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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 신앙에 대한 한·중 제도권의 대응 - 『옥추경(玉樞經)』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

  • 박용철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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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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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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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本论文是关于"九天应元雷声普化天尊"的信仰, 是亚洲特别是在韩国和中国所具有的地位, 是怎样演变过来的, 同时还要考察它所蕴含的意义。即是在不能清楚的理解对"九天应元雷声普化天尊"的基本信仰的状态下, 关于对大巡真理会的传统信仰"九天应元雷声普化天尊" 进行讨论时, 稍有不慎便有可能出现非合理性的矛盾理论。所以作为关于中国和韩国的『玉枢经』的混乱和误会的再声明, 历史的长流所带来的对『玉枢经』的误导, 通过容纳和批判一起作为对关于大巡真理会的"九天应元雷声普化天尊"信仰的神学的基础解说。中国元朝的时候道教是非常受敬重的, 然而在道教和佛教辩论时, 道教惨败之后(1256年, 1281年), 在道教的衰退期时, 因道人们的意愿, "九天应元雷声普化天尊"显现, 并且记录了天尊所说的话的『玉枢经』, 在明世宗(在位:1521-1566年)以后开始遭到士大夫和外面的百姓们的抨击。理由是明世宗热衷于研制"不死药", 而在政治上荒废朝政。还有从严蒿开始受到政治镇压的王世贞第一次对『玉枢经』作出了学者性的误导解说, 这使给受到明朝文化影响的朝鲜的士大夫, 传达了对『玉枢经』误导, 这也是成为传播到朝鲜重要证据。从朝鲜建国开始, 虽然当时儒教作为国家的统治理念, 但是作为消除国家灾难的神位, 在朝鲜初期时得到了很多优待的事实在许多文献里都有体现。这样一本记录了受到优待的"雷声普化天尊"教导的『玉枢经』, 因英祖的儿子思悼世子读过这本书之后便开始生病(1752-1762年), 作为世子不只是在政治上没有力量, 反而父亲英祖先被杀害。这样类似的事件使『玉枢经』从左序那里得出被驳倒的结果, 再进一步, 『玉枢经』在政治方面和学文方面同时受到世俗抨击。介于这样相同的中韩脉络对『玉枢经』的认识, "九天应元雷声普化天尊"作为道教的最高神位而从主流信仰里被排挤出来。和这一样历史的"九天应元雷声普化天尊", 关于世俗的隐退推移, 作为大巡真理会的最高神位重新登场的"九天应元雷声普化天尊"信仰是关系到大巡真理会的宗统并且是具有时代意义的谨慎的类比推论。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의고악부(擬古樂府) 창작에 미친 명대(明代) 문학론(文學論)의 영향 - 「한요가(漢鐃歌)」 18곡을 중심으로 - (The influence of the literary theory of the Ming Dynasty in Sangchon(象村) Shin-Heum(申欽)'s Uigoakbu(擬古樂府) - Focused on 「Han-Yoga (漢鐃歌)」 18 songs)

  • 정용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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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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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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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의고악부(擬古樂府)가 조선 중기 명대(明代) 복고주의(復古主義) 문학론 수용의 맥락 하에서 창작되었음을 확인하고, "한요가" 18곡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전후칠자(前後七子)가 주창한 의고적 방법론이 구체적인 작품 구현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던 정황을 살펴보았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에서 악부는 역대 여러 문인들에 의해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지어져 왔다. 그중에서도 신흠은 여타 인물과 비교해볼 때 유례없이 많은 수의 의고악부를 창작하였으며, 이전까지 이루어진 바 없었던 "한요가" 18곡 전체에 대한 의작까지 수행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정력적인 의작 활동은 무엇보다도 조선 중기에 소개된 명대 문예 사조에 대한 깊은 관심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는 명대 전후칠자가 제기한 복고적 문학론에 공감을 표하며, 모의(模擬)의 방법을 통해 질박하고 진솔한 감정을 담지하고 있던 옛 한위(漢魏) 시기의 문학을 자신의 시대에 재현해 내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표현 뿐 아니라 내용 및 주제의식에 이르기까지 전후칠자의 의고악부를 참조 활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구성해 냈다. 이와 같은 면모는 그간 충분한 관심 속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신흠 의고악부의 창작 동기와 존재 양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근거가 됨은 물론, 전후칠자의 문학적 지향과 그들의 '모의'라는 방법론이 당대 조선 문인에게 유의미한 대상으로 인식 수용되고 있던 정황을 확인케 하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