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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과 맹자(孟子)의 인정론(仁政論) ('Good life', 'good politics' and Mencius)

  • 안외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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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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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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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정치사상의 고전적인 질문은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 삶인가'에 대한 추구였다. 그만큼 '좋은 삶'과 '좋은 정치'는 필연적인 관계에 있다. 맹자(孟子: B.C.385 - 303/302)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의 사상 전반이 담긴 "맹자(孟子)"는 좋은 삶과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정의(定義)로 시작하여 그것이 왜 좋은 삶이고 옳은 것인지를 논증하는 것으로 책 전체를 할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은 맹자가 바라본 '좋은 삶'에 대하여 정치사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맹자의 사숙(私淑) 스승 공자(孔子)는 인간다운 인간의 길이야 말로 가장 좋은 삶으로서 문명적 삶인데, 그것은 '인(仁)'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기존의 삶과 차별화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맹자는 이러한 공자의 주창에 대해 그것이 옳은 것이었으며, 나아가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특히 정치적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맹자에게 있어서 '좋은 삶'은 1) 지배자가 즐거움을 독점하는 삶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 혹은 '여민해락(與民偕樂)'의 삶이고 2) 이를 토대로 각자 구성원들의 사회적 몫이 상호 보장되는 '오륜(五倫)'적 삶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좋은 삶의 실현을 위해, 맹자는 한편으로는 가능성 차원에서 '사단(四端)'으로 확인되는 '사덕(四德)'의 선한 인간본성을 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실천을 위해 '인정(仁政)'이라는 정치적 장치를 고안하였다. 나아가 좋은 정치인 인정의 일차적 조건으로 양민론(養民論)을, 최종적 조건으로 교민론(敎民論)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좋은 삶을 위한 공자의 노력을 맹자가 인정(仁政) 이론으로 계승했듯이, 맹자의 그것은 특히 150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른바 주자학자들에 의해 '수기치인(修己治人)' 이론으로 계승되었다.

근대적 예술 개념으로서의 서예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aligraphy as a modern concept of art)

  • 김희정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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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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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5-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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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논문을 '근대적 예술 개념으로서의 서예'를 정의해 보고자하는 글이다. 근대성의 지표로서의 '자율성'에 근거하여 '순수예술로서의 서예성'과 배치되는 요소들을 제거해 봄으로써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시대의 서예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반추해보자는 의미이다. 근대예술 개념으로서의 서예를 '글자를 쓰는 예술'로 정의하고, 이를 성격과 형식, 내용적 측면으로 분류하여 논의하였다. 먼저 성격적 측면에서 서예는 마땅히 공간예술이어야 하지만, 시간의 추이와 함께 창작되고 감상되는 시간예술적 속성도 또한 지닌다. 따라서 공간예술 가운데 2차원적 공간예술인 회화와 가장 유사하며, 시간예술 가운데 리듬성(운동성)과 추이성을 내재한 음악과 유사하여 시공간예술로서의 무용과 유사함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서예는 '회화와 같이 눈에 보이는 글자를 음악과 같이 시간의 추이에 따라 (평면)공간에 써가는 사이에 살아있는 작가의 생명감이 표현되는' 무용과 같은 '시공간 예술'이라 하였다. 형식적 측면에서는 서예를 전각 서각 문자디자인과의 비교를 통해 동이점을 도출함으로써 '순수예술'로서의 서예 개념을 도출하였다. 서예의 내용적 측면은 문학과의 비교를 통해서 동이점을 논설하였다. 근대예술 개념으로서의 서예, 즉 서예의 자율성 문제는 순수예술이냐 응용예술(실용예술)이냐의 문제와 어울려 서예의 소재인 문자의 가독성(可讀性)과 문의(文意) 문제를 들었다. 문자의 가독성과 문의는 서예를 존재케 하는 요소임과 동시에 서예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일종의 파라독스다. 즉 문자의 가독성과 문의의 수용 여부는 서예를 응용예술 혹은 문학예술의 부용으로서의 서예인가, 순수조형예술인가의 가름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하여 서예의 창작과 감상 부분에서는 2차원적 공간예술인 회화와 시간적 예술인 음악과 대비시킴으로서 문의로부터 자유로운 '순수조형예술로서의 서예'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옥동(玉洞) 이서(李漵)의 이(理)·기(氣) 대립적(對立的) 사유(思惟) 양식(樣式)과 그 의미(意味) (Okdong Lee Seo's Li(理)-Qi(氣)Dualism and Its Meaning)

