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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Korea-U.S. Negotiation Process for AFKN-TV Color Broadcasting in 1977

  • Yoon, Sangkil (Dept. of Media & Communication, Shinhan University)
  • Received : 2022.07.18
  • Accepted : 2022.08.09
  • Published : 2022.08.31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historical facts about the negotiation process between Korea and the U.S. over the launch of AFKN-TV's color broadcasting in 1977, which can be evaluated as the first time that the government raised the issue of broadcasting sovereignty against the U.S. government. More specifically, through literature research on archive documents stored in the Korean National Archives and Diplomatic Archive of Korea National Diplomatic Academy, this study examined the arguments, perceptions, and actions of the two governments by dividing three phases of the negotiation process. As a result of the study, the negotiations with the U.S. government over the unilateral color broadcasting of AFKN-TV in early 1977 and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countries led to a new perspective of broadcasting sovereignty. The Korean government's commitment to broadcasting sovereignty targeted the U.S. government in the 1980s once again.

본 연구는 정부 차원에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방송주권의 문제를 사상 처음으로 제기했던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는, 1977년 AFKN-TV의 컬러 방송 개시를 둘러싼 한미 간의 교섭과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국가기록원과 외교사료관에 소장된 아카이브 문서에 대한 문헌연구를 통해, 한미 간의 교섭과정을 세 국면으로 나누어 각 국면별로 양국 정부의 주장과 인식, 조치 등을 살펴봄으로써 양국 간에 벌어졌던 갈등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1977년 초 AFKN-TV의 일방적인 컬러 방송 실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미국 정부와의 교섭과 그 교섭과정에서 나타난 양국 간의 갈등은 AFKN방송을 새롭게 주권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계기였고, 이러한 1970년대 말 한국 정부의 방송주권에 대한 의지는 역사적 유산으로 이어져 1980년대에 다시 미국 정부를 겨냥하게 되었다.

Keywords

I. Introduction

본 연구의 목적은 1957년 9월 15일 흑백 방송으로 개국한 미군 방송인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TV가 1977년 초 미국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부분적 컬러 방송을 실시함에 따라 야기된 한미 양국 간의갈등과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교섭 과정을 검토하는데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양국 간의 교섭과정에서 어떠한 주장이 제기되었고 양국 간의 갈등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 개되었으며, 또 교섭 과정에 영향을 받아 한국 정부가 미군방송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AFKN-TV의 역사에 대한 본격적이고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했던 박용규가 적절히 지적하고 하듯이, 그간 한국 학계에서 1980년대 중반 이후 AFKN-TV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에 대한 연구는 부분적으로 이루어 진 바 있지만[1-4] 문제의식의 부족과 자료 접근의 어려움 때문에 AFKN-TV 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5]. 그러나 박용규의 연구에서도 1977년 AFKN-TV의 컬러화와 관련된 언급은 단 두 줄의 서술에 불과할 정도로, AFKN -TV의 컬러 방송 실시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AFKN-TV의 컬러 방송 실시가 중요한 이유는 정부 차원에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방송주권의 문제를 사상 처음으로 제기했다는 데 있다. 권태동이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AFKN은 문화적 영향을 논의하기 이전에 이미 주권국가와 주권국가 간의 국제법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한국과 미국 간의 전통적 우호관계 때문에 그간 한국 정부의 규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 다[6]. 이런 측면에서 1977년 AFKN-TV의 컬러 방송 실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양국 간의 교섭과정을 사실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본고의 기획은 1980년대 초중반 이후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등장하고, 또 그로부터 영향 받아 “1991년 AFKN TV채널의 한국 측 반환을 위한 합의각서가 교환되어 1995년 5월 30일 정식으로 환수가 결정”[7]된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이 그간 거의 사실 규명이 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데 있는 만큼, 본 연구에서는 먼저 예비적인 고찰로서 AFRTS에 대한 통사(通史) 자료 등의 외국 문헌과 대한민국 정부문서를 통해 1970년대 당시 AFKN-TV의 방송시설 현황 뿐 만 아니라 AFKN의 네트워크 운영과 관련해 양국 간 구축되어 있었던 협의 절차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본 연구에서는 국가기록원과 외교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정부문서(1차 사료)를 대상으로 한 아카이브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시기적국면에 따라 양국 간의 교섭과정을 사실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II. Preliminaries

1. Starting of AFKN-TV Broadcast and AFKN-TV Network of the 1970s

AFKN의 첫 출발은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후였던 1942년 5월 26일 국방성(U.S. Department of Defense)이 내렸던 명령, 즉 “오락과 특별 행사 방송을 통해 해외의 우리 국군을 위해 교육, 정보, 오리엔테이션을 제공하라”는 명령에 입각하여 1943년 12월 15일 LA에 설립된 AFRS(Armed Forces Radio Service)이다. 그리고 이러한 AFRS의 임무는 1954년 텔레비전이 포함된 AFRTS(Armed Forces Radio and Television Service) 로 확장된 이후에도 기본적으로 동일하였다[8].

