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조선시대 사진

검색결과 31건 처리시간 0.024초

퍼트남자료관에 소장된 로웰의 조선관련 사진 아카이브에 대한 고찰 (A Study of Lowerll's Photographic Materials of Chosön Archived in Putnam Collection Center)

  • 정영진
    • 기록학연구
    • /
    • 제60호
    • /
    • pp.239-281
    • /
    • 2019
  • 미국인 퍼시발 로웰은 최초로 사진기를 가지고 1883년에 조선에 정식으로 입국한 외국인으로서 고종의 사진을 비롯한 80여장의 사진자료를 남겼다. 이 사진자료들은 모두가 한국의 사진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귀중한 역사적 정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연구가 수행된 적이 없다. 이 사진에 관련된 자료들은 대부분 미국에 소장되어 있는데, 사진과 관련된 정보는 많은 오류와 함께 웹사이트에 게시되고 있기 때문에 일부 책자와 연구자들에 의해서 오 인용되고 있다. 이에 필자는 로웰이 조선에서 촬영한 사진을 분석하여 그 내용을 파악하고, 사진자료의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는 미국의 퍼트남자료관의 로웰의 조선관련 사진 아카이브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오류에 대한 수정안을 제시했다.

한국천문연구원-제26호

  • 한국천문연구원
    • KASI NEWSLETTER
    • /
    • 통권26호
    • /
    • pp.1-4
    • /
    • 2001
  • 하와이 CFHT 망원경 관측제안서 모집 결과/조선시대 일식도 발간/제9회 천체사진 공모전 당선작 선정 및 시상/홈페이지 질문상자 이용빈도 급격히 증가/국립중앙과학관과 천체사진 전시회 공동 개최/과학의 달을 맞아 별의 축제 개최/국가지정연구실 미르호 대책반 참여/CFHT 망원경을 이용한 공동연구 및 자료분석 컴퓨터/우리 연구원 홈페이지 질문상자 3,000회 돌파/콜로퀴움/GPS 관측자료 웹서비스 실시

  • PDF

조선말과 대한제국 시기 사진기록물의 성격과 생산, 유통 과정 (The Facets of Photographic Records on Korea in Modern Era)

  • 박주석
    • 기록학연구
    • /
    • 제62호
    • /
    • pp.225-258
    • /
    • 2019
  • 조선의 개항 이후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대를 찍은 사진기록물은 당시의 기술적 수준이나 대외 개방의 정도를 감안하면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한국 관련 사진기록은 서구 사회에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 인쇄한 서적의 삽화, 화보 신문이나 잡지의 도판, 빈티지 프린트, 사진엽서, 스테레오 사진, 카드형 사진, 랜턴슬라이드(Lantern Slide) 등 다양한 형태로 보급되었고, 현재도 상당량이 남아 있다. 관련 연구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조선 사람이 처음 사진에 찍힌 1863년부터 1910년 이전에 촬영된 한국 관련 사진은 최소 3,000점에서 4,000점 이상이고, 같은 사진이 중복되기는 하지만 발행된 사진엽서의 수는 25,000점 이상이며, 그중 대부분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본 논문은 근대 초기인 구한말 한국 관련 사진기록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경로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이를 전형적인 사진가 또는 기관의 활동 사례를 들어 분석했다. 사진에 찍힌 대상은 분명 한국 또는 한국인의 모습이지만, 사진의 생산 주체는 거의 대부분 제국주의의 부역자들인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이었다. 사진의 경우 생산 주체의 필요나 관점에 따라 사실 관계의 왜곡 가능성이 무척 크다. 그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사진의 내용뿐만 아니라 생산자의 의도와 생산 및 소통 경위가 파악되어야 한다. 세월이 많이 흘러 실제 경험자가 없는 시대의 사진기록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판독하는 문제는 근대 한국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폭넓게 연구하기 위한 초석이기 때문이다.

