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Summary/Keyword: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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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정의 전통적 생활문화에 대한 고찰 -명절, 통과의례에서의 전통적방법과 가정행사의 실제- (Literature Review on The Traditional Customs of Korean Family Life)

  • 정영숙;권수애;조재순;최미숙
    • 한국생활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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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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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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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out the traditional customs of family occasions-New Year Day, Full Moon Day, a marriage ceremony, funeral, first-year birthday, 60th birthday, other birthday, and moving a residence through a literature review. The content of each occasion consists of meaning, process of activities, costume, foods, plays, gifts, etc. The following research is suggested to survey on actual family life and to develop and provide ideal program of the family occasions through formal and informal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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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사시대 석기문화에 대한 연구: 석기문화와의 진화 (A study of Stone Industries of Korea)

  • 배기동
    • 한국제4기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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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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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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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한반도의 석기문화는 전기구석기부터 시작되는데 동아시아지역에 퍼져 살던 고인류 집단의 일파가 한반도로 확산하여 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의 석기문화는 아슐리안주먹도 끼를 공반한 정형화되지 않은 구석기공작이었다, 중기구석기는 르발르와기법의 유무에 대한 논란이 남아있으며 전기적인특성이 그대로 지속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약 3만년전의 후기구 석기시대가 되면 석인석기공작이 나타나고 석기도 대단히 정교해 지는데 이 석기 공작은 동 아시아로 확산되어 오던 현생인류의 도구이었다. 바이칼호부근에서 기원한 세석인문화는 한 반도의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석기공작은 중석기를 거쳐 신석기에 이를 때 까지 눌러 떼 기기법과 함께 존속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마제기법이 나타나게 되고 어로용도구들이 새로 이 추가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간단한 가공으로 만든 농경구들이 추가되기 시작하는데 중후 기에 가서는 마제농경수확구가 증가하게 된다, 청동기시대에는 금속기의 영향을 받은 마제 석검등의 대단히 정교한 석기들이 훌현하고 또한 석기의 기능에 의례적인 기능이 추가되면 서 양식이 분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생산구들도 효율성이 높게 발달해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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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문집에 나타난 아동양육 고찰(I) (Childrearing in the Collection of Works during the Koryo Dynasty Period(I))

  • 신양재
    • 가정과삶의질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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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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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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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본 연구는 한국전총사회의 아동양육을 알아 보기 위해 고려시대의 문집인 파한집.한국이상국집.보한집을 문헌분석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시대의 아동에 대한 인식특징으로는 아동의 소질이나 품성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으로 보았으며, 또한 아동의 지적 측면에 대한 기초가 높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고려시대 아동은 가내과업을 통하여 성인생활로 자연스럽게 사회화될 뿐만아니라 행동모방.자연적 친화.도구제작 등의 활동특성을 지닌 놀이 생활을 하였다. 세째, 고려시대에 부성은 아동의 물리적 보호뿐만 아니라 심리적 측면에서의 야육활동을 수행하였고 한편으로 모성에게는 영아 양육에 있어 필연적 관계가 강조되었으며 또한 당시 사회에는 강항 양육책임의식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분집을 통하여 당시 아동의 의식주생활, 출생의례, 가족교육등에 관한 일부 내용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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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후 통신사선의 항로와 항해

  • 김주식;김소형;김성준
    • 한국항해항만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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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항해항만학회 2018년도 춘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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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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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은 개국 이후 일본과의 교린정책을 위해 막부의 요청에 따라 총 20차례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그 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통신사행과 관련한 제도와 문학, 문화교류, 통신사선의 건조, 상호간의 인식, 외교와 의례, 영접 등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통신사행의 이동경로인 항로와 항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진하였다. 본 연구는 임란 후 1607년부터 1763년까지 일본에 파견된 12차례 통신사행의 해상항로와 항해에 대해 현지답사와 사료를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이 연구는 통신사선의 항로와 항해에 대한 최초의 학술연구로서 통신사행에 대한 연구의 질과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고, 해양사적으로는 한선의 항해술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항해의 실체에 대해서는 통신사선의 사공과 격군이 남긴 사료가 전무하여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차후 연구를 통해 보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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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세조대(世祖代) 의경세자(懿敬世子) 상장례(喪葬禮) 구성과 특징 (The composition and characteristic of the funeral of Ui-Kyoung Prince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in the Joseon dynasty)

