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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대나무' 도상의 상징에 대한 고찰 - 『성화집(聲畵集)』의 '대나무' 제화시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ymbols of bamboo icon in bamboo paintings - Focused on 'bamboo' Ti-hua-shi(題畵詩) in 『Sheng-hua-ji(聲畵集)』)

  • 서은숙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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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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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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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는 그림에 제하거나 그림을 대상으로 한 제화시(題畵詩)의 특성에 비추어볼 때 묵죽(墨竹)의 형상성이나 형상 과정이 잘 묘사될 수 있다고 여겨, 송대(宋代) 제화시를 수록한 대표적 제화시집인 "성화집(聲畵集)"에 실린 '대나무' 제화시를 통해 북송대 이후 묵죽화의 발전 양상과 그것의 도상학적 의미를 살펴본다. 묵죽화 발전 양상과 그 유형을 살펴보면, 북송대에는 당시 어부(御府)에 148축의 묵죽화가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묵죽화가 성행했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묵죽의 모습, 즉 그림 속의 '도상'은 와룡처럼 누운 횡죽(橫竹)이나 교룡처럼 굽은 우죽(紆竹)이 많이 등장하고, 특히 많은 대나무가 겨울에 서리를 맞고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송대에 오면 '대나무' 도상에 대한 인식은 유가적 이상형인 군자라는 보편적 인식과 더불어, 대나무를 자기표현의 한 수단으로 여기고 문인 사대부 특유의 문인성을 표현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게 된다. 그 결과, 전업화가들이 단청(丹靑)과 형사(形似)에 몰두해 그린 대나무가 아니라 문인 사대부 즉 자신들이 '묵죽'을 창작하고 감상하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 묵죽에 대한 송대 문인사대부의 애호와 관심에는, 유가적 이상형인 군자 외에 시련에도 불요불굴하는 의지의 구현자이자, 부귀와 공명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도덕적인 책임과 문화적 과제를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진정한 '문인성'의 체현자라는 인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각공간과 건축공간의 관계 (Entre l' espace sculptural et, l' espace architectural)

  • 이봉순
    • 조형예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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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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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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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시각이 아닌 오감체계에 관계하는 때문에 현대미술은 외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곧 예술 작품들은 하나의 장소를 관객에게 제공하여, 심리적, 물리적, 또는 예술이 존재여부에 관한 갖가지 질문들을 제기한다. 모든 예술 작품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념 또는 아이디어에 우선하는 현대미술은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우리의 사회적 배경과 보편성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의 물체 인식은 결국 우리의 경험체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간주하면, 현대미술의 새로운 형태는 보편적 특질들이 그 특질들 이상의 상태로 보여지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창조 행위의 시작은 현대인간의 문화 읽기이며 문화는 인간과 자연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역사는 지나간 시간을 기록한 것이며, 이 또한 우리의 지식과 정보 체계에 속한다. 회화가 평면에 입체감을 표현하는 것과는 달리 조각은 자연 속, 즉 실재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시각(visible) 이외에도 촉각(tangible)이 관여하게 된다. 조각의 특수성은 촉각(tangible)이 우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각과 촉각은 매우 적극적으로 미학적 경험에 참여하는 감각으로 이들을 서로 분리하여 생각하기가 무척 힘들다. 왜냐하면 어떤 경험에 있어서 기억연합 또는 감각 연합에 의해 하나의 감각이 다른 여러 감각을 촉발하여 연쇄반응 혹은 '형태 Gestalt'를 이루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근대 조각 작품들은 조각대 위에 고정되어 있는 구상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조각작품 자체가 지닌 외적 형태와 그 자체내의 공간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미로의 비너스 조각은 대리석과 비너스 형태의 결합이다. 