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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도서관의 디지털 통합 수준 평가에 관한 연구 (A Study on Evaluating Digital Illusion Level of Public Library)

  • 노영희
    • 정보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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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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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7-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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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연구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공공도서관이 디지털통합적 지역사회 구축자로서의 역할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국가도서관통계시스템에 등록된 전국 공공도서관 935개 기관을 대상으로 설문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첫째, 컴퓨터, 노트북, 스캐너, 태블릿 PC 등 장비 인프라, 인터넷 인프라 등은 비교적 높은 수준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둘째, 이용자가 이용할 수 있는 전자책, 디지털 및 가상참고서비스, 도서관서비스 모바일 앱 등 서비스나 자원은 비교적 높은 수준이나 협업과 그룹작업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나 참여공간의 가용성 등은 상당히 낮게 나타났다. 셋째, 기술과 관련된 리터러시 훈련 비율은 22.4%에 지나지 않았고, 교육주제도 자원탐색 주제로 집중되어 있으며, 화상회의기술 사용법이나 클라우드 컴퓨팅 어플리케이션 교육 등 다소 미래지향적인 기술교육은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문화향유 공간 또는 창의적인 공간으로서의 도서관의 다양한 역할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술 및 장비의 제공확대, 그리고 미래지향적 서비스 및 교육제공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유사배(劉師培)의 『중국민약정의』 연구 - 「상고(上古)」를 중심으로 -

  • 천병돈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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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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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3-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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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유사배(劉師培)는 '반청(反淸)'에서 반전통의 '무정부주의'로, 그리고 '친청(親淸)'으로 변절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중국민약정의(中國民約精義)"는 유사배(劉師培)가 무정부운동을 하기 전, 즉 1903년에 완성한 저서다. 1903년은 유사배(劉師培)가 고향을 떠나 상해(上海)에서 반만(反滿) 운동을 시작했던 시기이고, 1907년 일본으로 유학가기 전 4년 여 동안 유사배(劉師培)는 반청(反淸)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중국민약정의(中國民約精義)"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이념인 '반전통(反傳統)'의 관점에서 저술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중국민약정의(中國民約精義)" 서문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유사배(劉師培)가 참조한 루소의 "민약론"은 양정동(楊廷棟)이 일본어판을 보고 중국어로 번역한 "민약론"이다. 둘째, "민약론"의 내용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셋째, 원고는 1903년 이전에 완성되었고, 책은 1904년에 출판되었다. 유사배(劉師培)는 "주역"을 통해서는 '군민(君民)의 일체(一體)'를, "상서"를 통해서는 '군민(君民)이 국가의 공동주인'임을 밝혔다. "시"는 '민의(民意)의 표현'이라고 했으며, "춘추"를 통해 군주세습제와 민권(民權) 그리고 민의(民意)에 의해 관료 등용 등을 주장했다. "논어"를 통해서는 군신(君臣)의 대등 관계와 군민의 일체를 다시 강조하고, "맹자"와 "순자"를 통해 군주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민의(民意)를 근거로 군주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유사배(劉師培)의 이러한 주장만 놓고 보면, 중국은 비록 전제군주체제에 있었지만, 사람들은(人民) 민주제도를 향유한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이 중국이다. 문제는 유사배(劉師培)의 주장처럼 루소의 "민약론"에 버금가는 사상과 역사적 사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도화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유사배(劉師培)가 "중국민약정의(中國民約精義)"에서 서술한 '민약(民約)'은 치도(治道) 방면과 비슷하다. 그러나 정도(政道) 방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게다가 서술된 '민약'의 내용이 한 번도 제도화된 적이 없다는 점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결국 비록 "중국민약정의(中國民約精義)"가 중국 전통사상에서 서구의 '민주' 개념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그것을 제도화하지 못하고 또 치도(治道)에만 치중해 서술한 점이 "중국민약정의(中國民約精義)"의 약점이다.

