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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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비인간 존재는 어떻게 만나는가? (How does Man and Non-human beings meet?)

  • 심귀연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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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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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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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기술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비인간존재인 인공지능로봇(A.I)은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과의 상호협력 또는 앙상블을 이루는 존재인가? 인간이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 자신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물음과 두려움의 근저에 있는 데카르트적 인식론의 문제를 확인하고 시몽동과 라투르의 존재론 및 기술철학을 활용하여 메를로-퐁티의 몸살존재론을 토대로 이 물음들에 답하려는 시도이다. 데카르트 철학이 도출한 코기토는 인간-이성을 주체로 하여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분법적 인식론의 구조'의 토대가 되었다. 인간이 중심인 세계에서 인간 아닌 모든 존재들은 인간을 위한 도구이거나 통제의 대상이었다. 근대인의 문제는 인간을 비롯한 자연을 통제하는 방식에 자연과학적 방법에서 도움을 얻을 뿐 아니라, 과학적 방법만이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는데 있다. 이를 비판하면서 메를로-퐁티는 몸이 인간과 비인간존재들을 매개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살존재론으로 그것이 가능한 존재론적 토대를 마련한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방법론과 존재론은 기술철학자이자 현상학의 영향 아래에 있는 시몽동에 의해 새롭게 전개된다. 시몽동에 의해 인간과 비인간존재의 관계는 인간과 기술적 대상의 앙상블 또는 인간과 기술적 대상과의 상호협력적 공진화로 나타난다. 특히 라투르는 시몽동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근대의 핵심 개념인 주체를 부정하고 세계에 거주하는 모든 몸들을 행위자네크워크이론으로 규정한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관점은 기술시대의 철학적 논의에 새로운 가능적 근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근대적 두려움이 현상학적 태도로 전환함으로써 그 문제 자체가 해소될 수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흄의 인위적 덕으로서의 정의 (Hume's Justice as an artificial Virtue)

  • 이남원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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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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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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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논문은 흄의 정의(justice) 개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고대 이래 많은 철학자들은 정의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범에 따라 "분배적 정의"로 이해하고 있다. 정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근대에까지 이어오는데, 근대에서는 특히 소유권 혹은 사적 재산과 연관해서 다루어진다. 근대에서 사적 소유권은 어떤 경우에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 권리로 간주된다. 흄은 이 사적 소유권을 정의와 동일시하고 있다. 사적 소유권을 절대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정의를 절대 깨트려서는 안 된다는 것과 동치이다. 흄은 이러한 정의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즉 흄은 칸트식의 정의의 정당화(justification)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라는 관념의 발생 과정이라는 심리학적 논의에 관심을 두고 있다. 흄의 대답은 "사회적 효용성"이 그 기원이라는 것이다. 공적 사회는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즉 공적 사회가 존재 혹은 존립하지 않는다면, [현재와 같은]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인 공적 사회는 어떻게 존재 혹은 유지될 수 있는가? 흄에 따르면 정의를 통해서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의 존재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흄은 정의의 존재 근거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묵계(convention)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묵계를 통해서 정의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흄의 개략적인 통찰이다. 흄은 이런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매우 다양한 개념들을 구사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다양한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의 정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흄의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쇼펜하우어의 음악철학 - 감정미학과 절대음악 사이 - (Between Aesthetics of Feeling and Absolute Music - Schopenhauer's Philosophy of Music -)

  • 홍사현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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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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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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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논문은 쇼펜하우어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중심으로 그의 음악론을 전통적인 음악미학의 논의, 특히 한슬릭의 절대음악적 관점을 통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그리고 이때 의지형이상학이라는 전체사유 내에서 다른 내용들과 함께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결코 독립적으로 음악미학적인 맥락 내에서 다루어질 수 없는 쇼펜하우어의 음악형이상학의 독특한 성격과 의미를 부각시킨다. 특히 음악은 '의지의 직접적인 모사'이며, 이때 음악을 통해 표현되는 의지, 즉 충동과 격정, 감정 등은 개체적이고 인격적인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 감정'이며, 따라서 음악은 '보편적 언어'라고 하는 쇼펜하우어 음악 형이상학의 내용으로부터 어떠한 미학적 논점들이 발생하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예술모방론의 맥락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음악적 추상 및 형식의 문제에 있어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당시 일반적으로 퍼져있던 감정미학의 영역으로도, 또 이와 대립되는 입장인 한슬릭의 절대음악과 연결시키려는 방향으로도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쇼펜하우어의 음악론을 둘러싼 미메시스 전반의 문제, 즉 모방과 표현, 언어와 음악, 음악의 추상성에 대해 논의하는 동시에, 이를 감정미학과 절대음악의 논쟁에서 핵심적임 쟁점이 되는 음악의 모사 대상이나 형식, 청각성, 아름다움 등의 문제와 연관하여 그 세부적인 논의를 살펴본다. 이로부터 순수한 음악적 형식을 통한 음악적 아름다움을 말하는 한슬릭과, 두 세계이론에 근거하는 후기낭만주의 철학자로서, 근본적으로는 음악에서도 예술을 통한 형이상학적 구원의 의미와 역할을 강조하게 되는 쇼펜하우어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며, 이를 통해 쇼펜하우어 음악형이상학이 지니는 미학사적 위상 및 예술적 자율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블로흐와 몰트만: 무엇을 위한 희망인가? (Ernst Bloch and Jürgen Moltmann: The Hope for What?)

