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This article examines the background and meaning of the construction of Josadang Hall in Buseoksa Temple, Yeongju, by Seolsan Cheonhee(1307~1382) in the late 14th century through the characteristics of the hall's mural. Six guardian deities(the Four Heavenly Kings in the center, Indra and Brahma on each side of the kings) are depicted on the southern wall(location of the entrance) of the Josadang, facing the statue of the great monk Uisang(625~702 AD) on the north wall. This mural is the oldest among Korean temple murals and exhibits very unique characteristics. In general, scenes from the scriptures are depicted on the back wall of the central statue. In contrast, the Josadang mural depicts only the guardian deities facing the main statue with no scene description. The appearance of the deities, who seem to protect the main statue of the monk Uisang, and their expressions, as if drawn from relief statues, are not seen in other murals. Nevertheless, it is similar to the stupas of the Seon(Ch. Chan 禪) sect monks established from the late Silla(57 BC~935 AD) through early Goryeo(918~1392 AD), with guardian deities on their surface. The iconography of the deities is a classic form of the late Silla to early Goryeo. The fact that the Josadang was built to commemorate Uisang, who founded the Korean Hwaeom sect(Ch. Huayan sect, 華嚴宗), and that guardians were placed to protect Uisang's statue reveals the concept of worship for the monk who founded the sect. As a result, the reason Cheonhee built the hall can also be understood as an extension of the ideology behind the construction of the stupas of the Seon sect monks. The problem, however, is that Cheonhee is a monk of the Hwaeom sect, and Buseoksa is a representative temple of the Hwaeom sect, not the Seon sect. Therefore, to better understand the background of the hall's construction, this article examined the situation of Goryeo Buddhism in the 14th century as well as the activities of Seolsan Cheonhee. Since Ganhwa Seon(Ch. Kanhua Chan, 看話禪) was dominant in the 14th century, Cheonhee went to study in the Yuan Dynasty(1271~1368 AD) at the age of 58 and was approved by Chinese Ganhwaseon monks before taking the position of Guksa(國師 national monk). However, he was eventually pushed to Buseoksa Temple, where he worked hard to rebuild it. Cheonhee most likely sought to expand the Hwaeom sect, which had been shrinking compared to the Seon sect, by enhancing power with the reconstruction of Buseoksa. The desire that the Hwaeom sect, which was losing its power due to the rise of the Seon sect in the 14th century, attempted to develop it by building Josadang hall, is well revealed by the Josadang murals.
이 글은 설산 천희(雪山 千熙, 1307~1382)가 영주 부석사에 조사당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의미를 조사당 벽화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조사당의 남벽(출입구 위치)에는 북벽에 위치한 의상 대사상을 마주 보며 6구의 신장(사천왕과 그 양 옆으로 제석천과 범천)이 그려져 있다. 이 신장 그림은 우리나라 사찰 벽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매우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사찰 전각의 내벽에는 경전에서 묘사하는 장면들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사당에는 이런 종류의 벽화는 없으며 신장들만 그려져 있다. 이는 유일한 예이며, 승려상과 마주보는 위치에 신장들이 그려진 예도 찾아볼 수 없다. 주인공인 승려(의상대사)를 외호하기 위한 신장의 배치와 부조상(浮彫像)을 그림으로 번안한 듯한 표현상의 특징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그 구성과 표현이 팔각의 탑신 표면에 신장상을 새긴 나말여초 선종의 석조승탑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도상 또한 나말여초기 신장과 유사성을 지닌 고식이다. 이중 동방과 서방천왕의 존명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는데 이 글에서는 나말여초 승탑의 사천왕 배치 순서에 근거하여 이들의 명호를 제시하였다. 한편, 해동 화엄의 초조 의상 대사를 기념하여 조사당을 건립하고 이를 외호하는 신장들을 배치했다는 것은 개산조에 대한 숭배 개념을 드러낸다. 따라서 조사당 건립의 목적 또한 선종 승탑 건립 이념의 연장선에서 찾았다. 문제는 설산 천희가 화엄종 승려이고 부석사는 대표적인 화엄 사찰이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조사당 건립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14세기 고려 불교계의 상황과 창건주 설산 천희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14세기에는 간화선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천희는 58세의 노령에도 원나라에 유학하여 간화선사의 인가를 받아온 뒤 국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결국 부석사로 밀려나 부석사 중창에 힘쓰게 된다. 천희는 아마도 사찰 중창을 통해 부석사의 위상을 높이고 선종에 위축되어 가던 화엄종의 발전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선종의 부상 아래 힘을 잃어가던 화엄종이 그 발전을 모색하는 시도 속에서 조사당을 건립하였고 이러한 염원이 벽화의 특징으로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조사당 벽화의 불교사적인 가치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