문헌을 통해 본 조선후기 꽃놀이 명소의 경관 특성 (A Study on Landscape Characteristics of Flower-viewing Sites through Historical Literatur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 이제이;성종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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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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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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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한양의 세시풍습과 명승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誌)"에 꽃놀이 명소로 등장하는 네 곳-필운대(弼雲臺), 북둔(北屯), 동대문 밖, 서대문의 천연정(天然亭) 등-을 대상으로 한다. 관련 문헌기록을 통해 각 명소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관요소들로 구성되고 방문객에게 어떻게 체험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경관특성은 물경(物境), 정경(情境), 체험행위로 세분하여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대표적인 물경은 꽃이었으며, 꽃과 함께 술, 술잔, 술병 등의 음주와 관련된 물리적인 요소와 시 짓는 모임인 시회를 즐기는 장면도 등장하였다. 또한 이용 주체들이 물경에 의미를 부여한 정경의 도출을 통해 주체들이 공간에 성대해 갖는 의미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본 꽃놀이 명소의 의미로는 첫째, 풍류를 향유하기 위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문인들이 모여 꽃을 구경하고 술을 마시며 시회를 여는 등 각 공간들을 문화 창작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둘째, 주체들이 각 장소에서 묘사한 정경에서 나타나듯, 방문객들은 공감각적인 완상을 통해 경관을 즐기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꽃놀이 명소는 단지 꽃을 감상하는 것 이상의 감각적 체험의 장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전통적인 꽃놀이 명소의 경관특성을 도출한 본 연구는 우리 선조들이 여가의 한 형태로 즐긴 꽃놀이와 그 공간이 갖는 의미를 추적하고 한국적인 꽃놀이 명소를 계획함에 있어 기초적인 자료가 될 것이라 판단한다.

의인화 기법으로 소구하는 디자인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Designing by the Personification Technique)

  • 이세정
    • 한국화예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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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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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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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의인화는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영역에서 흔히 사용되는 소구 방법 중 하나로 인간이 접하는 거의 모든 시각이미지는 이러한 의인화 현상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의인화 현상을 활용하거나 활용 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또한 의인화 현상은 특정 학문분야가 아닌 거의 모든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적용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문화·예술 전반에서 관찰되는 의인화 기반의 사례와 선행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의인화를 관계 형성구도를 중심으로 재정의 하였다. 또한 의인화 기법에 대한 선행연구에서 도출된 의인화 유형 및 제스처 목록을 기준으로 의인화 형태를 관계형성의 주체에 따라 의인화와 역 의인화, 두 부류로 규정하고 각각의 다른 물리적인 형질을 기준으로 화훼 및 공간장식을 포함한 디자인 영역에 걸쳐 소구되는 의인화 기법의 적용사례를 통해 효과적인 의인화 적용 체계를 정의 하였다. 의인화 관계형성 구도와 의인화 적용 체계의 정의를 통해 다양한 매체에서 효과적인 수용자 만족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의인화 기법의 틀을 제공하였다. 또한 매체가 가진 본질의 개념적 형질의 특성을 제스처 목록과 의인화 유형분류에 동기화하는 의인화 적용체계를 통해 강력하고 효과적인 의인화 기법으로 향유자와 소통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익산 금마 황각동 유상곡수 유적 일대의 현황과 장소성에 대한 일고찰 (A Review of Current Status and Placeness on the Yusang-Goksu Ruins in Hwanggak-dong, Geumma, Iksan)