  • 김진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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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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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7-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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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철학을 몰트만 교수가 어떻게 수용하고 변형하는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상반된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는 두 사상가가 제시하는 희망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현대 종교철학에서 다양한 종교유형들 사이의 대화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마르크스주의와 페르시아 이원론으로 유대-기독교 사상을 독창적으로 해석한 철학자로서, 기독교 안의 무신론을 발굴하고 희망철학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기독교 종말론 사상의 내재적 비판을 수행하는데 일조하였다. 블로흐와 몰트만은 종말론적 지평에서 미래, 인간, 나라, 희망을 말하지만, 그들이 서있는 세계관적 지평은 너무나 다르다. 그들은 물질과 하느님, 처음(시작)과 끝(마지막)의 연관성, 즉 단절 혹은 연속, 실존 원핵과 부활, 메시아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무신론과 유신론, 페르시아 이신론과 유대-기독교적 유일신론 등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몰트만은 유대인 사상가 블로흐의 메시아주의는 받아들이고 마르크스주의는 배제하였다. 몰트만은 아직-아닌-존재의 존재론에서 물질이 가진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하느님의 창조와 출애굽의 하느님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 대체하였다. 또한 블로흐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기독교 안의 무신론이 차지하는 위상을 삼위일체 유일신론으로 대체함으로써, 구약과 신약 사이의 단절과 갈등, 특히 야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서 오는 긴장을 묵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퇴계 심학과 정신주의 철학 (Toegye's Simhak and Spiritualism)

  • 장승구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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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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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1-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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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퇴계학은 주자학 계열에 속하면서도 오히려 심학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퇴계 심학은 리와 심을 구분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심과 리의 합일[심여리일(心與理一)]을 추구하는 수양론적 의미가 강하고, 양명의 심학은 심즉리(心卽理)로서 본체론적 의미의 심학으로 구분된다. 퇴계 심학이나 양명 심학이나 진리의 객관성보다도 그것이 나의 실존에 와 닿아야 참된 것이라고 보는 점에서 진리의 주체성 실존성을 중시하고, 이론적 탐구보다는 실제적 실천을 강조하는 공통점이 있다. 퇴계는 많은 고전 가운데 특히 "심경부주(心經附註)"를 매우 중시하였다. "심경부주"에 대해 제자들과 주위에서 많은 문제점을 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경부주"에 대한 퇴계의 존숭은 결코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퇴계가 "심경"을 좋아하고 중요한 텍스트로 여겼던 것은 그의 심학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심학도"를 통해서 보면 도심과 인심, 천리와 인욕 사이의 마음의 갈등 상황에서 "존천리알인욕(存天理?人欲)"을 위한 심성 수양공부의 방법이 심학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수양공부를 통해 심학은 공자의 "종심소욕부유구(從心所欲不踰矩)"나 맹자의 '불동심(不動心)'과 같은 성인의 마음 즉 '심여리일(心與理一)'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주목적인 것이다. 퇴계 심학은 20세기 프랑스 정신주의 철학자 루이 라벨(Louis Lavelle)의 철학과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 즉 존재의 원천으로서의 절대적 존재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물질에 대한 정신의 존재론적 우위, 마음의 눈을 안으로 돌리는 향내적 자각을 강조한다. 퇴계 심학은 단순히 종교적 도덕적 금욕주의로 회귀하자는 것이 아니라, 참된 존재의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깊은 차원의 희열을 추구하는 것이다. 심학의 정신주의 철학은 현대인에게 새로운 차원의 즐거움과 삶의 양식을 보여줄 수 있다. 퇴계의 주자학적 심학은 양명의 심학이 지닌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의 한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학의 폐단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심학이 지닌 생생한 실존적 체험의 생명력을 주자학에 끌어들려 주자학의 새로운 재활성화를 추구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기독교의 역할과 교육방향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Role of Christianity and the Educational Direction in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 김희영
    • 기독교교육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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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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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7-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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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슈밥(Schwab)이 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을 언급하면서 많은 이들이 4차 산업혁명과 미래사회에 대하여 논하였다. 4차 산업혁명은 기술의 발달을 넘어서서 우리의 사회, 문화, 생활양식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우리는 코로나19 상황을 맞이하며 더욱더 실감을 하고 있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은 분명 인간의 삶을 증진시키며, 문명의 발달을 이루게 할 것이라 희망하지만, 인간소외나 양극화의 문제를 우려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기독교가 어떻게 공적 영역에서 기여하며 교육의 방향을 설정할 것인가. 본 연구는 이러한 4차 산업혁명시대의 기독교의 역할과 교육방향에 관하여 연구한 논문이다. 먼저 4차 산업혁명시대에 일어날 개인과 공동체의 내면과 외면의 문제를 다각도로 조명하고자 심리학자 미첼(Mitchell), 사회학자 벨라(Bellah), 신학자 맥그래스(McGrath), 철학자 보스트롬(Bostrom)의 견해를 통해 접근하였다. 이들의 이론을 통해 4차 산업혁명시대의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 초월적 세계에 사는 개인의 삶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 기독교가 초월적 규범을 제시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개인과 세계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며, 교육의 방향을 "상징을 만들고 표현하는 교육"으로 보았다. 이를 위하여 관찰하기, 들어가기, 발견하기, 참여하기, 상징 만들기의 5단계를 제시하여, 이를 통해 현실 세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진짜' 견유(犬儒)를 찾아서: 율리아누스 황제의 견유주의 수용과 그 한계 (In Search of the 'True' Cynic: Julian the Emperor's Reception of Cynicism and Its Limits)