  • 윤재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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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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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7-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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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글은 옥동 이서의 문집을 통해 그의 학문세계를 이루는 기본 토대인 옥동의 사유(思惟) 양식(樣式)과 체계(體系)를 살펴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필자가 옥동 이서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이전까지 그의 가문 안에서 전해지던 가학(家學)의 전통(傳統)에 강한 자극과 충격을 주는 가학(家學) 변화의 시작점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옥동 이전까지 그의 가문은 문학으로 성가(聲價)를 얻었던 문한가(文翰家)였다고 생각되는데, 이 가문의 학문 경향이 옥동에 의해 경학(經學) 중심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특히 옥동은 조선 후기 학계를 대표하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셋째 형으로, 성호의 학문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옥동은 성호 학문의 골격을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문학 중심의 가학 전통을 경학 중심으로 전환시켜 성호에게 전했다고 보인다. 따라서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옥동과 옥동 학문 세계의 근저(根底)를 해명해 내기 위한 작업으로 의미를 지니지만, 보다 큰 의미는 옥동 개인을 넘어 조선 후기 학문적 지표의 하나로 존재하는 성호와 그의 학문 세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성호학의 기본 골격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옥동의 문집을 살펴보면 옥동은 유가적(儒家的) 성선설(性善說)에 사유(思惟)의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세계를 이(理)와 기(氣)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사유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이(理)와 기(氣)를 대립 관계로 바라보았던 것은 순선(純善)하지 못한 인간의 심(心)을 이해하고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옥동은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도덕적 완전성을 회복하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 "성(誠)과 경(敬)을 통한 심(心)의 수양"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수양을 통해 유가적(儒家的) 고도(古道)가 구현된 효제(孝悌) 충신(忠信)의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 순선(純善)한 인간을 회복하는 것이 옥동의 목표였다. 여기에 옥동의 사유(思惟) 양식(樣式)이 지니는 기본적인 의미가 놓여 있다.

연행록의 계보적 독해 - 18세기 전반 노론 사대신 전주이씨 집안 연행 기록의 개관과 관심지향 분석 - (Genealogical reading on YeonHangrok : A general survey on a series of YeonHang documents of 18th Century No-Ron Jeon-Ju Lee's Family(老論 全州李氏) and an analysis on their points of concern)

  • 김현미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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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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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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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고는 개인적으로 지어진 한문 산문 연행록(燕行錄)이 본격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한 18세기 전반의 구체적인 창작층과 창작된 산문 연행록의 관심지향 양상을 살피기 위하여 쓰여졌다. 실지적인 작품을 다수 남겼으나, 문헌군 형성 전에 주목받지 못하였던 작자층 중에 '서인 노론 사대신' 중 소재 이이명, 그 아들 일암 이기지, 한포재 이건명의 사적(私的) 한문 산문 연행기록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우선 현전하는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그들의 연행 관련 글을 살핀 결과, 소재와 일암, 한포재의 연행 의식은 '연행의 중요성'을 의식하며 연행의 임무를 경험 대상에 대한 '관찰과 주목'이라는 태도로 실행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연행 의식이 구체적으로 그들의 한문 산문 연행기록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를 살핀 결과는 다음과 같다. 소재 이이명과 일암 이기지 부자의 1720년 사행 결과로 나온 "연행잡지"와 "일암연기"는, 공통적으로 노가재 김창업과 그의 저작 "노가재연행일기"(1712)가 창작의 원인이 되었지만 서술 방법에 있어 화소의 편성을 보면 일암은 천주당을 중심한 서양 문화, 길에서 본 문물의 번성 관찰, 역관 등에게서 들은 현재의 정세 등 자신의 관심사에 따른 직접 체험들의 영역을 편성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노가재의 교유 인물과 견문을 구비하는 방식을 띤다. 한편 아버지 소재는 자신이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현상과 일들을 통하여 그의 연행 기록을 작성하는 원칙으로 조선에 영향을 준 청(淸)의 정세, 세법(稅法) 등 제도에 대한 관심지향성을 보인다. 1721년 세제 책봉을 위한 주청사로 간 한포재 이건명의 "한포재 사행일기"에서는, 앞선 두 개의 연행록처럼 자신의 연행 기록을 촉발시킨 사람이나 작품을 거론하지 않지만 서술의 곳곳에서 소재와 일암의 기록, 혹은 전해 들었을 그들의 경험 견문이 반영되어있다. "한포재사행일기"는 등장화소의 성격상 '공무' 와 '사신의 사명'을 중시하고 그 과정을 충실히 소개하고 분석한다는 점에서 소재의 연행기록인 "연행잡지"와 가깝다. 그러나, 자신의 심정 술회를 하기 위해 "일암연기"의 점술 화소를 유입하기도 하고, 공무 외의 견문과 체험에 대해서도 자신이 경험한 것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결국 18세기 전기 한문 산문 연행록의 주 작자층인 서인 노론계 전주 이씨의 작자들은 경험으로서 '사행의 중요성'을 공통적으로 인지한 채로,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영역을 주목하고 관찰하면서 연행록의 내용을 제시하였다. 소재와 한포재는 '공무'와 '사명'의 범주로 특화되며, 일암 이기지는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타문화의 일상 문물과 교유로까지 넓어진다.

