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I QR코드

DOI QR Code

A Study on Role of Production Company Executive Producer as Drama Producer

드라마 생산자로서의 제작사 기획 프로듀서 연구

  • 김미숙 (가톨릭관동대학교 산학협력단)
  • Received : 2021.09.02
  • Accepted : 2021.10.12
  • Published : 2021.10.28

Abstract

For a long time, dramas that everyone has enjoyed at home have become the most popular cultural contents due to the development of digital technology and the influence of Hallyu.(Korean Wave) This study was conducted in-depth interviews and participatory observations on the background, role, identity, and labor experience of TV planning producers who appeared in the drama production process with the implementation of outsourcing production policy in 1991. The number of dramas produced increased sharply in the mid-2000s due to the Korean Wave. Against this backdrop, the planning producer has expanded their scope in the drama production process and emerged as a new drama producer. The planning producer plays a role in creating an environment in which writers and directors can be selected with the identity of "not a creator but a producer of dramas" and lead drama planning. OTT and watching TV on the Internet have made it possible to watch dramas without TV. As this phenomenon accelerates and becomes commonplace, fewer consumers adhere to the traditional way of watching dramas using TV, and consumers' emotional tastes become more demanding. In this environment, TV planning producers are leading the production of dramas, exerting as much influence as writers and directors. They are also building new power relationships among drama producers by securing planning and financial power.

오랫동안 누구나 안방에서 즐길 수 있었던 드라마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한류 영향으로 가장 대중적인 문화콘텐츠로 탈바꿈했다. 이 연구는 1991년 외주제작 정책의 시행으로 드라마 생산과정에 등장한 TV 기획 프로듀서의 등장 배경과 역할과 정체성, 노동 경험에 대해 심층 인터뷰와 참여관찰을 통해 '가까운 거리'에서 살펴본 연구이다. 2000년대 중반 한류 열풍으로 급격하게 늘어난 드라마 제작 편수를 배경으로 드라마 제작과정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며 새로운 드라마 생산 주체로 등장한 기획 프로듀서들은 '창작자는 아니지만 드라마 생산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가와 감독을 선별하고 드라마 기획을 주도하면서 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는 제반 환경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OTT의 등장과 인터넷 다시 보기 등 'TV 없는 드라마'가 일상화되어 전통적인 드라마 보기 방식이 무너지고 드라마 소비자의 정서적 취향이 까다로워지고 있는 환경에서, 작가와 감독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드라마 제작을 주도하고 있는 TV 기획 프로듀서들은 탄탄한 기획력을 기반으로 자금력을 확보해 드라마 생산자들 사이의 새로운 권력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Keywords

I. 들어가며:드라마 기획 프로듀서 연구의 필요성

TV 드라마는 다수의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과 쉬운 접근성으로 즐기는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문화 콘텐츠이다. 특히 한국 드라마는 2000년대 중반 이후 한류를 타고 아시아권 시청자들에게 한국 드라마, 이른바 한드의매력을 전파한 이후에 최근에는 Neflix 등 인터넷 플랫폼을 기반으로 세계 시장을 확장 중이다. 1956년 <사형수>로 첫선을 보인 한국의 TV 드라마 산업은 몇 차례 중요한 변환점을 맞이하며 오늘에 이른다. 그 가운데도 감독과 배우, 작가가 모두 특정 방송사 소속의 인력으로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방식으로 TV 드라마를 만들던 80년대를 지나 1991년, 방송사 외부의 인력으로 제작된 드라마가 방송사의 채널을 통해 방송되는 외주제작 시스템의 도입이 대표적 변화의 계기이다[1]. TV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제작 방식의 변화는 TV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제작 현장의 변화로 이어진다. 제작 현장의 변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제작 과정에 따른 드라마 생산 주체들의 역할이 변화하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직업군이 제작 현장에 등장하는 것이다. 브레이버만[2]은 기술발전과 자본이 새로운 산업으로 이동함에 따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새로운 노동 분야를 끊임없이 확장시키는 동시에 노동자는 그러한 생산양식에 순응해야 한다고 본다. 나아가 어떤 산업에서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데 성공할 경우 그 분야의 노동은 다른 분야로 이동하게 되어 대규모로 축적된다. 즉, 그 결과가 다른 직업이나 산업으로의 노동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미디어 산업 내 변화하는 생산양식과 노동과정의 측면에서 제작 환경 내부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3].

