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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상의 존덕정 영역에 나타난 무편액 건물의 조영사적 고찰 (Historical Studies on the Nameless Buildings at the Jondeokjeong Area in Donggwoldo)

  • 정우진;심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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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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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8-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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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창덕궁과 창경궁이 공유하는 후원인 동궐 후원은 조선왕조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기술과 사상이 집약된 후원으로서 단연코 한국 조경문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왕실의 휴식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상징적 의례와 인재양성의 장이 되었던 동궐 후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당부분 훼철되어 과거의 면모가 일축되었다. 창경궁 북쪽의 후원권역은 일제에 의해 완전히 변형되어, 현재는 주합루에서 옥류천에 이르는 몇 개소의 영역이 후원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중에서 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존덕정 영역은 인조 연간에 옥류천 개발이 완료된 직후부터 화원(花園)으로 조성된 정원으로서, 심추정, 척뇌당, 폄우사, 망춘정, 천향각, 청심정 등의 정자가 존덕정을 중심으로 승경의 요점지에 자리 잡은 화목류와 연지 중심의 공간이었으나 현재 존덕정과 심추정, 폄우사만이 남아 있고, 그 외의 정자들은 멸실되거나 변형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각 건축물에서 감상되는 수요소, 식생, 점경물 등을 분석함으로써 원형적인 조영의도를 구명하는데 주력하였으며, 동궐 후원의 진정성 있는 복원 정비와 조경 시설물을 둘러싼 환경의 보전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정보 구축을 위하여 존덕정 영역의 정자인 심추정, 망춘정, 척뇌당, 천향각, 청연각의 5개 정자의 역사적 기록과 조영실태가 고찰되었다. 이들은 "궁궐지"와 실록에는 명칭이 언급되어 있지만 "동궐도"에는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데, 관련된 문헌자료가 망라되어 고증이 시도되었다. 이중 척뇌당과 심추정은 동궐도상에서 추정 건물을 뚜렷하게 밝힐 수 있었고, 존덕정 서북쪽에 위치한 용도가 불분명한 건물은 천향각 내지는 망춘정이었다고 추정하였으며, 태청문의 담장이 본래 청연각에 둘러쳐져 있었던 담장이었다는 가설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제껏 동궐도와 동궐 후원연구에서 난관으로 여겨졌던 창덕궁 동북쪽 모퉁이에 위치한 용도와 명칭이 불분명한 건물일곽에 대해서는 연산군과 숙종이 사용했던 기록이 발견되었고, 궁궐 사람들 모르게 유희생활을 하는 임금만의 별당이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조선시대 능참봉직(陵參奉職)의 조경사적 의의 (A Study on the Landscape Architecture Historical Significance of Reung Chambong in the Joseon Dynasty)

  • 신현실;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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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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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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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의 관리를 담당한 관직인 능참봉직을 소재로 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각종 의궤(儀軌), 능지(陵誌), "일성록", 능참봉 일기 등 관련 고문헌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능참봉의 조경가적 역할을 규명하는 기초연구로 수행되었으며, 요약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능참봉(陵參奉)은 종9품 참봉 2인으로 구성되고 능참봉직은 생원 진사 혹은 유학중에 삼망(三望)을 거쳐 임명이 되는 음직(蔭職)으로 임용기준은 '연소하지 않고 경륜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으며, 왕릉수호의 상징성으로 인해 관직진출의 수단이 되었다. 둘째, 능참봉의 업무체계는 품계서열을 따랐으나 지리상의 여건 등으로 봉심과 능의 공사감독 등 실제보다 많은 권한과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능수호군 관리 및 능지작성 등 조선왕릉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셋째, 능참봉의 조경관련 직무 중 봉심은 능상의 석물이나 사초, 정자각 등을 정기적으로 예찰하여 예조에 보고하는 것이며,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봉심의 체계와 방법 등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넷째, 능참봉의 조경관련 직무 중 수목관리 및 능역공사 감독은 조경식물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관리능력과 건축 토목을 망라한 공간에 대한 다양한 식견이 요구되는 직무로 조선왕릉의 현장관리 실무자로써 지방관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유동성 확보와 산림부산물 처리에서 암묵적 권한과 관리 책임이 부여되었으며, 오늘날 조경가의 직무성향과 관련성이 깊다. 능참봉의 조선시대 조경관련 직무에 대해 좀 더 폭넓은 문헌 발굴 및 고증으로 조선시대 능참봉의 조선왕릉 조경관리자로서의 역할과 능참봉과 조선왕릉의 조경사적 가치 규명을 위한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