때문에 관객은 그 주변을 돌면서 우리 신체의 내적 공간과 시각에 의존하면서 그 작품의 중량감, 양감, 형태 등의 특질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현대 추상조각과 개념조각은 이보다 좀 더 확장된 공간을 제시한다. 이것은 현대조각이 건축개념을 수용한 때문이며, 그것이 때로는 안 쪽에서 때로는 바깥 쪽에서 그 형태를 결정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만져지고 왕래하는 등의 인식 영역인 관객의 오감체계에 직접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축 공간에서, 시각 외에도 청각이나 촉각을 통해 지각한다. 대강 요약하자면 공간은 객관적 상태이기보다는 인식영역의 주관성을 통해 받아들여진 우리가 지나쳐온 것들이나 체험된 공간이다. 여기서 '받아들여지는' 일은 과거 경험들의 주체들, 언어와 문화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건물, 즉 둘러싸고 있는 공간은 중앙이 아니다. 중앙은 바로 나, 둘러싸여진 나이다 나는 나의 동작에 따라 그 공간의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동적인 중심이다 (이때의 나는 위치의 축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탐색하는 것이다). 작품이 대형화되면서 이러한 건축공간개념이 현대 조각가들의 작품개념에 이용되었다고 본다. 현대미술에서 In situ작업과 특정한 장소를 위한 기획되어진 최근의 프로젝트 작업들은 대형화되어있으며, 건축에서처럼 특정한 장소를 만들어낸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또한 '조각영역의 확장 (La sculpture dans le champ elargi)'에서 현대조각이 건축과 환경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녀에 의하면, 1960년대 이후의 현대조각은 이러한 탈 귀속성과 조각의 자율성을 획득함으로써 조각은 건축물이 아니면서 건축물 주변에 위치하거나 풍경이 아니면서 풍경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현대의 대형조각 작품들 - 예를 들어 대형화된 미니별 조각이나 개념미술, 또는 대지예술 등 -은 풍경의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환경으로부터 구분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들 조각은 더 이상 만져지는 실체이거나 점유하는 공간의 상징언어를 지닌 조각의 범주에 한정되지 않게 된다. 조각과 건축의 공간인식을 인체의 크기와 관련하여 보면, 메를로 퐁티(Merleau-Ponty)의 '지각의 현상학' 은 우리가 논하는 작품의 공간체계를 분석하는데 지침표가 되어준다.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지각은 정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몸과 함께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지각은 우리가 부단히 눈을 움직이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주변을 돌아 다니면서 세계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 진다. 몸의 움직임을 통하여 나타나는 신체적 표현은 몸 자체가 원천적으로 지향적 활동의 주체로서 파악되는 한 이미 항상(恒常, constant) 의미 현상을 지니다. 우리의 지각이 움직이는 몸의 지향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몸의 지향활동이 의식에 선행함을 의미한다. 몸의 움직임은 의식의 의도를 표현할 때에만 의미를 나타내는 기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살아있는 표현이다. 우리의 몸짓, 표정은 우리 의식이 의도하기 전에 이미 의미가 담겨있다. 몸은 그 자체가 기호(Signe)적이다. 결국. 메를로 퐁티에게서 세상(le monde entier)은 그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인식한다, 그리고 이 인식 구조에는 우리의 몸이 구심점(le point centripete)이 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메를로 퐁티의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예술작품의 특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재료와 크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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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남종화(南宗畵)의 예술심미 고찰 (The foundation and Characteristic on the Aesthetic of EuiJae Huh BaekRyun' Namjonghwa)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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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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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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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호남 남종화의 상징적 거목이자 호남문화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의재 허백련(1891~1977)은 진도출신으로 소치 허련의 방계이며, 미산 허형의 제자이다. 