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삼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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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축제의 삼사신(三使臣) 조복(朝服) 제작을 위한 제언 (A study for the production of three envoys at the Joseon tongsinsa festival)

  • 이영주;김효숙
    • 한국의상디자인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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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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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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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The Joseon Tongsinsa Festival has been held annually in May in Busan. It reenacts the procession of the Joseon Tongsinsa that the Joseon Government delegated to Japan four times in the 18th century. In the most important situation during the meandering period, three envoys (Jeongsa, Busa, Jongsagwan) who led the Joseon Tongsinsa, wore Jobok, but at the Joseon Tongsinsa Festival, the three envoys are wearing Jobok, which are not historically accurate. The Jobok called Geumgwan Jobok and were comprised of Yanggwan, Eui, Sang, Jungdan, Peasul, Su, Pumdae, Daedae, Paeok, Hall, Mal, and Hwa. These were ranked from first class to ninth class by personal ornamentation such as Yanggwan, Su, Pumdae, Paeok. So, this study is focused on ascertaining the Jobok of the 18th century for the three envoys who were ranked third grade. This study is based on literature, artifacts, and portraits that can depict the 18th century Jobok including all components. It was based on The 7th Korean Human Body Survey Final Report (2015) in order to produce all components of the Jobok of the modern males in their 50s who are playing the role of the three envoys in the Joseon Tongsinsa Festival.

세종시대 천문시계 옥루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

  • 김상혁;이용삼
    • 한국우주과학회:학술대회논문집(한국우주과학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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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우주과학회 2010년도 한국우주과학회보 제1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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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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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옥루(玉漏)는 1438년(세종 20)에 장영실이 제작한 자동물시계이다. 종, 북, 징을 타격하여 시간을 알려주고 태양운행 장치가 있어 절기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옥루에 대한 관련 문헌을 연구하여 옥루 작동구조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옥루는 물의 흐름을 이용한 수력으로 운행하는 동력장치를 두고 있다. 옥루를 이루고 있는 가산의 형태는 빈풍도를 나타낸 것으로 백성들의 농사짓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옥루의 구조는 산위, 산기슭, 평지로 구분할 수 있다. 산위에는 태양운행 장치, 옥녀(玉女)와 사신(四神), 산기슭에는 사신(司辰)과 무사(武士), 평지에는 12신(神), 옥녀(玉女), 관인(官人)이 위치해 있다. 각 층별로 구성되어 있는 시간을 알려주는 인형들의 기본적인 운행 메커니즘에 대하여 분석하고 작동 개념도로 제시하였다. 또한 태양운행장치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 개념도로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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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 조선통신사 복식에 관한 연구 -삼사신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Costume of Korean Envoys of the Chosun Dynasty in 1711 -Focused on the Three Envoys-)

  • 이자연
    • 복식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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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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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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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This study is to research the costume of Korean envoys of the Chosun dynasty. The research results follow. The costume of three envoys including senior envoys and vice envoys is by, its different kinds, Gwandae, Jobok, Gongbok, and Pyongbok. According to the different purposes of occasions, these dresses were classified as the dress for ceremonies, the dress for banquets, and the dress for travel. For the ceremonial purpose, Gongbok and Jobok were mostly used. Gongbok was chosen when the envoys entered into the major cities or when they had ceremonies with the lord of the manor. The envoys wore Jobok for important ceremonies such as when receiving or presenting credentials or when entering into Chusima. For travel costume, Pyonbok of nobleman was used. The envoys wore Pyonbok during journey but they changed into Gongbok when they entered into the major cities such as Osaka or Kyoto in order to show their diplomatic etiquettes as representatives of the Chosun dynasty. And for the banquets, they wore Gongbok for official banquet and Pyongbok for private banquet. These findings of the different dress for different occasion indicate that there was a strict dress code according to the occasions and purp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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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왕묘의 어제(御製) 현판(懸板)의 유형과 내용 분석 (An Analysis on Types and Contents of Hanging Boards Inscribed with King's Writings in Donggwanwangmyo[East Shrine of King Guan Yu])