격구희(擊毬戱)와 개최공간의 역사적 고찰(1) - 고려조 궁궐을 중심으로 - (Historical Conciderations of Gyeokgu Game and Play Space - Focused on the Goryeo Dynasty Palace -)

  • 최우영;윤영조;윤영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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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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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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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격구(擊毬)는 중국에서 국내에 전래되어 고려시대 궁궐과 민간에 크게 성행하며 조선시대로 전승된 집단 공놀이 유희이다. 이 연구는 격구가 가장 왕성했던 고려시대 궁궐을 중심으로 고려조 군왕들이 격구희를 즐긴 행태와 격구희가 열린 뜰인 구정(毬庭)의 역사 공간적 의미와 장소적 특성을 고증에 의해 구명하고자 하였다. 조사자료는 고려왕조실록3개 사료(史料)에서 격구 관련기록을 채록(採錄)하여 조사, 분석하였다. 조사결과, 군왕들의 격구희(擊毬戱) 참석행태는 역대 34명 군왕 중 12명이 격구에 관여했으며, 모두 46회 사록(史錄)에 남겼다. 참석행태는 46회 중 9회는 군왕이 격구경기에 직접 참여하였고, 37회는 군왕이 참관하였다. 이중 제18대 의종이 17회(36.9%)로 격구기록을 가장 많이 남겼다. 격구가 열린 곳은 본궐, 이궁, 누정, 사찰, 민간저택, 시전 및 시가, 기타 궐밖 등 모두 25곳으로 이곳에서 총 46회의 격구희가 열렸다. 개최 장소 중 이궁 5개소에서만 격구희가 21회(45.6%)나 열려 이궁의 이용률이 가장 높았다. 특히 이궁 중에서도 수창궁과 장원정에서의 개최가 많았는데, 이는 모두 의종 때 기록이다. 격구희는 고려 말까지 성행하며 군왕이 직접 시가나 저자에 나와 군중과 같이 격구희를 즐기는 국가적 축제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다산(茶山) 『소학지언(小學枝言)』의 수신론(修身論)과 도덕교육적 함의 (The Moral Training Theory and the Moral Educational Implication on Dasan's 『Sohakjieon』)

