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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에서의 선진(先秦) 제자학(諸子學) 수용 양상 - 순자(荀子)에 대한 비판과 이해를 중심으로 - (The Aspect to Receive Pre-Chin Study of One Hundred Schools in Cho Sun Dynasty-Centered on the criticism and understanding of Hsün Tzu)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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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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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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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에서는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선진 제자학을 위상을 검토하고 아울러 순자사상의 한국적 수용과 전개 양상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여말선초부터 18-19세기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문집을 통하여 순자에 대한 이해양상과 시대별 흐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부터 고려 중엽까지는 지식인들이 선진 제자학 가운데 다른 학파나 사상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여말선초 이래 "맹자"가 유가의 정통 경전으로 확립되면서부터 순자를 비롯한 선진 제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고려부터 선초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으며, 다만 순자에 대한 이해의 심도가 점차 깊어짐을 알 수 있다. 성리학 전성기에 이르면 선초에 비해 순자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 강도가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토대로 한 성리학적 세계관이 이미 확립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성악설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대체로 순자의 다른 사상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원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17세기에 이르면 순자를 법가로 귀결시키는 논의도 일부 보이지만, 주자학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실학적 토대 위에서 제자학을 적극 수용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18세기에 이르면 순자에 대한 이해 범위가 보다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글자 고증에 있어서 순자의 원문 및 주석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요컨대 조선조 지식인들의 순자 비판은 시종일관 그의 성악설에 근거하며 나아가 분서갱유를 주도한 이사(李斯) 등의 법가와 연계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이를 제외한 순자의 기타 사상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수용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순자를 비판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제자서를 쉽게 접하거나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태도를 지녔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상사(思想史)의 맥락에서 본 19세기 심설논쟁(心說論爭) - 사칠논쟁(四七論爭)에서 심설논쟁(心說論爭)까지 - (19th-Century Morality Dispute in Context of History of Thought - From Four-Seven Dispute to Morality Dispute)

  • 최영성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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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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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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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성리학사를 보면 수백년 동안 굵직한 주제의 논쟁이 이어졌다. 16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던 사단칠정 논쟁은 '정(情: 감정)'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18세기 초에 등장했던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사람과 사물의 '성(性: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주안이 있었다. 이 두 논쟁은 이후 조선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쟁점이 확실하게 부각되면서 조선성리학의 특징적 부면이 아울러 잘 드러났다. 18세기 중엽 이래로 서양세력이 밀려오면서 조선성리학은 서양 세력에 맞설 논리를 개발해야 했다. 성리학에서의 주리론(主理論)이 그 대응 논리의 하나로 제기되었다. 특히 '심(心)'에 대한 각종 논의들이 폭넓게 다루어졌다.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섭한다는 의미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의 개념으로부터, 심을 '리(理)'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 심은 기본적으로 '기(氣)'라는 주장이 나와 대립하였다. 또 심과 명덕(明德)은 같은 개념인가 다른 개념인가의 문제, 명덕은 '리'로 보아야 하는가, '기'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들이 제기되어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 논문에서는 조선 말기의 심설논쟁을 사단칠정논쟁, 호락논쟁과 함께 '조선성리학의 3대 논쟁'으로 규정하고 그 위상과 실상, 의의를 조명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심설논쟁은 단순히 이론 논쟁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사성(時事性)'의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서양과 일본 세력을 배척하는 운동,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등에도 직, 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 심설논쟁은 사칠논쟁이나 호락논쟁에 비해 논쟁의 성격이 복잡하고 범위가 넓다. 게다가 자료의 체계적인 정리를 필요로 한다. 삼대 논쟁에 대한 상호 비교문제는 조선성리학의 특성을 밝히는 데 중요한 주제의 하나다.

조선시대 양양(襄陽) 하조대(河趙臺)의 유래와 경관에 따른 명승의 향유 방식 (The Origin of Hajodae(河趙臺) in Yangyang(襄陽) and the Way of Enjoying Scenic Sites(名勝) According to the Landscape in Joseon Dynasty)

