)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의 작품이 제작된 이후, 두 사람의 구도를 따라 관동도의 유형이 정착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라진 듯 했던 16세기 <경포대도>의 구도가 조선 말기 <강릉 경포대도>에서와 같이 민간 회화에서 전승된 것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관동 지역의 명승도는 이른 시기부터 그려져 고려 김생(金生)(711~?)의 관동도(關東圖), 조선 초 안견(安堅)(15세기 활동)의 낙산사도(洛山寺圖) 등 여러 화가가 단폭이거나 여러 폭의 관동도를 병풍이나 첩 형태로 그렸던 것을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록은 많으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는데 본고에서 고찰하는 이 두 점은 현존하는 관동도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예로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관동도(關東圖) 병풍(屛風)의 제작 양상을 알게 해주어 회화사적인 의미가 크다. 특히 발문의 내용에 따라 8폭 병풍일 것으로 생각되어 16세기 후반에 이미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형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성격에 있어서 현존하는 16세기 실경산수화의 예로 거론되는 작품들이 모두 실용적, 공적인 목적의 계회도나 기록화로 제작되어 실경산수화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실제 경관을 대상으로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발문을 쓴 박충간은 유람할 때 지었던 감상시를 곁들여 자연의 진면목을 반추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기존에 알려진 실경산수화의 성격과 그 양상을 달리하는 것으로 순수 감상을 목적으로 한 본격적인 실경산수화의 예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 이처럼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두 작품은 유람의 결과를 시화(詩畫)로 제작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존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예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지대하다. 또한 그간 확인할 수 없었던 16세기 실경 산수화의 다양한 형태와 구도 및 시점의 면모를 보여주어 한국 실경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한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