  • 조용철
    • 역사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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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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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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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조선은 의례를 국가통치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국가였으며, 이는 "세종실록" "오례" 와 "국조오례의"로 대표된다. 그런데, "세종실록" "오례" 와 "국조오례의"에서 국왕 상장례 절차는 모두 수록하고 있는 반면 세자의 상장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조선의 세자 상장례는 조선 최초의 세자 상장례인 의경세자 상장례를 참고하여 진행되었다. 의경세자 상장례의 기본 절차는 국왕 상장례를 따르고 있었으나, 같은 국상이라 하더라도 세자는 왕위계승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국왕과 차별을 두어야 했다. 따라서 세자 상장례는 국왕 상장례에서 한 등급 낮추어 진행되었다. 의경세자의 상장례는 비록 국상 차원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절차 속에 일반 종친 혹은 대부 상장례의 요소들이 확인된다. 이것은 세자의 지위가 사망을 통해 변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국왕과 세자의 차별을 부각시켜왔던 세조대의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과 대안적 도시운동의 부상

  • 이기웅
    • 사회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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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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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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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최근 몇 년 동안 서울에서는 도시공간에 관한 권리를 둘러싼 격렬한 투쟁이 이어져왔다. 급작스러운 임대료 상승과 그에 뒤따르는 폭력적 전치는 이제 도시생활의 일상적 의례의 하나로 자리잡은 듯하다. 흔히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명명되는 도시공간의 자본화는 한편으로 도시 내 계급지배가 관철되는 대표적 양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도시운동이 발생하는 조건과 배경으로도 작용한다. 이 논문에서는 최근 서울의 도시공간에서 발견되는 도시운동의 새로운 형태들을 2010년 이후 등장한 세 개의 도시 운동 집단,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맘상모),' 리슨투더시티, 비빌기지에 초점을 맞춰 검토한다. 구체적으로 이 글에서는 도시공간에 대한 이들의 대안적 상상과 실천의 형성 과정을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고, 이들이 제시하는 도시운동의 '새로움'을 과거의 도시운동과 비교 분석하며, 도시운동으로서 이들의 실천이 지닌 함의를 도시권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내용과 형식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집단의 행동은 몇몇 핵심적 특성을 공유한다. 첫째, 이들은 공동재(commons)로서의 도시공간을 추구한다. 둘째, 이들은 느슨하고 유연하며 소규모의 조직을 지향한다. 셋째, 이들은 예술과 문화를 주체형성에 적극적으로 동원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철거민운동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계급 기반 도시운동과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며, 계급 이후(post-class) 도시권의 전망을 선취한다.

서울지역 공동체신앙 전승과정 고찰 조선시대 각사(各司) 신당(神堂)의 존재양상과 변화를 중심으로 (A Study of the Transmission of Community Religion in Seoul Focussing on the Shrine of the Authorities and the Change)