  • 김세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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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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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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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이 글은 양양 하조대의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그 유래와 경관의 내용을 분석하여 조선시대 문인들이 향유한 하조대의 문화사를 조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에 따른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조대는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유람한 고사가 전하는 공간이다. 다만 이러한 전설이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았기에 역사에서 는 다양한 이견이 공존했다. 조위한(趙緯韓)은 양양 부로들의 의견을 인용해 조준이 아닌 조인벽(趙仁壁)일 수 있다고 하였고, 조덕린(趙德鄰)은 '멀리 보는 대'라는 의미의 '遐眺臺'로 기록했다. 문헌적 근거를 밝혀 하조대의 유래를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둘째, 하조대는 조선 중기 관동 최고의 명승으로 회자되었다. 당대 문인들은 하조대를 관동 최고의 명승 가운데 하나로 거론했고 이는 곧 양양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하조대의 기록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는 관동팔경이 정립되고 낙산사(洛山寺)가 명성을 얻으면서 하조대의 위상이 다소 줄어든 데 기인한 결과로 판단된다. 셋째, 조선의 문인들은 하조대의 다양한 경관을 통해 명승을 향유했다. 삼면이 탁 트인 지세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었고 호연지기를 기르거나 스스로를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한편, 근경에 해당하는 기암절벽은 유람객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하조대 일대에 핀 해당화는 기이한 매력을 보이기에 충분했다. 이는 하조대가 지닌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고 이와 같은 경관에 대한 관리가 필요함을 암시한다. 넷째, 하조대를 읊은 한시는 하조대가 지닌 그 공간적 의미를 보여준다. 하조대를 주제로 한 한시의 면면을 살펴보면, 경관을 바탕으로 회포를 풀어낸 경우, 자연경관에 자신의 존재를 견주거나 의식을 투영한 면모, 조선 전기 명신 하륜과 조준을 회고한 사례 등이 확인된다. 경관을 통해 자신의 소회를 표출하고 역사를 회고하는 양상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진주(晉州) 망진산(望晉山)의 역사문화경관과 명승적 가치 (The Historical and Cultural Landscape, and the Scenic Value of Mangjinsan Mountain in Jinju)

  • 김세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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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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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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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이 글은 경상남도 진주시에 소재한 망진산(望晉山)을 중심으로 역사문화경관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명승적 가치를 살펴본 논문이다. 문헌분석 방법에 따른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망진산은 진주의 안산(案山)으로 봉수(烽燧)가 자리해 역사에 주목되었다. 망진산의 정보는 그 위상으로 인해 점차 배가되었고, 봉수는 진주 일대 방어를 담당하는 기능을 도맡았다. 이러한 망진산은 진주의 상징적인 경물로 묘사되었다. 망진산의 어원과 관련하여, 성여신(成汝信)은 진주의 지세를 분석해 봉황에서 비롯된 지명임을 제기했다. 다만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망진산의 이름은 한결같이 유지되지만 그 표기는 통일되지 않는 양상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둘째, 망진산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진주성 전투 승리의 계기를 제공했지만 정유재란 때에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애환 어린 공간임이 확인된다. 한편, 망진산 일대에는 별서, 사찰, 행정시설 등이 자리해 당대 문화사를 구가했고, 19세기에는 진주성을 조망하는 경관적 가치로 인해 망경대(望景臺)가 들어섰다. 진주의 역사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증언하는 사례이다. 셋째, 조선 후기 망진산을 읊은 시문이 등장하고 이는 망진산이 진주의 명승으로 자리매김한 현실을 보여준다. 진주의 명승을 열거한 작품에 망진산을 묘사한 대목이 확인된다. 반면, 진주에 거주한 문인들은 봉수대에 주목하여 전란이 없는 평화로운 현실을 노래하고 역사를 회고했다. 19세기에는 전별연이 베풀어지기도 하였으니, 이는 진주를 조망하고 지역을 개관하는 아름다움에 기인한 결과로 보인다. 진주 망진산이 지닌 상징성과 명승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적인 것, 혹은 금지된 '소리'의 계보 -한일국교정상화 성립기 '왜색(倭色)' 비판담론과 양의성의 정치미학 (The Genealogy of Forbidden Sound -Political Aesthetics of Ambiguity in the Criticism of Japanese Style in Korean Society of the 1960s)

