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몸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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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에 나타난 자녀교육관 (Hildrearing Philosophy in "The Anthology of the Essentials Sagely Learning")

  • 홍달아기
    • 가정과삶의질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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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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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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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 본 연구는 한국전통사회의 자녀교육관을 율곡이 저술한 $\ulcorner$성학집요$\lrcorner$를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ulcorner$성학집요$\lrcorner$ 정가편 교자음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이라고 믿고 누구 든지 노력하면 성인에 도달할수 있다고 보아 특히 교육시킬수 것을 강조했다 즉 애태시켜야 하며 일상생활을 통한 반복학습에 의한 습득형성을 강조했다 또한 유모를 정할때도 인성형 성의 막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신중히 고를 것을 말 했다 셋째 교육하는 순서와 학문하는 자 세를 강조하였다 넷째 생활교육을 강조했다 가족에서의 자녀교육이란 일상생활을 통한 교육 이 중요함을 말했다 다섯째 학문을 할 때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성패를 좌우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자녀교육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상은 성실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생애학습 이나 자아실현이란 것도 입지를 돈독히 하여 꾸준히 성실한 자세를 갖는 것이 인간의 계속 적인 성장을 가능케 하는 동인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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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글로벌 에티켓에 관한 기사 내용분석 (The Content Analysis of the Articles related to Global Etiquette In Chosun Daily Newspaper)

  • 최배영
    • 가정과삶의질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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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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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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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This paper aims to provide the basic data for the educational direction of global etiquette through the analyses of 1,028 articles appearing in Chosun Daily Newspaper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1. The articles of global etiquette were classified into the life in public places, the traffic and the public behavior. 1) The contents of the life in public places dealt with restaurants(29.3%), the neighborhood(24.7%), theaters and stadiums(9.7%), hotels and sanitary facilities(8.8%), stores(7.7%), schools and offices(7.0%), airports and public offices(6.6%) and resorts(6.2%). 2) The contents of traffic dealt with the motorists(29.3%), buses(24.7%), taxis(12.3%), subways(10.3%), trains(8.2%), elevators and pedestrian crossing(6.2%), airplanes(4.6%) and parking(4.4%). 3) The contents of public behavior contained the kindness(45.6%), the use of cellular Phone(12.4%), the concession and queues(10.8%), the greeting(10.3%), the responsibility and obeying laws(7.9%), the cleanliness(7.7%), the commercial transaction(2.9%) and the table manner(2.4%). 2. Koreans were negatively evaluated on 1) the kindness at restaurants, the neighbor and strangers and the motorists, 2) there aren't enough greetings being practiced within the neighborhood and at restaurants, 3) The use of cellular phone at theaters and stadiums, schools and offices, buses and subways, 4) The table manner at restaurants, 5) The concession and queues at theaters and stadiums, resorts, the motorists and subways, 6) The responsibility and obeying laws of the motorists, 7) the commercial transaction at restaurants and stores, 8) The cleanliness at restaurants, resorts and hotels and public sanitary facilities. According to this finding, it is recommended that we develop the educational contents and programs of global etiquette which are focused on educating the public on the connection between the living area and how the public should adapt and behave

선불교전통(禪佛敎傳統)에서 본 한용운(韓龍雲)의 불교관(佛敎觀) (Han Yong-un's View Point of Buddhism from the Perspective of Zen Buddhism)

  • 정연수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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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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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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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고에서는 선불교(禪佛敎)의 전통(傳統) 속에서 한용운(韓龍雲)의 불교관(佛敎觀)을 고찰하였다. 한용운은 원효(元曉)의 지관쌍운론(止觀雙運論)과 지눌(知訥)의 정혜쌍수론(定慧雙修論)의 전통 속에서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선정(禪定)의 본질을 강조한다. 한용운은 당시 선객(禪客)들이 중생들을 외면하고 산림에 은거하면서 처소와 몸가짐만을 적적(寂寂)하게 하려는 행태를 비판하면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수행자의 일상 속에서 적적성성한 선정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 사상적 특징이 있다. 한편, 한용운은 김시습 이래로 조동종(曹洞宗)의 전통이 담긴 "십현담(十玄談)"을 주해하면서 조동오위(曹洞五位)에 의거하지 않고 구세정신에 입각하여 임제선풍(臨濟禪風)으로 일관하는 특성이 있다. 굳이 한용운의 "십현담주해"를 조동오위에 비춰보자면, 중생들의 편위(偏位) 속에서 진인(眞人)의 정위(正位)를 밝힌다는 편중정(偏中正)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십현담주해"에서는 조일불교동맹조약(朝日佛敎同盟條約)으로 조선불교의 정신까지 말살하려는 일본조동종 승려들의 만행을 질타하고자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용운의 불교관을 종합해 보자면, 선불교(禪佛敎)의 전통 속에서 애국애민(愛國愛民)의 정신을 담아내는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왕실의 유아교육 (Early Childhood Education of Joseon Royal Family)