한국에서 미군방송은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 년 7월부터 전선에 투입된 미군을 위한 (이동)방송이 이미1945년 이래 일본에 미리 들어와 있던 극동 미군방송망 (Far Eastern Network : FEN)을 통해서 실시되었고, 미군의 참전규모가 커짐에 따라 맥아더사령부는 1950년 9월27일 일반명령 제84호를 통해 용산의 미8군 통제 아래 미군방송 네트워크를 두도록 함으로써 AFKN 본부가 서울반도호텔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1950년 10월 4일부터 AFKN 라디오방송(AFRS-Seoul)이 시작되었다[9].

1956년 AFKN의 텔레비전 방송에 대한 공식적 승인이 이뤄진 직후, 400W 송신기와 170개의 안테나가 서울 남산에 건립되어 20마일 반경을 커버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첫 AFKN 텔레비전 방송은 1957년 9월 15일에 채널 3 번으로 개시되었는데, 이것은 AFRTS 역사 상 처음으로 전투 지역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실시한 것이었다. 용산에 제작 스튜디오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자체 제작을 거의 하지 못하고 주로 AFRTS와 AFPRTS(Armed Forces Press-Radio-Television Service)에서 가져온 필름들을 방송하다가 1959년 1월 4일 용산에 스튜디오가 완공되면서 비로소 자체 제작을 하고 생방송도 함께 할 수 있었다 [10].

남산에 송신기를 설치하고 첫 방송을 개시한 AFKN-TV 는 이후 지역국을 점차 확대하면서 독자적인 TV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갔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1977년 초 AFKN-TV 컬러 방송이 실시되기 직전까지 한국 정부와의 방송용 주파수 협의를 통해 설치된 AFKN-TV 방송시설은[표 1]과 [표 2]와 같다[11].

Table 1. Current Status of AFKN-TV VHF Broadcasting Frequency Until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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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2. Current Status of AFKN-TV UHF Broadcasting Frequency Until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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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과 [표 2]의 TV방송국을 지도 위에 표기한 자료가[그림 1]과 [그림 2]이다. [그림 1]은 비교적 초창기인 1962년의 지도이고 [그림 2]는 1985년 무렵의 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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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Station Map of AFKN-TV stations in May,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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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Station Map of AFKN-TV stations in 1985 [13]

1962년 당시, 정식 AFKN-TV 방송국은 서울 용산과 캠프 카이저(Camp Kaiser)가 있었고, 네 개의 재방송 방송국, 서울국의 프로그램을 중계하는 1개의 중계국이 있었다[12].

이후 AFKN-TV 네트워크는 [그림 2]와 같이 확장되었다.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AM 및 FM라디오, 그리고 TV방송국까지 함께 하는 AFKN방송국은 서울, 부산을 포함해 7곳에 이르렀다.

2. AFKN Network Management Consultation Procedure with the Korean Government

AM라디오뿐만 아니라 FM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까지도 AFKN방송은 (국내 방송채널을 통해 많은 국내 수용자가 시청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지만) 엄연히 외국방송이기 때문에, 주권국가와 주권국가 간의 국제법적인 협정에 의해 관리, 운영되는 것이 상례였다. 가령, 국경을 넘어 월경(越境, spill-over)하여 유입되는 외국방송에 대해선, 1978년 ITU의 ‘중파방송 지역협정’이 발효된 이후부터 해당 국가가 이 협정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거나, 당사국 간의 외교교섭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4]. 그러나 국내 방송채널을 이용하는 AFKN 방송의 경우엔, 1967년 2월 9일 ‘한미행정협정’(정식 명칭은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미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 약칭 SOFA)이 발효되기 전까지도 한국 정부가 AFKN 방송을 규제할 국제법적 근거가 부재하였기 때문 에, 방송업무 담당자 간의 잠정적 협의를 통해 AFKN 방송과 관련된 사안들이 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6.25전쟁 휴전협정체결 직후인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간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된,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 제4조 -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용(許與)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 락한다”[15] - 에 의해 체결된 ‘한미행정협정’은 AFKN이 사용하는 방송용 주파수를 규제하고 AFKN 방송국을 허가할 국제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미행정협정의 제3조 ‘시설과 구역(보안 조치)’ 제2항 나호의 규정 - “전자파 방사장치용 무선(radio) 주파수 또는 이에 유사한 사항을 포함한 전기통신에 관한 모든 문제는 양 정부의 지정 통신 당국 간의 약정에 따라 ‘최대의 조정과 협력의 정신’으로 신속히 계속 해결하여야 한 다”[16] - 에 의거해서 한국 정부가 AFKN 시설에 대해 규제할 수는 있었지만 방송 프로그램을 규제할 근거조항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시설 규제를 위한 조항 중 ‘최대의 조정과 협력의 정신’이라는 문구는 한미 간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집약시킨 말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문구는 1970년대까지 만약 한국의 정책당국이 AFKN 방송을 규제하고자 할 의지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의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심리적 장벽으로 작용할 여지가 충분한 요인이었다.

