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불교의 철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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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서 불교와 철학함 (Buddhism as Philosophy and its Doing Philosophy)

  • 박병기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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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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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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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우리에게 불교는 제도종교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강하다. 20세기 중반 이후 그리스도교와 함께 대표적인 제도종교로 받아들여진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이다. 특히 불교는 전통에 기반한 제도종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불교는 또한 철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철학을 지적 명료함과 삶의 지혜 추구로 정의해온 서양철학적 배경을 수용한다고 해도, 불교는 고타마 붓다가 발견한 진리를 무조건적으로 신봉하지 않고 철학적 비판의 가능성을 충분히 허용한다는 점에서 철학으로 분류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철학으로서 불교의 가능성은 불교의 철학함(doing philosophy) 가능성으로 직결된다. 불교의 철학함은 일상으로부터의 거리두기와 그 거리를 기반으로 하는 관찰과 집중,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 등의 세 과정으로 제시될 수 있고, 이러한 철학함은 후기 자본주의적 일상에 지친 우리의 삶에 명상 같은 방법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교는 종교로서의 속성 또한 분명히 지니고 있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종교와 철학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지난한 과제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스도교 문명권의 종교와 철학 사이의 엄격한 분리 전통은 불교를 철학으로 분류하는 일을 꺼리게 하는 요소로 현재까지 작동하고 있다. 철학의 목적에 지적 명료함과 삶의 실천적 지혜 추구를 함께 포함시킬 경우, 불교는 안심(安心)이라는 종교 고유의 기능과 입명(立命)이라는 철학과 종교의 공통 역할을 공유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종교와 철학 사이의 관계에 관한 우리의 새로운 관점 모색 또한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웰다잉(well dying) 문화 형성을 위한 불교의 죽음관 연구 (The study on the view of death in the Buddhism for well dying's culture formation)

  • 윤영호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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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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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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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웰빙'(well being)과 함께 최근 '웰다잉'(well dying)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안락사'(安樂死) 문제를 계기로 촉발되어 인간 죽음의 존엄성에 대한 중요한 담론으로 대두되고 있다. '웰다잉'(well dying)은 그 어의대로 '좋은 죽음'을 의미하며, 이런 의미적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통상적으로 '준비된 죽음', '품위 있는 죽음', '아름다운 죽음'을 지칭한다. 본고에서 논자는 '죽음'을 교학의 출발점으로, 그리고 '죽음의 극복'을 교학의 종착점으로 삼고 있는 불교의 죽음관이 웰다잉에 대한 담론에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면밀히 고찰하였다. 불교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해석, 그리고 그 극복의 과정은 웰다잉에 대한 보다 풍부한 담론을 형성하는 단초가 되며, 특히 죽음의 극복을 육체적 생리적 영생으로서가 아닌 정신적 심리적 현상으로 해석하고 이러한 정신적 심리적 변화를 통한 사물의 진실상(眞實相)에 대한 깨달음[정각(正覺)]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는 불교의 견해는 죽음불안의 극복 및 죽음교육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

선불교전통(禪佛敎傳統)에서 본 한용운(韓龍雲)의 불교관(佛敎觀) (Han Yong-un's View Point of Buddhism from the Perspective of Zen Buddhism)

