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리(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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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돈이와 권근의 천인합일사상 비교 - 『태극도설』과 『입학도설』을 중심으로 - (The Comparison of 'Oneness between Heaven and Man(天人合一)' thoughts between Zhoudunyi(周敦頤) and Kwonkun(權近) - Focusing on "Taijirushuo (太極圖說)" and "Ip-Hak-Do-Seol(入學圖說)")

  • 허광호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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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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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1-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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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논문은 주돈이가 "태극도설"에서 제시한 천인합일사상과 권근이 "입학도설"에서 제시한 천인심성합일사상을 비교하여 그 차이를 규명하고자 한 시도이다. 수양론 중심의 실천적인 사상으로 발전해 온 천인합일사상은 송대 주돈이가 "태극도설"에서 형이상학적 우주론과 인성론으로 정리하면서 철학적 깊이와 논리적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는 천(天)에 상응하는 무극(無極)의 개념을 세워 무극-태극-음양-오행-인간-만물의 일원적 우주론을 제시한다. 그의 우주론은 만물의 창조자인 천(天)은 피조자인 인간과 명(命)과 성(性)을 매개로하여 결부되는 합일의 관계라는 인식이다. 따라서 본성을 회복하여 자기의 본성이 천명(天命)임을 알면 곧 천인합일이 실현되고 성인도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주돈이의 사상은 약 120년 뒤 주희에게 와서 이기론 으로 융합된 주자학으로 집대성 된다. 이에 따라 주돈이는 주자학의 시조로 후대에 평가된다. 고려 말 권근은 그의 "입학도설"에서 천인심성합일사상을 제시한다. 권근의 천인심성합일사상은 그의 스승인 이색의 천인무간사상에 주자학적 요소를 가미하여 내 마음의 작용과 리(理)가 일체라고 정리함으로써 논리적 정합성을 이룬다. 주돈이가 주로 우주와 만물의 생성원리에 대해 관심을 기진 것에 반해 권근은 주로 심성론적 관점에서 천(天), 인(人), 심(心), 성(性)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또한 경(敬)중심의 수양으로 천인심성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제시한다. 권근의 이런 사상은 조선조 주자학이 심성론 중심으로 발전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약 150년후 퇴계 이황에게 와서 사단칠정론과 경(敬)사상으로 집대성 된다. 그러나 주돈이와 달리 권근은 그의 학문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심설(心說)과 척사논리(斥邪論理)의 상관(相關) 관계(關係) (A study on the mutual relation between logic of Simjuriseol and the movement to "reject heterodoxy" of Yi, Hang-no)

  • 박성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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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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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7-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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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항로는 태극(太極), 즉 이(理)가 지닌 주재(主宰)와 묘용(妙用)의 측면을 적극적으로 강조하면서 그것을 명덕(明德), 즉 심의 본질이라고 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것은 리와 기를 상보적인 것으로 보는 기존의 심설에서 벗어나 리와 기의 차별성을 보다 분명히 하고자 함이었다. 특히 그는 학문의 목표는 대인(大人)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며, 그것은 먼저 인심과 도심의 구별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즉 인심과 도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하는 당시의 특수한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이항로는 리로 표현되는 물아일체적(物我一體的) 도덕률(道德律), 즉 천명의식(天命意識)을 부정하고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서양인들의 윤리관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었다. 이항로는 그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태극이 곧 우리 마음의 본체라는 점을 일깨우려고 한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도덕심(道德心)이란 것은 인간이 사사로이 거스를 수 없는 태극의 원리, 즉 천명(天命)'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이항로가, 인간이 사사로이 거부할 수 없는 도덕심의 당위성을 강조한 것은, 그것 이외에는 당시 조선사회를 격동시키던 서양 문화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병인양요(丙寅洋擾)(1866)가 발생하자, 이항로는 동부승지로 발탁되어 상소(上疏)와 주차(奏箚) 등을 통해서 척사의 방책을 진달하였다. 평소 인심과 도심의 구분을 통해서 인간으로서의 도심을 준수해야 한다고 역설한 그의 주장은 척사 상소에서도 그대로 전개되었다. '양이(洋夷)'의 침투에 맞서 주전론(主戰論)과 통상불가론(通商不可論) 등을 피력한 이항로의 척사소는 그 궁극적인 해결책으로서 군주의 도심을 강조하는 형식을 띠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항로의 심설은 그대로 병인양요 때에 제시된 척사소에 반영된 것이다. 이것은 이론과 실천이 일치될 수밖에 없었던 이항로 심주리설의 특징이었다.