더구나 한미행정협정 제3조 제2항 나호의 규정에 따라 양 정부의 지정 통신 당국 간에 약정을 체결하도록 되어 있었다하더라도, 협의절차에 관한 약정이 명문화된 바 없었기 때문에 당시 체신부는 ‘주한미군의 주파수 사용에 관한 협의절차’를 마련하여 공식 외교 통로에 의한 약정이 정식으로 체결될 때까지 미군 당국과 1971년 1월부터 잠정적으로 합의하여 1977년 무렵까지 실무에 적용해 오고있던 실정이었다[17]. 1970년 12월 양국이 ‘잠정적으로 합의한’ 〈주한미군의 주파수 사용에 관한 협의절차〉는 다음과 같다[18].

1. 대한민국은 국제전기통신협약에 서명한 ITU 회원국 가이며, 체신부(장관)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전기통신 주관청이며 전파관리국(장)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무선통신 주관청임을 인식하고,

2. 한미협정 제3조에 입각하여 대한민국 전기통신 주관청 하에서 주한미군은 전자파를 발사하는 시설 또는 이에 준하는 시설의 설치 및 운용을 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3. 전파의 특성상 전파의 동시 이용성이 극히 제한된다는 점을 인식하여 다음과 같이 주한미군의 무선전파의 주파수 사용에 관한 절차를 정한다.

(1) 주한미군 사령관은 그 산하 무선설비에 필요한 주 파수 및 주파수 대역을 대한민국 주관청에 서면 협의 신청 또는 동의 요청하며, 대한민국 주관청은 국제 및 국내 규칙과 전파관리 및 동(同)이용에 관한 계획을 참작하여 그 협의에 협조한다.

(2) 제 1항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한 전파는 한미협정 제 3조 제2항 ‘다’호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3) 제1항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전파 또는 협의 내용 과 상이하게 운용되는 전파가 대한민국 주관청이 허가한 합법 전파에 혼신을 초래할 때에는 주한미군 사령관은 지체없이 그 원인을 제거하여야 한다.

(4) 주한미군 사령관은 제1항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방송국은 여하한 방송국 일지라도 일절 운용할 수 없다.

(5) 국제주파수등록위원회(IFRB) 관계 (필자 생략)

이 잠정적 협의절차에 따라, 당시 방송국 허가신청의 경우엔, 한국군과 미군 실무담당자 간의 협의체인 ‘한미합동군(軍)주파수관리위원회’가 주한미군사령관의 결재를 통해 방송국 설치허용을 한국 정부의 체신부에 신청하면, 한국정부 내 관계부처의 협의를 거치는 절차를 따랐다.

1976년 9월 AFKN 원주FM 방송국 설치신청에 대한 사례는 당시까지 한미 간의 협의절차가 어떤 식으로 실행되고 있었는지를 잘 예시해 주고 있다. 미8군 ‘한미합동 군(軍)주파수관리위원회’로부터 원주AFKN에서 사용할 FM 방송용 주파수(250와트)의 사용요청이 있었던 상황에서, 중앙정보부장은 허가신청에 대한 처리요령에 대한 체신부의문의에 대하여 “한미 행정협정 제3조에 따라 미 본토인을위하여 방송되는 방송국에 관하여는 문제점이 없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답변하였고, 이에 따라 체신부 내에서는 “종전의 관례대로” 처리하였다. 해당 정부문서에서 ‘관례’로 언급한 사안은 1973년 3월 AFKN TV 중계국 설치를 위한 주파수 신청([표 1]의 빨간색 음영처리부분 참고)과 FM 중계국 신설을 위한 주파수 신청과 관련된 것이었다[19].

종합해 보면, 1967년 2월 9일 ‘한미행정협정’ 발효로 인해 양국 간에 AFKN 방송과 관련된 사항을 협의할 법적 근거가 마련되기는 하였지만, 구체적인 협의절차에 관한 양국 간의 정식 약정으로 명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1971년이후 마련된 ‘잠정적인’ 협의절차에 입각하여 AFKN 방송시설과 주파수에 관련된 사항이 처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양국 간의 우호적 관계를 고려하여 한미행정협정 제3조 제2항 나호의 규정에 표현된 ‘최대의 조정과 협력의 정신’을 발휘하여 ‘기존의 관례’에 따르는 소극적인 정책으로 일관했다. 여기에는 그간의 미국 측 요구가 주로 기술적인 측면, 즉 AFKN 방송망의 확장과 관련된 사항이었던 것도 일조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III. The Negotiation Process and the Confrontation between Korea and the U.S.