유학 및 신유학 철학에서의 덕의 문제 (On the Problem of Virtue in Confucian and Neoconfucian Philosophy)

  • 베르너 가브리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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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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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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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이 글은 동아시아 유학 전통의 뿌리를 다룬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중국의 고전 전통과 그에 대한 송대(宋代)의 해석이다. 덕의 개념은 유럽 및 중국의 전통이 만나는 드문 사례들 중 하나처럼 보인다. 라틴어 virtus 와 그리스어 $aret{\acute{e}}$는 중국어 $d{\acute{e}}$ 덕(德)과 매우 유사해 보이는 것이다. 중국 전통에서 덕(德)은 따라서 자연적 힘의 총체로 간주되는 도(道) $da{\grave{o}}$와 늘 연결되어 있다. 유럽 전통과 달리, 중국 전통에서는 덕이 그 자체로 인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자연적 힘으로서 간주된다. 이 힘은 주변 세계와 인간의 연결, 통합 그리고 조화를 유지해준다. 공자는 사회적 행동(social behaviour)의 가능성, 곧 덕의 가능성에 관한 엄격히 철학적인 논쟁을 촉발시켰다. 공자에게 있어, 상(喪, mourning)는 인간의 원초적인 사회적 특성을 보여주는 현상들 중 하나이다. 하나의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현상으로서의 애도는 자연적 필연성이라는 성질을 갖는다. 이런 기초적인 사회적 감정은 인(仁)($r{\acute{e}}n$, "human-heartedness") 이라 불린다. 인은 그것이 인간의 사회적 지향의 기초이자 결과로서 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사회 구성 능력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간주된다. 인은 덕의 전형이다. 곧 인은 단순히 자연 법칙으로부터 연역 가능한 하나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성취하거나 혹은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는 어떤 것에 관련되어 인간에게 제기되는 하나의 요청이다. 따라서, 인(仁)의 기본적 특성은 관심(concern)이다. 신유학 시기의 덕 해석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덕에 관한 논의는 우주론적 관점으로까지 확장된다. 신유학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우주적 상호관계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모든 규칙들로부터 자연을 해방시키려 하는 도가와는 반대로, 신유가는 이(理)(lǐ) 개념을 통한 존재론적 기초를 창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신유학의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 -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 서양적 사고와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이(理) 개념과 함께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논쟁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다. 불교의 무(無) 개념과 함께 등장한 실재의 해체와 차별이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개념과 함께 새로운 답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전통에서는 매우 새로운 관점이다. 영원하며 파괴되지 않는 관념적 원리가 현상적 실재의 파괴를 막아준다. 마지막으로, 나는 덕 개념과 관련된 유럽적 및 중국적 사유의 비교 가능성에 대한 몇 가지 결론적 언급을 적어보고자 한다. 우선, 모든 고전시대의 유가들에게 있어 구체적이며 성공적인 행동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는 이 세계에 완벽히 꼭 들어맞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일반적 개념을 구분할 수 있는 진리에 의해 계몽된 대화만이 합당한 행동에 관한 통찰로 이끈다고 믿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이렇게 도출된 규칙은 실천되어야만 할 어떤 것이다. 유가적 방식의 경우는 보다 직접적이다. 행위자는 이후의 행위를 위한 하나의 정확한 패턴을 수립한다. 이는 - 위에서 언급한 대로 - 하나의 구체적 행동은 결코 다른 행동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으므로, 논쟁은 행동이 수행된 상황들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논의로부터만 발생한다. 이 논쟁은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행동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의 초점은, 개념적 구별이 아니라, 행동 형식에 관련된 세심한 지식의 습득에 놓여진다. 일반화는 물론 이런 노력의 과정에서 성공을 위해 요청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점 역시 존재한다. 개념화의 성공 여부는 - 규범적 개념과 일치하는 행동의 형성이 아니라 - 개별적 행동의 성공적인 수행에 달려 있다.