갑곶돈 일대 문화재 지역의 경관특징에 관한 기초연구 (A Basic Study on the Landscape Characteristics of Cultural Heritage Area at the Gapgot Fortification in Ganghwa island)

  • 현상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3권1호
    • /
    • pp.88-96
    • /
    • 2015
  • 본 연구는 해안에 분포한 갑곶돈 일대 문화재 지역의 경관 특성을 살펴보기 위한 연구로 고문헌, 고지도, 근대의 사진자료를 분석하고 항공사진 촬영을 통해 현재 갑곶돈 일대의 경관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갑곶돈은 강화도를 진입하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강화도의 상징적 또는 실제적 관문요소로써의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일대의 역사문화자원 또한 통과교통으로서의 장치 및 군사시설 등이 분포하였다. 둘째, 문헌 및 도상자료에 나타나는 갑곶돈 일대는 고려시대부터 군사시설 및 마을이 형성되어왔으며, 조선시대 강화외성의 축성 이후 갑곶돈의 진해루를 중심으로 마을이 확장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셋째, 현재 갑곶돈 일대는 강화대교 진입에 따라 연속되는 해안경관이 조망되나 강화대교 인근의 경관저해요소는 개선사항으로 제시되었다.

조선시대 지방 옥(獄) 구조에 관한 고찰 - 발굴 유적과 고지도 비교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tructure of a Local Prison in the Joseon Dynasty Based on the comparison of excavation sites and antique maps)

  • 이은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4권4호
    • /
    • pp.246-259
    • /
    • 2021
  • 조선시대 지방 읍성에 대한 연구는 다방면에서 많은 성과가 있었으나, 그 내부 관청 건물의 하나인 옥(獄)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인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죄인들이 머무는 옥사의 배치나 구조, 옥리(관헌)들이 사무를 보거나 숙직 근무를 서는 집무소, 탈출을 방지하는 담장의 구조 등에 대해서는 1997년 경주에서 옥이 처음 발굴된 이후 연구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어 왔으나 비교 대상이 없어 답보 상태였다. 그러나 그 후 발굴된 연일옥 자료와 공주옥 등의 사진을 비교 분석해 본 결과 조선 전기부터 말기까지 축조된 옥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전국의 죄수들을 잘 관리하도록 1426년 표준적인 설계도인 안옥도(犴獄圖)를 배포하였고, 동·하절기 처우 개선 등을 위해 1439년 한 차례 수정하기도 하였다. 1421년부터 1743년까지 운영된 연일옥은 조선 전기부터 중기까지의 옥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데, 조선 후기까지 운영된 경주옥과 비교할 때 원형 담장, 동서 옥사의 배치와 구조 등 그 형식이 매우 유사하며 규모만 작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조선 말기 사진으로 남아 있는 공주옥까지 계속 그 형식이 유지되고 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조선시대 옥은 타원형의 담장과 남녀를 구분하여 수용하는 건물이 나누어져 있었고, 담장의 높이는 약 3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옥사는 동쪽이 남자, 서쪽이 여자 옥사로 구분되며 지붕으로 탈출이 어려운 기와집 구조였다. 원형 담장 앞에는 옥리(押牢)들이 근무하는 초가 지붕의 집무소가 있었는데, 2중의 옥문을 통해야만 옥의 출입이 가능하였다. 조선시대 왕들은 인본주의 유교 사상을 구현하고자 미결수들이 머무는 옥의 환경을 개선하고 남녀를 구분하여 수감토록 한 것이 건축물의 배치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안 영상의 입체 자유시점 비디오 (Stereoscopic Free-viewpoint Video of a Monoscopic Image)

  • 이관욱;이광훈;김만배
    • 한국방송∙미디어공학회:학술대회논문집
    • /
    • 한국방송공학회 2010년도 하계학술대회
    • /
    • pp.234-236
    • /
    • 2010
  • 본 논문에서는 한 장의 영상을 가상 카메라와 깊이맵을 이용하여 영상 내부를 네비게이션하는 입체 자유시점 비디오를 제안한다. 이 분야는 한장 또는 여러장의 사진 내부를 탐험하면서 애니메이션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제안 방법은 전처리과정으로 전경 마스크, 배경영상, 및 깊이맵을 자동 및 수동 방법으로 구한다. 다음에는 영상 내부를 항해하면서 투영 영상들을 획득한다. 배경영상과 전객객체의 3D 모델링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상 카메라의 3차원 공간 이동, yaw, pitch, rolling의 회전, look-around effect, 줌인 등의 다양한 카메라 기능을 활용하여 자유시점 비디오를 구현한다. 소프트웨어는 OpenGL 및 MFC Visual C++ 기반으로 구축되었으며, 실험영상으로 조선시대의 작품인 김홍도의 무이귀도를 사용하였고, 입체영상으로 제작되어 보다 실감있는 자유시점 콘텐츠를 제공한다.