  • 장경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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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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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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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관우를 모신 동관왕묘에는 51점의 현판이 소장되어 있다. 이것들은 조선의 국왕이나 명 청대 사신 및 장군들이 쓴 것이다. 그동안 현판에 대한 연구는 궁궐에 소장된 것들이 주로 연구되었고, 동관왕묘의 것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국왕의 글씨로 만든 현판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그 내용과 형식을 분석하였다. 내용상으로는 현판의 제작자와 제작시기 및 제작배경을, 형식상으로는 현판의 유형과 재료 및 시기별 양식 변천을 밝혀 보았다. 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동관왕묘에 국왕 글씨로 만든 현판은 총 7점이 현존하고 있다. 숙종이 쓴 1점, 영조가 쓴 4점, 고종이 쓴 2점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건물의 이름을 쓴 편액(扁額)과 동관왕묘에 방문한 느낌을 시로 쓴 시액(詩額)으로 나뉘었다. 특히 후자는 국왕이 봄과 가을에 능행(陵幸)하면서 동관왕묘에 들렀을 때 썼으며, 관우의 의리와 충성을 통해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의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 국왕의 현판은 명 청대 사신이나 장군의 것들과 비교할 때 재료나 형식면에서 차별화되었다. 바탕은 청색[회회청(回回靑) ]이나 주색[주칠(朱漆)] 및 옻색[흑칠(黑漆)]으로서, 먹색[묵(墨)]이나 흰색[분질(粉質)]으로 된 현판보다 고급 재료로 칠하였다. 글씨는 양각으로 새긴 위에 금(金)으로 칠하였다. 현판의 형식은 4면이 모판처럼 $45^{\circ}$로 비스듬하며 단청기법으로 꽃문양이나 칠보문양을 그렸고, 그 좌우와 아래로 길게 빼 당초문양을 장식하였다. 이것은 '사변형(斜邊形)'이라고 부르는 형식이며, 나머지 3종류의 형식보다 품격이 높아 최고 수준의 것이었다. 이처럼 국왕의 글씨를 새긴 현판의 존재를 통해 조선후기에 동관왕묘는 국왕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군인들의 충성심을 강조한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위상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밖에 명대 사신이나 청대 장군의 글씨로 제작된 현판과 형식 비교나 시기별 양식적 변천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조선후기 관서지방의 공연 시공간과 향유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Time-Space and Appreciation for the Performance Culture of Gwanseo Region in Late Joseon Period: Focusing on Analysis of Terminology)

