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미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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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지역 조선백자가마터의 성격 (A Study of Chosun White Porcelain Kiln Site in Wonju, Kangwondo)

  • 김경중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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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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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5-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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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현재까지 원주지역에서 확인된 백자가마터는 모두 12곳으로 지정면 판대리와 귀래면 귀래1리 등지에서 조선 전기 백자가마터 6곳, 귀래면 귀래2리와 손곡3리 등지에서 조선 후기 백자가마터 6곳으로 조선시대 전${\cdot}$후기에 걸쳐서 가마가 설치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원주지역에서 조선시대 전${\cdot}$후기 백자가마가 설치 운영될 수 있었던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원주지역에서는 양질의 태토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중앙관요인 경기도 광주 분원에서 원주지역의 태토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원주지역에 양질의 백토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주지역 백자가마는 광주 분원처럼 양질의 백토를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가마 운영시 필요한 땔나무가 풍부했다. 경기도 광주 분원에서도 땔나무가 부족하여 가마를 10년마다 한번씩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데 이런 사실을 통해서도 땔나무가 가마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광주 분원에 비해 원주지역의 경우에는 땔나무를 확보하는데 훨씬 유리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귀래2리 백자가마터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가마가 광주 분원에 비해 비교적 장기간 운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소규모생산체제였기 때문이기도 하게만 땔나무 때문에 가마를 이동해야 될 필요성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원주지역 백자가마터의 구조와 유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발굴조사된 귀래2리의 경우, 가마의 구조는 조선 후기 백자가마터인 순천 문길리${\cdot}$승주 후곡리${\cdot}$곡성 송강리${\cdot}$안성 화곡리${\cdot}$대전 장안동${\cdot}$보령 늑전리${\cdot}$ 충주 미륵리${\cdot}$무안 피서리, 그리고 중앙관요인 광주 분원리 2호가마와 동일한 평면형태로 후기 백자가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백자의 형식적 특정은 경기도 광주 중앙관요의 대량생산용 백자 기본형과 같은 형태를 지닌 지방백자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 분원과 원주지역은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상호교류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형과 태토, 유색면에서 경기도 광주 분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원주지역은 가마를 설치${\cdot}$운영하는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귀래2리 백자가마터의 예를 볼 때 가마의 구조는 조선 전${\cdot}$후기의 전형적인 백자가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유물에서는 광주분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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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우렁쉥이 대량폐사에 대한 용존산소의 영향 (The Effect of Dissolved Oxygen on the Estival Mass Mortality of sea squirt, Halocynthia roretzi(Drasche))

  • 라기환;이채성;최우정
    • 한국수산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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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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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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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 1988년 여름철의 장기간 가뭄 및 고수온으로 남해안 일원에서 우렁쉥이 대량폐사가 일어났으나 폐사체의 대부분이 2년산인 것이 특이하여 그 원인을 밝히고져 환경요인 중 산소농도와 폐사상황을 조사하고 실내에서 수온 및 염분에 대한 내성시험과 함께 개체별 산소소비량에 중점을 두어 설험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렁쉥이 폐사는 고수온기인 8월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9월에 최대에 달했고 폐사율은 용존산소농도가 3.79ml/l로 최저치를 보인 남해 미조어장에서 $74.3\%$로 가장 높았으며 미륵도, 한산어장 순이었다. 20일간 고수온 내성시험에서 수온 $25^{\circ}C$일때 $30\%$ 폐사되었으나 $27^{\circ}C$이상에서는 전량폐사하였고 염분은 30이상되면 폐사와 무관하였다. 우렁쉥이의 산소요구량은 온도가 높을수록, 단위중량에 대한 개체가 작을수록 즉 3년산에 비해 2년산이 높았으며 질식을 방지하기 위한 최저산소 요구량은 $20^{\circ}C$에서 3.7ml/kg/h, $25^{\circ}C$에서 6.3m1/kg/h로 수온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우렁쉥이의 대량폐사는 고수온에 의한 대사장애가 있던 중 우렁쉥이 군집의 산소요구량에 대한 수중의 용존산소가 불충분하여 대량폐사를 가중시킨 것 같으며 1년산이나 3년산에 비해 2년산의 대량폐사는 군집의 산소요구량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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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절기 남해안 참돔(Pagrus major)의 대량폐사에 관한 연구 (Study on the Winter Mass Mortality of red sea bream, Pagrus major in South sea area)