  • 오문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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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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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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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서울 공동체 신앙은 조선시대 각 관서에 속한 신당의 제사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각 관서(官署)의 부속공간으로 존재하던 신당의 제사 주체는 하급관리들이었다. 이러한 신당은 대개 부군당(府君堂)으로 불리웠다. 기록에 등장하는 부군당은 대개 1~3칸 정도의 규모이며, 내부에는 신앙의 대상인 부군을 그림으로 그려 봉안하였다. 역사기록에는 부군당의 제사대상이 최영장군이나 송씨부인으로 등장하는데, 실제 부군당의 제사대상은 각각 달랐다. 부군당의 제사 대상 가운데는 왕건, 단군, 남이장군, 제갈공명, 김유신, 임경업, 공민왕, 태조 이성계, 조선의 개국공신인 조반, 남한산성 일대의 지역에 전승되는 설화의 주인공인 홍씨대감과 처첩, 임진왜란 이후 신으로 모셔지기 시작했던 관우와 제갈공명 등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조선시대 각 관서 신당의 의례를 오늘날 서울지역 마을굿의 양상과 정확하게 비교해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록을 통해 볼 때 굿과 고사의 형태가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관서 신당 의례는 점차 민(民)의 공동체신앙으로 자리잡아, 서울의 문화적 변동 맥락 속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다. 본고는 조선시대 관서에 속한 신당의 존재양상을 살펴 보고, 관서 신당의 의례가 민간화되는 전승의 맥락을 장충동 관성묘, 방산동 성제묘, 서빙고 부군당의 사례를 통해 살펴 보았다. 방산동 성제묘가 민간화 되어가는 과정은, 군인들의 신으로 인식되던 신령 관우가 역사적 변화과정 속에 놓이게 되면서 군인들의 신에서 상인들의 신이 되었고, 이후 특정지역 상인들의 공동체적 신앙 대상이 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충동 관성묘는 남영 군인들의 부군당으로서, 관성묘 주변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영신사(永信社)라 불리는 제사집단에 의해 제사가 전승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구성원이 된 이 일대 마을의 공동체신앙으로의 전승이 자연스럽게 계승되었다. 서빙고 부군당의 민간화 과정은 조선 후기 장빙역(藏氷役)의 변화와 맞물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경기도 향토민요 관련 무형문화재의 전승현황과 과제 (Current status and tasks of the transmission of Gyeonggi Province intangible cultural assets (folk songs))

  • 장희선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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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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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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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논의는 경기도 지역 향토민요 무형문화재의 지정 및 지정 후 재현, 전승 현황을 고찰하고, 전승의 과제와 개선방안을 제시한 글이다. 1998년 지정 후 2016년까지, 경기도 향토민요 관련 무형문화재로 최대 13종 지정이후 9종으로 감소하여, 문화재 관리, 운영의 문제가 예상된다. 우선 북서부 지역 위주의 분포와 농요, 의례요 등 유사한 민요의 지정현황은 발굴 복원과정에서 일정부분 상호 전이되거나 정형화 경향과, 일부의 원형 훼손 가능성, 지정 전승 과정상의 한계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화재 종목의 '(세시)놀이'와 '민속음악'의 유형분류와 민요구성의 관계가 모호하여, 재검토가 요구된다. 민요와 놀이 의례의 연계성 등은 원형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다. 지정문화재의 명칭과 종목 번호도 올바른 문화재 지정 여부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보존회의 전수교육은 정기적인 회원 강습과 일반인 대상교육으로 구분가능하고, 원형전승과 현대적 계승의 이원화된 공연양상을 띤다. 의례(일) 과정과 연계된 다양한 유형의 소리 발굴 및 지나친 양식화에 따른 원형훼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전승의 과제와 개선방안으로, 첫째, 문화유산의 가치와 보존에 대한 인식 재고, 둘째, 문화재 지정과 해제 과정의 지표화, 셋째, 문화재의 기록화와 기록물 보존의 체계화, 넷째, 지역사회와의 연계, 다섯째, 전문인력 구성과 지원관리의 체계적 정립 등을 주요 논점으로써, 제안하였다.

서울 진오기굿의 재차구성과 의미 (The Composition and Principles of Seoul Jinogigut (Shamanistic Ritual))

