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백제익산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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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후기 익산도성 조영계획모델에 대한 도성계획사적 해석 (Restoration of Iksan Imperial Capital City Structure and Construction Model in Late Baekje from the Point of Ancient Capital City Planning)

  • 이경찬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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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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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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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This study aims to draw out planning principles and structure of Iksan imperial capital city in late Baekje, especially in view of the relationship among imperial capital city planning area, skeletal axis and the location of royal castle. With site survey and analysis of historical records, old maps, topographical maps, archeological excavation data, land registration map of 1915, some significant inferences were drawn out. Firstly from the point of topological conditions, the contiguous line of a stratum from Mireuk mountain(彌勒山) to Wangkung-ri castle(王宮里遺蹟) and two waterways made a topological axis of Iksan Imperial capital city. Secondly district of Iksan imperial capital city can be deduced to the inner area north to Kummado soil wall(金馬都土城), south to the confluence of Iksan river(益山川) and Busang river(扶桑川), west to Okum mountain fortress(五金山城) and Galjeon river(葛田川), east to line near to eastern wall of Jesuksa temple(帝釋寺). Iksan ssang-reung(益山雙陵) was located outside western boundary line of capital city. Thirdly axis from Wangkung-ri castle to northern Kummado soil wall made a skeletal axis of city structure. It got through northern lowland along Buk river(北川) between Yonghwa(龍華山) and Mireuk mountain. Fourthly the location of royal palace can be deduced to the north part of the city around Kumma town area along the planning principle of northern royal palace.

백제의 익산 경영 방식의 전환과 사비(泗沘) 재정비 (The Change of Management Methods on Iksan and the rearrangement of Sabi by Baekje)

  • 김낙중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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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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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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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이 글에서는 익산 왕궁이 사찰로 바뀐 것에 주목하고 그것이 익산 경영 방식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겼다. 익산 왕궁의 위상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은 미륵사 서원 건립 즈음으로 추정되며, 더 나아가 왕궁의 일부가 훼손되고 사찰로 바뀐 것은 의자왕 즉위 후 얼마 안 된 시점으로 여겨진다. 이로써 익산으로의 천도는 달성되지 않은 채 사찰 중심의 도시로 바뀌었다. 사비에서는 무왕대에 대홍수를 겪으며 도시 체계를 다시 수립할 필요성이 증대되고, 익산 경영 방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이와 연동하여 왕궁의 범위가 확대되고 이궁도 조영되었으며 도성 내부 전역으로 시가지가 확대되었다. 이때 유행한 기와가 7엽 꽃술형 수막새다. 무왕은 익산에 단순한 별도를 세운 것이 아니라 사찰이 의미하는 신성을 부여하여 사비와 차별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말년의 무왕이나 무왕 사망 직후의 의자왕은 기반이 되는 정치 세력의 재편에 따라 익산에서 천도와 관련된 도성 개발을 멈추고 사찰 중심으로 운영하는 대신 사비의 재정비에 중점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

묘제(墓制)와 목관(木棺)을 통해 본 익산 쌍릉(益山 雙陵)의 의미 (The Burial Type and Wooden Coffin of Iksan(益山) Ssangneung(雙陵))

  • 김낙중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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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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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2-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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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글에서는 익산 쌍릉의 묘제 및 목관의 특징과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쌍릉은 묘제와 장제 뿐만 아니라 옥장신구와 같은 부장유물 그리고 익산과 무왕의 관계를 통해서도 무왕과 그 비의 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익산에 백제 왕릉, 즉 무왕릉이 조영된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사비가 아니라 익산을 기반으로 왕이 된 무왕이 익산을 중요시한 것은 당연하다. 또한 신라와의 관계에서 익산의 지정학적 중요성도 익산 경영의 요인이 되었다. 익산에 도성의 경관을 이루는 주요시설을 세운 것은 천도 혹은 그에 준하는 행위의 준비와 일부 실행을 보여준다. 다만 귀족과 사서인(士庶人)의 거주구역 등 도시로 완성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것이 완전하지 못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무왕 사후에도 익산의 중요성은 의자왕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것은 무왕 재위 후반기에 창건된 제석사 및 미륵사와 같은 대사찰이 백제 멸망 때까지 계속 운영된 점이나 사찰로 전용되었지만 왕궁 일원이 여전히 존속된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계승의식이 무왕과 그 비의 능을 익산지역에 조성하는 행위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익산 왕궁리유적 후원(後苑)의 조성 시설에 관한 고찰 (Perspectives on the Composition Facilities of The Royal Garden at Wanggung-ri site, Iksan)