  • 김혜련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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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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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9-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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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논문은 인성교육 문제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는 입장에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저술한 "소학지언(小學枝言)"의 수신론에 관한 견해를 윤리학적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도덕 교육적 함의를 도출하고자 한다. 동양철학에서 수신론은 인성론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다산의 수신론 역시 그의 인성론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성리학적 수신론과의 차별성은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수신론(修身論) 속에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산은 성리학적 수양론(修養論)이 내적으로 마음을 관조하는 정적(靜的)인 수양론임을 비판하면서 덕(德)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비로소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 다산의 수양론이 성립되는 근거는 그의 성기호설(性嗜好說)에 있다. 다산은 인간에게 주어진 성(性)을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으로 보지 않고, 선(善)을 좋아하는 기호(嗜好)로 보고 있기에 인간에게는 본래 완전한 본성이나 이(理)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어야 할 지향성이 있을 뿐이며, 그 지향성의 함양을 통한 덕(德)의 형성은 수신론(修身論)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소학" '소도(小道)를 따르고 소예(小藝)를 익히는 것'으로서 학문적인 추구보다 오히려 가까운 현실로부터 실천을 통해 인격을 성숙시키는 도덕실천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 속에서 다산은 "소학지언(小學枝言)" 저술 전체를 관통하여 정확한 훈고(訓?)와 고증(考證)을 바탕으로 의리(義理)를 추구하고자 하는 경전해석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권형(權衡)의 행사(行事)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는 "소학지언(小學枝言)"에서 성기호설(性嗜好說)을 바탕으로 한 본연성(本然性)을 함양하며, 윤리적 존재로서의 관계성을 인식하고, 자학(字學)과 도학(道學)의 조화을 추구하는 전인교육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소학지언(小學枝言)"에는 그가 추구하는 실천 중심의 도덕교육 철학이 구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 무예 인류무형유산 등재 과제 (A Task for Listing Martial arts of 『Muyedobotongji』 on the UNESCO Representative List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 곽낙현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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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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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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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연구의 목적은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위한 과제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예도보통지"는 1790년(정조 14)에 편찬되었다. "무예도보통지"의 24가지 무예는 기본적으로 찌르는 방식의 자법(刺法), 찍어 베는 방식의 감법(坎法), 치는 방식의 격법(擊法)의 세 가지 방식으로 구분하였다. 둘째, "무예도보통지"의 무예가 무예사적 가치로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18세기 한국 중국 일본의 동양 삼국 무예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새로운 안목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종합한 것이다. "무예도보통지"가 세계기록유산으로 갖는 가치는 장교와 군졸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실용성을 강조하면서 만든 무예 서적이라는 점이다. 셋째,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절차는 준비 및 제출, 심사, 결정의 세 단계로 진행되며, 소요되는 기간은 2년이다. 특히 심사보조기구는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 산하 기구로서 24개 위원국 가운데 각 지역별로 1개국씩 전체 6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넷째,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인류무형유산 등재 과제는 다음과 같다. (1) "무예도보통지" 소장본에 대한 전수조사가 필요하다. (2)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시 도무형문화재 또는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필요하다. (3) "무예도보통지" 무예 기법 및 동작에 대한 실기 표준화 작업이 필요하다. (4) "무예도보통지" 무예 복장 및 무기에 대한 고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5) "무예도보통지" 무예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야 한다. (6) 문화재청 세계유산팀, 외교부 등 관련 부처와 긴밀한 협조 체제를 이루어야 한다. (7) 유네스코 등재기준과 충족을 위한 국내외의 "무예도보통지" 무예 관련 자료 수집을 포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8) 인류무형유산 등재유형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조선조에서의 선진(先秦) 제자학(諸子學) 수용 양상 - 순자(荀子)에 대한 비판과 이해를 중심으로 - (The Aspect to Receive Pre-Chin Study of One Hundred Schools in Cho Sun Dynasty-Centered on the criticism and understanding of Hsün Tzu)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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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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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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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에서는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선진 제자학을 위상을 검토하고 아울러 순자사상의 한국적 수용과 전개 양상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여말선초부터 18-19세기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문집을 통하여 순자에 대한 이해양상과 시대별 흐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부터 고려 중엽까지는 지식인들이 선진 제자학 가운데 다른 학파나 사상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여말선초 이래 "맹자"가 유가의 정통 경전으로 확립되면서부터 순자를 비롯한 선진 제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고려부터 선초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으며, 다만 순자에 대한 이해의 심도가 점차 깊어짐을 알 수 있다. 성리학 전성기에 이르면 선초에 비해 순자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 강도가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토대로 한 성리학적 세계관이 이미 확립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성악설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대체로 순자의 다른 사상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원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17세기에 이르면 순자를 법가로 귀결시키는 논의도 일부 보이지만, 주자학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실학적 토대 위에서 제자학을 적극 수용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18세기에 이르면 순자에 대한 이해 범위가 보다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글자 고증에 있어서 순자의 원문 및 주석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요컨대 조선조 지식인들의 순자 비판은 시종일관 그의 성악설에 근거하며 나아가 분서갱유를 주도한 이사(李斯) 등의 법가와 연계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이를 제외한 순자의 기타 사상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수용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순자를 비판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제자서를 쉽게 접하거나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태도를 지녔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원 류승국의 정역(正易)과 한국사상사의 상호 매개적 인식 (Lew Seung Kug's Recognition on Relations between Juhng-yaug and History of Korean Thoughts)

