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경성제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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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정원 특성과 시행과정 고찰 (A Study on Keijo Imperial University's Landscaping Characteristics and Construction Process in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 김해경;유주은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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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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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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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경성제국대학 정원공사의 시행과정을 통한 일제강점기에 진행된 조경공사의 특성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했다. 첫째,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정원공사는 회계법에 의해서 진행되었으며, 정원 설계도면 내역서 착공 및 준공 서류 공사대금 지급서류 등이 작성되었다. 둘째, 경성제국대학 정원공사에 참여한 청부업체는 모두 일본 업체이며, 5개 업체가 견적서를 제출한 후 최저낙찰제에 의한 수의계약으로 진행되었다. 셋째, 경성제국대학 정원은 사분원과 선형이며, 화단 경계는 측구로 활용되어 배수시설과 연계되었다. 넷째, 조경 수목은 설계도에 상세하게 명시되지 않았지만, 내역서를 통해서 수종을 알 수 있다. 수목은 지역적 특성으로 조선 자생종이 다수 도입되었으며, 적송은 당시에도 규격이 클 경우 고가였다. 이와 같이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조경공사에 사용된 주재료와 기법을 실증적으로 밝힌 것에 의의가 있다.

생약연구소의 인삼연구와 약도개성 (Ginseng Research in Natural Products Research Institute (NPRI) and the Pharmaceutical Industry Complex in Gaesong)

  • 박주영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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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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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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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경성제국대학의 부속기관인 생약연구소는 현재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천연물 과학연구소의 전신으로, 일제강점기 인삼연구를 중점적으로 수행하였던 종합연구기관이었다. 생약연구소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약리학 제2강좌의 교수 스기하라 노리유키의 주도로 설립되게 되는데, 스기하라는 약리학 제2강좌가 설치되었던 1926년부터 고려인삼 및 한약에 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진행하였다. 약리학 제2강좌에는 의학 및 약물학 전공인 스기하라 외에도 조교수로 약학을 전공한 카쿠 텐민, 강사로 농학 및 임학을 전공한 이시도야 츠토무가 있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1939년 생약연구소 설립 이전까지 약 36명의 연구자가 활동하였다. 이 중에서는 약 14명의 조선인 연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경성의전, 경성치전, 경성약전 등 전문학교 출신들로 기본적인 의약학 지식을 갖추고 한의학, 본초학 등 독자적인 의약체계를 활용하는 조선의 한약재 연구에 임하였다. 1927년부터 민병기, 김하식 등이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30년 이후 조선인 연구자는 증가하였다. 약리학 제2강좌는 조선의 약용식물 조사 및 한약재에 대한 약리학적 작용, 성분분석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였으며, 또한 경성의전, 경성치전, 경성마약류중독자치료소, 지방도립의원 등의 기관들과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1935년, 국내 최대의 인삼 산지인 개성에서는 "약도개성"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는 전시용 약품의 연구 및 양산화, 인삼 산업개편을 통한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민간단체, 개성부, 관동군, 경성제국대학 등이 참여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1936년에 경기도립 약용식물연구소, 1938년에 경성제국대학 부속 약초원 및 병참 제약공장이 설치되었으며, 1939년, 약용식물연구소와 약초원이 결합하여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스기하라는 생약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생약연구소에서는 인삼에 관한 약리학적 연구에서 더욱 나아가, 선려삼 등 인삼을 이용한 제품개발 및 판매, 그리고 인삼재배 연구가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1941년 제주도시험장을 설립하여, 제주도산 약재를 사용한 구충제 판시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1945년 일제의 항복과 광복으로 스기하라를 포함한 일본인 연구자들은 급히 귀국하였다. 이후 생약연구소는 서울대학교에 인계되어,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출신 오진섭을 소장으로 우린근, 석주명 등의 학자들이 활동하며 한국 과학계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한국 대학 및 전문학교 도서관 현황 연구 (A Study on the University and College Libraries Under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 정해성;여지숙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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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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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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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이 연구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대학과 전문학교를 대상으로 이 대학과 전문학교에 있었던 도서관의 현황에 대해서 조사하였다. 부속기관으로서의 도서관은 경성제국대학도서관과 보성전문학교도서관이며, 나머지 도서관은 계 또는 과 단위의 부서에서 도서관을 운영하였다. 독립된 건물을 사용한 도서관은 경성고등상업학교 도서관과 보성전문학교도서관, 숭실전문학교 도서관이었고 나머지 대학 및 전문학교 도서관은 공용건물을 사용하였다. 직원수는 경성제국대학부속도서관이 12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그 외의 도서관은 1명에서 4명 사이의 직원으로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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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경성 연예관의 일본공연단 연구 - 극장, 퍼포먼스, 나카라이 도수이(半井桃水) (A Study of Japanese Performers in 1915' KEIJO ENGEIKAN : Theater, Performance, and Nakalai ToSui)