전통 남종화 정신과 그 기법에 충실한 화격(畫格)을 자득(自得)·자화(自化)하였다. 의재(毅齋)는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켜 후진양성을 도모하였고, 해방 후 무등산 아래 산장을 짓고 다도인으로서, 그리고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실천했던 사회교육자로서의 또 다른 면모도 보였다. 그는 한시와 화론에 조예가 깊었고, 서예에 있어서 독특한 심미경지를 구현하는 등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의 전형적 서화가였다. 의재(毅齋)는 특히 산수화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화풍은 예황풍(倪黃風)의 갈필(渴筆)로써 기존 화법을 준수하면서도 문기(文氣)를 중요시 여겼으며, 탈진습기(脫盡習氣)하여 새로운 실험정신으로 끊임없이 도전했다. 의재(毅齋)의 작품세계는 화풍이나 추구하는 관점의 변화를 작품에 사용한 낙관(落款)을 기준으로, 고법(古法)과 사의간원(寫意簡遠)의 숙련기였던 '의재(毅齋)'시대, 실경(實景)과 남화(南畵)의 융합 화풍으로 절정기를 보였던 '의재산인(毅齋散人)'시대, 청담평안(淸談平安)한 신품경지(神品境地) 구현으로 독자적 화풍을 이룬 '의도인(毅道人)'시대 등 총 3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의재(毅齋)의 공헌은 동양회화의 지류인 한국회화문화의 정통 남종화에 대한 한 축을 이어왔다는 미술사적인 평가를 넘어 남도화의 보편적 정신과 지역적 특성을 바탕한 실경과 정서를 살린 창의적 계승을 통하여 현대를 잇는 조종(祖宗)이었음을 인식하고, 그의 예술정신과 전통에 대한 열정과 실험정신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연산 돈암서원(豚巖書院) 구지(舊址)의 원형경관 탐색 (Research on the Prototype Landscape of Former Donam SeoWon Located in YeonSan)

  • 노재현;최종희;신상섭;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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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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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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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돈암서원 구지(舊址)의 입지 및 공간구성 그리고 경관적 특징을 고찰함으로써 돈암서원의 원형경관과 관련된 진정성을 고양할 수 있는 자료 추출을 목표로 시도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돈암서원 구지와 일체감을 갖는 '둔암(遯巖)' 각자바위와 사계선생 유허비, 김집사당과 광산김씨 종가 그리고 그 앞을 흐르는 사계천과 원경으로 펼쳐지는 계룡산과 대둔산의 조망경관은 '돈암원림'으로 불리웠던 구지의 입지 및 장소 특성을 명료히 보여 주는 원형경관 요소이다. 또한 "양성당십영"을 통해 볼 때 임정(林亭)을 중심으로 약초밭과 쌍지(雙池) 죽림(竹林) 학당(學堂) 도원(桃園) 등 원림경관 요소를 갖추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관어(觀魚) 강론(講論) 방은(訪隱) 침승(尋僧) 그리고 관가(觀稼) 등 성리학적 사유와 깊은 의미경관적 행위가 발견된다. 동향으로 좌향된 구지는 사우-응도당-입덕문-산앙루로 이루어진 건물축의 배치로 파악되는 바, 배산임수의 자리잡기 틀 속에서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위계적 배치구조로 판단된다. 그리고 사우(崇禮祠) 영역 좌측으로 전사청이, 우측으로 외사에 해당되는 상하 쌍연지(雙蓮池)를 거느린 양성당이 위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경내에는 송 죽 매 연 등 성리학적 수양론 및 출처관과 관련한 절제된 조경수가 도입되었고, 복숭아나무 및 버드나무는 물론, 배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뽕나무 등의 식재를 통한 제례와 관련된 이용후생의 식재법이 반영되었다. 특히 주자가 말년에 호로 사용했던 돈옹(豚翁)의 돈(豚)을 상징적 주제어로 대입시킨 돈암서원 구지는 근 250여 년간 서원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 장소로서,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돈암서원의 진정성을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현지는 물론 구지의 보존 및 원형경관 보전이 시급히 요망된다.

해방전후 함대훈 소설에 나타난 '러시아' 표상 연구 (Russia Represented the Novel of Dae Hun Ham before and after the Liberation)