  • 정창훈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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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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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9-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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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한일국교정상화를 전후하여 '일본이 또 다시 한반도로 온다'라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의 정조가 조성되었으며,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왜색' 비판담론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다만 기존의 '왜색' 비판담론이 미처 처분하지 못한 식민지 잔재에 대한 민족적 반감을 표명하는 것이었다면, 1960년대 비판담론은 대중문화 속에서 새롭게 생성되고 있던 '왜색'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며 그것을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변함없는 악의'가 징후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으로서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국교정상화를 전후하여 대두된 '왜색' 비판담론은 기존 비판담론과는 질적인 차이를 지녔다. 이 새로운 '왜색' 비판의 논리는 "국경을 넘는 문화적 현대성의 매개", 즉 냉전체제하 지정학적 질서 속에서 유동하고 연쇄되었던 서구(미국)발 탈민족적·탈국가적 '대중문화'와 그것의 소비주체로서 성장한 '대중'에 대한 경계와 검열의 의지를 동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960년대 한국에서 '대중적인 것=왜색적인 것=소비적인 것'의 위상학은 그 사회 내부에 존재했던 "도덕적 요구의 역설"을 드러내 보인다. 이는 일본이라는 타자와의 직접적 접촉을 회피하도록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한없이 이끌리며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드는 분열적 순환구조를 고착화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자타를 엄밀하게 가르는 도덕적 절단을 통해 대상을 저편으로 밀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대상에 매료되어 다시 이편으로 끌어들이는 반복강박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 글은 그것이 구조화된 궤적을 더듬어보고 그에서 반복되어 나타난 불협화음의 의의를 정치미학적 차원에서 해명하고자 당대에 발생된 상이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여 볼 작정이다. 그것은 곧 한국사회의 내적 통제원리를 구축하려는 권력이 강력하게 발동하면 할수록, 혹은 그 권력이 지닌 억압적이고도 폭력적인 이면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되풀이하여 끌어들어야만 했던 '일본(적인 것)'이라는 대타성, 즉 완전히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도 없고 소멸시켜 버릴 수도 없는 역설에 대한 고찰이 될 것이다.

부석사 조사당 신장 벽화를 통해 본 조사당 건립의 배경과 의미 (The History of the Josadang and Its Meaning as Seen Through the Murals of Josadang Hall in Buseoksa, Yeoungju)

  • 심영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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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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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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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이 글은 설산 천희(雪山 千熙, 1307~1382)가 영주 부석사에 조사당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의미를 조사당 벽화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조사당의 남벽(출입구 위치)에는 북벽에 위치한 의상 대사상을 마주 보며 6구의 신장(사천왕과 그 양 옆으로 제석천과 범천)이 그려져 있다. 이 신장 그림은 우리나라 사찰 벽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매우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사찰 전각의 내벽에는 경전에서 묘사하는 장면들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사당에는 이런 종류의 벽화는 없으며 신장들만 그려져 있다. 이는 유일한 예이며, 승려상과 마주보는 위치에 신장들이 그려진 예도 찾아볼 수 없다. 주인공인 승려(의상대사)를 외호하기 위한 신장의 배치와 부조상(浮彫像)을 그림으로 번안한 듯한 표현상의 특징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그 구성과 표현이 팔각의 탑신 표면에 신장상을 새긴 나말여초 선종의 석조승탑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도상 또한 나말여초기 신장과 유사성을 지닌 고식이다. 이중 동방과 서방천왕의 존명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는데 이 글에서는 나말여초 승탑의 사천왕 배치 순서에 근거하여 이들의 명호를 제시하였다. 한편, 해동 화엄의 초조 의상 대사를 기념하여 조사당을 건립하고 이를 외호하는 신장들을 배치했다는 것은 개산조에 대한 숭배 개념을 드러낸다. 따라서 조사당 건립의 목적 또한 선종 승탑 건립 이념의 연장선에서 찾았다. 문제는 설산 천희가 화엄종 승려이고 부석사는 대표적인 화엄 사찰이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조사당 건립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14세기 고려 불교계의 상황과 창건주 설산 천희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14세기에는 간화선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천희는 58세의 노령에도 원나라에 유학하여 간화선사의 인가를 받아온 뒤 국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결국 부석사로 밀려나 부석사 중창에 힘쓰게 된다. 천희는 아마도 사찰 중창을 통해 부석사의 위상을 높이고 선종에 위축되어 가던 화엄종의 발전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선종의 부상 아래 힘을 잃어가던 화엄종이 그 발전을 모색하는 시도 속에서 조사당을 건립하였고 이러한 염원이 벽화의 특징으로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조사당 벽화의 불교사적인 가치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호흡연동 용적변조 회전방사선치료에서 호흡주기에 따른 선량전달 정확성 검증 (Dose verification for Gated Volumetric Modulated Arc Therapy according to Respiratory period)