  • 홍선영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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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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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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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20세기 초 '제국'일본의 지(知)를 축적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제국대학, 도서관, 박물관 등이 있었다면, 식민지 문화의 영유(領有)를 위해서는 극장이 설립되었다. 극장에서는 연극단과 흥행단, 활동사진 등 다양한 장르의 흥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박람회가 가지는 다양한 성격 가운데 '박람회는 구경거리', 즉 일상적이지 않은 이벤트이면서 '시정(始政)5년 기념'이라는 국가제전과 융합되었다. 1915년 경성 최장기 흥행은 일본 예기들에 의한 무용 공연이었으며 그들의 노래[패(唄)]는 지배의 정통성을 전한다. 본고는 극장이라는 '문화' 전파의 공간에서 펼쳐진 퍼포먼스에 주목함으로써 그들이 담당한 '제국'의 문화적 파장을 조명하고, 이러한 문화 접경지대에 나타나는 히에라르키의 긴장관계를 주목하였다. 특히 1915년 연예관 공연은 경성의 일본인 연극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첫째는 연예관이라는 대형 공연장의 출연, 둘째, 50 여 일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공연이 이루어졌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또 시기적으로 뒤를 이어 1915년 11월 예술좌의 경성공연 등 거물급 극단의 출연 등을 들 수 있다. 이상, 본고에서 검토한 1915년 경성 연예관 공연의 예술단, 공연장르의 문제, 관객구성의 문제 등을 살펴보고 흥행성과 오락성을 담보하면서 문화지배를 통한 오락과 통치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재조선 일본인의 문화역량을 결집시킨 '경성협찬회'라는 조직적 운영이 동반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결국 1915년 경성 연예관 공연은 예술장르 간의 긴장관계, 공연주체 간 경합관계, 문화권력의 문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역사속 과학인물 - 적리병균 세계 최초 개발한 세균학자 '일본 시가 키요시'

  • 박성래
    • 과학과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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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4호통권3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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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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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 1897년 적리의 병균을 세계 최초로 발견해 명성을 떨친 일본의 세균학자 시가 키요시는 1920년부터 11여년간 한국에 근무하면서 조선총독부 의원장을 거쳐 경성제국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고향인 센다이시의 한 공원의 흉상에 새겨진 이력 소개문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의료사에도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896년 동경대를 졸업한 다음해 적리균을 발견해 28세때 세계적인 학자로 발돋움한 시가 키요시의 생애를 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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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학 논문의 계량학적 방법을 통한 연구 경향 비교 분석 - 의학전문학교 학술지 2종을 중심으로 - (A Comparative Analysis of Research Trends in Korean Modern Medicine: Focusing on Two Journals of Medical School)