금영작(金永爵)과 한중 척독교류의 새 자료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 (Kim Youngjak(金永爵) and the new material, 『A Collector of Correspondence from Chinese Intellectuals (中朝學士書翰錄)』)

  • 천금매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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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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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7-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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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는 금영작(金永爵)이 중국 문인들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척독집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을 새로 발굴하고 소개한 글로, 정공수(程恭壽), 옹학함(翁學涵), 장병염(張丙炎), 소언한(少言翰)과 자렴함(子廉銜), 이문원(李文源) 등이 김영작에게 보낸 편지 10통, 조정황(趙廷璜)이 김영작의 아들 김홍집(金弘集)에게 보낸 편지 1통 및 시(詩) 5수가 수록되어 있다. 김영작은 많은 중국 문인들과 직접 또는 간접적인 교유를 진행하였다. 그는 연행을 갔다 온 친구 홍양후(洪良厚)의 소개로 중국 문인 이백형(李伯衡), 수방울(帥方蔚)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30여 년간 간접적인 교유를 진행하였다. 1858년에는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 직접 북경에 가서 현지 중국 문사 섭명례(葉名澧), 장병염(張丙炎), 오곤전(吳昆田), 정공수(程恭壽), 조광(趙光) 등과 만나서 교유하고 귀국 후에도 지속적으로 척독교류를 진행하였다. 김영작은 학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나 한중 문화교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김영작이 생면부지의 중국 문사 이백형(李伯衡)과 수방울(帥方蔚)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어 교유를 청하였고 상대방 역시 흔쾌히 답장을 보내면서 평생 편지로만 문학적, 개인적 교류를 진행하였으며, 또한 김영작이 조선의 명문가의 사대부로서 연행사(燕行使)의 부사(副使)라는 높은 신분으로 중국 현지의 문사들과 친밀하게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한중 인사들의 마음이 열려있고 신뢰성과 친숙감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홍대용을 비롯한 많은 선배 문인들의 교유의 전통이 있어 기초를 닦아놓았기에 가능했다. 이런 의미에서 19세기 후반 김영작과 중국 문사들의 교유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그 사실을 보여주는 척독집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도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만으로는 김영작과 중국 문사들이 주고받은(교류의) 내용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자료적 한계를 갖고 있는 점이다. 앞으로 중국 측에 교유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들을 더욱 많이 발굴해낼 것을 기대할 뿐이다.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의 『양아록(養兒錄)』에 나타난 조손(祖孫) 갈등(葛藤)에 대한 일고(一考) (A Study on the conflicts between the grandfather and the grandson contained in Mukjae Lee Mun Geon's 『Yangarok』)

  • 정시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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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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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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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양아록(養兒錄)"은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손자를 양육하면서 남긴 기록물이다. "양아록"의 저자인 이문건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 휴수(休?)이다. 그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경북 성주에 20여 년간 유배되었다가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16년간의 기록인 "양아록"은 크게 3단 구성을 보인다. 먼저 제1단에서는 묵재 본인의 자서(自序)와 손자 출생 시의 기쁨을 담은 율시 한 수, 출생 당시의 상황과 개명(改名)에 대해 언급한 산문 한 편, 성주 목사와 조카 이섬(李?)이 보내준 축시가 등장하며, 제2단에서는 본격적인 양아의 내용을 35제의 시로 담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제3단에서는 음주에 대한 경계, 가족에 대한 소개, 세계(世系), 축원문, 자신의 성품에 대해 자책하는 글로 마무리 했다. 본고에서는 "양아록"에 나타난 조부와 손자의 갈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양아록"의 여러 측면 가운데 유독 조손 간의 갈등에 초점을 둔 것은 서술의 주체인 묵재의 마음에 자리한 애증의 양가감정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양아록"에는 묵재의 심리적 추이가 잘 나타나 있는데, 특히 손자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갈등과 실망으로 이행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관계에 존재하는 애증(愛憎)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연구 목적에 맞는 정확한 논의를 위해 제2장에서는 조손 갈등의 근본적 발생 요인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제3장에서는 조손 갈등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 고찰했다. 갈등의 원인과 양상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제4장에서는 성찰의 자료로서 "양아록"이 현대인들에게 주는 전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소림일다(小林一茶)의 ≪시경≫ 배구화(俳句化) 양상 고찰 (Kobayashi Issa's ≪Shi jing≫ Hiku-ka and that meaning)