  • 전수동;배선명;윤인하;강태영;백금문
    • 대한방사선치료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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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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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7-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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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목 적 : 호흡연동 용적변조 회전방사선치료(Gated Volumetric Modulated Arc Therapy)에서 환자의 호흡주기 변화에 따른 선량전달의 정확성을 검증하고자 한다. 대상 및 방법 : 실험에는 TrueBeam STxTM(Varian Medical Systems, Palo Alto, CA)치료기를 사용하였다. 인체모형등가팬텀(Rando Phantom, Alderson Resarch Laboratories Inc. Stamford. CT, USA)의 전산화단층영상에 전산화치료계획시스템(Eclipse 10.0, Varian, USA)을 이용하여 10 MV FFF(Flatenning Filter Free), 선량률 1200 MU/min으로 1500 cGy/fx(Case1, 2, 3)과 220 cGy/fx(Case4, 5, 6)의 치료계획을 수립하였다. $QUASAR^{TM}$ Respiratory Motion Phantom(Modus Medical Devices Inc)을 이용하여 1.5, 2.5, 3.5, 4.5 sec의 일정한 호흡주기와 평균호흡주기가 2.2, 3.5 sec인 환자의 호흡주기를 재현하였고 위상모드 30~70% 구간에서 방사선이 조사되도록 설정하였다. 각각의 호흡 조건에서 2차원 이온전리함 배열 검출기(I'mRT Matrixx, IBA Dosimetry, Germany)와 MultiCube Phantom(IBA Dosimetry, Germany)을 이용하여 측정하였고 세기변조 방사선치료 분석 프로그램(OmniPro I'mRT, IBA Dosimetry, Germany)을 이용하여 Gamma pass rate(3 mm, 3%)을 비교하였다. 결 과 : Case 1, 2, 3, 4, 5, 6의 Gamma pass rate은 일정한 호흡주기 1.5 sec에서 100.0, 97.6, 98.1, 96.3, 93.0, 94.8%, 2.5 sec에서 98.8, 99.5, 97.5, 99.5, 98.3, 99.6%, 3.5 sec에서 99.6, 96.6, 97.5, 99.2, 97.8, 99.1%, 4.5 sec에서 99.4, 96.3, 97.2, 99.0, 98.0, 99.3%의 결과를 보였다. 환자의 호흡을 재현한 경우 평균 호흡주기 2.2 sec에서는 97.7, 95.4, 96.2, 98.9, 96.2, 98.4%, 3.5 sec에서는 97.3, 97.5, 96.8, 100.0, 99.3 99.8%의 결과를 보였다. 결 론 : 2.5 sec이상의 일정한 호흡주기와 환자의 호흡을 재현한 실험에서 Gamma pass rate 95%이상의 임상적으로 신뢰할 만한 결과를 보였다. 일정한 호흡주기 1.5 sec의 Case 5, 6 에서 93.0, 94.8%의 결과를 보였으나 100명의 환자 호흡주기 분석 결과 1.5 sec의 호흡을 지속했던 경우는 없었던 점으로 보아 대부분의 호흡조건에서 정확한 선량전달이 가능함을 확인 하였다. 다만 극히 짧은 호흡주기로 인한 오차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치료전 선량전달 정확성 검증이 선행되어야 하며 모의치료시 환자 교육으로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고 정확한 모니터링을 통해 치료중 환자 호흡변화에 대처한다면 더욱 안정적이고 정확한 치료가 이루어질 것으로 사료된다.

무왕(武王, 1738-1765) 시기 메콩 델타에서의 영토 확장 추이: 제국으로 가는 길, '잠식지계(蠶食之計)'와 '이만공만(以蠻攻蠻)'의 변주 (Territorial Expansion the King Võ (Võ Vương, 1738-1765) in the Mekong Delta: Variation of Tám Thực Chi Kế (strategy of silkworm nibbling) and Dĩ Man Công Man (to strike barbarians by barbarians) in the Way to Build a New World Order)