  • 서미진;이지수
    • 한국비블리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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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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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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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는 한국 근대의학을 대표하는 의학교육기관에서 발행된 논문을 계량학적으로 분석하여 공통 및 학술지별 연구 주제를 파악하고 기관에 따른 저자 특성, 연구 경향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발행한 학술지 2종에 수록된 연구 논문 총 682건을 대상으로 저자 분석, 빈도 분석, 주제 분석을 수행하였다. 연구 결과, 경성의전 기요에 참여한 저자의 소속은 학교 및 병원 등 다양한 기관이 조사되었으며, 기초의학 전공과 임상의학 전공이 비슷한 비율을 차지하였다. 경성제대 의학부 기요는 학교 소속 저자만이 참여하였으며, 기초의학 전공은 96.33%임에 비해 임상의학 전공은 3.36%로 현저히 적었다. MeSH on Demand를 활용하여 논문 제목에서 추출한 MeSH 용어를 대상으로 동시출현 네트워크 분석을 실시한 결과, 두 학술지에서 공통으로 등장한 중심 주제어는 'erythrocytes'로 여러 장기 및 질병에 따른 적혈구 상태를 분석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빈도 분석 결과, 두 학술지에서 공통으로 혈액 및 혈구에 초점을 맞춘 연구와 당시 유행했던 질병인 빈혈과 결핵에 대한 연구가 등장하였다. 각 학술지의 주요 연구 주제를 비교한 결과, 경성의전 기요는 염증 질환에 대한 연구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병리학적 연구가 다수 확인되었으며, 경성제대 의학부 기요는 동물을 대상으로 한 해부학적 연구와 의약품에 대한 약리학적 연구가 주로 진행되었다. 본 연구를 통하여 설립 목표가 다른 두 의학전문학교에서 진행된 연구 주제와 주요 키워드를 파악하고, 학술지에 따른 연구 영역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1880-1945 년간의 한국 생물교육의 역사 (History of Biology Education in Korea During the Periord of 1880-1945)

  • 김훈수
    • Animal Systematics, Evolution and D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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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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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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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 1. 시대 구분을 크게 개항 이후 갑오경장 이전(1876-1894), 갑오경장 내지 한일합방 이전(1894-1910), 일제식민지시대(1910-1945)로 하여, 시대에 따른 교육관련 법령 및 시행령의 변천과 각급 교육기관의 증설 및 학생수의 증가 상태를 보았다. 2. 갑오경장이전에는 뚜렷한 교육관계 법령이 없었다. 을사조약 후인 1906년에 관립한성사범학교교원임시양성과 규칙, 사범학교령, 고등학교령, 보통학교령, 농상공부소관농림학교규칙이, 이어서 고등여학교령(1908), 사립학교령(1908), 실업학교령(1909)이 공포되었다. 1910-1945년간에는 1911년에 조선교육령이 공포된 후 제2차(1922).제3차(1938).제4차(1943) 교육령이 제정되었다. 일제는 보다 휴율적인 식미지 수탈을 위한 "황국신민화교육"을 교육령의 개정으로 가속햇다. 3. 일제는 각종 교육령에 따라 초등교육기관과 실업교육기관은 그런대로 확장해왔었으나, 고등보통교육(중등교육)과 전문.대학 교육기관의 확장을 외면하고, 한국인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억제하였다. 예컨대 초등교육기관(보통학교$\longrightarrow$소학교$\longrightarrow$국민학교)의 경우 1912년에 330교(한국인 총학생수:42,602명)에서 1941년에 3,118교(공.사립)(한국인 총학생수:약 156만명)로 되었고, 1912-1945년간에 약 230만명의 한국인 졸업생이 나왔다고 추산된다. 초등교원 양성기관(주로 사범학교)에는 변천이 많았는데 1941년까지 한국인 약 10,100명 일본인 약 5.300명의 졸업생을 낸 것을 추산된다. 4. 관립 전문학교의 경우, 1922년에 5교(총학생수:한국인 523명, 일본인 433명). 1941년에 7교(한국인 617명, 일본인 1,327명)였고, 생물학과 가장 관계가 깊은 수원고등농림학교의 한국인 졸업생이 1906-1945년간에 총 847명이었다. 공사립 의학전문학교 및 경성제대 의학부 그리고 경성치의전, 경성약전 등 의약 관계 전문.대학의 1902-1945년간 졸업생수는 총 약 3,580명으로 추산된다. 5. 생물학 관계 교과목에 관해서, 초등학교에서는 이과, 중등 및 사범교육기관에서는 이과 또는 박물, 농업.의학 등의 고등교육기관에서는 식물학.동물학.유전학 기타 생물학과 관계가 깊은 전공 과목이 들어있었다. 6. 생물학 관계 교과용 도서에 관해서는 각 시대의 각급학교의 것을 수집하여 검토하였다. 7. 중등교육기관의 생물학관계 교원 교수의 수급의 관해서, 관공립 중등 학교에서는 거의 대부분 일본에서 교육 받은 일본인을 채요했고, 사립학교에서는 주로 국내에 있던 관사립 전문학교의 한국인 졸업자와 소수의 일본유학자 그리고 일본인을 채용하였다. 한국인 중등교원 중에는 농업전문학교 특히 수원고등농림학교 출신이 많았다. 8. 일정시에 한국내의 관공립 전문학교와 대학의 교수는 거의 모두 일본인이었다. 숭실전문학교와 이화여전에는 일본의 동북제국대학 생물학과 출신자가 있었다. 이 2교수를 제외하고도, 일본의 제국대학 식물학과.동물학과 또는 생물학괄르 나온 4명(중등학교 또는 연구기관 재직), 그리고 제국대 농학과 출신 2명도 중등학교 박물을 담당했다. 이상 각급 학교 졸업생들은 각기 주어진 정도대로 생물학 관련 지식을 수용하고 이용하고 보급하는데 공헌했고, 이것은 8.15 광복후에 이어졌다. 특히 상기 제국대학 출신자 중 5명은 1945년 8.15 광복 후 일찍부터 우리나라의 대학교에서 생물학분야 교육과 연구에 주도적 구실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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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고등수학 도입과 교과과정 연구 (Korean tertiary mathematics and curriculum in early 20th century)