  • 정연수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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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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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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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고에서는 선불교(禪佛敎)의 전통(傳統) 속에서 한용운(韓龍雲)의 불교관(佛敎觀)을 고찰하였다. 한용운은 원효(元曉)의 지관쌍운론(止觀雙運論)과 지눌(知訥)의 정혜쌍수론(定慧雙修論)의 전통 속에서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선정(禪定)의 본질을 강조한다. 한용운은 당시 선객(禪客)들이 중생들을 외면하고 산림에 은거하면서 처소와 몸가짐만을 적적(寂寂)하게 하려는 행태를 비판하면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수행자의 일상 속에서 적적성성한 선정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 사상적 특징이 있다. 한편, 한용운은 김시습 이래로 조동종(曹洞宗)의 전통이 담긴 "십현담(十玄談)"을 주해하면서 조동오위(曹洞五位)에 의거하지 않고 구세정신에 입각하여 임제선풍(臨濟禪風)으로 일관하는 특성이 있다. 굳이 한용운의 "십현담주해"를 조동오위에 비춰보자면, 중생들의 편위(偏位) 속에서 진인(眞人)의 정위(正位)를 밝힌다는 편중정(偏中正)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십현담주해"에서는 조일불교동맹조약(朝日佛敎同盟條約)으로 조선불교의 정신까지 말살하려는 일본조동종 승려들의 만행을 질타하고자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용운의 불교관을 종합해 보자면, 선불교(禪佛敎)의 전통 속에서 애국애민(愛國愛民)의 정신을 담아내는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아시아 불교미술에서 지표로서의 환경 (Environment as an Indicator in the Buddhist Art of Asia)

  • 이정희
    • 조형예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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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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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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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불교와 불교미술은 인도에서 발원하였지만, 그것들은 각 나라에 전파되면서 국제적인 환경을 만들어 냈다. 불교는 각 나라에 일종의 꾸러미의 형식으로 전파되었다. 예를 들면 불경, 불상과 불화의 도상과 양식, 건축과 그 기법, 복잡한 의식, 승려나 여승이 기거하는 사찰에서 건축적 요소와 그 기법들이 함께 소개되었다 불교의 시작은 인도의 아쇼카 왕조시기(reign of King Asoka)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후 각 나라의 정치적, 지적, 예술적, 종교적, 사회적, 자연적 환경, 지리적, 지질적 환경에 맞게 전개됐다. 불교미술은 토착화하면서 그 지역민을 닮은 상이 만들어 졌고, 또 지역마다 독특한 특색을 나타내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스투파(stupa)와 차이챠 홀(chaitya hall)은 수도원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곤 중앙아시아의 대상인들은 인도의 문화가 중국에 전해지는데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나던 교역루트의 자연환경 덕분에 화려한 색채의 벽화들이 제작되고 보존될 수 있었다. 불교와 불교 미술이 중국과 한국, 일본에 전해졌을 때, 불교는 국가 제도와 사회적 조직의 일부가 되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거대한 불상들이 산속의 동굴에 만들어 지기도 했다. 중국은 스투파를 사각형의 기둥으로 변형시켰고, 기와를 얹은 지붕 형식의 탑을 만들어 냈다. 한국은 불교미술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파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유한 방식으로 그것을 변형시켰다. 석굴암의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보살상들의 이미지가 그 좋은 예이다. 중국에서는 신유교 철학이 국-가의 공식적인 이념이 되면서 선종의 부흥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선승들은 신도들의 명상을 북돋기 위해 선종 형식의 정원을 만들어 냈다. 티벳의 밀교에서도 불교미술의 중요한 발전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밀교의 미술은 예술적 환경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종교적인 것에도 속한다. 한편 티벳의 신들이 그들의 배우자를 안고 있는 모습은 신과 신자들의 융합을 상징하기도 한다. 불교미술은 독창적인 환경을 만들어 냈고, 여라 나라에 전파되면서, 상당한 변화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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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확의 '조선' 인식과 '조선철학' (An Hwak's Recognition of 'Joseon' and 'Joseon Cheolhak')

