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온궁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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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1795)의 온양행궁지 추정 및 온양행궁 변천 고찰 (A Study on the Transitions and Site of temporary palace(Onyanghaenggung) according to the <Oncheonhaenggungdo>(1795))

  • 이정수;김일환;이경미;지원구;최재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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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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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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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온양행궁(溫陽行宮)은 <온궁영괴대(溫宮靈槐臺)>, 『온궁사실(溫宮事實)』<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 『영괴대기(靈槐臺記))』 등 문헌기록과 영괴대(靈槐臺)와 신정비(神井碑) 등 온행 유적 등을 통해 왕의 온행을 확인가능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현재 온양행궁지로 추정되는 곳은 온양관광호텔이 입지하고 있어, 온양행궁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 정체성마저 위협받고 있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훼손 이전 『온궁사실』<온천행궁도>(1795)에 나타나는 온양행궁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첫째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온행관련 기록을 고찰하고, 둘째 조선시대 온양행궁의 건축물 변화 및 일제강점기 훼손과정 등을 정리한 후, 셋째 <온천행궁도> 및 읍지, 고지도 그리고 지적원도 등을 현재 온양관광호텔 및 주변 지역 변화와 비교분석하여 온양행궁의 위치를 추정하였다. 이상의 연구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온양군읍지」 및 「호서읍지」의 1,758척을 주척(周尺)으로 환산하면, 온양행궁의 범위는 지적원도(1914년)의 대(垈)로 표현된 부지 내측 둘레와 근접하고 있다. 둘째, 지적원도의 온양관 남측 잡(雜)으로부터 온천천으로 나가는 물길, <온천분포견취도(溫泉分布見取圖)>(1925, 1928)의 온천공, 그리고 <온천행궁도>의 내동문(內東門), 비각(碑閣), 신정(神井), 답도 등의 관계를 종합하면, 헤르만 산더(Hermann Gustav Theodor Sander, 1906) 및 한국저작권위원회 온양온천 사진의 건축물을 『온궁사실』<온천행궁도>의 온천(溫泉) 즉, 탕실(湯室)로 추정할 수 있다. 셋째, 경남철도회사가 온양행궁지 유원화(遊園化) 과정에서 관유재산인 영괴대 부지의 양도 및 이전(1927)을 요청하나 충청남도는 국유 영괴대기념비 및 영괴대를 괴수(회나무)를 함께 현 위치에 영구보존(1928) 하도록 한 기록과 <조선경남철도연선명소교통도회(朝鮮京南鐵道沿線名所交通図絵)>(1929)를 참고하면, 영괴대비각(靈槐臺碑閣)은 현 위치로 판단되며 신정비는 신정관(神井館) 전면으로 이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온양행궁 둘레범위, 『온궁사실』<온천행궁도>의 온천(溫泉) 즉, 탕실(湯室) 및 영괴대 위치 등을 기초로, 일제강점기 및 근대기 필지변화, 그리고 최근 주변 유구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온천행궁도> 온양행궁지의 범위 및 주요 건축물 위치는 현재의 시민로 및 온양온천시장까지 확대하여 추정할 수 있다.

<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1795)의 온천(탕실) 건축 고찰 (A Study on the Hot Springs(Tangsil Building) of Temporary Palace(Onyanghaenggung) according to the <Oncheonhaenggungdo>(1795))

  • 이정수;김일환;이경미;지원구;최재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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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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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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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온양행궁은 <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온궁사실(溫宮事實)』(1795), 『영괴대기(靈槐臺記)』 및 <영괴대도> 등의 문헌자료와 영괴대(靈槐臺), 신정비(神井碑)로 왕의 온행을 확인가능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1906년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가 촬영한 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온양행궁의 온천(탕실)이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온양행궁 관련 문헌 및 <온천행궁도>(1795)에 기초하여, 온양행궁 탕실의 건축형식을 밝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첫째 온양행궁 및 탕실의 변천을 살펴보고, 둘째 왕의 목욕문화 및 행태를 고찰한 후, 셋째 <온천행궁도> 온천(탕실) 건축을 「온궁수리」를 통해 정리하고, 넷째 일제강점 초기 헤르만 산더(Sander)의 사진과 비교하여 조선 후기 마지막 온양행궁 온천(탕실) 건축 형식을 고찰하였다. 이상의 연구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온양행궁 온천(탕실)은 현종 초 온정실(溫井室, 8칸), <온천행궁도> 온천(탕실)로 이어지면서 조선 후기 『호서읍지』(1871)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초기 헤르만 산더(1906) 및 <1912년 충남 아산시 온양온천>(한국저작권 위원회) 사진 건축물과 일치하고 있다. 둘째, 조선시대 국왕의 목욕법은 목욕평상(沐浴平床) 또는 교의(交倚)에 앉아 세두, 유두, 목두 등을 시행하거나, 온천수 증기를 직접 쐬는 훈세, 탕정 앞에 목판을 깔고 앉아 물에 발을 담그는 침족 또는 침세, 그리고 배꼽 아래만 물에 담그는 반신욕인 체욕, 좌탕 등의 다양한 목욕방법을 채택하였다. 셋째, 온양행궁 온천(탕실)은 온천수가 상탕 서북쪽에서 분출되어 동쪽으로 꺾여 중탕으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꺾어지면서 바깥으로 나와 하탕이 되는 구조로서, 탕체 주변부는 태안에서 실어 온 바둑돌을 탕실 바닥에 깔았다. 이상의 고찰로부터, 어실로부터 왕의 접근동선, 왕의 목욕법과 목욕도구, 입대하는 의관과 목욕보조 인력 등 목욕행태와 「온궁수리」에서 언급된 각 실 등의 구성을 헤르만 산더의 사진과 비교하여, 온양행궁 온천(탕실) 건축물을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