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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Destruction and Rebirth: Transformation of Jesus into a Hillbilly of the Graphic Novel, Songy of Paradise

파괴와 부활 사이에서: 만화 『낙원의 쏭이』에 나타나는 예수의 촌뜨기로의 전환

  • 김혜연 (국립순천대학교 영어교육과)
  • Received : 2022.07.26
  • Accepted : 2022.08.13
  • Published : 2022.09.28

Abstract

John Milton's 17th century epic poem, Paradise Regained, is deconstructed or re-birthed in Panter's new graphic novel, Songy of Paradise in 2017, and the most notable change comes from the main character, Jesus. In the original text, Jesus as an "anointed universal King" achieves his greatness in the progress of lonely journey, and is declared as Son of God. Therefore, Panter's description of Songy as hillbilly is quite stunning. Panter's Punk vagabond, however, shares common aspects with Milton's Jesus in terms of his stubborn resistance against Satan's temptation. Jesus and Songy succeeds in the battle against Satan leading their talk into the "failure of a conversation." This study examines how ironically this punk art embraces the original character of the grand epic while destroying it utterly.

본 연구에서는 밀턴의 예수가 개리 팬터의 『낙원의 쏭이』의 쏭이로 재현되면서 나타나는 원전에 대한 전복성과 유사성을 논한다. 팬터는 영문학의 청교도 서사시인 『복낙원』을 현대 펑크 만화로 재현하면서, 밀턴의 예수를 '힐빌리', 즉 촌뜨기 쏭이로 그린다. 원작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 그려지는 예수가 펑크식 촌뜨기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원작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도전이자 해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는 방식에 있어서 쏭이는 원작의 예수와 비슷한 방식을 취한다. 즉 법률적 언어의 의미를 파괴하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상징의 언어를 취하면서 결국 '대화의 실패'로 귀결되는 방식을 통해 쏭이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사탄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낸다. 본 연구에서는 이처럼 예수적 담론 대한 해체와 예수적 저항 방식의 수용이라는 이중적 특징을 보여주는 쏭이의 재현 방식을 분석한다.

Keywords

I. 서론

2017년 개리 팬터(Gary Panter)는 존 밀턴(John Milton)의 『복낙원』(Paradise Regained)을 펑크식으로 만화화한 『낙원의 쏭이』(Songy of Paradise)를 출판한다. 처음 이 만화가 출판되었을 때 많은 밀턴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다양한 서사적, 극적 요소를 담고 있는 『실낙원』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청교도 신학 논쟁을 중심으로 예수와 사탄과의 수사적 대화로만 이루어져 있는 『복낙원』이 어떻게 현대 대표적 하위문화인 펑크 만화로 재탄생 되었는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지점은 밀턴 작품의 주인공, 예수의 펑크식 묘사에 있었다. 17세기를 대표하는 밀턴의 『복낙원』에서 예수는 전형적인 인류의 구원자이자 영웅이다. 신기독교 중심(Neo-Christian) 밀턴 학자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이며, 신역사주의(New Historicism)와 신맑시즘(New Marxism) 밀턴 학자들에게 예수는 인간적인 영웅이다. 밀턴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든 인간적인 영웅으로 해석하든 밀턴의 예수는 원작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우주적 왕”(anointed universal King)으로, 하나님에 의해 “완벽한 인간, 그로 인해 나의 아들”(perfect Man, by merit call’d my Son”(PR 1. 166-67)[1]로 선포 받은 위대하고 존엄한 존재로 묘사된다.

이러한 예수가 팬터의 만화에서 촌뜨기(Hibilly)인 쏭이로 묘사되고 있음은 매우 흥미롭다. 팬터는 본 연구자와의 인터뷰에서 “힐빌리”가 미국 현지에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사회와 단절되어 살아가고 종종 불법으로 주조하며, 정부쪽 사람들과 다툼을 벌이고, 총질하며 친족과 불화가 있는”(uneducated people, living isolated, often making their own alcohol, which was illegal, fighting the government city people, having gun fights and feuds between related families)[2]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팬터가 그리는 쏭이의 모습과 대사는 전형적인 ‘힐빌리’ 그 자체다. 밀턴의 예수가 깊은 내적 성찰을 하는 인간성이 초월된 성인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수의 힐빌리로의 전환은 당연히 매우 파격적이다.