  • 이행훈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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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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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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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화한 일제의 '조선' 연구가 식민 정책의 일환이었다면 그에 대항하는 조선 연구는 국권 회복과 자주 독립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이는 당대 '조선'이라는 개념이 발화주체에 따라 그 안에 내포된 의미와 지향이 상이했음을 의미한다. 대한제국의 소멸과 함께 근대 국가 건설은 좌절됐지만 민족의 이념 지형 안에서 '조선'은 새롭게 발견되었다. '조선'은 과거의 경험을 응축하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아내는 역사적 기본개념이 되어갔다. '조선학'은 학술의 장에 국한된 지식인들 사이의 담론이었으나, '조선'은 그 내 외부의 보다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발화를 포괄한다. 더욱이 개념과 담론의 상호 연관을 고려한다면 '조선학'은 '조선'의 역사적 의미론 속에서 독해되어야 마땅하다. 1920년대 문화운동의 흥기 속에서 안확은 "조선문명사"를 통해 고대 신화의 시대로부터 당대까지를 '조선'이라는 기표 아래에 묶어낸다. 역사 실증주의의 미명 아래 자행된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서 조선의 역사를 서양 민주주의 정체에 비견해도 뒤지지 않는 문명으로 이상화한다. 안확은 '조선' 연구를 문화 전반으로 확장하는 가운데 조선의 미술과 문학을 넘어 조선철학의 탄생을 예고했다. "조선철학사상개관"은 '조선철학'을 하나의 독립적 학문영역으로 사고한 최초의 기술로써, 조선의 학술과 사상의 특수성을 인류의 보편적 문명사의 관점에서 파악하려했던 작업의 일환이었다. 안확은 철학을 조선의 3대 발달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고, 조선 철학사의 특색을 서양과 비교하여 특정함으로써 조선철학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주장했다. '종(倧)'을 조선철학의 시원이자 근세에까지 이르는 사상적 근저로 파악하면서 불교와 유교의 수용도 조선철학의 발전으로 인식했다. 전통 지식체계의 근대적 전환과정에서 탄생한 '조선철학'은 전통 지를 근대적 학문 분류 체계에 적용하여 재해석하고 재구축하는 지적 실험이었다.

불교의 마음 이해 -연기(緣起)적 관점과 성기(性起)적 관점을 중심으로- (Understanding Mind in Buddhism : Focusing on the Perspective of 'Dependent Arising' and 'Nature Arising')

  • 장진영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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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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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7-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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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우리는 마음을 나타내는 수많은 용어를 가지고 있다. 이를 크게 분별심과 무분별심이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음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언어적 분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어떤 것에 대한 분별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 분별에 의하여 나타난 마음[분별심]을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분별을 벗어난 본래 마음[무분별심]도 함께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불교에서는 마음을 일체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연기적 관점에서 이해하여 왔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는 마음에 대한 분별적 접근이 주로 이루어지고, 그 분별심의 생성과 소멸을 연기의 법칙으로 설명하였다. 이때 분별심은 연기된 것으로 무상한 것이며, 찰나적인 것이다. 그러나 결코 분별심을 허망한 것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한편 대승불교에서 용수는 연기의 본질을 '공(空)'으로 파악하고 연기를 순차적 의존관계가 아닌 동시적 의존관계로 이해하였다. 용수는 공을 통하여 분별심의 허망성을 지적함으로써 분별 이전의 무분별심을 직접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무분별심은 언어적 분별(허망분별)을 떠난 자리이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불공(不空)'의 측면에서는 여러 가명(假名)을 통하여 심층의식이나 본성에 대한 접근이 시도될 수 있었다. 여기서 공사상이 분별의 허망성을 지적하는데 초점을 두었다면, 화엄사상은 분별의 진실성을 일체가 연기되어 있다는 일승연기의 입장에서 제시하고 있으며, 나아가 일체가 모두 본성이 그대로 현현한 성기(性起)임을 밝힘으로써 무분별과 분별(참 분별) 모두를 긍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화엄사상에서는 '분별심' 혹은 '무분별심' 자체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무주(無住)의 입장에서 분별과 무분별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연기적 관점[연기문(緣起門)]에서는 분별의 세계에서 무분별의 세계로 들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기적 관점[성기문(性起門)]에서는 무분별의 세계에서 분별의 세계마저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분별에 집착하는 마음병을 치유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적용될 것이다.

