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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경복궁 궐내각사의 건축공간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Architectural Space of Gwolnaegaksa at Gyeongbokgu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 이정국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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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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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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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architectural space of Gwolnaegaksa (闕內各司), the Government office in the palac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Royal palace can be divided into three parts, political space for king, living space for king and his family and government office. So first, we should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each space in the Royal Palace. Up to now we have looked at the architectural space of Gwolnaegaksa in Gyeongbokgung (景福宮), one of the Royal Palace, the result of this study is as followings. There were not many Gwolnaegaksas in the early days in Gyeongbokgung. After King Sejong, some office buildings were established in that palace. King's closest guards, like as Seonjeonkwan (宣傳官), Gyumsabok (兼司僕), Naegeumwi (內禁衛) had been on duty in Sajeongjeon Haengrang (思政殿 行廊), a kind of servants' quarters. Bincheong (賓廳), a conference room of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s was situated in Geungjeon Haengrang (勤政殿 行廊). There were also barracks of other palace guards in Geungjeon Haengrang. Gyeongyeoncheong (經筵廳), a place to prepare and wait, was built separately from Geungjeon Haengrang Layout drawings of Gyeongbokgung painted since the 18th century were different from document in some parts. The arrangement of the Gwolnaegaksa was assumed like as the Fig. 9.

조선시대 궁궐에서의 양학(養鶴) 사례 (A Cases of Crane Breeding(養鶴) in the Palace of the Joseon Dynasty Period)

  • 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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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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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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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시대 궁궐에서도 학을 길렀는가에 대한 확인과 함께 그 사례를 고찰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조선 시대이며 공간적 범위는 외전, 내전, 궐내각사, 궐외각사 등 궁궐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본 연구를 위한 문헌 자료는 일부 원문 자료를 발췌·번역하여 고찰하였으며, 이와 함께 한국고전번역원 데이터베이스(http://db.itkc.or.kr)에 탑재되어 있는 고전번역서를 활용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시대 최고 관부인 의정부에서는 전기 때부터 학을 길렀다. 임진왜란 이후 위상 변화와 청사의 훼철로 인해 의정부에서의 양학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조선 시대에 경연과 언론 기능을 담당하며 왕을 측근에서 보좌한 홍문관에서의 양학은 조선 전기 중종 대부터 임진왜란 이후 정조 대에까지 이어졌다. 셋째, 정조 대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학문의 중추기관으로 새롭게 설치한 규장각에서도 학을 길렀다. 당시 규장각에는 여러 쌍의 학을 기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의정부, 홍문관, 규장각 등 조선의 핵심적 관부에서의 양학 행위는 그 기관의 위상이나 성격 등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상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섯째, 홍문관 등 궁궐에서 기르는 학은 관례적으로 황해도 배천군 등에서 충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례는 영조 대에 이르러 중앙 관서와 지방 관아 간에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이후 정조 연간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에서는 대부분 국역 자료에 의존하여 연구를 진행했다는 한계가 있다. 추후 자료의 발굴과 번역 성과가 더욱 축적된다면 보다 풍부한 사례를 확인할 있을 것이다. 또 지방의 관아, 사찰 등에서의 양학 사례 등 보다 심화된 후속 연구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