외주제작 시스템의 도입이 가져온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방송사와 방송사에 소속된 연출자가 행사하던 드라마 제작의 주도권이 대본을 기획하고 이를 토대로 편성을 따내는 작가와 작가들이 소속된 외주제작사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다. 과거 지상파 방송국 중심의 TV 드라마 제작 현장을 주도한 것이 감독(연출)- 작가(대본)- 배우(연기)의 세 직업군이었다면 작금의 거대한 드라마 시장은 생산 주체들 사이의 다양해진 역학관계 속에서 전통적인 인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건과 갈등을 경험한다. 결국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고 조율할 수 있는 새로운 인력에 대한 수요가 생긴다. 드라마의 제작 규모 증가에 따라 투자를 이끌어올 수 있는 배우의 중요성이 증가하자 배우 캐스팅에 주력하는 캐스팅디렉터가 등장하고, 외주제작 정책으로 제작사의 제작비 관리가 중요해지자 과거 방송사 조연출이 담당했던 제작비를 맡아 제작 현장의 제작비를 관리하는 제작/라인 프로듀서가 등장하고, PPL 등 드라마 수익구조가 다양해지자 PPL을 담당하는 전문가들이 생겨나는 것이 그 예이다.

드라마는 작가, 감독, 배우는 물론이고 무수하고 다양한 인력이 참여하는 대중 종합예술이다. 제작 방식이 변화하면서 기존 생산 주체들의 역할에 변화가 생기거나 기존의 제작 현장에서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가진 주체가 새로운 주체에게 밀려나는 새로운 권력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따라서 미디어 생산자 연구는 각 노동 생산자들의 개별적인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것 못지않게 구성원들 사이에 만들어지는 역학의 함의에도 관심을 기울인다[4].

이 연구는 TV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포착되는 새로운 직업군 가운데 드라마 산업과 드라마 생산이 교차하는 TV 드라마 제작 현장에 2000년대 중반부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제작사의 드라마 기획자, 기획 프로듀서의 등장과 역할에 주목하고자 한다. 새로운 직종의 등장은 산업의 확장이나 TV 드라마의 문화 예술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어느 일방의 필요에 의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 연구는 이전에 없던, 혹은 있더라도 별도의 타이틀이 필요할 만큼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았던 제작사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의 등장 배경과 역할을 질문함으로 궁극적으로 제작 방식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생산 주체들의 역학관계, 달라진 TV 산업 구도 안에서 새롭게 정립되는 미디어 노동자들의 정체성, 그리고 이들 미디어 노동자들이 TV 드라마에 부여하는 문화 콘텐츠이자 상품으로서의 가치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미디어 문화연구에서 생산 주체들 사이의 역학관계나 외부 제작 환경에 변화에 따른 생산 주체의 노동 변화에 대한 선행연구들을 살펴보고 본 연구의 문제의식과 연결 짓고자 한다. 또한 현재 한국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 시스템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영화 기획 프로듀서 시스템과 미국 TV 드라마 제작 시스템을 현재 한국 TV 기획 프로듀서 시스템과 비교하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현재 한국 TV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가시화되는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이 가지는 산업적, 제도적 맥락의 가치를 논의하고 나아가 바람직한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 모델을 제안할 것이다.