II-2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AFKN 방송과 관련된 사항들은 한미 간의 우호적인 외교관계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쟁점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계획 아래 미국에 의해 주도면밀하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추진된 AFKN-TV의 컬러 방송 개시는 한국 정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도 연관된 사항이었던 만큼, 한미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할 우려가 있는 핵심적인 외교적 쟁점으로 부각 되었다. 여기서는 주요 국면별로 양국 간의 교섭과정을 살펴본다.

1. AFN's Color TV Transition Policy and AFKN's Test Color Broadcast in 1973-1974

정확히 언제부터 미 국방성이 세계 주요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위한 AFN(American Forces Network) 텔레비전 방송을 컬러로 전환할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73년 8월 ‘유럽 주둔 미 육군’(United States Army Europe, USAREUR)이 “모든 AFN 텔레비전 시설이 컬러 방송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라”[20]고 지시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미루어 보면, 대체로 전환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1973년 무렵부터 대두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AFN-TV의 컬러전환과 관련된 국방성의 장기적 계획은 1975년 무렵 미 의회의 승인을 받아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21].

1973년 10월 11일, 주한미군 수석고문관 Richard W. Dewell이 문화공보부에 보낸 요청공문을 통해 “AFKN은 회계년도 1974년에 시작하여 1976년에 완벽하게 컬러 텔레비전으로 전환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라는 미국 국방성의 지시를 받은 바 있고, 이에 따라 한국 정부의 컬러 방송과 관련된 정책에 대한 질의를 하게 되었으며, 초기 전환은 서울의 AFKN 방송국에서 시작하여, 종국적으로는 한국 내모든 AFKN 방송국으로 확대할 계획”임을 밝힘으로써, 한미 양국 간의 외교적 교섭은 시발되었다. 이 정책 질의에 대해 문화공보부는 두 가지 근거를 들어 완곡한 형태의 반대의견을 피력하였다. 첫째 한국 정부가 아직 컬러 방송의 계획을 수립하고 있지 않고, 둘째 AFKN-TV의 컬러화가 한국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가능한 한국 정부와 균형을 맞춰 시행하기를 희망한다는 것이었다[22].

한편 그로부터 약 1년이 경과된 1974년 11월 11일, 주한미군은 1974년 12월 15일 무렵 잠정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시험TV방송 프로젝트를 실행할 것임을 통보하면서, “AFKN-TV시설의 가장 ‘비용 효율적인’ 활용을 위해 기존AFKN-TV시설을 통해 사전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방송함으로써 부대처방적 프로그램과 기본 교육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이 실행가능한지를 평가하기 위한 실험을 실시할 계획이고, 미국 교육부에 의해 재정 지원받아 제작된 비디오테이프의 프로그램 내용은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 수학, 사회 과목”이라고 배경 설명하면서, 컬러 시험방송의 취지를 밝혔다. 즉, “비디오테이프가 컬러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미군은 이 실험을 동시적으로 AFKN의 컬러 방송 역량에 대한 (제한적) 실행테스트로 수행시키고자 하는 것이고, NTSC식을 따르는 이 컬러 방송은 1976년 말에완료될 예정인 AFKN의 TV컬러전환 프로젝트 이행에 필요한 예비적인 수행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사용될 것”이라고 하면서, AFKN의 TV컬러전환이 1976년 경에 완료될 예정임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문화공보부는 “AFKN이 기존 AFKN-TV시설을 통해 교육을 위한 시험방송을 하루 2시간 실시하고 그 결과를 문화공보부에 통보하겠다는 문서를 보내왔기 때문에, AFKN이 한국 정부와 항상 협조하여 활동해 온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계속 이 같은 유대가 유지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23].

지금까지 살펴본 바처럼, 미국은 장기적인 계획수립에 입각하여 컬러 방송 전환을 위한 시험방송 실시를 차근차근 준비했고, 한국 정부는 이 실시계획과 실행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기 보다는 한미행정협정에 규정된 ‘최대의 조정과 협력의 정신’을 발휘하면서 다소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1973년과 1974년 문화공보부의 입장이 ‘완곡한 반대’와 ‘주한미군과의 유대 유지 희망’이라는 다소 상반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한국 정부의 관망적 자세는 아직 실현되지 않는 미국의 컬러전환계획이 가져올 잠재적인 영향에 대해 뚜렷한 정책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2. Two Meetings of Related Officials Between U.S. and Korea from April to August in 1977

AFKN-TV의 컬러시험방송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를 견지했던 1973,4년과 달리, 미8군 관계자와 한국 정부의 주요 관계부처 책임자 간의 실무 교섭이 두 차례 진행되었던 1977년 4월부터 8월까지의 기간은 상호적인 교섭과정에서 한미 간의 정책적 입장이 점차 뚜렷하게 확립되면서 양국간의 의견 대립이 심화되는 시기이다.