  • 송유레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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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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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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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문의 목적은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신플라톤주의자였던 율리아누스의 견유주의 수용의 특징과 그 한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율리아누스는 당대의 퇴락한 견유들을 질타하면서 진정한 견유주의의 회복을 촉구한다. 이를 위해 그는 디오게네스를 진짜 견유의 모범으로 이상화한다. 우리는 율리아누스가 디오게네스를 이상화하는 방식에 주목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디오게네스에 초점을 맞추어 견유주의의 기본 특징을 소개할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로부터 행복의 윤리학을 계승하여, 관습으로부터의 자유, 허욕에 대립되는 자족, 안락을 거부한 금욕적인 수행을 핵심으로 하는 견유주의적 실천을 행복의 지름길로 제시했지만, '파렴치'로 대표되는 그의 파격적인 언행으로 인해 '미친 소크라테스'로 불리게 된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디오게네스의 모습에 견주어 율리아누스가 묘사한 진짜 견유의 특징을 검토할 것이다. 율리아누스의 진짜 견유는 디오게네스처럼 엄격한 금욕주의자이지만, 염치를 아는 디오게네스이고, 소크라테스처럼 통념에 비판적인 지성인이다. 그는 지상의 특정 국가에 예속되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우주시민으로서 신성한 도덕법을 수호하는 경건한 철학자로 드러날 것이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견유주의를 소크라테스의 이성주의적 도덕주의 전통에 포섭되는 한에서 수용했음을 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율리아누스의 견유주의 수용의 의의를 기독교에 대항한 이교 철학 전통의 대통합 시도의 관점에서 간략히 재조명할 것이다.

허치슨, 흄,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나타난 공감의 역할과 도덕의 규범성 (The Role of Sympathy and Moral Nomativity in Moral Sentimentalism of Hutcheson, Hume, and Adam Smith)