Ⅱ. 미디어 생산노동과 기획 프로듀서의 등장

미디어 생산자 연구는 개별 생산자들이 수행하는 생산 노동의 특징과 과정에 대한 탐구 외에도 제도가 생산과정에 미치는 영향, 나아가 미디어 생산자들 사이의 노동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5][6]. 특히 TV 드라마 생산자 연구에서 단독 생산 주체가 아닌 주체들 간의 상호작용과 노동관계의 변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드라마가 예술적 가치를 가진 문화적 콘텐츠인 동시에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제작에 참여하는 문화상품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부딪히고 조율된 결과물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크래스나우(Krasnow)는 방송 정책의 변화를 다양한 이해집단 간의 상호작용 내지는 갈등, 이해의 득실을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정치적 과정으로 이해한다[7].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직종의 등장 역시 직종 자체에 대한 흥미를 넘어 제작 현장에 참여하는 생산 주체들 간의 상호작용 내지 갈등에 의한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미디어 생산자 연구는 미디어 생산과정을 둘러싼 문화와 권력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8]으로 각 생산 주체에 대한 연구라 할지라도 생산현장과 사업구조, 자본과 제작구조에 대한 이해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9-11].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미디어 생산자 연구들의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영찬[10]은 케이블 채널에서 주도하는 미드 열풍의 원인과 배경을 진단하며 미드를 수입하고 편성하는 편성담당자들의 작업 과정과 직업 정체성을 문화매개자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탐구한다. 인터넷을 통한 빠른 접근성과 팬들의 자발적인 자막 달기라는 호의적인 시청 조건을 배경으로 각 방송사의 편성담당자들은 한국적 정서와 맞는 미드의 수입과 미드데이 편성 등 미드의 가공을 주도하며 새로운 콘텐츠와 한국의 지역 수용자들을 연결하는 문화적 대화자, 문화적 생산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김현미[12]와 나미수[13]는 미디어 생산자연구에젠더적 문제의식을 결합하여 여성의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성차별적인 젠더의식이 여성 생산자들의 직업 수행에 불필요한 감정노동의 부담을 지우거나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축소 재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밝힌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파견직 FD의 노동 경험을 탐구한 이상길·이정현·김지현의 연구[14]는 비정규직 FD들이 신자유주의적 유연 경제체제에서 불안정하고 부조리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는 이유를 방송 노동에 대한 낭만적 기대와 게임으로서의 프로그램 생산 의식에서 찾는 한편 집단적 연대와 비판을 위한 물질적, 제도적 기반의 결여 또한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을 유지하는 구조적 원인임을 지적한다.

김미숙과 홍지아[15][16]는 1991년 외주제작 시스템이 도입된 이후 TV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작가와 연출 감독의 갈등이 커지는 현상에 주목한다. 연출 감독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작가의 대본으로 편성을 확보한 다음에 연출자가 결정되는 외주제작 시스템에서는 감독과 작가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고 이러한 갈등이 드라마 작가의 직업 정체성 변화로 이어진다는 분석이다. 위 연구들의 공통점은 모두 심층 인터뷰와 참여관찰이라는 질적 연구 방법을 통해 개별 미디어 노동자들의 노동 수행 과정은 물론이고 프로그램 생산방식의 변화가 생산 주체들 간의 권력관계와 노동자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탐구한다는 것이다.

해외콘텐츠 사업자들의 국내시장 진입과 투자활성화, 이에 더해 방송사 편성만이 아닌 인터넷, Neflix 등의 OTT 플랫폼, 해외수출 등 판로의 다양화로 인해 TV 드라마 제작시장은 양적,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17]. 시장의 확장에 따라 산업규모가 커지고 제작과정은 다양해졌으며 이윤을 바라는 생산주체들의 유형과 이윤 추구의 방식도 복잡해졌다. 문화산업의 특성상 드라마 제작 현장은 글로 쓰인 매뉴얼이 아니라 각 생산 주체들의 경험이나 대인 간 상호작용을 통해 습득된 이른바 ‘암묵적 지식’에 의해 운영된다. 관건은 다양한 생산 주체들의 암묵적 지식을 잘 조율해 최선의 결과로 유도하는 것으로 기획, 제작, 마케팅의 전 과정에 걸쳐 전문적 생산 주체들의 암묵적 지식이 효율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역할이 필요하다[18].

이 연구의 연구 대상은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대본을 쓰는 작가나 작가의 대본으로 완성물을 촬영하는 감독, 연기하는 연기자 등 직접적인 생산노동자가 아니면서도 누구보다 이들을 잘 이해하고 각 생산 주체들의 암묵적 지식을 이용해 최선의 결과물을 창출해 내는 새로운 생산 주체인 제작사 기획 프로듀서이다. 이들의 작업 과정과 노동 정체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제작 방식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생산 주체들의 역학관계, 달라진 TV 산업 구도 안에서 새롭게 정립되는 미디어 노동자들의 정체성, 그리고 이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문화 콘텐츠이자 상품인 TV 드라마의 미래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Ⅲ. 제작현장에 따른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 차이에 대한 논의

기획 프로듀서(기획사)가 제작을 주도한 이른바 기획 영화의 시작을 알린 한국 영화는 1992년 신생 기획사신씨네가 제작한 <결혼 이야기>이다[19][20]. 이전의 한국 영화들이 일본 영화의 모방, 베스트셀러의 영화화, 아니면 흥행에 성공한 기존 영화를 답습하는 제한된 제작 방식으로 국내 관객들에게 외면을 받았던 것에 비해 1990년대 초 도입된 기획영화 시스템은 관객의 수요를 반영한 참신한 시나리오와 신선한 기획으로 2000년대 초까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기획영화 이전의 제작 시스템이 감독이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자가 자본을 대는 방식이었다면 기획영화는 기획자가 시나리오로 투자자를 확보하고 이후에 감독을 섭외하는 제작 방식의 변화를 가져온다[20].