  • 이선경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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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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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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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글은 도원(道原) 류승국(柳承國, 1923~2011)의 사상적 지향과 한국사상사의 해석방법론이 정역의 원리와 가치관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고찰한 것이다. 도원은 그의 학문적 화두가 '화해와 상생, 인도주의와 세계평화에 있으며, 궁극적으로 대동세계를 구현하는데 있다'고 밝히며, 한국사상사 탐구를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찾는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상은 인간주체를 기본으로 하는 사상이며, 모든 갈등과 대립을 지양할 수 있는 중용(中庸), 중화(中和)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데, 한국의 역학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충족한다. 도원은 한국사상이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주역적 가치가 아니라 '조양율음(調陽律陰)'의 정역적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의 절대주체를 통해 양극을 화합하는 '중(中)'사상이 고대점복행위로부터 구한말 "정역"에 이르기까지 일관한다고 보았다. 성숙한 인도주의와 음양의 양극을 종합해 생명을 살리는 '호생지덕(好生之德)'의 인(仁)은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도원의 한국사상사연구의 핵심적 개념이다. '양극을 종합해 생명을 살리는 인간성숙'의 정신이 한국사상의 본령이라고 본다. 도원에 따르면 유교 인도주의의 핵심용어인 '인(人)''인(仁)'이 동이(東夷)에서 연원하였음이 갑골을 통해 고증되며, 동이족 수골복사(獸骨卜辭)의 음양사상과 인도주의의 사상적 연관성의 실제를 순(舜)임금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는 단군신화의 요점을 천지를 아우르는 중(中)사상과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해명하고, 최치원의 풍류도에서 인(仁)을 매개로 유불도 삼교의 이질성을 재창조하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인본주의를 읽어낸다. 신라의 불교는 성(聖)과 속(俗)의 양극성을 일원화하고, 유(有)와 공(空)의 대립을 원융한다고 본다. 조선 성리학에서 양극의 통합양상을 살펴보면, 퇴계의 경우 태극이 마음의 '인극(人極)'으로 전환됨으로써 자아의 인격과 생명의 주체성으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율곡의 이기지묘(理氣之妙)와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모두 양극성을 지양한 인도주의로서 한국사상은 상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 원형적 사고가 그 시대적 특수성 속에서도 보편성을 지니며 관통해 온 것으로 본다. 그 대미가 "정역"이다. "정역"의 새로운 괘도가 지향하는 조양율음(調陽律陰)의 가치, 지인(至人) 및 황극(皇極)사상을 통해 드러나는 성숙한 인도주의가 그것이다. 한국사상의 인도주의는 "정역"에 이르러 확연하게 그 정체(正體)를 드러내며, 이는 역(逆)으로 한국사상사 전체를 조명할 수 있는 키워드로 기능한다. 도원의 사상전반을 꿰뚫고 있는 핵심정신은 바로 "정역"의 중심축인 '생명 평화의 성숙한 인도주의'와 '조양율음'의 원리로서 "정역"은 한국사상의 결정(結晶)이라 할 수 있다.

연천 홍석주의 예술론(藝術論)에 대한 일고찰 - 정약용(丁若鏞)과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 (A study about art theory of Yeoncheon Hong Seok-joo - Focused on difference with Jeong Yak-yong丁若鏞)

  • 윤종일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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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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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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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연천 홍석주(淵泉 洪奭周: 1774-1842)는 정조의 문체반정 정책에 충실한 수행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1794년 이래 초계문신으로 정조를 가까이 대하면서 그 영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조 사후(1800) 이래 비교적 순탄한 사환기(仕宦期, 1795-1836)를 가지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관을 정립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홍석주는 성리학적 문학론의 핵심개념인 '도본문말(道本文末)' 사상에 바탕을 둔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이론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문(文)과 시(詩)의 기능을 명교(明敎)와 감인(感人)으로 구분한다. 문의 방면으로는 교훈적 대사회적인 기능을, 시의 방면에서는 성정과 천기를 중시하는 감성적 이해에 주목하였다. 홍석주는 세교설(世敎說)에 입각하여 도덕적 감발과 그를 통한 사회적 교화를 예술 창작의 핵심에 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작품의 중요 요소로 언급되고 있는 '흥관군원(興觀群怨)'이나 '여항구요(閭巷謳謠)'와 같은 표현은 예술행위에 있어서의 객관적 대상의 실재를 중시하고 그 실상과 부합되는 묘사를 요구하는 태도에 연결되는데 이러한 표현방식은 마치 회화에 있어서 그가 풍속화적(風俗畵的)인 특성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미망으로도 추정된다. 반면 정약용은 성리학적 문이재도론의 입장에서 주희의 '시경론'을 비판하는 데로 나아간 것이 특징이다. 그는 "시경"의 시편과 일반시의 정치사회적 기능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주희의 시에 관한 담론을 자신의 견해에 의하여 재해석한다. 작자(作者)가 정치적, 사회적 비판을 행한 것이 국풍의 시라는 것이다. 정약용의 국풍론은 사회정치적 맥락 속에서 사대부 계층의 실천적 역할을 강조하는 정약용의 사상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정비사업을 통해 본 부여 정림사지 문화재 조경의 특성 (A Characteristics of Cultural Heritage Landscaping of Jeongnimsa Temple Site in Buyeo from Perspective of Maintenance Project)