  • 홍태한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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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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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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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글은 서울지역에서 행해지는 진오기굿의 구성 원리를 도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미를 규명한 글이다. 진오기굿은 신과 인간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이승과 저승이 혼재되어 있는 세계이고, 인간의 세계에 있던 망자가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의례이다. 진오기굿은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과정을 차례로 보여준다. 먼저 신 중심의 거리가 연행되는데, 신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할지를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신과 인간이 중심이 되는 거리로 사자를 따라 저승으로 가는 망자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인간 중심의 구조로 인간이 어떻게 저승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 망자가 마침내 저승에 좌정했음을 드러낸다. 신 중심의 굿거리가 신과 인간의 만남을 거쳐 인간 중심으로 연행되는 것이 진오기굿 후반부 저승굿의 짜임이다. <도령돌기> 이후에 연행되는 <베가르기>, <뒷영실>은 망자가 온전하게 저승에 들어갔음을 확인하는 의례이다. 베를 갈라 망자가 저승으로 들어가는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뒷영실>에서 망자는 다시 한 번 굿청에 들어와 굿을 해 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죽음의 세계에 안착했음을 알려준다. 저승에 좌정한 조상신에게 비로소 제사를 올리는 <상식거리>는 진오기굿을 통해 인간이었던 망자가 조상신으로 변화했음을 알려준다. 진오기굿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재가집을 위로해주는 기능도 수행한다. 재가집의 위로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망자가 무사히 저승으로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오기굿은 그러한 과정을 삼중구조를 통해 보여준다. 신들의 세계에서 망자가 어떻게 천도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저승에서 이승으로 나온 사재를 따라 망자가 무사히 저승으로 들어감을 보여준다. 다시 바리공주 뒤를 따라 저승으로 들어가는 망자의 모습을 보여주어 남은 가족의 마음을 달래준다.

창녕 교동 39·63호분 동물순장 연구 (A study on animal SHUNJANG in tombs 39 and 63 in Gyo-dong, Changnyeong)

  • 권주영;김보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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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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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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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창녕 교동 39호분과 63호분은 북쪽에 입구부를 둔 횡구식 묘제로 별도의 추가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창녕지역의 독특한 묘제이다. 본고는 해당 고분의 매장 프로세스와 함께 고분의 입구부에 별도로 조성된 석곽 2기의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 2기의 석곽은 39호분의 석곽 3호(39-3호)와 63호분의 석곽 3호(63-3호)로 대형분 내에 독립되어 조성된 소형 무덤이다. 2기 모두 매장주체부의 북벽 중위에 위치하며 한쪽 벽면을 매장주체부 벽석과 공유하고 있는데 축조상태로 보아 주피장자를 석곽 내부에 안치한 뒤 북벽을 폐쇄하는 과정에서 조성되었다. 석곽 내부에는 동물유체가 모두 확인되었는데 특히 63-3호 동물유체 동정결과 최소 3개체의 개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무엇보다 이들 동물유체는 주피장자를 등진 상태로 머리를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한정된 공간 내에 중첩되지 않고 나란히 안치되어 있어 주목된다. 창녕 교동 39-3호와 63-3호는 매장주체부를 축조하는 과정에서 조성된 것으로 동시성을 가지며 각각의 독립된 유구이지만한 고분 내에서 주피장자를 따라 축조되었다는 종속적 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동물을 살해한 뒤 해체되지 않은 상태로 일정한 방향에 따라 정연하게 안치하였다는 점에서 강제성을 띠고 있다. 이에 유구의 성격은 개(견(犬))를 순장한 순장곽(殉葬槨)으로 이해된다. 삼국시대 고분 출토 동물유체에 대한 연구는 그 위치에 따라 동물부장, 제수매납, 동물희생 등으로 해석되며 이는 일련의 동물희생의례, 즉 동물 부장과 희생(제생(祭牲) 혹은 공희(供犧))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동물을 음식이나 제의 희생물과 같이 물적 대상화하는데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창녕 교동 39-3호와 63-3호는 장송의례 과정에서 동물을 영적존재로 인식하고 주피장자의 계세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유구의 위치와 방향성에 대한 다각도로의 분석도 요구되는데, 이 2기의 순장곽이 고분의 입구부에 해당하며, 위치가 입구부의 가장 개방된 공간이라는 점, 바깥을 향해 바라보는 개의 모습 등은 고분 수호와 벽사의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모습은 고대 계세사상을 반영하는 고구려 벽화고분에 묘사된 개의 그림과 백제 무령왕릉 출토 석수와도 비교가 가능하며 고대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의 의미와도 상통한다. 이는 차후 동물유체 매장유구에 대해 다각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