영화 제작 방식의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비디오판권 입도선매나 현물, 현금 협찬 등의 형식으로 대기업의 자본투자가 이루어지고 대기업의 자본 투자를 받기 위해 투자에 적합한 대본을 발굴하는 새로운 제작 방식에 젊은 영화인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까닭이다[19]. 투자에 따른 수익을 창출하기 원하는 대기업의 영화시장 유입은 관객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사전조사하고 이를 충족하는 창작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기획 프로듀서의 등장을 불러왔다[19][21]. 첫 번째 기획영화로 불리는 <결혼 이야기>의 경우,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당시 한국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실제 신혼부부 수십 커플의 인터뷰가 이루어졌고 영화 마지막에 에피소드 형식으로 삽입되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20].

기획 프로듀서 시스템의 도입은 한국 영화의 발전에 큰 이정표로 평가된다. 당시 <결혼 이야기>의 성공은 구태의연한 스토리로 시장에서 신뢰를 잃은 한국 영화를 다시 보게 하고 대중문화의 소비자인 젊은 관객을 영화관에 불러들인 계기로 평가되며 이후 기획영화 시스템의 정착으로 이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영화에서 이루어진 기획 프로듀서 시스템의 의미는 무엇보다 기존의 안정적인 것을 되풀이하려는 산업적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시나리오를 개발함으로 장르의 외연을 확대하고 신진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영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문화적 다양성을 도모한 것이라 할 수 있다[22].

실제 영화가 제작되는 현장에서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은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 또한 기획과 제작단계에서 영화의 제작에 참가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기여도를 어떻게 평가하고 직함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뚜렷하게 자기 역할이 있는 감독이나 작가와 달리 생산 주체들의 다양한 갈등을 조율해야 하는 프로듀서는 다른 창작 주체들에 대한 보조적 지원자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어 적합한 크레딧을 확보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다[22][23]. 분명하지 않은 역할 구분 때문에 현장에서는 라인 프로듀서, 협력 프로듀서, 보조 프로듀서,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등 다양한 직함이 존재하는데[24] 이러한 혼란스러움은 제작 현장의 역동성 때문에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기획이라는 역할이 그만큼 모호함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학계에서는 미국 영화 프로듀서 제도에 근거해 원작을 구매하거나 작가를 고용해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한편, 영화 제작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저작권의 문제를 해결해 안정적인 영화제작을 가능하게 하는 한국형 프로듀서의 역할을 제안하기도 한다[22].

기획 프로듀서의 등장에 있어 영화와 TV 제작 현장의 공통점은 산업의 변화이다. 한국영화가 1990년대 초반부터 대기업의 자본 유입과 함께 기획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본격적인 산업의 기반을 다져나갔듯이 TV 드라마 역시 외주제작이 본격화된 2000년대를 전후로 기획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고 볼 수 있다[25]. 즉, TV 기획 프로듀서는 TV 산업이 확장되고 외주제작사 시스템이 활성화되는 TV 드라마 제작방식 변화 과정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제작방식의 변화로 가시화되는 생산 주체들의 역학관계를 조율하기 위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드라마 작가 자체가 프로듀서를 겸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의 드라마 제작 과정은 흔히쇼런너(Show runner)라고 하는 기획 작가 자신이 구상한 드라마를 스튜디오(제작사)에 피칭을 하면서 시작된다. 미국의 드라마는 기획 작가인 쇼런너가 자신의 드라마를 제작할 스튜디오를 정한 후, 방송사에 들어가 피칭을 하여 방송사를 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역할이 똑같은 기획 프로듀서는 없다. 다만 스튜디오나 방송사의 피칭 후 작가의 대본에 대해 피드백을 적어 노트(note)를 주는 스튜디오나 방송사의프로듀서(직원)은 있지만 우리나라의 기획 프로듀서 역할과는 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쇼런너는 제작비 (money), 시간(time), 드라마의 품질(quality)를 책임지며, 촬영 3개월 전에 작가진을 구성하여, 대본 수정, 세트 제작, 로케이션 결정, 캐스팅 등을 준비한다[26]. 미국의 쇼런너는 대부분 작가 출신이지만, 감독 출신이나 기획 프로듀서만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1년 외주정책이 실시된 후, 1994년에 SBS가 삼화프로덕션과 <작별>을 50부작으로 방송하고, MBC도 같은 해 7월 장길수 감독의 제일기획 60분물 3부작 <생의 한가운데>를, KBS는 10월 제일영상의 50부작 드라마 <인간의 땅>을 제작, 방송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드라마 외주제작이 시작되었고[27]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외주제작 비율은 점점 높아져서 2006년에 KBS에서 편성된 월화 미니시리즈, 수목드라마, 주말연속극은 91.5%가 외주에서 제작된 것으로 나타났다[28]. 외주제작이라는 변화된 드라마 제작 현장 속에서 작가와 감독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조율하고 드라마 생산에 직접 관여하는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라는 전문 직종이 생겨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은 영화 프로듀서와도 다르고 미국의 쇼런너와도 다른 역할을 가지고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성장하면서 그들만의 정체성을 발현한다.