  • 강용훈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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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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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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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식민지 시기 함대훈은 러시아 문학을 자신의 소설 창작에 반복적으로 활용했다. 그 중에서 투르게네프의 소설 "그 전날 밤"은 함대훈의 첫 장편소설 "폭풍전야"에도, 1943년 발표된 "북풍의 정열"에도 반복적으로 차용되고 있다. 함대훈 문학에 차용된 러시아 문학은 지금 이곳과는 다른 문화, 다른 질서에 대한 인물들의 동경을 이끌어냈으며, 인물들의 동경은 1930년대 중반 발표된 "폭풍전야"에서는 민족운동에 뛰어든 신청년(新靑年)의 형상으로 구체화되어 당대 식민지 조선의 상황과 긴장 관계를 만들어냈다. 반면 1943년 발표된 "북풍의 정열"은 "폭풍전야"와 마찬가지로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을 차용하고 있지만, 이 소설에는 "폭풍전야"와는 변별되는 지정학적 상상력이 구현되어 있다. "북풍의 정열"에서는 '만주'를 둘러싼 당대의 정치적 역사적 맥락은 소거된 반면, '만주'와 과거 지식인 청년들의 열정을 이끌어냈던 '러시아'를 연결시키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열정이 만주에 대한 동경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함대훈 문학에 나타난 '북국(北國)' 표상의 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1930년대 후반 함대훈의 소설에서는 '러시아'가 '북국'으로도 표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함대훈 문학에서 '북국'은 점차 '러시아'가 아니라 '만주'를 지칭하는 공간 표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북국' 표상을 통해 러시아와 만주를 연결시키는 방식은 '만주'가 시베리아 지방과 멀지 않은 지역임을 부각시키는 언술에서도 암시되어 있듯이 시베리아 지역으로까지 대동아공영권을 확대하고 싶은 제국 일본의 욕망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함대훈은 '북국' 표상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제국 일본의 지정학적 논리를 정당화하는 담론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시기 함대훈에게 '러시아'는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었지만, 그 동경은 '만주'에 대한 함대훈의 인식에서 드러나듯 언제든 세속적 욕망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해방 직후 발표된 함대훈 장편소설 "청춘보"에서도 확인된다. 해방 직후는 소련이 냉전질서의 한 축으로 부각되고 러시아어가 한국인의 일상적 담화공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였다. 함대훈은 "청춘보"를 통해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소련의 문화를 동경하던 연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후, 그의 시선으로 해방 전후의 북조선 사회를 재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 작품은 러시아의 문화 및 '소련'과 관련된 다층적 표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재현의 양상을 만들어낸 것은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심퍼사이저(sympathizer) 의식, 즉 '동반자 의식'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동반자 의식은 식민지 후반의 조선에서 금지의 대상이었던 '소비에트' 문화의 이국성을 그가 동경하고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러시아어가 일상에서 사용될 수 있는 언어이자 영어와 교환될 수 있는 위상을 확보하게 된 해방 직후 '러시아' 및 '소비에트'를 재현하던 주인공의 시선은 변모하게 된다. '붉은 군대'라는 상징 아래 '러시아'와 '소비에트'를 통합적으로 인식하던 시선은 점차 변모하였고, 월남(越南) 이후에는 '러시아'를 '공산주의'라는 도깨비에 의해 점령된 소굴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와 '소비에트'는 분리되어 이해되기 시작했다. 식민지 시기 가장 핵심적인 러시아 문학 연구자이자 번역자로 규정된 함대훈의 해방 이후 행보, 그리고 해방 직후 그가 발표한 소설 "청춘보"의 러시아어 번역/통역가 곽성식의 면모는 해방직후 한국의 러시아 문학 연구가 걸어야 할 침체의 길들을 서사의 형태로 예견하고 있다. 금지된 것에 대한 열망 및 러시아의 이국적 문화에 대한 동경에 의해 수행되던 낭만적 번역, 해방 전후 함대훈 소설의 러시아 표상은 그러한 낭만적 번역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진주 용호정원(龍虎庭園) 무산십이봉의 경관의미와 축산효과 (A Study on the Meaning and Mount Effect of Twelve Peaks of Musan in Yongho Garden, Jinju)

  • 이현우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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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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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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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경남 진주시 용호정원에 조성된 무산십이봉이 전통적 축산(Mount)의 원형이자, 지형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변화와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설계요소라는 전제 아래 시작되었다. 또한 연구 결과가 축산되는 유사공간의 재현 및 현대적 변용에 필요한 자료 및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또한 크다. 