  • PDF

전통적 조형의 창출을 통한 디자인 개발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DESIGN TO THE EXTRACT OF TRADITIONAL SHAPE ELEMENT)

  • 이상락;홍정표
    • 한국감성과학회:학술대회논문집
    • /
    • 한국감성과학회 1999년도 춘계학술발표논문집 논문집
    • /
    • pp.81-87
    • /
    • 1999
  • 본 연구의 목적은 전통적 조형요소의 이해를 통하여 한국적 조형의 특성을 파악하고 효율적으로 디자인에 적용시킴으로써 차별화 된 제품개발을 하는데 있어 조형언어의 창출을 모색하는데 있다. 이를 위하여 전통도구들의 물적 특성을 통하여 우리의 환경과 삶의 태도에서 베어난 우리 고유의 도구에 대한 사고와 조형방법등에 대한 특질과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만의 차별화된 디자인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연구범위는 조선시대 일반서민들의 생활에서 사용되었던 도구를 그 대상으로 하였으며 전통제품들의 예시를 통하여 한국적인 조형성의 특징을 파악하였는데 이는 비교적 자료수집 등 연구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연구방법은 국내에서 출간된 관련서적과 사진 자료 및 그 동안 연구되어 왔던 각종 연구보고서, 각 대학의 디자인 관련학과에서 진행되어 온 컨셉츄얼 디자인(본 연구에서 설정된 조형적 적용방법과 같은 내용으로 디자인작업을 수행해온)을 토대로 하였다.

  • PDF

근현대기 창덕궁 후원의 동선 변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nge of Road in the Changdeokgung Palace Rear Garden between Modern and Contemporary Period)

  • 하태일;김충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4권2호
    • /
    • pp.120-135
    • /
    • 2021
  • 창덕궁 후원은 조선시대 궁궐 정원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공간이다. 후원의 경관체험에 있어서 동선의 복원은 주요 공간을 연결하는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선의 복원을 위해서는 생성과 소멸, 유지 등을 정확하게 파악해야한다. 본 연구는 조선 후기에서 근현대 시기까지 문헌과 도면자료 분석과 현장조사를 병행함으로써 창덕궁 후원에서 발생한 동선의 변화를 세밀하게 밝히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시계열적인 분석을 위해 조선시대 제작된 「동궐도」, 「동궐도형」와 함께 근현대시기 제작된 「창덕궁평면도」, 항공사진을 사용하였다. 시대별 동선의 변화를 중첩하여 변화를 비교하기 위해 각기 다른 좌표체계로 이루어진 도면과 사진을 지리정보시스템인 ArcGIS에서 하나의 좌표계로 변환하여 정합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강점기 이후 총 37개의 구간이 이용되었으며, 이 중에서 13개가 유지되고, 14개가 사라졌으며, 10개가 신설된 것을 확인하였다. 멸실구간 중에서도 능허정 북쪽 원로는 후원에 대한 공간을 연결하고 경관의 향유를 위해 시급히 회복시켜야 할 곳으로 판단된다. 신설구간에서도 대보단지~옥류천 구간에 대해서는 대체동선의 신설이나 구간의 단축 등을 통해서 영향을 최소화할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후원에서 동선체계에 대한 변화가 가장 크고 빈번하게 시행된 것이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 보수정화사업 이었음을 밝혔다. 후원에 대한 주체적 관리가 어려웠던 일제강점기보다 1970년대 이후 발생한 동선의 변화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옥류천 진입로는 1990년대까지 원형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잘못된 원형 인식으로 인해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이 시기의 변화에 대해 명확한 기제와 원인을 찾고, 훼손된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사업의 전개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근현대기 창덕궁 후원 동선 변화를 시대별로 밝혔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이다. 다만, 조경계획이나 정비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해 복원해야 할 위치와 형상을 명확하게 제시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본 연구에서 밝힌 자료를 이용해서 동선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공간 이용도, 관람체계, 방재 및 유지관리 등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 경주 서출지(書出池) 일원의 정원 조영과 경관 특성 (Garden Construction and Landscape Characteristics of the Seochulji Pond Area in Gyeongju during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 김형석;심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2권2호
    • /
    • pp.62-79
    • /
    • 2019
  • 본 연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등장하는 유서 깊은 연못인 경주 서출지(세계유산, 사적 제138호)가 조선 중기 풍천 임씨(豊川 任氏) 가문의 정원으로 기능하게 된 배경과 정원의 형성, 당시 경관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이를 위해 기문 시문 개인문집 등의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를 수행하였으며,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난 경관과 과거 사진 등을 비교하여 경관 변화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집약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 이후 조선 초기까지는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해 당시의 기능과 경관에 대해 추측할 수 없지만 조선 중기 풍천 임씨가 동남산 일원에 세거하면서부터 별서정원으로 경영되었다. 당시에도 서출지를 유서 깊은 장소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임적(任勣, 1612~1672)이 이요당(二樂堂)을 건립하면서부터 풍천 임씨의 정원으로 기능하였다. 둘째, 문헌 기록상 이요당은 객당 정사 별각 별서 등으로도 불렸는데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 누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능 때문에 평소에 빙허루(憑虛樓)라는 명칭이 통용되었다. 셋째, 서출지는 뒤로는 경주 남산(금오산), 앞으로는 넓은 들판과 남천이 흐르는 풍경이 수려한 곳에 입지하였으며, 인문환경과 자연환경을 갖춘 전형적인 조선시대 별서정원이었다. 넷째, 현재 풍천 임씨 종가가 사찰로 변하여 별서정원과의 관계성은 사라졌지만 현재의 주요 경관 요소인 연꽃과 소나무 대나무 숲이 옛 시문에도 나타나며, 현재 서출지 일원은 개발이 거의 진행되지 않아 경관이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재 서출지를 상징하는 배롱나무는 옛 시문과 과거 사진에 확인되지 않고 수령이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배롱나무가 두드러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 본 연구를 통해 서출지 일원을 전설 속의 장소로만 부각할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정원으로서 공간적 의미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경주 남산 일원의 문화 콘텐츠이자 조경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겠다.