  • 최병욱
    • 동남아시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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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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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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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베트남이 메콩 델타로 영토를 팽창하는 역사 속에서 완거정은 두 개의 얼굴을 갖는다. 하나는 현재 베트남 영토 내에 있는 메콩 델타 거의 전부를 획득하는 데서 그의 공헌이다. 또 하나는 베트남 역사를 읽는 독자들의 눈을 현재의 베트남 영역에만 머물게 하는 그의 역할이다. 독자들에게 완거정의 메콩 델타 획득은 베트남 남진사의 마지막 단계로 인식된다. 그러나 완거정의 업적은 부분적이었을 뿐이다. 이 연구는 메콩 델타에서의 영토 팽창 추이에서 완거정 보다 무왕에 주목한다. 무왕의 목표는 완거정의 공헌에 의해 성취된 영토 획득보다 더 야심적이었다. 그리고 이 야심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국제 질서를 건설한다는 그의 꿈에 의해 추동된 것이며, 그가 건설한 수도 푸쑤언은 이 새 국제 질서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그는 황제가 되기를 희망했다.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필자는 세 가지의 요소를 검토하고 있다. 첫째는 무왕 왕권의 성격이다. 두 번째는 메콩 델타에서의 군사 작전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셋째는 새로이 무왕의 판도로 편입된 땅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북부 홍하 델타에 근거한 레 황실의 신하를 자처하던 선대 지배자들의 태도와 결별하면서 무왕은 즉위한 지 6년 뒤인 1744년 자신이 왕임을 선포했다. 행정 조직이 개편되었고 의복과 풍속도 북부의 것을 버리고 남국의 것을 제정하였다. 무왕은 캄보디아, 참파, 수사, 화사, 만상, 남장 등 조공국도 충분히 확보했다. 레 왕조와 비교해 이 조공국의 숫자는 더 많았으며 19세기 대남 제국의 조공국 수와 맞먹었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 무왕이 실제로 원했던 자리는 왕이 아니라 황제였음을 지적한다. 비록 무왕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는 자신을 천왕이라고 칭함으로써 통상적인 왕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캄보디아 왕이 캄보디아 영토 내의 참족을 공격한 게 무왕에게는 캄보디아에 개입하는 충분한 이유로 작용했다. 무왕은 이 참족이 자신의 신복이라 여겼다. 왕은 그들이 자신의 판도 내에 있는 참 즉 순성진 참인의 일부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무왕은 1750년에 캄보디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동시에 그는 태국왕에게 외교 서한을 보냈는데 여기서 그는 캄보디아가 자신의 배타적 조공국임을 천명했다. 캄보디아의 영토였던 메콩 델타에의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무왕은 푸쑤언을 새로 건설해 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권력중심지로 삼았다. 인플레이션, 기근, 경제 왜곡 등도 이 시기를 특징짓는 면모였다. 그러나 이 연구는 무왕의 메콩 델타 진출 이유라고 이야기되어 온 이런 경제적인 측면보다 제국 건설자로서 무왕이 보이던 적극적 정책에 더 관심을 가지며 이런 정책에 기초한 영토 팽창의 욕구가 메콩 델타의 광활한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1754년부터 3년 동안 현재 베트남의 영토에 해당하는 메콩 델타 대부분이 무왕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여기에는 완거정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무왕이 차지하고자 한 영역의 범주는 여기에 더해 메콩 오른편에 해당하며 현재의 사이공보다 위쪽에 있는 껌뽕짬, 프레이비엥, 스바이리엥을 포괄했다. 많아진 조공국의 수에 걸맞게 제국의 영토는 넉넉히 확대되어야 했다. 무왕의 전략은 '잠식지계'와 '이만공만'의 변주곡이었다고 이 글은 주장한다. 무왕은 하부캄보디아에 해당하는 델타를 야금야금 차지했다. 이는 누에가 뽕잎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게 일반적인 이해 방식이다. 그러나 무왕의 최종적 목표는 위에서 언급한 메콩 델타 세 개의 주까지 다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다 먹어치운다'는 건 '잠식'의 또 다른 의미이자 적용이었다. 무왕은 현 롱안 지역으로부터 쩌우독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참인을 이용해 캄보디아를 쳤다. 이것은 '이만공만'의 표준적 적용이었다. 이에 더해 그는 막씨가 관할하던 중국인 망명자들을 이용해 하띠엔과 그 주변 지역을 캄보디아 왕으로부터 취했다. '이만공만'의 또다른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19세기에 출현할 응우옌 왕조의 제국 질서 뿌리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주장한다. 제국 질서는 홍하 델타에 근거한 대월 제국 왕조들의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 아니라 푸쑤언에 앉은 무왕의 신 세계질서를 계승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만공만'과 '잠식지계'는 무왕의 후손들에게 여전히 유용했다. 그의 손자인 쟈롱은 타이, 크메르, 라오, 중국인, 산지민, 유럽인 같은 '만'을 이용해 또다른 '만'인 '떠이썬 도적떼(西賊)'를 이겼다. 떠이썬에는 수많은 중국인 및 중국 해적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참인, 산지민이 있었다. 무왕의 증손자인 민망 황제는 화려한 제국을 건설했다. 동시에 그는 캄보디아와 참 영역을 몽땅 먹어치우면서 영토 확장에도 골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