  • 노재현;한민순;서윤미;박율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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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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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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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문헌연구와 옛지도 및 항공사진의 분석, 현장 관찰과 드론 사진 촬영과 고저측량 그리고 주민인터뷰를 통해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황각동에 소재한 '유상곡수(流觴曲水)' 암각서 유적의 입지성과 장소성을 추적하여 이곳에서의 유상곡수 수계(修禊) 등의 향유 가능성을 타진함으로써, 이곳의 장소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국내 유상곡수로 정원 유적의 조명과 보존을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유상곡수 유적이 존재하는 황각동 일대는 여러 문헌에서 익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경(佳景)으로 손꼽혀왔다. 황각동의 유래는 의정부(議政府)의 별칭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과의 관련성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그의 태생지와 인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별서인 태허정(太虛亭), 은거당인 퇴휴당(退休堂)과 묘소 그리고 사후 배향 서원 등이 인근에 다수 분포한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밭일 후 바위에 호미를 걸어 놓는 넓은 바위인 하서대(荷鋤臺)는 중국과 한국의 한시의 용례로 볼 때 한가로운 전원생활과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소박하고 은자적인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본 유적의 핵심이 되는 '유상곡수' 바위글씨가 있는 수석바위 상부의 암혈(巖穴)은 수계를 지원하기 위한 차일공(遮日孔)으로 파악되며 인근의 일간정과 모정은 유상곡수를 지원하기 위한 공간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등잔바위 전면에 새겨진 '황각동(黃閣洞)'바위글씨는 황각동천(黃閣洞天)에 이르는 관문으로, 향촌에 존재하는 이상세계를 관념화한 표식으로 파악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서 '황각동'과 '하서대' 바위글씨는 대한제국 광무(光武) 5년인 1901년 3월 29일에 익산군수 오횡묵과 지인인 김인길(金寅吉)이 새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이봉구의 「황각동운(黃閣洞韻)」과 양곡의 후손인 소진덕의 「황각동시회(黃閣洞詩會)」란 시제로 볼 때 황각동에서 곡수연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사 모임이 최소한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도 행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현재 곡수로의 최대폭은 11.3m, 횡단구배는 15.04%로 계상되었으며 곡수로로 추정되는 수로 구간의 연장거리는 약 27.6m, 종단구배는 3.51%로 측정되었으나 현재 양안이 석축으로 처리된 점을 감안한다면 곡수로의 폭원과 연장거리는 훨씬 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각동 유상곡수 유적과 관련된 봄(삼월삼짇날) 모춘(暮春) 이용, 음주와 시 짓기, 시제 「황각동시회」, 유상곡수 바위글씨 그리고 인근 유상정으로 추정되는 일간정이라는 정자의 존재 등으로 볼 때 최소한 조선 말기까지 유상곡수연이 펼쳐진 공간이었음이 확인된다. 아쉽게도 '유상곡수'바위글씨에 대한 암각 주체와 조선 말기 이전의 향유자 등에 대해서는 자료 부족으로 확인하지 못함은 연구 한계로 남는다. 이는 향후 이에 대한 꾸준한 자료 발굴 노력을 통해 구명해야 할 부분이다.

조선시대 옛글을 통한 한양도성 연지(蓮池) 일대의 문화경관 고찰 (A Study on the Cultural Landscape around Lotus Ponds of Fortress Wall of Seoul through Old Writings in the Joseon Dynasty)

  • 길지혜;손용훈;황기원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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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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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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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한양도성의 연지인 동지, 서지, 남지 관련 옛글을 통해 연지에서의 개인의 행태와 감흥을 준 경관적 특성을 고찰해 당대의 문화경관으로서 연지의 가치를 이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각 연지의 경관을 묘사하고 있는 시문, 일기문, 기문 등의 옛글을 추출하여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첫째, 세 연지 모두 연꽃, 버드나무, 연못의 물을 아름다운 경관요소로 꼽고 있다. 둘째, 지역적으로 동지가 자연적 경관으로 인식되었다면, 서지는 자연적 경관과 도시적 경관으로, 남지는 도시적 경관으로의 성격이 강했다. 셋째, 이용행태 측면에서 동지가 이동 중 잠시 들리거나 멀리 조망하는 방식이었다면, 서지는 천연정 누정에서 긴 시간을 체류하며 다양한 행태가 이루어졌다. 남지는 임시로 장막을 편 곳이나 인접한 지인의 저택에서 모임을 가졌고, 번화한 주변 환경으로 인해 밤 시간이 연지를 즐기기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넷째, 세 연지가 한양도성과 인접하기에 주변 경관에서 성곽을 인상적으로 묘사하는 글이 많았다. 다섯째, 연지는 주변 환경과 통합적으로 체험되어 넓은 수공간과 자연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오픈스페이스 역할을 했다. 한양도성의 연지는 도성의 연접부에 위치해 도시의 문화적 기능을 보완하고, 오픈스페이스로서의 가치가 높으며 한양 고유의 경관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였다. 현재 이들 연지는 사라졌지만 고도의 수경관으로서 많은 의미와 잠재적 가치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후기 청화백자 산수문양의 전개양상 (Landscape Designs on Blue and White Porcelains in the Late Joseon Period)