  • 유정란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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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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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9-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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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글은 소림일다(小林一茶)(고바야시 잇사, 1763-1827, 이하 '잇사'라고 칭함)의 ${\ll}$시경${\gg}$ 배구(俳句)(이하 '하이쿠'라고 칭함)화(化) 양상을 살피고 그 의미를 도출한 것이다. 잇사는 1803년 ${\ll}$시경${\gg}$을 공부하고, 이를 하이쿠로 재창작하여 ${\ll}$향화구첩(享和句帖)${\gg}$을 작성했다. 현재까지 이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없으며, 일본과 중국에서 잇사의 ${\ll}$시경${\gg}$ 수용 양상을 다룬 바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주로 국풍(國風)에 한정되었으며 연구자들 사이에 용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등 다양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작품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번역이라는 관점을 지양하고 배구화(俳句化)라고 명명하였다. 나아가 두 장르간의 심층적인 교류와 영향 관계를 문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 ${\ll}$시경${\gg}$ 배구화(俳句化) 양상을 주제의식의 재현, 시어와 이미지의 변용, 의경 전화와 제목 차용의 층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주제의식의 재현에서는 주로 고향이나 부모를 그리워하는 작품이 선별되어 배구화(俳句化) 되었다. 이때 단순한 주제 차용의 수준이 아니라 핵심 의미를 도출, 주석을 고려하여 해석하거나 잇사 개인의 원작 이해가 많이 개입되었음을 살폈다. 시어와 이미지의 변용에서는 해당 원천들의 의미를 절취하거나 조합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 작품이 두드러졌다. 의경 전화에서는 일본적 정경으로 그 분위기를 바꾸는 작품이 있었는가하면, 제목 차용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작품도 존재했다. 배구화(俳句化)의 의식 지향은 ${\ll}$시경${\gg}$의 감정이나 격앙된 어조, 비난 등을 의도적으로 탈락시키고 이치를 배척하거나 시교(詩敎)의 관점을 탈피한 것, 도덕적 이상을 담아내지 않는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잇사는 ${\ll}$시경${\gg}$을 하이쿠로 옮겨 올 때 매우 많은 부분에서 하이쿠적인 감상과 습관을 자각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잇사가 ${\ll}$시경${\gg}$을 배구화(俳句化)한 것의 의미는 우리의 ${\ll}$시경${\gg}$ 수용과 대조해볼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에서는 ${\ll}$시경${\gg}$을 언해하였지만 의역이 아닌 직역을 하였기 때문에 ${\ll}$시경${\gg}$ 원문의 글자가 유지되었다. 일본의 경우도 훈독체로 ${\ll}$시경${\gg}$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원 글자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잇사는 ${\ll}$시경${\gg}$의 출발점인 민요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하여 일본의 민족어 시가 형태로 그 내용을 옮겼다.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ll}$시경${\gg}$ 수용 방식을 벗어나 잇사는 민족어 시가로 ${\ll}$시경${\gg}$에 대응한 것이다. 따라서 잇사의 ${\ll}$시경${\gg}$ 배구화(俳句化)의 의미를 본래 ${\ll}$시경${\gg}$의 출발점인 노래 그 자체로 인식하여 받아들인 태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후기 문학작품의 지옥 형상화와 그 성격 (Hell Formation and Character of Literary Works of the Late Joseon Dynasty)