  • 최혜승;정승희;허영백;양준용
    • 한국어병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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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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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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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남해안 일원의 양식 대상종인 참돔의 월동기간중의 폐사발생 원인구명을 위해 병리학적, 혈액생화학적 성상 및 장단기간 양식장의 수온조사를 종합비교하였다. 1. 월동 기간중에 폐사한 참돔의 병리학적조사결과, 육안적으로 녹간증, 장내 복수 증상을 나타내었으며, 경증의 아가미흡충 감염을 제외한 세균, 바이러스 질병은 확인하지 못하였다.2. 혈액생화학적 분석결과, 폐사시기에 혈중의 AST, ALT는 폐사시기에 급격히 높아졌으며, 단백질, 지방 성분값은 저하된 것으로 나타났다. 3. 실시간 양식어장 환경정보제공시스템의 수온 분석에 의하면, 참돔의 폐사가 가장 먼저 시작된 해역인 사량도 해역은 참돔의 저온 한계수온인 8℃ 이하의 수온이 42일간 지속된 것으로 나타나 저수온에 장기간 노출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4. 폐사가 많았던 사량도 양지와 미륵도 명지해역의 2003년에서 2006년까지 3년간 장기수온변화를 보면, 월동기간인 2005년 12월에서 2006년 2월까지의 수온이 2003, 2004년에 비해 낮은 수온 분포를 보였다.5. 참돔의 폐사발생해역은 비폐사해역에 비해 수심이 얕으며, 수층별 수온변화가 큰 것이 특징이었다.

익산 미륵사지 출토 동종의 금속학적 연구 (Metallurgical study of bronze bells excavated from the Miruksa (temple) site in Iksan)

  • 조남철;허일권;강형태
    • 보존과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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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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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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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Mireuksa is a temple that was established in the Baekjea Period and continued around to the 16thcentury. The sites of the temple throughout diverse periods such as the United Shilla Period, KoryuPeriod, and Chosun Period including the one of the early temple in the late Baekjea Period were discovered. In those temple sites, there were lots of diverse artifacts discovered including artifacts in the Bronze Age. In this study, the compositions of four bronze bells excavated from Mireuksa site in Iksan were analyzed and the manufacturing technique of bronze bells was studied through the observation of microstructure. Also, the analytical cases of ancient bronze bells were collected and compared. Furthermore, the provenance study of the bronze bells site was attempted with the Pbisotope ratio. The results aim to offer crucial keys for discovering the aspect of society as well as information about the origin, development, and the route of propagation of ancient technologies. Bronze bell No. 1 showed an unexpected composition as Cu was found 98.5% in it. There were shown twins which were created by annealing and an even phase in the fine grains. It was also shown that bronze bell No. 2 and 4 had a high content of Pb although they showed a similar composition with general bronze bells in terms of Sn content. As shown in the analysis characteristics table of Korean bronze bell of this study, the ancient bronze bell used Pb of which content was limited to 2.12% in general, however, the results showed 15.5% and 13.2% respectively, which is an excessive amount. Asa result of analyzing inclusion in the microstructure of bronze bell No. 2, it was found that sulfide group mineral was used since there appeared S(14.55%). Also, it was proven that $CuFeS_2$ or$Cu_5FeS_4$ was used as a raw material because there was a small amount of Fe. As a result of analyzing inclusion of bronze bell No. 4, the bronze bell sample contained S(13.43%) and it is thought that sulfide group mineral was used, however, it had no Fe. Therefore, it is not connected to $CuFeS_2$ which is the main mineral of Korea. In addition, a strain line was shown with processing in bronze bell No. 2 and 4. As a result of provenance study of bronze bell No. 2 and 4 using the Pb isotope ratio, they or their raw materials are estimated to come from the southern China. Bronze bell No. 3 showed only Cu and Sn, and it is featured with a relatively low amount of Sn(6.63%). The microstructure has only phase, andintergranular corrosion was highly in pro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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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와를 통해 본 익산의 기와에 대한 연구 (Study on roof tiles of Iksan featuring Stamped-Roof Tiles)

  • 이다운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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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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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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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인각와는 백제기와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익산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종류와 출토량 그리고 출토유적의 성격을 살펴보면 왕실과 관계 깊은 유적에서 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작기법이 같다는 것은 특정 와공집단에 의해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생산시기에 대해서는 간지명인각와를 참고하였다. 그 결과 크게 무왕 즉위를 전후한 시기와 기축년(629)을 중심으로 한 7세기 제2/4반기 두 시기로 나뉘어 생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와 함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의 창건기 수막새도 문양과 출토량 등을 검토한 결과 인각와와 같이 두 시기로 나뉘어 생산 공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생산배경에 대해서는 제작기법 생산시기와 함께 오부와 오항을 나타내는 인각와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무왕 주체의 조영사업에 필요한 기와생산에는 왕실만으로 그 재원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부뿐만 아니라 오항에서도 원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하에 성립된 기와생산은 관 주도의 일원화된 체제하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때 생산된 인각와의 인장을 인증 또는 검정을 위해 만든 것으로 날인 주체는 기증자도 생산자도 아닌 정해진 수량을 확인하고 날인할 수 있는 검사관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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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국사비에 나타난 고려의 용화세계 (Goryeo's utopia in Jigangkooksa's monument)