  • 김미진;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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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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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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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정림사지 정비사업은 사찰을 구성하는 건물의 원형복원을 목표로 하였으나 점차 사역의 경관을 조성하는 조경 정비로 이행되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은 정림사지 문화재 조경의 특성을 정리하였다. 첫째, 문화재 조경은 문화재보호법상 지정된 문화재와 주변에 지정된 문화재 보호구역을 공간적 범위로 하여 경관을 조성, 유지, 관리하는 조경 행위로서 유구 보호 및 정비, 기능별 공간 배치와 동선계획, 문화재 보호를 위한 구조물 설치, 방문자 편의를 위한 시설물 도입, 식생경관 조성을 포함하는 작업이다. 둘째, 정림사지 문화재 경관은 일제의 문화재 지정과 발굴조사로 사찰명이 밝혀진 '고적조사사업', 광복 이후 '백제탑공원 조성', 사적으로 지정된 '백제문화권 개발사업', 고증의 어려움으로 전각의 복원 대신 공원과 박물관 건립으로 이행된 '백제문화권 특정지역 종합개발사업', 백제 창건 당시 가람 배치를 회복하고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정림사지 복원사업'으로 전개되었다. 셋째, 부여신궁(扶餘神宮) 외원(外苑)과 연계된 기념공원 조성, 일제강점기의 시가지계획 실현, 발굴 유구와 사역의 보호환경 조성, 가람 배치의 원형복원, 문화재의 진정성 회복과 활용이라는 정림사지 경관 변화의 배경을 확인하였다. 넷째, 정림사지 경관은 문화재 지정대상과 범위, 토지이용, 동선·포장, 유구정비 수법, 구조물, 시설물, 식생으로 결정되는데 이들의 정비 양상을 고찰한 결과, 문화재 영역의 시각적 차별화로 위계성 부여, 문화재 지정 범위 확장을 고려한 과정적 경관 조성, 가역성을 고려한 유구 정비로 진정성 확보, 역사문화경관에 어울리는 식생경관 조성, 오픈스페이스 제공으로 문화유산 향유가치 증진이라는 정림사지 문화재 조경의 특성을 도출하였다.

국내 문화원형 특징을 기반으로 한 문화 기획 연구: 제주 설화 '설문대 할망과 오백장군'을 중심으로 (A Study on Cultural Planning Based on the Characteristics of Domestic Cultural Archetypes: Focusing on the Jeju Folktale 'Seolmundae Halmang and Obaek General')

  • 이지훈
    •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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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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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9-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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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제주지역 문화원형인 '설문대 할망과 오백장군' 전설을 고찰하고, 그 내용의 특징을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분석된 문화원형을 기반으로 게임, 애니메이션 등의 문화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타당성을 분석한 후 이를 바탕으로 문화 기획사에게 문화원형을 기반으로 한 문화기획 접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의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문화원형 중 제주도 전설을 대표하는 '설문대 할망과 오백장군'은 많은 역사 연구가 및 채록가를 중심으로 정리되고 있지만, 정확한 전설의 시점과 어떻게 발생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립이 없다. 따라서 문화기획사들은 문화원형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기획 및 개발 시 역사적 고증과 지역민들의 의견을 조사하여 일치된 이야기 관점을 파악한 후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문화원형 내용이 역사가 및 채록가에 의해서 조금 다르게 정리되고 있지만 이야기가 주고자 하는 주된 내용 및 특성들은 유사한 형태를 띠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문화기획사들은 문화원형을 할 때 비록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사람에 의해 다르게 쓰였다 할지라도 이야기의 관점과 특성을 찾아내는 것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셋째, 문화원형을 바탕으로 게임 기획 시 게임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요소와 재미 요소 등 주 요소들을 찾아내어 제시되어야 한다. 특히 게임은 재미와 룰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문화원형 이야기에서 이 부분이 도출되지 않거나 만들 수 없다면 문화원형을 게임으로 변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존재한다. 따라서 문화기획사들은 문화원형 전체 이야기 중 핵심 혹은 비핵심이더라도 이야기 표현과 재미부분을 고려하여 게임 기획의도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원형인 '설문대 할망과 오백장군'을 애니메이션 콘텐츠로 기획 시에도 제시되었지만 스토리, 캐릭터, 매체, 주시청자 등을 고려하여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문화기획사들은 문화원형에서 각색할 수 있는 스토리, 대표 캐릭터 및 보조캐릭터, 주시청자 등의 요소들을 최대한 도출해 낼 수 있어야 하며 간단한 쇼케이스 정도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주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도 콘텐츠 완성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