그런데 본 연구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밀턴의 예수가 상징하는 신학 담론과 쏭이가 상징하는 펑크문화 사이의 충돌 지점만은 아니다. 팬터의 쏭이는 분명 밀턴 작품이 대변하는 신학 담론의 엄숙함에 펑크적 방식의 저항과 파괴를 가하고 있지만, 밀턴의 예수가 사탄에 저항하던 유사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즉 쏭이와 예수는 모두 사탄과의 말을 통해 사탄으로 대변되는 기존 질서에 저항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맞이하는데, 사탄에 저항하는 청교도 신학의 수사적 담론이 주류 문화에 대한 펑크식 저항으로 재탄생하면서 두 작품은 유사한 방식의 저항 서사를 완성한다. 예수와 쏭이는 모두 ‘대화의 실패’를 통해 기존 질서에 대한 전복적 행위를 시도하고 이를 성공으로 이끈다. 본 연구에서는 쏭이가 어떻게 밀턴의 예수를 파괴하고, 동시에 예수의 저항 방식을 전략적으로 수용하며 새로운 캐릭터로 재현되는지 논하고자 한다.

Ⅱ. 파괴와 부활 사이에서

1. 밀턴에 대한 파괴인가?

“선명한 선”(Ligne Claire [clear line])이 아닌 “낡은 선”(Ratty line) 기법으로 그려진 쏭이의 첫 등장은 밀턴의『복낙원』이 대변하는 청교도 담론에 대한 충분한 도전적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복낙원』에서 세례자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는 예수의 모습은 쏭이의 만화에서 [그림 1]과 같이 그려진다.

그림 1.

요한은 예수를 “얘, 쏭이야”(boy, Songy)라고 하대하듯 부르고, 요한의 스플래시가 거칠게 쏭이의 입으로 분출된다. 밀턴의 작품에서 예수의 머리 위로 하늘이 열려, 비둘기의 모습을 한 성령이 내려오는 경건한 세례의식이 이 만화에서 스플래시로 희화화된다. 종교 의식에서 세례는 “한 존재가 물에 잠기는 행위”(the act of immersing oneself or being immersed in water)를 거행하여, “죄와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어 믿음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고, 새로운 계약을 맺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broke with sin and seductions of the devil, entered a new relationship, through faith, with the triune God and was joined to the people of the new covenant)[3] 매우 성스러운 성찬의식을 상징한다. 쏭이의 첫 등장은 이러한 성스러운 세례의식을 철저히 조롱하고 있으며, 특히 성스러운 존재를 통해 위(하늘)에서 아래(땅)로 하강하는 종교적 움직임과 상징성이, 아래에서 위로 분출하는 스플래시적 행위로 완전히 전복된다. 또한 스플래시 때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쏭이는 “응”(Yea), “아니”(Nay)밖에 대답할 수 없는 무지한 존재로 그려진다.

김혜연은 [그림 2]에 나타나는 것처럼 쏭이의 모습이 “지저분한 수염을 깎지 않고 낡은 옷을 입은 채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같이 그려지며, 특히 마지막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고 하늘의 비행기로(『복낙원』의 천사 대신)부터 구출된 쏭이는 인류를 구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대신 “얼빠진 녀석”(slew foot)으로 명명”되고 있음을 지적한다[4].

그림 2.

쏭이는 분명 밀턴의 작품이 대변하는 종교적 담론을 해체하며 세속적 담론으로 모든 것을 치환시키고자 한 팬터의 펑크적 캐릭터이다. 예수의 존엄성을 파괴시킨 쏭이는 딕 헙디지(Dick Hebdige)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스러운 기호들(아이콘)의 끊임없는 부재”(absence of permanently sacred signifiers(icons)[5]를 추구하던 펑크식 도전의 대변자이다. 팬터는 쏭이가 전혀 예수 같지 않다는 본 연구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쏭이가 예수 같지 않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도덕적으로 그의 단순한 완강함으로 그 유혹에 저항할 수 있다. 이것은 풍자적이지만 동시에 제도권의 규정된 신성함보다는 평범한 정신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You are correct that Songy is not Jesus-like, but he is morally able to resist temptation by his simple stubbornness. This is a satiric point but also in the favor of the common mind over the institutions of declared divinity)[2].