조선 후기 군현지도의 유형 연구 - 동래부를 사례로 - (A Study on the Types of Old County-Maps in the Case of Dongrae-Bu(동래부))

  • 김기혁;윤용출;배미애;정암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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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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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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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본 연구는 조선 후기 동래부를 그린 군현지도 26종의 유형화를 시도하였고, 지명을 이용하여 대축척 전국지도와의 연관성을 파악하였다. 지도의 내용과 수록된 지명 등을 이용하여 분석한 결과 네 유형으로 분류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해동지도) 유형은 홍문관에서 주도하여 편찬된 지도인 $\ulcorner$해동지도$\lrcorner$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이며, 이후 이를 모사한 지도로서, 7종의 지도가 이에 속한다. (2) $\leqq$(비변사인)영남지도$\geqq$ 유형은 비변사에서 주도하여 편찬된 지도와 이를 모사하며 부분 수정되는 5종의 지도들이다. (3) $\leqq$방안식군 현지도$\geqq$ 유형은 지도위에 20리 방안이 그려진 동일한 축척의 지도로서 4종이 이에 해당된다. 군현을 연결하여 전국 혹은 도별 지도의 제작을 목적으로 편찬된 것으로 사료된다. (4) (지방군현지도) 유형은 7종으로, 지방의 화원들이 그린 지도로 각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실경으로 묘사되는 것이 특징이다. 유형별 대표지도에 수록된 지명을 분석한 결과 (방안식군현지도)에 수록된 지명이 $\ulcorner$청구도$\lrcorner$ $\ulcorner$대동여지도$\lrcorner$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유형의 지도들은 조선 후기 대축척 전국지도의 제작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금궤요략의 상견복증(常見腹證)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f Abdominal Syndrome in Jin Kui Yao Lue)

  • 홍문엽;박선동;박원환
    • 동국한의학연구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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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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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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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 금궤요략은 후한말기(後漢末期) 장기(張機)가 지은 임상의학(臨床醫學) 전문서적(專門書籍)으로써, 리(理) 법(法) 방(方) 약(藥)이 갖추어진 독창적(獨創的)인 변증론치체계(辨證論治體系)를 수립하고 있으며, 특히 복증(腹證)에 관한 내용을 중(重)히 다루고 있고, 방증변증(方證辨證)이 중심(中心)이 되어 복증(腹證)을 통한 변증(辨證)이 매우 발달되어 있어서 진단학(診斷學)의 발전(發展)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진단학(診斷學)의 발전(發展)은 진맥(診脈), 진설(診舌)을 위주로 했으며, 복진(腹診)의 운용(運用)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인 특수한 배경으로 인하여 계속 발전되지 못하였다. 최근 한의학적(韓醫學的) 진단방법(診斷方法)과 치료방법(治療方法)이 매우 강조되어 활발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면서 복증변증(腹證變證)에 관한 관심이 매우 집중되고 있기에, 복부진단(腹部診斷)에 관한 연구(硏究)의 한 방법(方法)으로써 금궤요략에 실려있는 상견복증(常見腹證)에 관련된 내용(內容)을 정리한 결과(結果) 약간의 지견(知見)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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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의 존재론적 관계성 성찰 (Ch'oe Han-gi's Reflection on Relationalities in Existence)