  • 이상구;함윤미
    • 한국수학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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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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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7-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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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초등(elementary), 중등(secondary)교육에 이어지는 대학 및 직업 교육을 총칭하여 고등(tertiary) 교육이라고 한다. 본 연구는 한국의 근대 고등수학 도입과정과 정규대학 교과과정으로의 정착 과정을 확인한다. 우리의 고등 수학교육은 산학자의 전통수학, 육영공원, 원산학사, 1895년 교육과정에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도입한 성균관, (교동)소학교, (교동)한성사범학교, (한성)중학교, 민족 사립학교, 종교학교, 배재학당 및 이화학당의 대학부, 숭실대학, 사범학교, 관 공립전문학교, 사립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 경성대학, 국립서울대, 김일성대를 시작으로 해방과 함께 전국의 주요대학을 통하여 전수, 발전 확산되며 오늘에 이르렀다. 1900년 근대 수학교과서의 발간을 시작으로 1909년까지 한글로 쓰인 근대 수학책이 봇물 터지듯 발간되었다. 그러나 오랜 수학적 연구의 전통과 1880년대에 시작된 고등교육에서의 서구식개혁노력은 1905년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간섭부터 시작하여 1910년 한일합방을 계기로, 특히 중등교육이상의 수학교육과 수학적 연구의 전통은 천천히 붕괴되었다. 최소한 1910-1945년 사이에는 한반도에 중등교육이나 교양수학의 수준을 넘어서는 진정한 고등 수학교육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을 때 한국은 모든 전문 직종에서 심각한 인력난을 겪었다. 특히 수학과가 단 하나도 없어 수학분야 이학사가 10여 명도 못되는 수학분야의 교수인력의 부족은 심각하였다. 단 한명의 교수도 연구경험을 가지지 못한 수학분야의 상황은 한국이 21세기 현대수학의 주류에 진입하는 과정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면서 신설된 다양한 국 공립 및 사립학교들에서 대학수학이 교수되었고 교육과정이 국제기준으로 정착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에 근대 고등수학이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도입되었으며, 어떤 교재로 누구에 의하여 지도 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정규 대학과정의 교육과정으로 정착되었는지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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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 - 한국산(韓國産) 박쥐류(類)의 흡충류(吸蟲類)