  • 김대식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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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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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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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탑비로 국보 59호로 탑비와 함께 조성된 지광국사현묘탑 역시 고려시대 부도탑의 걸작으로 국보 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광국사 해린은 중소호족 출신으로 각고의 노력을 통해 71세 때에 현화사 주지가 되고 75세에 이르러 국사에 오른 인물이다. 입적 후 조성된 그의 부도탑과 탑비는 고려시대 최고의 걸작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러한 탑비가 조성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대장경의 조성 혹은 완성에 그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 외에도 만년에 맞아들인 당시 최고의 문별귀족 출신의 제자 소현이 그의 탑비를 조성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지광국사비의 용화세계는 현재까지 알려진 변상도을 비롯한 불화나 여러 사경도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아를 표현한 것이다. 서오 네 마리가 노리는 운문을 지나면 궁륭으로 보이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아래는 13천을 표현한 13개의 산(山)이 있고 그 중심에 우뚝선 하늘인 도솔천이 있다. 그 도솔천 위에 용화수가 서있다. 좌우로 비천이 용화수를 향해 수노를 들어 예를 행하고 있다. 용화수 주위는 해와 달이 도는데 좌측의 달에는 토끼(항아)가 계수나무 아래에서 두꺼비와 함께 디딜방아를 찧고 있다. 우측의 해에는 삼족오가 새겨져 있다. 용화수는 보룡의 문양으로 된 나무 기둥에 용머리 모양의 꽃이 피어있고, 아래에는 제강주가 달려 있다. 지광국사비의 용화세계는 미륵이 성불하는 용화세계와 관련된 모든 내용이 문양으로 새겨져 있다. 지광국사는 고려의 최고 전성기인 문종대에 활동했고, 또한 고려인들이 가장 신성시한 대장경의 간행을 주도한 인물이다. 당시 고려인들은 그의 탑비의 전액 위에 그가 용화세계의 주인이라는 최대의 존경을 담은 그림을 헌상했다. 이는 고려인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유토피아인 것이다. 이는 밝혀지지 않은 고려문화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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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절기 조피볼락, Sebastes schlegeli의 대량폐사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summer mortality of Korean rockfish Sebastes schlegeli in Korea)

  • 최혜승;명정인;박명애;조미영
    • 한국어병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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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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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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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2006년 8-9월 통영시 한산도, 미륵도, 거제시 해역에서 대량 폐사된 조피볼락의 폐사원인을 조사한 결과, 병원체는 연쇄구균이 3.8-35.8%, 칼리구스충이 1.9-33.7%, 아가미흡충이 17.7-26.9% 검출되었으며, 전 개체에서 바이러스는 검출되지 않았다. 각 장기별 세로이드 관찰 결과, 간, 신장 및 비장 등의 조혈기관에 갈색 및 검은색의 세로이드가 관찰되었다. 폐사가 제일 먼저 발생한 통영시 한산면 용초해역에서 폐사발생 약 20일전에 표층 22.3${^{\circ}C}$, 저층 18.3${^{\circ}C}$로 수온약층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폐사발생 약 5일전에 표층 25.8${^{\circ}C}$, 저층 24.7${^{\circ}C}$로 수온 약층이 완전 소멸된 수온이 상승한 상태였다. 거제시 남부면 해역의 조피볼락 대량폐사는 8월 18일 태풍 우쿵 발생 직후 수온약층이 소멸됨에 따라 19${^{\circ}C}$의 수온이 5일만에 27${^{\circ}C}$까지 급상승하였다가, 8월말에 22.9℃로 하강하였다가 5일만에 25.9${^{\circ}C}$로 상승하는 등 고수온역에서 수온변화가 많았던 것이 특징이었다. 따라서, 2006년 하계에 발생한 통영 및 거제해역의 조피볼락 대량폐사는 태풍 우쿵 발생 이전에 생성되었던 수온약층이 소멸되면서 3.0-6.7${^{\circ}C}$의 수온 급상승으로 27${^{\circ}C}$의 고수온 환경이 약화되어 있던 조피볼락에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여 생리대사 및 저항력의 약화로 폐사가 발생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백제(百濟) '정림사(定林寺)'의 창건연대(創建年代) (The Establishment Year of 'Jeongnimsa' Temple in Buyeo)