  • 육수화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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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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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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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조선시대 왕실문화는 유교문화의 정수였고, 왕실교육은 유교교육의 최고봉이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실현하는 선비이자 내성외왕(內聖外王)을 구현하는 치자로서, 유교의 이상적인 모델이자,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 바로 조선의 왕이다. 때문에 왕위계승자들의 교육은 일반 사대부들보다 더욱 엄격하고 치열한 교육과정을 이수해야만 했고, 왕실구성원이었던 왕실자손들의 교육 또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태교는 태아의 건강과 좋은 기질의 형성을 위해 산모가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몸가짐이다. 이는 애초 산모가 보고 느낀 것을 태아도 태내에서 감응한다는 한의학적 학설에 바탕을 둔 것인데, 유교적 수양론과 결부되면서 교육의 시작이요, 성품형성의 근원으로 여겨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원자와 원손의 교육과정은 왕위계승교육의 일환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아주 체계적으로 구축되었다. 대개 3세 이전에는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하여 보육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들이 글을 읽기 시작할 무렵이 되면 강학청(講學廳)을 설치하여 조기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들을 제외한 다른 왕실자손들의 경우, 보양청은 설치되지 않지만 통상 6세가 되면, 종친부 주관으로 대군과 왕자군의 경우에는 강학청(講學廳)을, 왕손의 경우에는 교학청(敎學廳)을 설치하여 조기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왕실 유아교육은 왕위계승자와 왕실자손들 모두 "효경(孝經)" "소학(小學)"과 같은 초학단계를 마치면,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의 단계적 학습과정을 거치게 되므로 교육과정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원자의 사부는 정 2품, 원손의 사부는 종 2품이며, 대군과 왕자군의 사부는 종 9품, 왕손의 교부 또한 종 9품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위상에 있어서는 현격히 차등을 두어 시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민심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인적자원 관리에 대한연구 (A study on human resource management in the Joseon Dynasty through Mokminsimseo)