  • 이재구;김현철
    • 대한수의사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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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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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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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지구상에 서식하고 있는 포유강(Class: Mammalia), 박쥐목(Order: Chiroptera)에 속하는 박쥐류는 1,00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포유류 중에서 1/4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2/3는 곤충류를 포식하는 식충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 서식하고 있는 박쥐류는 관박쥐과(Family:Rhinolophidae) 2종, 애기박쥐과(Family: Vespertilionidae) 28종, 큰귀박쥐과(Family: Molossidae) 1종으로서 총 31종이며, 모두 식충성 동물이다. 흡충류라고 하는 것은 편형동물문에 속하는 기생성 동물의 한 군으로서, 항온동물의 장이나 그 밖에 조직에 기생하는 것은 모두 하나 또는 두개 이상의 중간숙주를 필요로 하는 이생 흡충이다. 제1중간숙주는 고둥이지만 제2중간숙주는 여러 가지 변온동물로서 그 대부분은 생활사에 있어서 수서 생활을 하는 시기가 있는 것에 한정되지만 이는 제1중간숙주의 체내에서 형성된 꼬리유충이라고 하는 흡충류의 유생이 보통 물 속을 헤엄쳐 다니다가 제2중간숙주에 침입하게 된다. 박쥐류는 여러 가지 땅강아지나 개똥벌레를 포식하기 때문에 이들 유생이 물 속에서 흡충류의 피낭유충에 감염되었을 경우 박쥐류가 흡충류의 종숙주로서 적합하면 그 체내에서 피낭유충이 장에서 탈랑하여 드디어 성충으로 된다. 만일, 감염된 수서 곤충의 유생이 우화되면 그 유생 시대에 감염된 피낭유충이 그 숙주의 변태와는 상관없이 그 기생이 이어져 적당한 종숙주에게 섭취되기를 기다리게 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박쥐류에 기생하는 흡충류에 관한 조사 연구는 일찌기 도쿄문리과 대학 동물학 연구실의 Ogata(1938)에 의하여 이루어진 이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Park(1939a,b)과 후쿠오까대학 의학부의 Kifune et al.(1983, 1997)이 있을 뿐 우리나라 학자에 의한 연구 보고는 접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럼으로, 우리나라 학자도 이에 관한 더욱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할 것으로 생각하는 바 이에 지금까지 보고된 자료를 종합, 검토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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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박영철씨기증서화류전관목록(故朴榮喆氏寄贈書畵類展觀目錄)』을 통해 본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의 수장활동 (The Life and Art Collection Activities of Pro-Japanese Collaborator Park Yeong-cheol During Japanese Occupation)

  • 김상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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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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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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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근대 미술시장과 유통에 대한 연구는 명품대가 및 그 유파, 영향 등을 추적하고 분석하던 기존 미술사의 연구경향과 달리 미술과 사회, 미술품 유통과 소비 등 새로운 연구방식과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 근대의 주요 수장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수장가의 하나로 꼽히는 박영철(1879~1939)의 생애와 수장활동을 살펴보았다. 박영철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일본군의 고위 장교, 전역 이후에는 강원도 지사, 함경북도 지사 등을 지냈고, 관직 은퇴 이후에는 굴지의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일제의 침략정책에 호응하고 앞장 선 철저한 친일파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로서의 박영철은 가장 정확한 "연암집"을 간행하였고, 사후에 수장품을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여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기초를 마련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의 서화수장은 한시와 서화 등을 좋아하고 즐겼던 그의 성정에 의한 바 크지만 동양의 비서구적 원천으로서 전통미술에서 고유의 특성을 찾으려 한 일본의 시책에 적극 협조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