신라성덕대왕신종(新羅聖德大王神鍾)의 명문(銘文) 연구(硏究) -'사상성(思想性)' 탐색을 겸하여- (Study on the Words Carved on Seongdeokdaewang-Shinjong (Divine Bell of King Seongdeok) with a New Viewpoint)

  • 최영성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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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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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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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중대(中代)의 사상사, 불교사, 정치사, 공예사, 한문학사, 서예사, 금석학사 등 여러 면에서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그러나 신종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에 비추어 명문(銘文)에 대한 연구는 아직 활발하지 않다. 명문에 대한 판독과 번역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체계적인 분석과 연구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기초한다. 부제(副題)를 '사상성의 탐색'으로 한것은 제2차 연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종래의 판독과 역주(譯註)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였다. 변려문(騈儷文)의 문체적 특성에 대한 연구도 병행하였다. 그 결과 약 20건 정도의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특히 '工匠?模', '日月?暉' 등 중요한 문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은, 명문 해석의 중요성을 부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종의 명문은 사상사의 측면에서 연구할 가치가 높다. 명문에는 불교사상, 유교사상, 도가사상은 물론 우리나라 고유사상 등이 서로 걸림이 없이 무르녹아 있다. 전반적으로 철학성이 높은 글이다. '원공(圓空)'을 주제어로 신종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울러 불교사상의 핵심과 통치철학을 제시한 것이 돋보인다. 한편 성덕왕의 정치이념, 통치원리가 우리 고유의 풍류도(風流道)에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 것은, 풍류도 전승의 맥락을 추적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다. 혜공왕 대에 유교사상에 입각한 개혁파와 민족 고유사상에 기반을 둔 보수파와의 대결을 시사한 대목도 함께 보아야 할 대목이다.

원천석(元天錫)의 역사의식과 유불도(儒佛道) 삼교관 (A Study on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View of the Three Religions of Won Cheon Seok)

  • 정성식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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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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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5-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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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의 목적은 고려 말과 조선초기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삶을 영위한 원천석의 역사의식과 유불도 삼교관을 탐구하는데 있다. 원천석은 당시 백성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려 하였다. 백성들을 고통과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권세가들의 전횡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그의 태도는 고려 말 신진사류들의 입장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는 요동정벌이 시행되자 고려의 기상을 떨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으나 현실상황은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개되어 나갔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말을 돌려 회군을 함으로써 국가적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되자 원천석은 이성계의 행위에 대한 강한 부정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원천석은 유학자로서 불교와 도교를 부정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는 유불도가 하나의 이치로 통하는 것이라 파악하였다. 유학에 학문적 토대를 둔 그가 유교 그 자체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적 세계관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도모하여 유교적 사유체계에서 오는 현실적 갈등과 대립의식을 승화시키고 있었다. 열린사회와 글로벌화를 지향하며 다문화사회로 접어든 현대는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고 점차 민족 간 문화적 교류 빈도가 증대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 변화과정으로 볼 때, 타자에 대한 넓은 이해와 소통, 그리고 상호존중의 교섭적 특성을 갖는 원천석의 유불도 삼교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전통교육의 정치성과 현대적 함의 (Political traits of traditional education and its meaning in modern age)

  • 함규진;임홍태;윤영돈;한성구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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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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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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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교육은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특히 조선의 경우, 불교에 대신하여 유교가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중심 역할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누구나 배우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 아래 적어도 명목적으로 국민 교육을 실시할 필요성이 중대했다. 이러한 전통 교육은 인성 교육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선한 본성의 회복'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교육의 주체는 스승(師)이었다. 이러한 전통 교육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전개로서의 교육'이자 '형식도야로서의 교육' 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교사에게 막대한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자발적인 발전 가능성을 억제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민주적 시민의식을 갖추기 힘들게 하는 효과를 낼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통교육에서의 스승은 또한 동도(同道)로서 제자를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하기보다 함께 배우고 서로 돕는 역할이 기대되기도 했으며, 이는 민주시민적인 차원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무엇보다 전통교육은 인성교육과 공동체교육을 강조하는 점에서 현대의 자기이익 중심적 교육과 문화가 초래하는 비인도적 사회환경과 비참여적 정치문화에 대해 극복의 단서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온고지신'적 교육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유학 및 신유학 철학에서의 덕의 문제 (On the Problem of Virtue in Confucian and Neoconfucian Philosophy)