  • 이명수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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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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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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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19세기 중엽 이후 동아시아, 그 가운데 특히 한국은 대외적으로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에 압박을 받았고, 대내적으로는 오랜 정치적 구태 현상, 예를 들어 세도정치와 같은 진부한 상황 때문에, 이른바 내우외환 상태에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을 목격하고 세계정세에 관하여, 거의 전 영역에 걸쳐 독서를 통해 학문적 역량을 쌓고 있었던 유가철학자 최한기는, 이 같은 막힘 현상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철학화하였다. 최한기는 만물이나 만사를 운동변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사람이나 사물에 내재한 운동, 변화의 에너지, 운화기가 있다고 믿었다. 사물에 내재하는 존재의 원리, 질서까지도 '기'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이전의 운동성이 결여된 존재론적 리(理)가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것보다 앞서 우월하게 존재하며 그것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관점을 바꾸었다. 그로부터 만사만물을 지배하는 정체성으로서, 도 또한 하나가 아니라 다양함을 설파하였다. 이것은 일면 잠정적으로 사물의 상대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상대성을 넘어 만물이 긴밀히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만물일체, 그들이 하나로 어울려 존재한다는 '일치', '일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최한기는 공간에서 뿐만 아니라 시간에 있어서도 사물은 유기적으로 서로 소통하면서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인데, 그것은 그의 운화철학에 두드러진다. 그리하여 존재물들은 자기 안에서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원활한 관계성을 확보하면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양평 벽계리에 설정된 곡중경(曲中景)의 지향성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벽원(蘗園) 경영 (Studies on the Directivity of Gokjungkyeong(Kyung Overlapped with Gok) which was specified in Byeokgye-ri, Yangpyeong-gun and the Hwaseo Lee, Hang-ro's Management in Byeokwon Garden)

  • 정우진;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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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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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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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문헌 및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양평군 서종면 벽계천에 형성된 수회구곡과 벽계구곡 그리고 노산팔경의 설정 경위를 검토하고, 화서 당대에 향유되고 경영된 명승 벽계의 경관실체를 구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화서 이항로 이후에 설정된 벽계구곡과 노산팔경은 화서의 행적과 관련된 주요 경처를 모은 '현대기(現代期)'의 집경으로 판명되었다. 벽계구곡이 수회구곡의 집경요소와 많은 부분 중복되는 점이나, 수회구곡의 종점부터 노산팔경의 영역이 시작되는 작위적 구성은 수입리 벽계와 노문리 벽계 사이의 장소대립 및 장소패권의 양상을 엿보게 한다. 이는 화서 이전 벽계 향유집단의 오랜 역사성과 화서의 이미지로 밀착된 영역성이 상충되어 나타난 결과로 판단된다. 둘째, 벽계구곡은 노산팔경의 영역을 확대함과 동시에 수입리의 경승을 선별해 재구성한 2차적 공간체계였다. 벽계구곡의 설정 이후 벽계천 전체 권역에 대한 장소 정체성이 효과적으로 확보되었는데, '청서구장(淸西舊莊)'과 '수회구곡(水回九曲)' 바위글씨 등 화서 이전의 명소가 철저히 배제되는 등 '화서 지향적' 공간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노문리뿐만 아니라 수입리에 이르는 벽계천 전체 영역은 화서의 문화경관으로 재편되었다. 셋째, '주자-율곡-우암-화서'로 이어지는 도통 강화의 일환으로 설정된 화서학파의 구곡 설정은 벽계구곡 탄생의 계기이자 외적 동인이 되었다. 즉, 벽계구곡과 노산팔경은 화서학의 중심이 옥계동으로 건너간 것에 대한 반동, 무이구곡 고산구곡과 옥계구곡의 사이의 결손된 도체공간의 창출 그리고 후손과 지역민에 의한 화서 선양작업 등 일련의 전략적 지향성과 흐름을 같이 한다. 넷째, 화서의 주리론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가 경영한 벽원(蘗園)의 모든 경역은 '실제로 존재하는 산수경치의 물상[氣]'을 통해 리(理)의 내재함과 심미적 자아의 허령(虛靈)한 경계를 체험하는 공간작법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벽계구곡이나 노산팔경을 화서와 연관된 영역으로 조명하기 이전에, 벽원 고유의 경관성을 규정짓고 나아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향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다섯째, 노산팔경은 벽계구곡 중 노문리 벽계 일원 중에서도, 화서가 강학하고 소요하던 여덟 곳의 경승을 담는 곡중경(曲中景)의 문화경관으로 구성되었으나 화서가 남긴 바위글씨와 시문에 의존해 집경됨으로써 벽계구곡에 비해 내적 충일성은 확보되지만 집경에 따른 개념적 타당성에는 다소의 의문이 남는다.