  • 최문정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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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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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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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고의 검토는 익산 왕궁리유적에서 조사된 후원 조사 결과로서, 후원을 조성하고 있는 시설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백제 사비기에 조성된 궁성 유적인 익산 왕궁리유적의 정원시설과 후원에 대한 조사 결과를 통해 백제의 궁내원에 대한 연구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익산 왕궁리유적의 후원을 구성하는 시설은 1) 석축시설, 2) 도수시설 : 환수구(동 서 북측 및 출수구 암거시설 등 출수시설) 및 곡수로(1~6 및 집수시설), 3) 방형초석 건물지로 나눌 수 있다. 본고에서는 후원 시설들의 조성과 배치에 대한 조사 결과를 정리하여 백제 사비기 도성에서의 궁원의 원형 복원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다. 먼저, 석축시설은 물의 집수 혹은 경계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말각장방형석축시설은 이음부를 통해 환수구까지 물이 이동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조경, 집수 및 도수의 역할을 복합적으로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두 시설은 궁성이 조성될 때 후원의 대표적인 시설이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서사면의 석렬시설은 아래쪽에 위치하는 공방시설 등에 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환수구 역시 동측궁장(성벽)과 북측궁장(성벽), 서측 경사면 아래쪽을 경계짓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환수구는 물을 집수 혹은 치수하는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관상을 위한 조경의 역할도 담당하였던 것이다. 백제~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동안 환수구는 물에 의한 내부 퇴적의 진행이 이루어지며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환수구 내부가 완전히 퇴적된 시기에, 환수구와 동일한 필요성으로 서측 경사면에 곡수로가 새롭게 조성되었다. 구릉정상부의 방형초석 건물지는 주변의 백제 기와무지 등의 존재를 통해 백제 사비기에 처음 조성되어 이후 개축을 거치며 방형의 초석이 설치된 건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과 왕도의 위치 관계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Location Relationship between Ancient Royal Garden and Royal Capital in North-East Asia)

  • 전용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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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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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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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왕도와 왕궁에서의 위치 관계에 따라 왕궁 내부의 북쪽, 왕궁 외부의 북쪽, 왕궁 내부나 외부의 남쪽에 위치하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중국 고대 궁실제도를 따른 전형적인 궁원이다. 두 번째는 왕궁과 독립적으로 위치하거나, 금원(禁苑)으로 확장되는 궁원이다. 세 번째는 왕궁의 남쪽에 위치하면서 유락(遊樂)이나 향연(饗宴)으로 특화한 궁원이다.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유형은 정궁(正宮)과 별궁(別宮) 혹은 이궁(離宮), 금원(禁苑)과의 관계에 따라 구분되고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익산 왕궁리 유적의 궁원을 비롯하여 한 장안성, 북위 낙양성과 남조 건강성, 당 대명궁 등에 이르기까지 정궁의 궁원으로 자리잡아왔다. 여기에서는 왕궁 안으로는 궁원이 내원(內苑)으로, 왕궁 밖으로 금원이 외원(外苑)으로 분리되어 있다. 반면에 두 번째는 궁원(宮苑)과 금원(禁苑)이 일체화되어 있다. 세 번째는 왕궁의 일부분을 구성하거나 왕도에서 정궁과 독립된 공간으로 별궁이나 이궁의 궁원으로 특화되어 왔다. 중국은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전형(典型)을 만들었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한국의 백제와 신라, 일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름대로 독창성을 발휘하여 독특한 궁원을 발전시켜 나갔다. 백제왕도 익산의 궁원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궁원을, 사비도성의 궁원은 진·한대와 수·당대의 궁원을, 신라왕경의 궁원은 사비도성과 당의 궁원을, 일본 아스카~나라시대의 궁원은 백제와 신라의 궁원을 영향을 각각 받았다. 그렇지만 이들 궁원은 각각 나름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궁원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지역에 따라 계통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평양 안학궁은 궁원으로 보아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영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안학궁 하부의 유구 중복 관계나 유물로 보아 그 초축 시기는 5~6세기로 올려보기 어렵고 대체로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평양 안학궁의 궁원은 평양 장안성의 정궁에 대응하는 별궁 혹은 이궁의 궁원으로서 한국 통일신라시대 동궁과 월지나 일본 나라시대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점으로 보아,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궁원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동북아시아의 고대 왕도라는 큰 틀에서 궁원의 위치 관계로 그 특징과 변천을 중점적으로 다룬 연구로 적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한계들을 조금씩 해결하여 나간다면,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지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