  • 베르너 가브리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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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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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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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이 글은 동아시아 유학 전통의 뿌리를 다룬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중국의 고전 전통과 그에 대한 송대(宋代)의 해석이다. 덕의 개념은 유럽 및 중국의 전통이 만나는 드문 사례들 중 하나처럼 보인다. 라틴어 virtus 와 그리스어 $aret{\acute{e}}$는 중국어 $d{\acute{e}}$ 덕(德)과 매우 유사해 보이는 것이다. 중국 전통에서 덕(德)은 따라서 자연적 힘의 총체로 간주되는 도(道) $da{\grave{o}}$와 늘 연결되어 있다. 유럽 전통과 달리, 중국 전통에서는 덕이 그 자체로 인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자연적 힘으로서 간주된다. 이 힘은 주변 세계와 인간의 연결, 통합 그리고 조화를 유지해준다. 공자는 사회적 행동(social behaviour)의 가능성, 곧 덕의 가능성에 관한 엄격히 철학적인 논쟁을 촉발시켰다. 공자에게 있어, 상(喪, mourning)는 인간의 원초적인 사회적 특성을 보여주는 현상들 중 하나이다. 하나의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현상으로서의 애도는 자연적 필연성이라는 성질을 갖는다. 이런 기초적인 사회적 감정은 인(仁)($r{\acute{e}}n$, "human-heartedness") 이라 불린다. 인은 그것이 인간의 사회적 지향의 기초이자 결과로서 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사회 구성 능력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간주된다. 인은 덕의 전형이다. 곧 인은 단순히 자연 법칙으로부터 연역 가능한 하나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성취하거나 혹은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는 어떤 것에 관련되어 인간에게 제기되는 하나의 요청이다. 따라서, 인(仁)의 기본적 특성은 관심(concern)이다. 신유학 시기의 덕 해석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덕에 관한 논의는 우주론적 관점으로까지 확장된다. 신유학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우주적 상호관계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모든 규칙들로부터 자연을 해방시키려 하는 도가와는 반대로, 신유가는 이(理)(lǐ) 개념을 통한 존재론적 기초를 창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신유학의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 -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 서양적 사고와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이(理) 개념과 함께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논쟁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다. 불교의 무(無) 개념과 함께 등장한 실재의 해체와 차별이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개념과 함께 새로운 답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전통에서는 매우 새로운 관점이다. 영원하며 파괴되지 않는 관념적 원리가 현상적 실재의 파괴를 막아준다. 마지막으로, 나는 덕 개념과 관련된 유럽적 및 중국적 사유의 비교 가능성에 대한 몇 가지 결론적 언급을 적어보고자 한다. 우선, 모든 고전시대의 유가들에게 있어 구체적이며 성공적인 행동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는 이 세계에 완벽히 꼭 들어맞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일반적 개념을 구분할 수 있는 진리에 의해 계몽된 대화만이 합당한 행동에 관한 통찰로 이끈다고 믿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이렇게 도출된 규칙은 실천되어야만 할 어떤 것이다. 유가적 방식의 경우는 보다 직접적이다. 행위자는 이후의 행위를 위한 하나의 정확한 패턴을 수립한다. 이는 - 위에서 언급한 대로 - 하나의 구체적 행동은 결코 다른 행동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으므로, 논쟁은 행동이 수행된 상황들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논의로부터만 발생한다. 이 논쟁은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행동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의 초점은, 개념적 구별이 아니라, 행동 형식에 관련된 세심한 지식의 습득에 놓여진다. 일반화는 물론 이런 노력의 과정에서 성공을 위해 요청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점 역시 존재한다. 개념화의 성공 여부는 - 규범적 개념과 일치하는 행동의 형성이 아니라 - 개별적 행동의 성공적인 수행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