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진언(眞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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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출토 범자 진언명(眞言銘) 기와의 특징과 의의 (A Study on the Character and Historical Significance of Sanskrit Roof Tiles in the Hoeamsa Temple of Yangju City)

  • 엄기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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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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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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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양주 회암사는 고려말기부터 조선초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크게 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특히 당대의 고승이었던 지공선사, 선각왕사 혜근, 무학대사 등과 인연을 맺으면서 여러 번 지속적으로 중창되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회암사는 조선전기 불교계의 중심으로서 불교문화를 선도하는 사찰이 되었다. 이러한 회암사는 조선후기에 소실된 이후 1997년부터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회암사지에서는 막새기와, 평기와, 특수기와 등 다양한 유형의 기와들이 출토되었는데, 이중에서 막새기와는 시대적인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그리고 다양한 범자 진언명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양주 회암사지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수막새와 암막새가 출토되었는데, 이 중에서 우수한 제작기법으로 범자 진언이 새겨진 막새가 상당량 출토되었다. 범자 진언은 1자에서 9자까지 다양한 유형의 범자 진언이 새겨졌는데, 그중에서 정법계진언과 육자진언이 새겨진 기와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이 진언은 도량을 청정케 함과 동시에 조선시대 들어와 육자진언 신앙이 본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회암사지에서는 편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범자 기와가 출토되어 다른 사찰 범자 기와의 편년 설정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것은 회암사의 범자 기와를 제작한 와공들이 범자 진언에 대한 신앙과 이해가 높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회암사 이후 대부분의 사찰에서 범자 진언명 기와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회암사가 우리나라 범자 진언명 기와의 제작과 활용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사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회암사지 출토 범자 진언명 기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고려 후기 범자 진언명 상감청자의 해석과 의미 (Interpretation and Meaning of Celadon Inlaid with Sanskrit Mantras in the late Goryeo Dynasty)

  • 이준광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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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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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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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청자에는 불교문화의 여러 단면이 담겨 있다. 그중 범자(梵字)가 새겨진 상감청자는 불교 중에서도 밀교와 밀접한 영향 관계에 있을 것이란 점은 익히 알려져 왔으나 판독을 통한 구체적인 연구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전하고 있는 자료의 수가 적은 데다 잔존 범자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강진 사당리 23호 요지에서 이루어진 4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 자료들을 판독하여 기존 자료들도 몇 가지 유형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범자 판독과 해석을 통해 얻은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청자에 상감된 범자는 진언(眞言)을 이루는 글자들이었다. 범자 한 자만 남아 있는 경우 해석을 유보해야 했지만, 그 밖의 범자들은 동심원 구조인 자륜진언(字輪眞言) 방식 속에서 '정법계진언', '육자대명진언', '감로수진언', '보루각진언', '구보살원주', '무량수여래심주', '멸악취진언'을 표기하고 있었음을 판독했다. 각 진언은 실담(悉曇, Siddham) 범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둘째, 제작 시기는 범자 배치 방식과 '감로수진언'이 40수 진언에 포함되는 양상을 근거로 13~14세기에 걸친 것으로 보았다. 특히 진언이 있는 동심원 구조의 상감청자 자료들은 제작 특징을 보아 13세기 말~14세기 전반으로 편년했다. 셋째, 상감된 진언들의 해석을 통해 모두 파지옥(破地獄)과 정토왕생(淨土往生)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를 근거로 범자 진언명 상감청자들 중 일부는 시아귀회(施餓鬼會)와 같은 망자(亡者)를 위한 불교 의례에 사용했으리라 판단했다. 또한 사당리 23호 요지와 '가'구역이 왕실용 자기 생산지로 추정되기 때문에 의례 또한 왕실 혹은 그 영향력 안에 있는 사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넷째, 범자 진언명 상감청자들은 원대 자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원의 불교문화와 고려가 이미 품고 있던 밀교적 요소가 더해져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다섯째, 범자 진언명 상감청자들은 고려 후기 사회에 퍼져 있던 개인적 밀교 의례의 한 측면을 보여 주는 자료였다. 당장의 불안을 해소해 주길 바라는 데서 촉발된 밀교의 변화는 묘지(墓誌), 관등에서도 찾을 수 있었는데 파지옥과 극락왕생에 대한 염원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섯째, 다른 공예품과 비교할 때 공통점으로 실담 범자를 사용했다는 점, '육자대명진언'을 중심적으로 활용했다는 점, 기와와 배치 방법이 유사하다는 점, 범종·목관·묘지의 진언과 의미상 상통한다는 점이 있었다. 차이점으로는 '멸악취진언'과 '감로수진언'은 다른 공예품에서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상감청자 특유의 경제성과 제작의 용이성은 다른 공예품과 차별되는 장점으로, 바로 이 점 때문에 범자 진언을 새길 기명으로 청자가 채택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본 연구에서 판독하지 못한 자료들은 추후 잔존 상태가 양호한 자료가 보고된다면 새로운 유형을 수립하여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