  • 김기종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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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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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9-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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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글은 '저승길' '심판' '징벌'의 지옥 관련 화소를 포함하고 있는 조선후기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지옥 형상화의 양상과 그 성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과문> <권왕가> 등의 불교가사는 지옥에서의 징벌 양상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징벌의 이유로 살생 망어 음주 사견 등의 5악 내지 10악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 가사에 나타난 '지옥'은 '불전 속의 지옥'과 큰 차이가 없다. '회심곡'의 경우는 시왕의 심판을 받는 죄인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한 뒤, 남자에게는 선행의 덕목을, 여자에게는 악행의 항목을 제시하고 있다. 선행의 덕목과 악행의 항목들에는 불교적 윤리 규범과, '삼강오륜'을 포함한 유교적 윤리 규범이 공존하고 있다. 지옥 관련 야담과 한글소설은 징벌의 양상 및 그 이유가 작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지옥행의 원인을 통해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윤리적 덕목들을 강조하고 있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리고 대체로 지옥행의 원인에 비해 지옥의 징벌 화소가 축소되어 나타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지옥 관련 조선후기 문학작품이 지옥의 고통을 환기시켜 불도수행에 힘쓸 것을 권하기보다는, 일반 대중에게 익숙한 '지옥 관념'을 활용하여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하는 윤리적 덕목들을 제공 또는 교육시키는데에 주된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교적 윤리 규범의 강조는 지옥 관련 문학작품에만 국한되는 현상은 아니다. 이들 작품이 창작 유통된 19세기에는 유교적 윤리 규범을 강조하는 교화서 교훈가사 권선서의 찬술 및 간행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교적 윤리의식의 고양 내지 강화는 삼정(三政)의 문란, 잦은 민란의 발생, 천주교의 교세 확장 등 기존 체제를 위협하는 사회적 혼란에 대한 19세기 조선사회의 위기의식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후기 지옥 관련 문학작품의 창작 유통은 천주교의 유포 및 확산과 관련이 있다. 당시의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천주교가 널리 확산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천당 지옥설'이었고, 집권층 및 유가 지식인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던 천주교의 교리 또한 천당 지옥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후기 문학작품의 지옥 형상화는 19세기 조선사회가 직면했던 사회적 혼란에 대한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이자, 당시 널리 확산되고 있던 천주교의 지옥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필리핀 건국의 핵심 과제와 대통령(들) 비교: 이승만 대 케손 등 (A Comparative Study on the Principal Tasks for State Building and the Presidents of Korea and the Philippines: Syngman Rhee with Manuel Quezon and others)

  • 류석춘;조정기
    • 동남아시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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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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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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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글에서는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과 패전국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건국 대통령을 당시 이들이 건국 과정에서 직면했던 공통의 과제들을 중심으로 비교한다. 이를 위해 한국의 건국대통령인 이승만과 필리핀의 자치를 주도하며 커먼웰스 정부를 세운 케손을 중심으로 이후 7명의 대통령의 삶을 두 나라의 건국과정과 교차시키며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한국과 필리핀은 독립 혹은 자치 후 미국의 영향을 받아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제 중심의 헌법을 채택하였다. 다음, 독립 후 두 국가는 냉전의 최전선에서 반공노선을 기본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나아가서, 두 국가는 반공을 뒷받침하기 위해 농민을 체제 내부로 포섭하기 위한 토지개혁도 실시하였다. 마지막으로, 두 국가는 일본의 식민지배 혹은 점령에 따른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도 공통적으로 겪었다. 따라서 첫째, 헌법의 제정, 둘째, 반공노선의 확립, 셋째, 토지개혁 문제, 넷째, 일본 식민지 혹은 점령을 청산하는 문제가 각각의 나라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배 기간인 1935년에 '헌법적 독립'을 이루면서 당시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던 아시아의 어느 국가보다 빠른 정치적 발전을 겪었다. 하지만 케손과 오스메냐 등 건국 초기의 국가지도자들은 헌법제정을 제외하고 농민운동으로부터 비롯된 공산주의 운동, 토지개혁과 일본점령 청산 등과 같은 건국의 핵심 과제들을 적절히 수행하지 못했다. 토지개혁에 실패하면서 소수의 지주가문이 농민을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 지배하게 되었고, 근대적 시민계급이 형성되지 못한 필리핀은 이후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후퇴를 거듭하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 분단과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이 있었지만,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위의 당면한 과제들을 미루지 않고 해결하고자 했다. 그 결과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트랙을 깔 수 있었으며 친일청산도 여건이 허락하는 수준에서 이루었다. 특히 농지개혁을 통해 국민국가 형성과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경제의 나아갈 바를 시장경제로 잡아 오늘의 한국 경제를 낳는 대들보를 놓았다. 물론 공과(功過)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나라의 지도자와 비교해, 특히 필리핀의 대통령들과 비교해 건국대통령으로서 국가의 기틀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에는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