무산십이봉 축산을 통해 조영자가 추구하고자 했던 12봉우리의 상징성과 공간구성원리 그리고 시각구성상의 기능 및 효과를 조망경관적 측면에서 분석 또는 해석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용호정원의 핵심인 용호지는 비보 풍수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인공혈구의 전형적 사례로 풍수형국의 완결을 위한 비보(裨補)의 장치이자 용과 관련한 지명의 연계를 통해 온전함을 강화시키고자 했던 산물이다. 축산의 크기는 높이 2~3.5m, 지름 약 6~12m정도의 오성상 금성산형을 하고 있으며, 봉우리의 높이는 1.9~3.2m, 평균값은 2.5m로 밝혀졌다. 봉우리의 면적은 $35{\sim}138m^2$의 범위에 있고, 면적 평균값은 $73.4m^2$로 나타났으며 이에 비례한 체적은 $30.7{\sim}115.0m^3$, 그 평균값은 $62.5m^3$으로 추산되었다. 용호정과 소선 그리고 본채 터 및 용산재의 일치된 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과 속의 의미 부여를 통해 용호지를 피안의 세계로 상정하였으며, 조영자는 무산십이봉의 형상을 구현시키기 위한 의도로 호두 자리에서 대응되는 지점과 교차되도록 용의 골격을 형상화한 12개의 봉우리를 축산하고, 그 중심에 '여의주를 문 용이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형상'의 무산십이봉과 용호정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무산십이봉 주변 중경권역은 남북으로 금성산형의 산봉으로 둘러싸여, 용호지를 중심으로 동질감을 유지한채 다층의 층위구조를 보이는 바, 이는 유사 형태조화에 기인하며 무산십이봉의 조성 시 기획된 축산의도라 사료된다. 무산십이봉 축산에는 은폐와 노출을 통한 점진적인 경관연출과 전망-은신처이론 그리고 틀에넣기 기법 등의 공간 질서가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데, 이는 무산십이봉 각 봉우리의 노출과 둘러싸임 정도의 다양함, 전망과 시선차단 조합의 다채로움을 통해 경관의 심도와 기대감을 높이고자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무산십이봉에 의해 '닫힌경관'은 흥미롭고 생기 있으며 매력적인 경관인식을 배태(胚胎)하는데, 특히 축산은 용호지와 용호정 주변에 관한 경관의 심도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지형설계적 차원에서 매우 유용하게 작용하고 있다. 더불어 용호정에서 조망하였을 때 섬을 통해 또 다른 섬이 보이도록 하는 중층적 노출효과를 의도해 특수한 위치를 배려한 경관짜임의 결과인 12개 봉우리의 묶음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가평 이천보(李天輔) 고가(古家)의 정원 현황과 원형 복원을 위한 제안 (A Study of the Current State of the Garden and Restoration Proposal for the Original Garden of Yi Cheon-bo's Historic House in Gapyeong)

  • 노재현;최승희;장혜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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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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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8-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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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우리나라 사대부 민가 정원 중 그 형태는 물론 정원의 구조와 기능 등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경기도 가평군 상면에 위치한 이천보 고가(경기도문화재자료 제55호)는 명문가로서의 내력이나 장소성 그리고 잔존하는 건물과 자연문화재 등의 측면에서 매우 가치 있는 정원 유산으로 판단되지만, 현재는 사랑채를 제외하고는 그 진가를 찾을 수 없다. 본 연구는 이천보 고가를 비롯하여 경기 북부와 가평군 관내 민가 정원의 배치 양식 등을 문헌 연구, 현장 연구, 1954년 항공사진 비교 검토 그리고 관련자 인터뷰 등을 통해 조사 분석함으로써 이천보 고가의 가치를 조명하고, 이천보 고가의 정원 원형을 추론하는 등 산림채와 정원 복원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정원의 장소성이 그나마 잘 보존된 반계천 일대의 반계동문(磻溪洞門) 암각서와 반석암의 존재를 통해 외원의 영역과 경관상을 살피고 이천보 고가의 입지 및 풍수 형국 그리고 조망축을 해석하였다. 이와 함께 사랑채에 걸린 상고당(尙古堂), 반계정사(磻溪精舍) 그리고 옥경산방(玉聲山房) 3개의 편액을 통해 사랑채의 경관성과 용도 및 상징성을 추론하였다. 더불어 내원에 현존하거나 존재했던 수목에 대해서는 실측 조사를 병행한 결과, 연하리향나무(경기도기념물 제61호)는 안내판이나 문화재 정보 등의 실제 규격보다도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행랑채 전면에 잔존하는 향나무 또한 제원 조사 후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원에 남아 있는 사랑채와 이전된 행랑채의 배치와 형태 그리고 사랑채 누마루와 지붕 측면부 합각 형태의 비대칭성 등을 통해 소실된 안채의 모습을 유추하였다. 또한 소실된 안채 및 사당 등의 복원을 통해 정원의 완전성을 추구할 목적으로 원래 모습을 추정한 결과, 안채는 사랑채 우측(북쪽)에 '구(口)자' 또는 '튼구(口)자'형태로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를 종합하여 이천보 고가에 대한 복원 대안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