한미 관계자 회의가 처음으로 1977년 4월에 개최되었던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국내 방송사의 컬러 방송 개시에 대한 대통령의 부정적인 견해가 표명되었다는 점이다. 1975년 신문지상에서는 대통령의 의중, 즉 경제개발이 시급한 시기에 컬러TV 방송을 조기에 실시한다면 국민 계층의 위화감을 조성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적 견해가 빈번하게 소개되기도 하였다[24]. 둘째는 이미 1977년 초부터 부분적이긴 하지만 AFKN-TV의 컬러 방송이 개시되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이 결합 하여, 부분적 컬러 방송 개시에 대해 방송관리국장은 즉시 중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항의성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에, 미국 측 또한 한미행정협정을 근거로 기존 주파수로 컬러 방송을 실시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외교적 교섭이 필요하다고 본 것으로 이해된다.

1977년 4월 12일 AFKN-TV 컬러 방송 실시에 따른 협의를 위해, (미국 측은 공보처 보좌관과 AFKN실장 등이 참석하고 한국 측에서는 문화공보부의 실무책임자가 참석한) 한미 간 관계관 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회의록을 보면, 한국 측의 주된 관심사는 AFKN-TV 컬러 방송 실시가 분명히 한국 정부와 사전에 협의해야 할 사항임을 강조하는 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973,4년에는 실시계획에 대해 협의를 해 놓고 1977년에 들어 일방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절절치 못하다는 것이었다. 반면, 미국 측 또한 컬러 방송 실시가 1973,4년에 이미 협의한 실시계획에 따른 것일 뿐만 아니라 미 의회의 결정사항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기본적 입장을 피력하면서도, 일종의 협상 전략으로 상대편 이해를 위한 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미국 측이 확인하고 싶었던 사항은 1973년에 “가능한 한국 정부와 균형을 맞춰 시행하기를 희망”한다고 표명했을 때, 그 ‘균형’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의 컬러 방송 실시계획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듣고자 질의했지만, 한국 측의 답변은 아직 수립된 실시계획이 없으며 빨라야 국민소득 수준이1,500달러 수준으로 올라가는 1980년대 초에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25]. 이 회의를 통해 양국 정부의 기본적인 입장이 어느 정도 상호 간에 확인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제1차 ‘한미 관계관 회의’ 이후 한국 정부 내의 정책적 움직임이다. 양국 간의 상호입장 차이를 확인한 이후 한국 정부는 좀 더 면밀한 대응책을 강구하고자 했고, 아래와 같이 부처 간 의견교환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급기야 AFKN-TV 컬러 방송 실시 문제가 한미행정협정(SOFA) 규정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정리되었다.

우선 6월 10일 (제1차 ‘한미 관계관 회의’에 한국 측 담당자로 배석했던) 문화공보부는 AFKN-TV의 컬러 방송이 SOFA협정에 의거하여 한국 정부와 사전협의를 거쳐 실시하여야 하는지 혹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체신부 전파관리국에 정책 질의를 하였다. 이에 대해 전파관리국은 사전협의할 사항이라고 판단한 문화공보부의 견해가 합당하다는 견해를 피력 했다. 덧붙여 “기존 AFKN-TV 방송의 컬러화는 그것이 전파관리 상 혼신 등을 초래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흑백방송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제 여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보므로 방송정책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제언과 함께, (II-2에서 살펴본 바의) 1970년 12월 양국이 ‘잠정적으로 합의한’ 〈주한미군의 주파수 사용에 관한 협의절차〉를 참고로 하여 이를 정식 약정으로 체결하도록 조치해 달라는 의뢰를 외무부에 보냈음을 알렸다[26].