그런데 예수가 비렁뱅이이자 “힐빌리”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은 제도권의 신성함 보다 평범한 정신의 위대성을 보여주고자 했던 팬터의 소박한 의도를 넘어선다. 예수의 쏭이로의 전환은 원전에 대한 파괴와 해체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적극적 시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2. 예수의 부활인가?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사탄에 대응하는 쏭이의 펑크식 저항이 사탄에 저항하는 예수의 수사적 방식과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쏭이와 예수의 영웅성은 모두 위대하고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닌, 사탄의 세 번의 유혹에 움직이지 않는(흔들리지 않는) ‘움직임의 실패’를 통해 구현된다. 예수는 ‘반 움직임’(anti-movement)의 대변자로, 스탠리 피쉬(Stanley Fish)의 지적대로 사탄이 중심과 진리로부터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라면 예수는 진리로부터 단 일 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는 ‘반 움직임’의 대변자이다. 움직임에 관하여 작중 예수와 사탄은 “위험성과 불경함이 움직임과 관련 있다”(danger and impiety are associated with movement)[6]라는 신학 전통에 충실히 따라 묘사된다. 예수의 복낙원 성공은 인간성을 초월한 극단적인 수동성, 즉 반 움직임을 통해 구현되고, 이러한 반 움직임은 예수와 사탄 사이의 대화 실패를 통해 가능해진다. 사막에서 사탄은 고난에 찬 인류를 언급한 이후 40일 동안 굶주린 예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이라면, / 이 단단한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아라; / 그러면 당신과 우리를 이 음식, 비참한 우리가 거의 맛보지 못한 이 음식으로 /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If thou be the Son of God, Command / That out of these hard stones be made thee bread; / So shalt thou save thyself and us relives/ with Food, whereof we wretched seldom taste) (1.342-45).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쓰여 있지 않은가? / 그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으로 /우리의 조상을 만나로 먹이신 바로 그것이다”(Is it not written /...../ man lives not by Bread only, but each Word / Proceeding from the mouth of God, who fed/ Our Fathers here with Manna?)(1.347-56)

여기서 예수는 사탄의 요구에 적절한 답변을 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대화의 소통에 참여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탄에게 음식은 문자 그대로 신체적 배고픔을 해결하는 빵을 의미하지만 예수에게 음식은 영적 구원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나아가 예수는 사탄의 ‘빵’을 문자 그대로 음식이 아니라 “불신”(distrust)(1.354)을 상징하는 단어로 파악한다. 대화의 핵심 단어인 ‘음식’ 과 ‘빵’에 대한 기본 개념이 상반된 상황에서 사탄과 예수의 대화는 무의미한 소통의 실패, 즉 대화의 실패로 귀결된다. 대화의 소통 실패로 귀결시킨 예수의 성공적 전략은 사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수동적 승리를 넘어서 사탄의 질서인 세상적 질서를 적극적으로 파괴시키는 매우 전복적인 효과까지 낳는다. 예수는 여기서 ‘음식’에 대한 개념을 법률적 언어에서 예언자들의 언어인 상징의 언어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법률은..... 의도적으로 문자 그대로 읽힌다. 그리고 법의 집행과 해석은 과거의 환경과 법이 쓰인 정신에 기대하도록 한다..... 문자 그대로 따르는 것 대신 예언은 투영된 질서, 즉 비유적인 방식으로 질서를 인지하거나 반영하는 “그 자체 내의” 행위나 행동에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인지하는 과정과 비유적으로 확장된 텍스트에서 해석가들은 그 의미를 그들만의 창조적인 것으로 동화시키고, 예상할 수 있는 과거로부터 예상할 수 있는 미래로 기호의 중심축을 옮긴다.

Law..... is intended literally, and its enforcement or interpretation requires an anticipation of the past circumstances and spirit in which the law was written...... instead of literal acquiescence prophecy demands a commitment to its projected order—a deed or act “in itself” that mirrors or acknowledges this order in some figurative way.....For in the act of apprehending and figuratively extending a text, the interpreters assimilate its significance to that of their own creation and shift its semiotic center of gravity from anticipated past to anticipated future[7].

기존의 사회적 합의에 의해 단일한 의미만을 생산하는 법률적 언어와 달리 예언의 언어, 즉 상징의 언어는 기존의 의미를 파괴하고 다양한 의미 혹은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상징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으며, 의미를 시작토록 하고”(Symbols do not contain meaning. They begin it.)(95), “안정성을 뒤흔드는 자”(troublers of stability)로 불린다[7]. 예수는 기존에 사회적 합의로 생성된 “음식”과 “빵”의 의미를 파괴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면서 자신의 말을 상징으로 가득한 예언적 텍스트로 전환시킨다. 따라서 대화의 실패는 흔들림 없는 예수를 표방하고, 기존 질서의 파괴와 기존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리를 예언하는 중요한 과정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예수의 대화 실패가 팬터의 펑크 만화에서도 재현된다는 점이다. 특히 사탄과 쏭이의대화의 실패는 기존의 종교적 담론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는 사탄과, 사탄의 종교적 의미를 세속적 의미로 전환시켜 대화를 끊임없는 소통의 부재로 귀결시키는 쏭이의 태도로부터 기인한다.

그림 3.

[그림 3]에 나타나는 것처럼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라는 말에 쏭이는 “이 돌을 비스킷으로 만들어보라고???????” “너는 이 돌과 비스킷 허튼소리로 나를 놀리려 왔느냐?”라고 되묻는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사탄의 요구는 “천상”(heaven)의 수호를 증명하기 위한 (『복낙원』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한) 영적, 종교적 이유에 근거하고 있는데, 쏭이는 사탄의 요구가 자신을 놀리기 위한 것이라는 육적, 세속적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고 사탄의 요구를 “실없는 이야기”, “허튼소리”(twaddle)로 간주한다. 쏭이는 사탄의 종교적 담론을 끊임없이 해체하며 대화의 실패를 이끈다.