  • 양선이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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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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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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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18세기 영국 도덕철학자 허치슨, 흄 그리고 아담 스미스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합리주의적 윤리학에 반대하여 도덕은 행위자의 행위나 성격에 대해 승인 또는 불승인을 느낄 수 있는 도덕감에서 생긴다고 보았다. 이들은 '도덕감(moral sense)'이라는 개념은 공유하지만 이러한 도덕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즉 도덕감이 발생하는 기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허치슨은 도덕감이 모든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고유한 정신적 능력으로서 신의 섭리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라 보았다. 흄과 아담 스미스는 허치슨의 선천적인 내재적 도덕감의 존재를 부정하고 공감의 원리에 호소함으로써 도덕의 자연화를 시도했다. 많은 사람들은 흄과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이 유사하다고 생각하지만 '공감'에 관한 이 둘의 설명 방식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그러한 차이점을 살펴 보게 될 것이다. 흄과 아담 스미스는 허치슨이 도덕감의 근원을 신에게 둔 것에 반대하여 도덕감의 발생 기제를 공감의 원리를 통해 설명함으로써 도덕의 자연화를 시도했지만 흄은 도덕의 궁극적 기준을 사회적 효용성 또는 관습적 규약에 둠으로써 외적인 기준을 택한 반면, 아담 스미스는 궁극적인 도덕적 기준으로 '공평무사한 관망자'의 판단 즉 '양심'이라는 내적 기준을 택했다. 스미스의 공평무사한 관망자는 개별성과 보편성 간의 간격을 메꾸고 실천적 이성을 작동케하는 수단이라 볼 수 있다. 이 논문에서 나는 공감에 관한 흄과 아담 스미스의 입장의 차이점을 밝히고 이러한 각각의 입장이 도덕의 규범성으로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라이프니츠와 인삼 (Leibniz and ginseng)

  • 설혜심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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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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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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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위대한 철학자이자 미적분을 발견한 수학자로 잘 알려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가 인삼에 대해 물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럽의 계몽주의를 열었던 라이프니츠는 왜 인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글은 라이프니츠가 남긴 방대한 기록 속에서 인삼을 찾아내고, 개인적 생애와 당대의 지적 흐름을 엮어 그가 인삼에 관심을 갖게 된 경로를 추적한 작업이다. 16세기부터 유럽에서는 약물지와 같은 고대 그리스 텍스트의 재발견과 해외에서 들여온 새로운 식물들로 인해 본초학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구대륙' 중국에서 만병통치약으로 이름을 떨치던 인삼 또한 여행기 등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중상주의 기치 하에 유용한 약용식물에 대한 관심이 커 가던 유럽에서는 과학단체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인삼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라이프니츠는 그런 연구의 중심지였던 왕립학회와 프랑스 왕립과학원을 방문하고 학자들과 교류를 나누었으며 독일에 그와 같은 연구기관을 설립하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 라이프니츠는 로마를 방문했을 때 예수회 선교사들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한층 더 깊어갔고, 그 맥락에서 인삼에 대한 관심도 커갔다. 라이프니츠는 그리말디, 부베 등 중국선교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했던 학자들과 인삼의 효능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게 된다. 이 논문은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인삼이 17세기 말 유럽의 학문적 지형과 지식인들 사이의 교류, 중상주의적 해외팽창을 얽어내는 단초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조엘 폼므라와 장-끌로드 그룸베르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연출적 글쓰기 : 픽션의 정치 (The Directive Writing in the Works of Joël Pommerat and Jean-Claude Grumberg : "le politique" of Fiction)

  • 하형주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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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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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3-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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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문은 포스트모던 연극/예술의 한계를 너머 새로운 글쓰기로서 '픽션'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 픽션은 관객들이 감정이입해야만 하는 환영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에 대한 형식의 무관심을 드러낸다. 이 픽션은 그래서 재현적 규범에 반대하며 말의 오래된 미메시스에 반대한다. 또한, 포스트모던 예술의 위기, 이미지의 종언에 대해 반박하면서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플라톤적 미메시스를 비틀어, 모방적 방식에 의해 유사성의 차용 가능함을 언급한다. 이 유사성을 차용한 이미지는, 그래서 내용에 대한 형식의 무관심을 드러내면서 의미작용의 상실과 함께 방황한다. 이 방황하는 말들은 마치 상형문자처럼, "화석들 또는 홈패인 돌들에 씌어진 역사를 담고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안없는 해체라고 비판받은 포스트모던 연극의 대안으로서 새로이 소환되는 '픽션'은 현실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서 '어떤 실재성'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인간정신의 방식 자체를 유희하게 하는 것을 허용하는 "사유의 움직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구는 산출하는 것과 산출되는 것 사이의 무매개적 관계를 위해 단순히 직접적인 반영을 해고하는 유사성을 차용하는 글쓰기를 행하는 두 작가, 조엘 폼므라와 장-끌로드 그룸베르그의 작품들을 살펴본다. 이들의 글쓰기는 기존의 픽션이 가지고 있었던 개념을 벗어나 새로운 미학적 글쓰기로서, 문학적 창작과 정치적인 것이 교차되어있는 방식일 뿐 아니라 사유의 움직임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