이러한 상황에서, 6월 28일 미국 측은 제2차 ‘한미 관계관 회의’ 개최를 요청하는 서한을 외무부에 전달하였다. 회의를 대비해 한국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한 정부 내 실무협의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7월 26일에는 (중앙정보부, 외 무부, 전파관리국, 문공부 등의) 주요 정부부처 관계자들이 모인 ‘대책회의’가 개최되었고, 그 결과 “1. 정부 측 협의주체는 외무부가 되고 문공부 및 체신부는 필요 사항을 협조한다. 2. 정부는 객관성 있는 결정적 사유를 마련하여 AFKN-TV 컬러 방영을 저지토록 노력하되, 단계적 실시 종용도 고려한다”는 결정사항에 도달하였다[27]. 이로써 AFKN-TV 컬러 방송 실시와 관련된 문제를 협의할 한국 정부의 협상주체로 외무부가 급부상하게 되었다. 협상대표로 외무부가 급부상한 데에는 SOFA규정에 의한 협의대상여부가 한미 간 해석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미국 측의 객관성 있는 주장에 비해 한국 측은 결정적인 사유가 미흡하다고 본 외무부의 외교적 입장에 힘이 실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윽고 8월 5일로 예정되어 있는 제2차 ‘한미 관계관 회의’를 대비하기 위해, 8월 3일 외무부, 문공부, 체신부의 한국 측 대표단은 AFKN-TV 컬러화에 따른 제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임시실무 분과위원회(Ad Hoc Sub-Commitee)를 구성하여 기본 입장을 정리하였는데, 한미 관계관 회의에서는 당분간 평행선을 그릴 것이 예상되는 만큼 최후 타협책으로 일정기간 단계적으로 컬러 방송 비율을 증가토록 하는 방안 또한 검토되기도 하였다[28].

이윽고 8월 5일 양국 대표단 각 6명씩이 참가한 제2차 ‘한미 관계관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역시 예상한 대로 양측의 입장은 평행선을 이루었다. 컬러화의 필요성은 물론, 컬러 방송이 흑백 수상기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 그리고 이미 실시되고 있는 컬러 방송에 대한 억제 요청 등의 문제를 두고, 양국의 입장은 첨예하게 갈렸다. 특히 이 회의의 핵심의제였던 ‘SOFA협정상의 규정문제’에 대한 양국의 주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AFKN-TV의 컬러화 문제를 바라보는 양국의 기본적인 인식 차이이다. 한국 측은 SOFA협정이 한미 양국 의회에서 승인한 국제조약이기 때문에 전기통신의 문제는 무조건 양국 간의 ‘합의’를 거쳐야 할 사항이라고 보았던 데 반해, 미국 측은 SOFA 3조 2항이 ‘무선 주파수 또는 이에 유사한 사항을 포함한 전기통신에 관한 모든 문제는 양국 지정통신 당국 간의 약정(arragement)에 따라야 한다’고 되어 있으므로 무선 주파수의 조정 등은 양국 간의 협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미 확정된 주파수에 따른 컬러 문제는 협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통보’의 대상이라는 입장이었다[29]. 이처럼 AFKN-TV의 컬러화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는 표면적으로는 SOFA규정 해석상의 차이로 나타났지만 궁극적으로 ‘합의의 문제인가 아니면 통보의 문제인가’ 라는 국가주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3. Cheong-Wa-Dae's Intervention, Foreign Ministry's Arbitration of Conflict, and Public Information Ministry's Boycott from September of 1977 to January of 1979

1977년 초 AFKN-TV의 일방적인 컬러 방송 개시를 둘러싼 양국 간의 교섭은 1977년 8월 5일 개최된 제2차 ‘한미 관계관 회의’가 서로의 입장만 확인한 채 아무런 성과없이 폐회됨으로써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양국 간의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미국이 스스로 컬러방영을 자제해 줄 것을 촉구했던 제2차 ‘한미 관계관 회의’ 에서의 작은 성과에 기대해 보았으나, AFKN-TV의 일방적인 컬러 방송 개시를 중지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방편이 없는 상황에서 AFKN-TV 컬러 방송의 비율은 대체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2차 ‘한미 관계관 회의’ 개최 시기를 전후로 한 시기를 대상으로 문화공보부가 AFKN-TV 컬러 방송을 모니터링한 결과표인 [표 3]을 보면, 개최 전후 시기 대체로 35~40%의 컬러 방송 비율을 보였다[30].

