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강신용, 장윤환(2004). 한국근대 도시공원사. 서울: 대왕사.
|
2 |
곤도 시로스케 저. 이언숙 역(2010). 대한민국 황실비사: 창덕궁에서 15년간 순종황제의 측근으로 이란 어느 일본 관리의 회고록. 서울: 이마고.
|
3 |
권보드래(2008). 1910년대, 풍문의 시대를 읽다.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
4 |
김수아(2011). 조선시대 와유문화의 전개와 전통조경공간의 조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29(2): 39-51.
|
5 |
김영희(2008). 기생엽서 속의 한국 근대 춤: 기생 100년 엽서 속의 기생읽기.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
6 |
김현숙(2008). 창경원의 밤 벚꽃놀이와 야앵. 한국근현대미술사학. 19: 139-162.
|
7 |
노성환(2008). 일본의 하나미와 한국의 화전놀이. 비교민속학. 37: 137-161.
|
8 |
농경과 원예. 2008년 11월호. 유망한 조경수목: 왕벚나무.
|
9 |
문화재관리국(1989). 창경궁: 중건보고서. 서울: 문화재관리국.
|
10 |
박만규(1965). 한국 왕벚나무의 조사 연구사. 한국식물학회지. 8(3): 12-15.
|
11 |
박상진(2001). 궁궐의 우리나무. 서울: 눌와.
|
12 |
별건곤. 1929년 4월 제20호. 지상종람(地上縱覽)조선 각지 꽃 품평회: 요새에 피는 팔도(八道)의 꽃 이야기.
|
13 |
별건곤. 1933년 4월 제65호. 야앵 풍경(夜櫻風景).
|
14 |
송희경(2008). 조선후기 아회도. 서울: 다할미디어.
|
15 |
신명직(2003). 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 서울: 현실문화연구.
|
16 |
안등정(1916). 경성사진화보(일주년;기념호). 경성: 조선사진통신사.
|
17 |
여성(女性). 1936년 4월 창간호. 하이킹 예찬(禮讚).
|
18 |
오창영(1993). 한국동물원 80년사: 창경원 편. 서울: 서울특별시.
|
19 |
이선(2006). 우리와 함께 살아 온 나무와 꽃. 서울: 수류산방중심.
|
20 |
이종묵(2004). 조선시대 와유문화 연구. 진단학보. 98: 81-107.
|
21 |
조선(朝鮮). 1922년 11월호. 櫻を牛耳洞に移植せし洪良浩.
|
22 |
추삼무(萩森茂: 1930). 조선의 도시(朝鮮の都市). 경성: 대륙문화사.
|
23 |
팀 에덴서 저. 박성일 역(2008). 대중문화와 일상, 그리고 민족정체성. 서울: 이후.
|
24 |
한양명(2001). 화전놀이의 축제성과 문화적 의미: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한국민속학회지. 33: 335-358.
|
25 |
황기원(2009). 한국 행락문화의 변천과정.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6 |
삼국사기 백제 진사왕 6년(390년).
|
27 |
삼국사기 백제 진사왕 7년(391년).
|
28 |
삼국사기 백제 무왕 37년(636년).
|
29 |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14년(674년).
|
30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진한편.
|
31 |
삼국유사 제2권 기이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편.
|
32 |
순종실록 부록. 1912년 4월 7일.
|
33 |
경성일보 1933년 4월 27일 기사.
|
34 |
경성일보 1933년 4월 20일 기사.
|
35 |
동아일보 1931년 12월 2일 기사.
|
36 |
동아일보 1939년 4월 18일 기사.
|
37 |
동아일보 1935년 4월 9일 기사.
|
38 |
동아일보 1935년 4월 12일 기사.
|
39 |
동아일보 1936년 4월 29일 기사.
|
40 |
경향신문 1972년 3월 20일 기사.
|
41 |
조선일보 1926년 4월 25일 기사.
|
42 |
조선일보 1929년 4월 15일 기사.
|
43 |
조선일보 1930년 4월 12일 기사.
|
44 |
조선일보 1930년 4월 15일 기사.
|
45 |
조선일보 1934년 4월 23일 기사.
|
46 |
조선일보 1932년 4월 28일 기사.
|
47 |
조선일보 1934년 4월 17일 기사.
|
48 |
조선일보 1934년 4월 23일 기사.
|
49 |
조선일보 1936년 5월 3일 기사.
|
50 |
조선일보 1937년 4월 22일 기사.
|
51 |
조선일보 1939년 4월 19일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