  • 정은주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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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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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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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본 논문은 청화백자에서 산수문이 가장 성행했던 조선후기를 중심으로 분원의 시대적 상황과 그곳에서 시문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것으로 보이는 화원과 화청장의 역할에 주목하였고, 현존 백자의 청화 산수문 주제를 분류하여 당시 문화.사상적인 배경에 초점에 두고 검토하였다. 또한 백자의 청화산수문양에 나타난 양식적 변화를 당시를 풍미했던 산수화풍 및 화보 도상과 비교하여 그 전개와 제변화 양상을 정리하였다. 조선후기 백자의 청화 산수문 중 대표적 주제는 동정추월문으로 이는 당시 화단을 풍미한 진경산수나 풍속화 등 현실적 소재와는 거리가 있으며, 국왕과 종실 등 분원의 정책을 운영하던 핵심 세력 및 백자 향유층의 사상.문화적인 경향을 잘 시사한다. 또한 청화백자의 기면에 동정추월문과 대칭하여 나타난 소재는 조선 유학자들의 이상적인 삶을 묘사한 처사들의 은일고사의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그 도상적 특징은 조선 중기의 소경산수인물도와 당시 유행하던 중국화보의 영향이 간취된다. 이들 산수문양은 호형 도자 문양을 구획 짓는 릉화창에 시문되거나 편병, 각병 등에 묘사되어 기면의 특성에 맞게 포치를 변화시켜 나타난다. 회화적인 요소가 강한 산수문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도식적으로 변모하거나 약리도와 길상도, 십장생과 같은 민화적 요소와 함께 시문되면서 점차 백자의 중심 문양에서 저변으로 밀려나 퇴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본고에서는 청화 산수문양이 시문된 백자의 편년작이 극히 드문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백자에 그려진 청화산수문 전개 양상의 일단이라도 정리하여 앞으로 이 분야 연구에 다양한 접근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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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애니메이션을 활용한 주제중심 통합교육 모형 연구 (A Study on the integrated art & culture education using short animations of Korea)

  • 김재웅;고민정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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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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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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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문화예술교육은 전 국민의 문화예술향유를 통한 삶의 질 향상과 국가의 문화 역량 강화를 지향하는 교육으로서, 지금까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그 범위가 확산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로 학교수업을 통해 진행되는 학교문화예술교육은 표면적이고 기능적인 교육에 그치는 등 수업 내용과 방식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학교문화예술교육이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고 학교 안에서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부분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양적인 성장에 더하여 질적 심화의 측면을 고려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 이 논문에서는 학교문화예술교육의 질적 제고와 활성화를 위해,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한국단편애니메이션을 활용해서 기존 교과와 문화예술교육을 통합할 수 있는 문화예술통합교육 모형을 개발하였다. 단편애니메이션은 감독 개개인의 세계관과 개성, 개인의 삶과 사회적 관계 및 역사적 성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독창적인 미학으로 표현해내고 있어, 풍부한 미적 경험과 더불어 주제중심통합교육을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오늘이>(2003)는 제주도의 원천강 본풀이라는 신화적 소재와 민화라는 전통적 소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어(언어지능)와 도덕(대인/자성지능)을 통합적으로 구성하여 자신의 생각을 글, 만화, 그림으로 표현하게 함으로써 언어지능과 공간지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예술통합교육 모델을 통해 개별교과 로 이루어지는 분과교육과정의 한계를 극복하여 정규 교과의 경계를 확장해서 전반적인 교육의 질을 개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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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담그기'의 전승양상과 지속가능성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Transmission and Sustainability of 'Making Traditional Soy Sauce' in Korea)