Table 3. AFKN-TV Color Broadcasting Ratio in July to August of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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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한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적 방편은 많지 않았다. 당시 거의 유일한 해결방법은 외무부를 통한 외교교섭이었다. 즉, 이미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자제 요청을 했던 만큼, 한국 정부가 꾸준히 AFKN-TV의 컬러 방송을 모니터링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컬러 방송의 비율축소를 요청하는 외교교섭을 통해 문제에 접근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에 따라, 8월말부터 9월에 걸쳐 외무부는 제2차 ‘한미관계관 회의’ 때 미국 측 대표단의 수장으로 참가했던 SOFA 미국 측 간사와 면담교섭을 벌였다. 이를 통해 미국이 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비율을 더 이상 높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한편, 컬러 방송의 비율을 2시간 내지 20% 수준으로 낮춰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축소 요청에 대해, 미국은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전략을 썼다. 즉, “만일 한국 측 요청으로 20%로 줄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미 언론 등에서 한미 관계에 또 하나의 좋지 못한 논쟁이 될 것이 우려”될 뿐만 아니라, “만약 컬러TV방송을 2시간 내로 자제해 달라는 내용의 정식서명 문서가 한국 정부로부터 접수될 때에는, 미국 측은 미국 측의 입장을 표명하는 정식문서를 다시 발송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교섭방식은 문제해결보다 문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고 압박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선, “양 측 고위 당국자 간에 접촉이 가능하지 검토하고, 이를 통하여 양해에 도달하는 방도를 고려해 보는 것이 상호 서신 송부방법보다는 문제해결에 더 도움이 된다”고 회유하였다[31].

결과적으로 이러한 미국의 교섭전략은 상당한 효과를 보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정부 내의 정책결정과정이 상당부분 미국의 의도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9월 21일 체신부의 대책회의에서, 체신부 관료들은 이미 양국의 입장이 실무회의 수준에서는 계속 평행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 측이 실무회의 차원을 넘어서 고위층과 협의할 것이 예견된다고 전망하였다[32]. 또 9월 26일 문화공보부의 문서에서는 “공식문서로 요청하면 미국 측에서도 자기의 기본 입장을 정식 문서로 회신하게 되므로 문제 해결이 더욱 악화될 우려가 있다는 외무부의 의견”을 전달 받았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문화공보부의 문서는 (미국 측이 얘기한 고위 당국자인) 청와대 홍보조정위원회에 상정되어 보고되었다[33].

그렇지만, 정작 9월 27일에 개최된 청와대 홍보조정위원회의 결정은 미국의 의도와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기록이 공개되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홍보조정위원회의 결정은 AFKN-TV 컬러 방영에 관한 한국 측의 입장을 SOFA합동위원회 의사록에 수록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8년 1월 28일자 외무부 문서에 따르면, 외무부는 “AFKN-TV 컬러 방영에 관한 우리 측의 입장을 SOFA합동위원회 의사록에 수록하게 한다는 홍보조정위원회의 결정을 그대로 이행하고자 할 때, 그간의 미국 측의 반응으로 보아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SOFA 규정의 해석과는 별도로, 안보적 견지에서 미국 측의 강력한 요청을 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외무부는 문화공보부의 양해, 즉 “홍보조정위원회의 결정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자신의 결정이 방송정책 상의 고려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외교적 고려는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의 구체적인 방침은 외무부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양해를 토대로, 대미 교섭을 주도했다[34]. 이에 따라, 이후에도 외무부는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관리하는 방식으로 AFKN-TV의 컬러 방송 실시 문제와 관련한 대미 교섭을 실시하였다. 이에 “SOFA합동위원회 한국 측 간사는 78.2.2., 2.7., 2.23. 등 기회 있는 대로 미국 측 간사에게 AFKN-TV 컬러 방영을 한국의 TV 컬러 방영과 시기를 같이해 줄 것과, 그 기간까지는 미국 측의 사정을 감안하여 교육방송에 한하여 매일 2시간 또는 일간 방영률 20% 한도 내에서 방영해줄 것을 요망하는 한국 측의 입장을 전달하고 미국 측의 협조를 요청”하였다[35].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외무부의 외교 교섭과정을 보면, 외무부는 (컬러 방송을 둘러싼 한미 간의 갈등을 국가주권 차원의 근본적인 해결을 도모하는 방향보다는) 그간의 우호적인 한미관계를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조율하는 데 주력해 왔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외무부의 고뇌 또한 읽히기도 한다. 이미 AFKN-TV의 컬러 방송 실시 문제를 SOFA합동회의에서 해결할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 않는 미국의 입장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외무부 관계자는, 아마도 AFKN-TV 컬러 방영에 관한 한국 측의 입장을 SOFA합동위원회 의사록에 수록하게 한다는 홍보조정위원회의 결정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면서도 ‘힘의 원리’가 적용되는 국제정치의 현실 속에서 미국의 일방적인 컬러 방송 실시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고뇌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청와대 홍보조정위원회의 결정 이후, 방송 주무부처인 문화공보부의 행보는 외무부의 방향성과는 명백히 달랐다. 마치 한국 정부를 골탕 먹이고 있는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너도 한번 당해보라는 식’의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1977년 12월 30일 문화공보부는 (그동안 관례대로 미국의 요청을 별 이의제기 없이 처리해 주었던 방식에서 벗어나) AFKN의 중파방송(회덕 10W) 및 FM방송(불모산 50W)용 주파수 요구에 대해 불가하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36]. 이와 같은 문화공보부의 일방적인 ‘보이콧’에 대해, 체신부 전파관리국에서는 매우 당혹스러워하면서 대미 관계를 위해선 좀 더 명분 있는 이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문화공보부에 제시하기도 하였고[37]. 다른 한편으로는 이 당혹스러움을 해결하기 위해 SOFA규정에 대한 처리를 염두에 두고 국(局) 차원의 대책 마련에 돌입하기도 하였다[38]. 이에 1978년 4월 8일에 개최된 전파관리국 전파관리심의위원회 의결주문에 따라, AFKN의 AM주파수에 대해선 거부하고, FM주파수는 할당하는 것으로 정리했지만, 문화공보부는 여전히 기존 입장을 고수하였다[39]. 또 1978년 7월 25일에는 AFKN의 출력증강(회덕TV 1W →10W, 문산 및 평택FM 50W→250W)에 대해서도 불허함으로써 앞으로 AFKN에 대한 일절의 신설 또는 증설을 불허한다는 문화공보부의 방침을 밝히기도 하였다[40]. 이렇게 문화공보부가 버티자, AFKN측도 주한미군의 사기진작의 문제라면서 재차 요청하였고[41], 결국 주한미군 부사령관의 서신을 접수한 문화공보부는 향후 대한민국 정부의 FM방송계획과 관련하여 변경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조건부로 임시 승인하도록 하였다[42].