Ⅳ. 연구 방법과 연구 문제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는 대본의 기획, 개발, 편성, PPL의 적용, 투자 등 드라마 생산 전반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드라마 생산자이다. 2000년대 들어 활성화된 이들의 등장 배경과 역할, 정체성 등을 탐구하기 위해 드라마 생산자의 내부자이기도 한 연구자는 수년 동안의 참여관찰과 8명의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와 심층 인터뷰를 진행해 왔다. 참여관찰은 연구자가 드라마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기획 프로듀서와 드라마 기획 작업을 함께 하면서 이루어졌으며, 심층 인터뷰는 시청률과 화제성 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던 드라마들을 기획·제작했던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 8명을 선정하여 진행하였다. 연구자는 드라마 기획 피디의 등장과 역할변화, 빠르게 바뀌는 TV 제작 현장 조건 등을 살피면서 2015년 8월부터 2021년 7월까지 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경력을 가진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와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각각의 인터뷰는 여의도나 상암동 등 제작사의 사무실이나 근처 카페에서 길게는 4시간 짧게는 2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두 명의 경우 대외환경의 악화로 심층 전화 인터뷰와 이메일 인터뷰로 대체하였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탐구한 연구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연구 문제 1: TV 기획 프로듀서의 등장 배경과 역할은 무엇이며, 이들의 등장 배경과 역할이 TV 드라마 제작 방식과 TV 드라마 산업의 구조적 맥락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연구 문제 2: 미디어 생산자로서 TV 기획 프로듀서들의 직업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며, TV 생산과정의 제도적인 압박과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발현하는가?

연구 문제 3: TV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은 생산과정 속에서 어떻게 확장되고 있으며, 이들이 성장이 드라마 생산과정에서 어떤 함의와 특징을 가지는가?

심층인터뷰는 반구조화된 질문지를 준비하여 진행하였고 진행 도중 심도 깊은 내용이 나올 경우 연구대상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기획 프로듀서의 정체성과 노동경험, 역할과 등장 배경, 최근 드라마 제작환경 등에 대해 상당히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드라마 생산자 연구의 경우, 외부자의 접촉이 용이하지 않고 바쁜 일정으로 연구에 응하기가 쉽지 않은 어려움이 있으나, 이번 연구의 경우 연구자가 내부자인 점이 장점으로 작용하여 섭외과정과 라포 형성 등이 비교적 원만하게 이루어진 점이 있다.

표 1. 연구 대상자 목록과 상세프로필

CCTHCV_2021_v21n10_286_t0001.png 이미지

Ⅴ. 분석 결과와 논의

1. 드라마 외주제작 정책이 가져온 새로운 직업,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

1.1. ‘맨땅에 헤딩’ 했던 초기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들

연구대상 프로듀서들은 중 A, B, C, F, H는 스스로 ‘1세대’ 프로듀서라고 구별 짓고 기획 프로듀서로 일하게 된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놨다. 1991년 이후, 드라마 외주제작 정책이 생겨 외주 제작사들이 생기고 방송사에서 나온 김종학, 이장수, 윤석호, 이진석 등의 스타 감독들이 드라마를 편성 받아 직접 연출하여 납품하는 시대가 끝나자 드라마 기획은 더욱 긴요한 작업이 되었다. 새로운 자본이 들어오면서 드라마를 사전에 기획해서 방송사에 제안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드라마 프로듀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늘긴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꼭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역할은 아주 미미했다고 했다.