  • 김봉화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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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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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9-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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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의 목적은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통해 조선시대 인사관리 흐름을 이해하고 이는 현대의 행정 조직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조직에서도 어떻게 활용되어지고 있는 지를 파악하는데 있다. 그 결과 첫째, 조선시대의 인적자원관리는 대부분 공공 종사자들의 청렴과 관련되어있었다. 이는 오늘날 평가의 방법과 범위, 가치기준, 평가 활용 등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는 내용들로 우리 전통적인 가치와 사상이 오늘날 까지도 사회복지조직 등 공조직의 종사자들의 평가에서 이어져 옴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조선시대의 인재 모집과 채용에 대해서는 적재적소의 인재등용이라 할 수 있는 적실성과 채용의 공정성, 인적 자원 채용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 등이 제시되어 있었다. 이는 인사가 만사임을 강조하는 인적자원의 적절한 등용과 규모에 대한 언급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지막으로 보상과 징계영역에서는 보상보다는 징계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공직자들의 경각심을 주고 능률을 높이는 방법으로 강화 또는 보상보다 징계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 종사자들의 의욕을 고취시키고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징계보다는 보상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 나타나고 있음은 조선시대의 인적자원 관리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공직자들의 교육과 훈련 부분에서는 전문성을 강조하고 있었고 몸가짐과 마음가짐의 품위 유지와 리더십을 강조하여 오늘날에도 사회복지조직을 비롯하여 공조직의 종사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면면히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시된 효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연구 (Showing Filial Piety: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재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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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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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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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덕수5520)는 그림과 발문(跋文) 열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으로, 작가는 조중묵(趙重黙)(1820~1894 이후), 주문자는 박경빈(朴景彬)(생몰년 미상), 발문을 쓴 사람은 홍선주(洪善疇)(생몰년 미상), 제작연대는 1868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낱장으로 보관되어 온 <인왕선영도>를 병풍으로 복원하고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최초로 공개하였다. <인왕선영도>에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홍은동을 아우르는 인왕산 서쪽 실경이 묘사되어있고 원경에는 북한산 연봉이 그려져 있다. 화면 속에는 인왕산(仁旺山), 추모현(追慕峴), 홍재원(弘濟院), 삼각산(三角山), 대남문(大南門), 미륵당(彌勒堂)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있다. 이 지역을 나타낸 조선후기 지도와 비교해보면 지형 표현과 지명 표기에 유사성이 있다. 조중묵은 넓은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지도의 지리정보를 숙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경의 현장을 답사한 결과, 조중묵은 각각의 경물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였고 수평의 화면에 나열식으로 조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조중묵은 남종화풍 정형산수에 뛰어났던 화가로, <인왕선영도>의 세부 표현에서 사왕파(四王派) 화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도화서 화원들이 화보를 활용하여 가옥을 그리거나 토파에 호초점을 찍고 당분법(撞粉法)으로 꽃을 나타내는 등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한 경향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인왕선영도>에는 바위를 짙은 먹으로 쓸어내리듯 붓질한 기법, 산세의 괴량감, 가로로 붓을 대어 단순하게 그린 소나무 등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의 개성적 양식도 가미되어있다. 조중묵은 인왕산 실경산수로 유명한 정선의 양식과 권위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유기적 공간감과 현장의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연폭 화면이라는 매체도 조중묵의 개인 양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인왕선영도>는 발문의 텍스트와 화면의 이미지가 잘 조응하는 작품이다. 발문의 내용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①무덤의 주인공과 이장 경위, ②무덤의 입지와 풍수, ③묘제(墓祭)와 신이(神異)한 응답, ④무덤 관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 ⑤병풍 제작의 동기인 박경빈의 효성과 수묘(守墓), ⑥발문을 쓴 의의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용이한 ②의 내용은 화면에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인왕선영도> 제작의 직접적 동기인 ⑤를 보면 주문자 박경빈이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다."라 하여 <인왕선영도>에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경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듯 나열한 구도는 회화미는 떨어지더라도 무덤의 풍수지리를 전달하는 데는 더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산도(山圖)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목판본 선영도로서, 족보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기록에서는 족자 선영도를 첨배(瞻拜)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선영도 첨배는 현실적으로 수묘(守墓)가 곤란할 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의례로 인정되었다. 한효원(韓效元)(1468~1534), 조실구(曺實久)(1591~1658) 등이 선영도를 제작한 후 당대의 명사에게 서문을 요청하고 효심을 과시한 사례는 <인왕선영도>의 선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개인 소장),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선영도는 아니지만 계회도 형식의 족자이고 풍수를 도해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선영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인왕선영도>는 첨배라는 측면에서 초상화와도 의미가 비슷했다. 발문의 "부친의 기침소리를 직접 접하는 듯하고, 그 태도와 몸가짐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는 표현과 부친의 초상에 조석 문안을 올린 서효숙 고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경빈이 일반적인 선영도 형식이었던 족자나 목판화 대신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를 주문한 의도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사례(四禮) 의식에 다수의 병풍을 배설(排設)하였는데, 의례의 성격에 따라 그림의 주제를 반드시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인왕선영도> 또한 여러 의례에 두루 배설하거나 장식 병풍으로도 사용하기 위해서 선영 그림이라는 주제를 실경산수화 이미지 아래에 가렸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왕선영도>의 핵심 소재인 무덤 봉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것은 사산금표(四山禁標)의 금제 위반을 숨기기 위함일 가능성이 있다. <인왕선영도>에 묘사된 인왕산 서쪽 산기슭은 분묘 조성 금지구역이었다. 1832년에 금표 내에 몰래 쓴 묘를 적발하여 즉시 파내고 관련자를 엄히 처벌한 사례로 볼 때, 19세기 중엽까지도 사산금표 내의 분묘 금제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장지를 얻기 위해 쏟은 정성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장지조성에 마을사람들의 협조와 묵인이 필요했던 것은 금표 구역 내에 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인왕선영도>와 비교 가능한 동시대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로 이한철(李漢喆)(1808~1880)이 그린 <석파정도(石坡亭圖)>(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를 들 수 있다. <석파정도> 제작시기를 전후한 1861년에 이한철과 조중묵은 철종어진도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조중묵이 이한철의 <석파정도> 제작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조중묵이 몇 년 후 <인왕선영도>를 주문받았을 때 <석파정도>의 인상적인 연폭 실경산수를 본 경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작품의 화풍 차이는 주문자의 취향과 제작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는 실경산수화와 선영도의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지식수준과 주문자와의 친분, 관람에 들이는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과 자호, 본관이 일체 작성되지 않은 채 '박공(朴公)'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주문자인 박경빈의 인적 사항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다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가계를 미루어 볼 때 재력이 있음에도 지배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발문을 쓴 홍선주 또한 사대부로 보기 어려우며, 『승정원일기』 기록에 나타나는 경아전 서리일 가능성이 있다. 박경빈은 상류 계층에 진입하고 싶은 욕망으로 보수적인 가치인 효(孝)를 강조하여 부친의 무덤을 명당으로 이전하고 <인왕선영도>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금제위반 적발에 대한 우려, 병풍의 다목적성 등의 이유로 본래의 제작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모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병풍이 제작된 지 47년 만에 각 폭이 분리된 채 미술상을 통해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이 된 상황을 보더라도, 박경빈이 <인왕선영도>에서 꿈꾸었던 명당 발복과 가문의 신분상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