IV. Conclusions

본 연구는 정부 차원에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방송주권의 문제를 사상 처음으로 제기했던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는, 1977년 AFKN-TV의 컬러 방송 개시를 둘러싼 한미 간의 교섭과정을 아카이브 문서를 통해 사실적으로 규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에 한미 간의 교섭과정을 세국면으로 나누어, 각 국면별로 양국 정부의 주장과 인식, 조치 등을 살펴봄으로써 양국 간에 벌어졌던 갈등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1967년 한미행정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AFKN방송은 사실상 한국의 방송주권이 행사되지 않는 ‘회색지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군(軍)방송으로서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규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계기로 국제법적인 차원에서 방송주권이 구현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는 했지만, 협의절차에 대한 약정조차 명문화되지 않아 ‘잠정적’ 협의절차에 의거하여 AFKN방송과 관련된 사항들이 SOFA규정에 명시된 ‘최대의 조정과 협력의 정신’에 따라 미국의 요구대로 이의제기 없이 ‘관례대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방송주권이 실질적으로 행사되고 있다고 볼 수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1977년 초 AFKN-TV의 일방적인 컬러 방송 실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미국 정부와의 교섭과 그 교섭과정에서 나타난 양국 간의 갈등은 AFKN방송을 새롭게 주권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계기였다. 물론 한미 간의 교섭과정에서 (법률적 객관성에 입각하여 ‘통보할 사항’이라고 버티는 미국 정부의 주장과 비교하여) ‘합의해야 할 사항’이라는 한국 정부의 주장에 당시 외무부의 판단대로 결정적인 사유가 미흡하기도 했고, 우호적인 한미관계를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조율하는 데 주력한 외무부의 태도에도 미국 정부에 ‘컬러 방영 비율 축소를 요청하는 상황적 비굴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AFKN-TV 컬러 방영에 관한 한국 측의 입장을 SOFA합동위원회 의사록에 수록하게 한다는 당시 청와대 홍보조정위의 결정, 그리고 미국과의 외교적 교섭과정에서 가졌을 외무부의 고뇌, 더 나아가 (비록 항의성의 조치였던 것으로 보이더라도) AFKN의 방송주파수 요구에 대해 문화공보부가 과감하게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한국 정부가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방송영역에서 ‘영토라는 경계 내에서 정부가 행할 수 있는 권위’[43]인 주권을 발휘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1970년대 말 한국 정부의 방송주권에 대한 의지는 역사적 유산으로 이어져, 1980년대에 또다시 미국 정부를 겨냥하게 되었다. AFKN-TV의 컬러방송 실시 무렵부터 주한미군은 방송프로그램 녹화필름의 항공편 송부 등으로 인한 시차 관계와 분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위성방송 실시를 계획하였고, 1983년말 이를 실행하기 위한 본격적인 협의를 한국 정부와 벌인바 있다. 이 과정에서 양국 정부는 재차 대립하게 되었다. 즉, 1983년 10월 4일부터 실시된 AFKN 위성방송을 계기로 한국 정부가 AFKN-TV에 대한 내용규제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던 것이다[44].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본고의 연구결과는 1980년대 초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지게 된 배경적 요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1977년 한미 간 교섭이 1983년 AFKN 위성방송 실시를 둘러싼 한미 간 교섭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는 추후의 작업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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