이러한 소통의 실패는 세 번째 책에서 밀턴의 작품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사탄은 쏭이에게 인류의 역사를 보여주며 자신을 따르면 그 누구도 갖지 못한 권력을 주겠다고 요구하는데, [그림 4]는 사탄과 쏭이의 대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실패하는지 매우 코믹한 방식으로 이를 보여준다.

그림 4.

사탄과 쏭이의 대화가 같은 말풍선에서 공유되며, 매우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여기서 어떠한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의 천국의 아버지도 그의 창조물의 경의와 무조건적인 순종을 간절히 원하고 요구한다. 내 아빠를 아느냐? 너 또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니 뛰어나기 위해 그의 모습을 따라야 한다. 왕국으로 향하는 열쇠를 구하라!!! 내가 정말 그와 닮았느냐? 뭐라고?” 이 대화에서 사탄에게 ‘아버지’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하늘의 영적 존재이고, 아버지 없이 태어난 쏭이에게 여기서 ‘아버지’는 자신을 낳은 생물학적 아버지를 의미한다. 쏭이는 기존 종교 담론에서의 ‘하늘의 아버지’가 지니는 단일한 의미를 파괴하고 ‘나를 낳고 죽은 아버지’로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한다. 밀턴의 예수와 사탄의 대화에서처럼 이 대화에서 역시 가장 핵심적인 단어인 ‘아버지’의 개념이 상충됨에 따라 이 대화는 “뭐라고?”(what?)로 귀결되며, 소통의 실패로 나아간다. 쏭이 역시 “하늘의 아버지”가 지니는 기존의 법률적 단일 의미를 거부하고 자신의 새로운 의미를 창조, 부여하면서 밀턴의 예수와 마찬가지로 상징과 예언의 질서로 나아간 것이다.

Ⅲ. 나오며

밀턴의 예수와 팬터의 쏭이는 모두 상대방과의 대화에 참여하여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비판하는 방식을 통해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대화와 소통의 실패를 통해 사탄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청교도 문화와 펑크 문화를 대변하는 그들은 모두 기존 질서에서 구축된 단일한 의미를 파괴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 부여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꾀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사탄의 세속적 언어를 종교적 담론으로 치환하여 응대한 예수와 달리, 쏭이는 사탄의 종교적 담론을 해체하고 세속적 담론으로 희귀하며 이를 수행한다는 점이다. 쏭이가 거부하는 것은 『복낙원』 원전의 세계를 포함하여 종교적 세계가 구축해 놓은 거대 담론과 이를 기반으로 한 사탄의 언어로, 그는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흔들리지 않기 위해 내적이고 영적이며, 진지하고 복잡한 종교적 거대 담론과의 충돌을 감행한다. 그의 행위가 매우 단순하며, 세속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팬터는 인터뷰에서 “만화가 전통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의 예술 양식으로 간주됨”(Comics are considered a very low form of art typically)[2]을 밝혔다. 그리고 팬터는 영문학의 고전이자 고고한 정통 문학 장르인 밀턴의 서사시를 “매우 낮은 수준의 예술 양식으로 간주되는” 만화로 바꾸면서, 주요 캐릭터인 예수를 ‘힐빌리’, 즉 촌뜨기로 전환시켰다. 따라서 펑크 만화의 쏭이와 청교도 문학의 예수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모두 ‘대화의 실패’라는 기존 질서에 대한 파괴적 저항 방식을 공유하고, 모두 성공적 결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유사성을 공유한다. 팬터의 작품은 분명 파괴와 부활 어느 지점에 위치하며, 한쪽에 분명히 속하지 않는 이 혼돈의 지점이 이 작품의 유일한 명백한 지점이다.

References

  1. J. Milton, John Milton Complete Poems and Major Prose, Odyssey Pub, 1957.
  2. G. Panter, 이메일 인터뷰, 2019.
  3. Angelo. Di Berardino, Thomas C. Oden, and Joel C. Elowsky, Encyclopedia of Ancient Christianity, IVP Academic, 2014.
  4. 김혜연, "밀턴의 펑크화," 영미문학연구, 제37호, pp.43-65, 2019.
  5. D. Hebdige, Subculture: the Meaning of Style, Routledge, Routledge, 1979.
  6. S. Fish, How Milton Works, The Belknap P of Harvard U, 2001.
  7. W. Kerrigan, The Sacred Complex, Harvard UP,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