<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1795)의 온천(탕실) 건축 고찰 (A Study on the Hot Springs(Tangsil Building) of Temporary Palace(Onyanghaenggung) according to the <Oncheonhaenggungdo>(1795))

  • 이정수;김일환;이경미;지원구;최재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7권1호
    • /
    • pp.110-123
    • /
    • 2024
  • 온양행궁은 <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온궁사실(溫宮事實)』(1795), 『영괴대기(靈槐臺記)』 및 <영괴대도> 등의 문헌자료와 영괴대(靈槐臺), 신정비(神井碑)로 왕의 온행을 확인가능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1906년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가 촬영한 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온양행궁의 온천(탕실)이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온양행궁 관련 문헌 및 <온천행궁도>(1795)에 기초하여, 온양행궁 탕실의 건축형식을 밝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첫째 온양행궁 및 탕실의 변천을 살펴보고, 둘째 왕의 목욕문화 및 행태를 고찰한 후, 셋째 <온천행궁도> 온천(탕실) 건축을 「온궁수리」를 통해 정리하고, 넷째 일제강점 초기 헤르만 산더(Sander)의 사진과 비교하여 조선 후기 마지막 온양행궁 온천(탕실) 건축 형식을 고찰하였다. 이상의 연구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온양행궁 온천(탕실)은 현종 초 온정실(溫井室, 8칸), <온천행궁도> 온천(탕실)로 이어지면서 조선 후기 『호서읍지』(1871)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초기 헤르만 산더(1906) 및 <1912년 충남 아산시 온양온천>(한국저작권 위원회) 사진 건축물과 일치하고 있다. 둘째, 조선시대 국왕의 목욕법은 목욕평상(沐浴平床) 또는 교의(交倚)에 앉아 세두, 유두, 목두 등을 시행하거나, 온천수 증기를 직접 쐬는 훈세, 탕정 앞에 목판을 깔고 앉아 물에 발을 담그는 침족 또는 침세, 그리고 배꼽 아래만 물에 담그는 반신욕인 체욕, 좌탕 등의 다양한 목욕방법을 채택하였다. 셋째, 온양행궁 온천(탕실)은 온천수가 상탕 서북쪽에서 분출되어 동쪽으로 꺾여 중탕으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꺾어지면서 바깥으로 나와 하탕이 되는 구조로서, 탕체 주변부는 태안에서 실어 온 바둑돌을 탕실 바닥에 깔았다. 이상의 고찰로부터, 어실로부터 왕의 접근동선, 왕의 목욕법과 목욕도구, 입대하는 의관과 목욕보조 인력 등 목욕행태와 「온궁수리」에서 언급된 각 실 등의 구성을 헤르만 산더의 사진과 비교하여, 온양행궁 온천(탕실) 건축물을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