  • 송혜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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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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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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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고는 조선후기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시공간과 향유에 관한 연구이다. 관서(關西) 지방은 중국 대륙과 인접한 접경지대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대외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재화가 풍부한 문화의 중심지였다. 조선후기에는 중국과 조선을 오가던 수많은 사신과 역관, 상인들이 이 지역을 경유하였고, 1~2년 간격으로 관찰사가 교체되었으며, 지역 인재 선발을 위한 도과(道科)과 빈번하게 시행되면서 환영과 전송 의례, 위로, 향연에 따른 공연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여러 문헌자료와 읍지(邑誌), 그림 자료로 전하며, 문학, 음악, 무용, 민속학 분야의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관서악부>를 비롯하여 평양, 성천의 자연과 풍류를 노래한 가사문학작품, 연행록 등을 문학작품을 세밀하게 읽다보면, 기존의 연구에서 주목해 온 공연의 종목과 악기편성, 음악기구, 음악인 등 뿐 만 아니라 공연활동의 주체와 시공간, 향유방식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이 매우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공연이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언제,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공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 관객과 공연주체가 어떻게 소통하였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음악과 춤에 관한 단적인 정보 외에 '공연', '사람', '시간', '공간'의 관계성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미진했던 '전통공연예술 양식' 연구의 기반이 되리라고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관서악부> 108편, 한글 가사 작품 8편, 한문연행록 9종에 표현된 공연관련 정보를 '주요어' 에 주목하여 분석한 결과 조선후기 공연문화의 시공간과 향유 양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공연의 시기와 시간, 전체 소요시간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사신연의 경우, 국가나 개인의 상례(喪禮), 기일(忌日) 등의 '금지사유'가 없는 한, 더위나 추위를 무릅쓰고라도 진행되었다. 그 외에 계절을 선택하여 '놀음'을 벌일 경우, 계절적으로는 '삼사월 좋은 때', '춘풍' 불고 '일기 화창'한 날과 '가을 물결' 아름다운 '추강(秋江)'의 계절이 선호되었다. 공연 시간 대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포시(오후 4시경)', '석반을 물리치고~', '야심(夜深)', 의 예에서 처럼 매우 가변적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밤에 열리는 야연(夜宴)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공연의 지속시간은 '잠깐 보고'부터 '전날 오전부터 다음날 낮까지' 차이가 컸다. 공연시간대와 전체 소요시간은 사신일행의 일정에 영향을 받았다. 공연 공간은 자연, 누정이나 관아의 건축 공간, 선유놀음의 선상 공간, 영송(迎送)의 행차음악이 연주된 연도(沿道)로 구분해볼 수 있었다. 평양의 연광정, 부벽루, 성천의 백상루, 선천의 의검정, 천연정, 의주의 통군정 등의 건축공간과 강상에 배를 띄운 선유놀음의 크고 작은 선상공간은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중심이었다. 공연 공간에는 공연주체와 좌상(座上)객의 필요에 따른 주물상, 다담상, 찬을 갖춘 상, 병풍, 의자, 향로 등이 구비되었으며, 야연에서는 청사초롱, 홍촉대, 횃불이 갖춰졌다. 약산동대 등, 자연 공간에서의 공연도 선호되었다. 공연 향유와 관련하여 공연주체와 관객, 공연내용, 향유자의 소감과 비평 등을 살폈다. 공연주체는 기생과 무동, 악공, 전악, 취타군, 무동, 가아(歌兒) 등 수많은 명칭이 사용되었다. 특히 공연에서 춤과 노래, 연주를 담당했던 기생에 대해서는 기생의 수, 연령, 역량, 이미지 등을 알 수 있는 아주 많은 이칭(異稱)이 조사되었다. 공연에서 향유자는 유객(遊客), 좌상(座上)으로 불렸고, 특정 작품에서는 '풍류 태수', '학탄 신선' 등의 표현도 사용되었다. 향유자들이 즐긴 공연은 정재류의 춤과 관서지방의 민속무, 이에 따른 삼현육각 편성의 음악, 12가사, 한문 낭송조, 잡가, 민요, 광대소리 등의 노래, 거문고, 가야금, 양금, 피리, 해금, 퉁소, 옥저 등의 기악 독주, 혹은 병주. 행차에 따른 연주 등이었다. 세부곡목에 주목해보면 조선후기 관서지방에서는 궁중 예술과의 교섭이 매우 활발하였고,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홍문연>, <항장무>, <선유락> 등의 레퍼토리를 탄생시켰는가 하면 고유의 민속가무도 함께 향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연의 규모는 '대연', '크게 벌이다', '수삼 동기', '성천기 7명', '60기생', '기생 2~3명', '삼자비' 등으로 표현되거나 독주, 독창, 독무인 경우 이름으로 표기하였다. 역시 공연 계기와 장소에 따라 공연의 규모가 매우 유동적이었음을 알려준다. 공연자의 연령은 10대 초반부터 늙은 기생까지 다양하게 소개되었는데, 특히 어린 기생들의 가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공연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지만, 반대로 '잡악(雜樂)', '졸렬', '웃음거리'로 분류되어 외면당한 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여러 지역에서 유사한 공연종목을 관람한 뒤, 이를 '비교(比較)' 평가한 예가 있는데, 이는 관서지방 공연문화 향유양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된다. 공연은 주로 사신맞이. 사신연, 순행에 따른 연회 등 공적인 성격을 띤 것이 많았고, 그밖에 사적인 향유 차원에서 이루어진 예도 적지 않게 조사되었다. 관서지역의 사신맞이는 대동강의 관선을 이용한 도강(渡江)의례가 특징적이다. 이는 관찰사, 부사, 감사 등의 관리의 이임과 부임뿐만 아니라 정례적으로 중국에 오가던 사신일행의 행차가 끊이지 않았으므로 이와 관련된 공연문화의 지속성이 탄탄하게 확보될 수 있었다. 이와같이 '주요어 추출'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관서지방의 공연 시·공간과 향유양상에 관해 살핀 본 연구는 향후 관서지방의 재정과 경제, 생활문화의 측면과 관련지어 '관서지방 특유의 공연문화'를 밝히는 연구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연구가 미진한 전통공연예술의 시공간과 공연양식에 관한 연구의 외연을 넓히는데 풍부한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회화심미(繪畵審美) 고찰 (A Study on the Painting's Aesthetic of Gongjae Yoon Duseo)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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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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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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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조선 후기 해남(海南) 출신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숙종년간 활동한 선비화가로서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교체되는 전환기에 조선 후기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서 그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남인(南人)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당쟁에 휘말려 출세길을 접고 서화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조선 후기가 시작되는 18C는 실학(實學)이 대두되고 민족주의에 대한 자각으로 진경(眞景)시대가 열린 시기였다. 이러한 때 실학사상을 예술세계에 접목하여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이며 현실개혁적(現實改革的) 심미의식을 발휘하여 서민풍속화 개척, 서양화법의 적용, 사실주의적 기법 추구, 남종문인 화풍 도입 등을 도모하였다. 철저한 학고(學古)를 통해 변통(變通)을 도모했던 그의 회화관은 학(學)·식(識)의 학문과 공(工)·재(才) 기예적 요소를 두루 갖추어야 화도(畵道)를 이룰 수 있다는 형신(形神) 겸용을 강조하였다. 그는 다양한 화목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인물화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사실주의 표현을 심미 특징으로 한다. 대표작인 「자화상(自畵像)」은 극사실적 묘사력과 구도의 혁신성이 탁월하며, 자신의 울분을 비장감있게 전신사조(傳神寫照)한 파격적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그의 산수화는 형사적 진경과 신사적 관념을 융합하여 형상으로써 도를 아름답게 구현한 망적지적(忘適之適)한 이형미도(以形媚道)를 이루었다. 한편 개방적 사고로써 다양한 서민 생활을 소재로 삼은 서민풍속화는 이형사진(以形寫眞)의 실득(實得)으로 파격을 도모하였는데, 이는 부패한 권력에 대한 소극적 항거이자 애민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후 그의 화풍은 장남 윤덕희(尹德熙), 손자 윤용(尹愹)에게 가전되어 전해져 조선 후기 서화예술의 변화와 부흥을 선도하였다.