  • 양미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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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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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6-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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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고는 '장 담그기'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무형유산으로서 음식의 전승성이라는 문제를 살펴보고, 음식관습을 지속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를 위해 필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유형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장 담그기'의 전승양상에서 나타나는 지속과 변화를 살펴보았다. 첫 번째 사례는 '장 담그기'의 전과정을 직접 수행하는 경우다. 두 번째는 구입한 메주로 '장 담그기'를 실천하고 있는 사례다. 세 번째 사례는 음식에 관한 이념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계를 조직하여 매년 장을 담그고 '씨간장'을 적립해가는 경우로, 매우 새로운 음식공동체의 출현을 엿볼 수 있다. '장 담그기'전승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요인은 도구와 기술, 생산과 소비, 그리고 음식공동체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변인들 때문에 오늘날 '장 담그기'전승은 실제 상당 부분 변화되고 있지만, 면담대상자들은 전통적 방식으로 만든 장맛이 유지되는 한 본인들의 '장 담그기'전통은 지속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장 담그기'가 계속 전승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장맛을 기억하고 향유할 줄 아는 '맛의 공동체'의 지속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가오별업(嘉梧別業)의 복원 설계를 위한 공간구성 및 정원 특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pace Formation and Garden Characteristics of Garden Remains, Gao-Byeoleop for Restoration Design)

  • 노재현;김순기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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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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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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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조선 말기 대표적 정치인이며 경세가, 그리고 다인이었던 귤산 이유원의 은거 유적인 남양주 천마산 기슭에 위치한 가오별업의 공간구성과 정원 특성을 고구함으로서 향유 별서원림 복원의 기초자료를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문헌고찰과 시문 분석 그리고 현장조사와 주민인터뷰를 결과를 종합해 얻은 가오별업의 정원 모습은 다음과 같다. 종남산을 상징하는 '귤산'이라 자호한 이유원은 왕유의 망천별업과 서계 박세당의 은거 및 별서 경영을 동경하고 이를 스스로 실현하기 위해 선영이 있는 양주 가오곡에 별업을 조성하였다. 천마산 아래 가오곡을 중심으로 조성한 가오별업은 크게 내원과 외원으로 구성되며 별업공간의 영역은 '가오복지' 바위글씨 표식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오별업의 내원은 사시향관, 오백간정, 임하려, 퇴사담 등의 건물과 행랑채 주변의 채원과 후원의 과원을 주요 정원구성요소로 하였으며 내원으로부터 약 850m 떨어진 상부에 조성된 영귀정은 별업 속에 또 다른 별서로서의 이중적 공간구성을 보인다. 가오별업의 내원은 장서각이자 고동서화의 보관소로서 사랑채 역할을 한 사시향관과 익랑 형태로 연결된 작은 사랑채 오백간정이 있었으며 주변에는 유상곡수거가 시설되었다. 또한 서재이자 벽려원(??園)이라 편액한 임하려는 별업 가장 높은 곳에 입지한 서옥이자다실이었다. 방지원도형의 연당 퇴사담에 도입된 태호석 이외에도 가오별업에는 여러 기의 태호석이 도입되었으며 내원에는 다양하고 희귀한 정원 식물들이 식재되었는데 이는 이 시기 원예취미 사조 및 이유원의 재력과 고동서화 수집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편 별업에서 만회암으로 이르는 가오천계곡에 세운 영귀정 일원은 이유원 시기 이후 옥산 또는 우암이란 호를 가졌던 또 다른 인사가 향유했던 명소 '우암폭'이었던 곳으로 보인다. 이유원은 우암폭을 제삼폭으로 규정하고 '귤산'이라 새김으로서 이곳이 자신의 별업 영역임을 알렸으며 이곳에 영귀정을 세우고 주변에는 다수의 복사나무를 심어 도화경을 재현하였다. 영귀정 상부에는 만회정에 이르는 교량 앞에 새겨진 벽파동천 바위글씨는 가오복지 속에 형성된 또 다른 선계로 가름된다. 이유원은 그가 중창에 큰 역할을 한 사찰 만회암 후면 계곡의 거대한 바위에는 제일산이라 바위글씨를 새겨 이곳이 가오별업 외원의 종국임을 알렸다. 본 연구는 문헌연구와 현장연구에 의해 가오곡 일대의 별업 흔적을 추정한 것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현장 유적에 의해 추정된 결과이다. 제일산과 제삼폭 사이의 제2의 경물이나 바위글씨를 확인을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향후 시굴조사 등을 통해 가오별업의 정확한 배치특성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가오별업 복원을 위한 남양주시의 관심과 역할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