상산심학과 양명심학의 차별성 연구 - '송학'과 '명학'의 차별적 관점에서 - (The research about difference between Sangsan-Simhak and Yangming-Simhak - from a different point of view between 'Song-Hak' and 'Ming-Hak'-)

  • 이상호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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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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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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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이 논문은 '상산 심학'과 '양명 심학'의 차이를 '송학'과 '명학'이라는 차별성을 가지고 규명하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상산학을 양명학의 전단계 학문정도로 이해하는 일반적 인식에서 벗어나 전체 성리학사에서 독자성을 가진 철학체계로 자리매김 시키려 했다. 이것은 전체 성리학사를 '리학'과 '심학'으로 이해하는 일반적 인식에서 벗어나, 시대적으로 변모된 철학적 패러다임에 근거해서 성리학의 전개를 이해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흔히 성리학을 리학과 심학으로 나누고, 전자를 정주학으로 후자를 육왕학으로 보는 일반적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되면서 상산학은 양명학의 전단계 학문으로만 인식되어, 전체 성리학사에서 독자적인 자리매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상산학은 주자학과는 철학적으로 대척점에 선 것으로 이해되면서, 이 둘 사이에는 이론적 동일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상산학은 '리학'적 패러다임이 일반화 되어 있던 '송학'의 배경 속에서 탄생되었으며, 양명학은 '기학'적 패러다임이 일반화 되어 있던 '명학'의 배경 속에서 탄생하였다. 이와 같은 '송학'과 '명학'의 차이는 실제 이들을 같은 학문으로 규정하게 하는 '심즉리心卽理'라는 명제에서도 의미 차이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연구는 바로 이 점을 간과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우선 '송학'과 '명학'의 철학적 차이점을 먼저 규명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상산학과 양명학을 같은 계통의 철학체계로 이해하게 했던 '심즉리'라는 명제가 가진 함의를 각각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즉리'의 개념이 어떻게 수양론에 적용되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상산학과 양명학의 철학 차이를 확인하고 있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리학'적 패러다임에 바탕한 '송학'과 '기학'적 패러다임에 바탕한 '명학'의 '리'의미 해석에 초점을 맞추어서, 여기에 대한 의미 차이가 '심즉리'의 의미 차이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주자학과 상산학이 가지고 있는 '송학'적 패러다임의 특징과 양명학이 가지고 있는 '명학'적 패러다임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상산학은 양명학의 전단계 학문이 아니라, 그 자체의 체계성을 갖춘 성리학으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난중(亂中)의 인심(人心)과 의리(義理) -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용사일기(龍蛇日記)』를 중심으로 - (People's heart-and-mind and the righteous principle in the hostile of circumstances / focusing on Yeheon's Record of Taking Refuge)

  • 전병욱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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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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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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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사회적 대혼란에 대한 여헌(旅軒)의 총체적 고민과 그가 제시한 궁극적 해결방안에 관한 연구이다. 여헌은 조선이 왜란 발생 이전에 이미 대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국면에 놓여있었다고 반성하였다. 군신상하(君臣上下)가 모두 의리(義理)에 맞는 삶을 살지 못하였고 국가는 도(道)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왜적의 침략은 홍수와 같은 자연적 재해의 일종일 뿐이어서 임진년 이후 닥친 사회적 대혼란의 총체적 책임을 전적으로 왜적에게 돌릴 수는 없다고 보았다. 여헌은 민심이 기아와 질병으로 인해 이반되고 금수(禽獸)처럼 변하고 있는 지경이었는데 조정이 직접적인 기아 구제보다는 성을 수축하고 군사를 조련하느라 백성들을 더욱 나락으로 내모는 상황에 주목하였다. 그가 보기에 대혼란의 근본 원인은 조선의 군신(君臣)과 사민(士民)이 근본적으로 인심(人心)을 상실하였다는 데 있었고, 전쟁과 그 여파로 금수(禽獸)와 같은 짓을 하게 된 것은 그 내면이 표출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여헌은 "피란록(避亂錄)"에서 왜란의 백성들의 참상을 상세히 묘사하고 국가정책의 난맥상을 치밀히 분석함으로써, 전사회적 반성을 촉구하고 올바른 극복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특히 여헌은 당시 "주역(周易)"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이는 길흉화복과 치란흥망의 이치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사회적 대혼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합당한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헌이 보기에, 인심이 무너진 시대에서는 사람마다 자신의 일상적인 자리에서 리(理)를 지키고 도(道)를 실현해나가려고 노력해 나가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일이었고,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맡겨진 선비의 사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