드라마 제작이라는 게 사실은 저도 몰랐고, 영화 공부를 했을 뿐이지 드라마 제작을, 본격적으로 방송사에 들어가서 조연출을 거쳐서 프로세스를 밟은 것도 아니고. 아주 노말한(normal) 방식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없었죠.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냥 거의 ‘맨 땅에 헤딩?’ 이렇게 시작했던 것 같고, 그러면서 흥미로웠던 게 제가 연출을 하겠다고 했는데 드라마를 들여다보니까 영화랑 다른 게 프로듀서가 없더라구요.(C)

C의 경우는 원래 영화를 공부했고 교양 예능 프로그램의 조연출로 시작해서 연출자를 꿈꿨었는데 이직을 하면서 드라마를 만드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어 아무도 해보지 않은 드라마 기획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드라마에서 프로듀서라는 시스템이 정착이 되면 훨씬 드라마 퀄리티도 높아지고, 기획의 방향성도 다양해지고 뭔가 시스템적으로 영화처럼 비즈니스 파이가 커질 수도 있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A 의 경우에는 원래는 음반사업을 주로 하는 회사에 음반 기획팀으로 입사를 했으나 그 회사에서 드라마 제작을 시작하게 되어 기획 PD, 제작 PD 같은 개념도 없을 때 닥치는 대로 드라마 일을 해냈다고 한다.

그때는 “내가 기획프로듀서다”라고 일을 한 게 아니고 그냥 회사의 기획팀에 있으면서 음반 일도 하고, 드라마 일을 한 거죠. 그때 아무것도 가르쳐준 사람도 없고, 드라마 기획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기획이란 개념이 있는 줄도 몰랐고. 그냥 작가님들이 계시니까 작가님들이 작품 준비하실 때 케어해 드리고 여러 가지 일을 했죠.(A)

A는 ‘작가 케어’라는 것은 작가가 집필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드라마에서는 무엇보다 대본의 퀄리티와 생산 시간이 중요하므로 집필에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지원해야 한다. A는 이러한 ‘작가 케어’, ‘시놉이나 대본의 최초 모니터 및 피드백’, ‘캐스팅 과정 지원’, ‘드라마 홍보’ 등의 일들을 가리지 않고 했다. 지나고 보니 촬영 나가기 전에 프리 프로덕션 단계의 일을 했지만, 당시는 그런 개념이 뚜렷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서 시간이 한 5년 정도 지나니까 외주 비율이 엄청 높아진 거예요. 외주제작사도 엄청 많이 생기기 시작하고, 외주제작사 나름의 역량의 바운더리(boundary)가엄청 넓어진 거예요. 그러면서 그때 방송사 국장 출신 000 사장이 저희 회사 드라마쪽 사장으로 오시면서 그때 비로소 저희 회사에 드라마 기획 파트가 정식으로 생긴 거예요. 그게 2007년도에요.(A)

A는 2007년 이전까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자신이 음반 일도 하면서 드라마 일 이것저것 많이 하는데도 어떤 개념의 직책으로 있는지 명확하지 않아서 혼란을 겪다가 회사에 드라마 기획팀이 생기면서 ‘기획 프로듀서’라는 타이틀을 공식적으로 받게 되었다고 한다.

F의 경우에는 영화팀과 애니메이션 팀과 함께 드라마 팀이 있었던 제작사였기 때문에 기획실은 따로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영화나 애니메이션 제작과는 다르게 드라마 제작에는 그 당시까지도 기획 프로듀서 시스템이 없다 보니 “별의별 시스템”을 다 해보면서 드라마 기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작가들과 계약해서 기획 작가 시스템1도 해보고 소재가 될 만한 아이템으로 대학생과 작업을 해 보는 등 드라마 기획을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고 한다. 다른 제작사에서는 계약한 작가들이 써주는 걸 받아서 방송사에 들고 가는 관행이 일반적이었던 시절에도 F의 제작사에서는 변화된 TV 제작 시스템 안에서 ‘기획’이라는 게 긴요한 작업이라는 것을 알고 기획 프로듀서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노력을 했던, 흔하지 않은 사례였다.