독석(獨石) 황혁(黃赫)의 생애(生涯)와 시세계(詩世界) - '소무(蘇武)'와 '굴원(屈原)'의 이미지 - (Hwang Hyok's life and poetry)

  • 권혁명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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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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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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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독석(獨石) 황혁(黃赫)의 생애와 시세계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 본고가 황혁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황혁이 문학적으로 상당한 재능이 있었음에도 우리 문학사에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황혁의 시세계를 탐색하는 일은 유배시의 외연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2장에서 황혁의 생애를 검토하였다. 황혁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점은 황혁이 해동강서시파로 평가받는 부친 황정욱의 문재를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문과에 장원급제를 한 후 10년간 빠르게 진급하여 통정대부까지 오른 사실은 황혁의 뛰어난 문재를 방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황혁의 생애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임진왜란 때 작성한 항복권유문으로 인해서 20여 년의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배의 배경으로서 기존의 그것과 변별되는 지점이고, 이는 황혁의 독특한 시세계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3장에서는 2장을 바탕으로 황혁의 시세계를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호(豺虎)의 현실(現實), 소무(蘇武)의 이미지'이다. 임진왜란은 황혁의 뇌리 속에 강하게 자리 잡은 나쁜 기억이었다. 왜냐하면 황혁이 긴 유배에 처하게 된 발단이 임진왜란 때 항복권유문을 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황혁은 임진왜란 때의 현실을 '시호(豺虎)가 우글거리는 혐오스런 현실로 인식했으며, 결백한 자기 자신을 흉노에게 사신 갔다가 억류된 소무(蘇武)로 비유하였다. 둘째, '장사(長沙)의 현실(現實), 굴원(屈原)의 이미지'이다. 황혁은 암담한 유배지에 놓인 자신을 굴원으로 비유하였다. 이는 항복권유문을 모함한 북인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된 자신을, 간신들의 모함을 받고 배척된 굴원(屈原)과 동일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독특한 점은, 황혁이 굴원의 이미지를 가져오되, 장사(長沙)라는 공간으로 한정했다는 것이다. 장사(長沙)는 굴원이 투신자살한 멱라수가 있는 곳이다. 황혁은 굴원이 최후를 맞이한 장사를 통해 항복권유문이라는 치명적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자신의 암담한 처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동춘당 송준길의 춘추정신과 현실 대응 (Thought of ChunChu and a practical solution of Song Joon Kil)

  • 김문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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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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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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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송준길은 '존중화 양이적'(尊中華 攘夷狄)이라는 춘추사상을 바탕으로 조정에서 '존명배청'(尊明排淸)과 '복수설치'(復讐雪恥)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송준길이 조정에 나가 재임하는 기간 동안 조선은 국내적으로는 수년간 지속된 대기근과 국외적으로는 복명(復明) 세력 몰락과 청의 대약진이라는 악조건 속에 처했다. 이에 현실적으로 송준길이 추진한 현실 정책은 '내수외양'(內修外攘)으로 요약된다. 송준길은 군사적 북벌 준비에 앞서 백성 구제를 우선시 했다. 당시 수년간 계속되었던 대기근으로 인해 송준길은 '내치 근본', '안민 우선'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북벌을 위한 군사력 증강 보다는 국내의 민생 구제, 군심(君心) 수양 등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준길의 '복수설치' 의리 실천은 '내수외양'에 입각하여, 시행정책은 '양민(養民)을 먼저하고 치병(治兵)을 뒤로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내수 방침은 '양민'과 함께 '격군심'(格君心)이 핵심이었다. 송준길은 군주의 덕성 함양과 심성 수양이 곧 치국 평천하의 근본이라고 주장했다. 송준길은 안민(安民)이 우선이고 외양(外攘)은 그 다음 일이며, '내치(內治)는 외양(外攘)의 근본'이고, '치병(治兵)은 안민이 우선'이라고 했다. 또한 송준길은 복명(復明) 세력이 몰락해 가는 가운데에서도 남경에 잔존하고 있던 남명(南明) 정부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하국으로서 충의를 다해야 한다고 건의하여, 춘추사상과 사업을 지속적으로 행하기 위해 외교 정책의 대의명분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