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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문화사의 한 범주로서의 '저항' : 식민지 버마의 천년왕국 봉기 (Resistance as a Category in Southeast Asian Cultural History : A Millenarian Revolt in Colonial Burma)

  • 마이뜨리 아웅뜨윙
    • 수완나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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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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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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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식민지하 동남아 천년왕국 운동에 대한 오늘날의 해석들은 그 주체인 농민들을 식민주의를 개념화하고 저항하는 동기와 조건 그리고 상징을 제공하는 토착 지식의 전수자로 간주한다. 종말론과 저항에 대한 관심의 대부분은 농민연구나 지역연구 학자들로부터 유래하며, 이들은 봉기에 대한 과거의 묘사들이 토착의 정신세계를 간과했거나 국가이념을 저항세력들의 결집원리로 과대 포장한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천년왕국 봉기에 관한 글들에서 제공하는 해석들은 동남아 신념 체계에 관한 독립적인 관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측면에서 식민지국가들을 이와 같은 전통에서 단절시키고 있다. 영국 식민지하에서 최대의 농민반란인 서야쌍 봉기(1930-1932)는 오늘날 이와 같은 천년왕국 운동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례로 간주된다. 학자들은 수천 명의 농민들로 하여금 버마인의 권위를 되찾고, 불교를 회복시키며, 식민통치로 인해 낳은 사회-경제적 부조리를 일소시킬 그들의 왕으로 믿게 만든 한 농부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일련의 반란이 미신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간주한 식민지 관찰자들과는 달리 이후의 역사가들은 그 반란이 불교를 재건하고 태평성대로 인도할 미래부처인 미륵불의 현신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학자들에게 서야쌍 봉기는 어떻게 동남아 사람들의 감수성이 식민지의 사회-경제적 압력 속에서도 지속되었으며, 상좌불교의 예언이 토착의 문화적 토양에 얼마나 깊이 내재해 있는지를 말해주는 사례였다. 경험적 관점에서 본 글은 서야쌍 봉기의 근원을 재해석함으로써 천년왕국 봉기에 관한 글들이 대부분 식민지적 문서화 작업과 종교를 과장되고 세속화된 화술로 믿게 하려고 지역연구자들의 산물임을 밝히고 있다. 개념적 관점에서 본고는 버마에서 일어난 천년왕국 운동의 역사적 구성에 대한 식민주의의 역할을 보다 면밀히 관찰하였다. 또한 식민지법, 학문, 그리고 식민지하 버마 농촌에서 발생한 종교적 저항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상호 연결하는 인식론적 관계를 탐구했다. 그리하여 본고는 천년왕국 해석이 이 시기에 공존했던 다른 유형의 불교정치적 형태를 어떻게 왜곡했는가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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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영제(靈帝) 시기 민중 봉기와 그 배경 -재정·자연재해·내란의 상호영향- (The Relationship between Yellow Turban Rebellion and Displaced Persons: The Entangled Influence of the Economy, Natural Disasters, Civil Wars, and Refugees)

  • 최진열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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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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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7-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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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본고에서 후한 중후기부터 누적된 재정위기가 영제 시기 황건적의 난과 그 전제가 되었던 유민 발생에 영향을 주었음을 논증하였다. 후한 영제 중평원년(184) 황건의 봉기는 천재와 인재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영제 시기 각종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유민 대책이 부실했고 영제가 유민들을 귀향시켜야 한다는 양사와 유도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황건적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영제의 부실한 유민 대책은 영제 개인의 각박한 성정과 공감능력 부족보다 화제 이후 만연한 자연재해와 강의 반란, 이 때문에 발생한 재정수입 감소와 재정지출 증가의 누적된 결과였다. 황건의 봉기는 1년도 되지 않아 진압되었다. 따라서 황건의 봉기 자체가 후한 붕괴의 원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평 2년(185) 이월 기유일 남궁에 대화재와 궁전 재건을 위한 전 1무당 10전의 증세, 공개적이고 강제적인 매관매직 장려, 이에 기생한 환관(宦官)의 수탈이 백성들을 곤경에 몰아넣었고 결국 각지에서 백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따라서 황건의 봉기와 달리 천재가 아니라 인재로 봐야 할 것이다. 본고는 후한말 동란의 원인이 만성적인 자연재해, 강의 반란으로 인한 군사비 급증, 재정의 악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을 주장하여 기존의 시각을 환기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