  • 김낙중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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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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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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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글에서는 부여 정림사지로 추정되는 백제 '정림사'의 창건 연대를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살펴보았다. 즉, 본격적인 대지 조성은 왕궁터로 추정되는 관북리 일대와 연동되어 있는데, 그 시기는 6세기 늦은 단계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찰 건립을 위한 대지 조성 이전에 사용된 소형 노 등과 그와 관련하여, 구지표에서 출토된 토기 등을 참고할 때 사비 천도 후 일정 기간 공방이 운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공방은 정림사지 북쪽에 인접한 관북리유적에서 본격적인 대지조성과 함께 이루어진 기와기단건물의 조영 이전에 운영된 것이 확인되었다. 대지 조성토에 혼입된 토기, 기와, 중국자기를 통해서도 정림사의 조영 연대가 사비 천도 직후까지 올라가기는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 점은 석탑 이전에 목탑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 구조는 지하기초부가 없는 높은 지상기단일 가능성과 연계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정림사지 가람배치는 동 서 건물과 강당 좌우의 건물이 하나로 통합되어 강당지 북편 기단보다 북쪽으로 좀 더 돌출되어 대규모 승방으로 통합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익산 미륵사지와 유사하여 정림사지가 능산리사지나 왕흥사지보다 늦게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강당과 동 서 건물의 배치 관계 등으로 살펴본 이러한 견해는 그동안 정림사지의 창건 연대를 사비 천도 전후로 보아 온 것과 배치된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볼때, 정림사는 사비 천도 전후가 아니라 도시조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6세기 후엽 이후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금산사 후령통(候鈴筒) 내 발견 호박유물의 과학적 분석과 보존처리 (Conservation Treatment and Material Analysis of Amber Relics Found in the Huryeongtong of Geumsansa Temple)

  • 함철희;강소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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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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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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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국내 출토 손상된 장신구 유물들의 안전한 보존처리를 위해서 비파괴 분석과 파괴 분석을 통해 재질 확인이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손상 원인과 보존처리 방안을 검토하여 보존처리에 임하여야 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2008년 6월 금산사 미륵전(彌勒殿) 좌협시보살(左脇侍菩薩)의 보수공사 중 발견된 손상 유물 11점을 재질 분석(자외선 조사, SEM-EDS 분석, FT-IR microscope 분석)한 결과 물리적 화학적 특성이 호박과 일치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출토된 대부분의 호박유물의 표면이 균열(龜裂)과 박락(剝落)되었는데 그 원인으로 C=C결합의 산화로 색이 어두워지는 현상으로 유추된다. 그러므로 손상된 호박유물의 보존처리는 무극성 용제(Xylene)에 희석한 Paraloid B67 강화제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물리적으로 취약한 호박유물 표면에 Paraloid B67 강화용액으로 보존처리를 실시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존과학적 기초자료를 이 글에서 제공하고자 한다.

묘제(墓制)와 목관(木棺)을 통해 본 익산 쌍릉(益山 雙陵)의 의미 (The Burial Type and Wooden Coffin of Iksan(益山) Ssangneung(雙陵))

  • 김낙중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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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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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2-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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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글에서는 익산 쌍릉의 묘제 및 목관의 특징과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쌍릉은 묘제와 장제 뿐만 아니라 옥장신구와 같은 부장유물 그리고 익산과 무왕의 관계를 통해서도 무왕과 그 비의 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익산에 백제 왕릉, 즉 무왕릉이 조영된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사비가 아니라 익산을 기반으로 왕이 된 무왕이 익산을 중요시한 것은 당연하다. 또한 신라와의 관계에서 익산의 지정학적 중요성도 익산 경영의 요인이 되었다. 익산에 도성의 경관을 이루는 주요시설을 세운 것은 천도 혹은 그에 준하는 행위의 준비와 일부 실행을 보여준다. 다만 귀족과 사서인(士庶人)의 거주구역 등 도시로 완성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것이 완전하지 못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무왕 사후에도 익산의 중요성은 의자왕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것은 무왕 재위 후반기에 창건된 제석사 및 미륵사와 같은 대사찰이 백제 멸망 때까지 계속 운영된 점이나 사찰로 전용되었지만 왕궁 일원이 여전히 존속된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계승의식이 무왕과 그 비의 능을 익산지역에 조성하는 행위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