저희는 한 10년을, 굉장히 치열하게 프로듀서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를 스스로 고민하고 또 감독님들한테도 그게 (기획 프로듀서) 뭔지 알려주고, 또 작가들한테도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려고 했어요...(중략) 그런데 처음에 프로듀서라고 인사하면 다 저한테 감독님이라고 불렀었어요. 전 연출하는 감독이 아니라고 말했죠. 이쪽은 그게(프로듀서와 연출자) 정리가 안 되어 있더라구요.(F)

1991년 외주제작정책이 실행되기 전에는 방송가에서 ‘프로듀서’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대부분 방송사 소속드라마 PD였다. 드라마 PD는 드라마를 현장에서 직접 연출하는 디렉터(Director)와 방송사 내에서 드라마를 기획하고 디렉터들을 관리하는 프로듀서(Producer) 로 나뉠 수 있다. KBS 홈페이지의 채용 부분 2[29]에서도 드라마 PD 소개를 프로듀서와 디렉터로 구분하여 업무 내용을 설명하고 있지만 이 역할이 자주 바뀌어 교대근무처럼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방송사에서는 연출자와 프로듀서가 동일시되어 왔다. F가 자신이 프로듀서라고 소개하니 ‘감독님’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는 프로듀서와 연출자를 동일시하던 관행에서 나온 오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연구대상 TV 프로듀서들은 자신들의 등장이 TV 드라마 제작시스템의 변화로 인한 것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방송사 내에서 드라마가 기획이 되면 거의 동시에 제작을 거쳐 송출이 이루어지는 형태였지만 외주제작사의 납품이 메인제작구조가 되면서 채널 플랫폼은 편성권을 행사하며 작품을 선택하는 구조로 점차 바뀌었다. 제작사가 방송사에서 선택하는 작품들을 기획하기 위해서는 기획하는 작품 편수가 편성 드라마의 3배수 정도 되어야만 했고 그중에 한두 편이 선택되어 방송되는 방식이다.

H는 드라마 기획 일과 비슷한 업무를 2000년 초반 지상파 방송사 안에서 시작했지만, H의 직책도 처음부터 ‘기획 프로듀서’는 아니었다고 했다. 드라마가 될 만한 원작을 고르고 어떤 내용의 드라마가 좋을지 드라마콘셉트를 잡아보는 일을 하면서 좋은 작가도 발굴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방송사에 있을 때 기획 피디라는 개념이 없었었어요. 5년 동안 있는 사이에 없었어요. 드라마 루루공주 (2005년) 할 때 000 감독이 제작 총괄이었는데, 그 분이 저한테 기획 피디 하자고 하면서 방송 크레딧에 ‘기획 프로듀서’라고 이름을 넣었죠. 그때 아마 기획 프로듀서로 이름이 들어간 게 제가 처음이라고 들었어요.(H)

H가 그렇게 방송사 안에서 드라마를 준비하는 감독들을 도와 기획 일을 했던 경험을 쌓자 꽤 큰 규모의 제작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고, 제작사로 옮긴 뒤에 상당히 큰 드라마를 여러 번 기획하여 제작하여 성공했다고 했다.

지금은 케이블 방송 자회사 제작사에 있는 C는 당시 본사 기획팀에 있었는데, 변화하는 드라마 제작환경에서 적응하기 위해서 프로듀서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기획 프로듀서가 하는 일은 작가가 가져온 아이템 선별, 원작 선택, 드라마 아이템 기획, 작가·감독 계약, 대본 개발 등 많았지만 조금 더 체계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기획 프로듀서가 기획 단계에서 아이템을 개발하고, 대본을 디벨롭하고 편성이 될 때까지 하고 손을 뗀다. 그거는 사실은 제작과정의 밸류(value)를 너무 낮게 보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프로덕션의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변수들이 발생하죠. 그거를 기획자하고 논의를 하지 않으면 방향성이 달라지고, 의도했던 드라마의 기획의도에서 벗어나서 온전하게 완성되는 거 같지는 않거든요.(C)

최근 기획 프로듀서의 힘이 세진 것은 기획력이 강한 드라마를 지향한 케이블 방송사의 영향이 큰 것 아니냐는 질문에 C는 “프로듀서 시스템으로 조직을 꾸린 게 저희가 처음이고 그런 시스템은 방송사와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답변했다. 당시만 해도 상대적으로 드라마 제작의 토대가 약했던 케이블 방송사는 기획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1.2. 정책의 변화, 자본의 유입, 드라마의 정체성 변화가 성장시킨 직업,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

연구대상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들은 ‘맨땅에 헤딩’, ‘기획 피디 개념이 없었을 시절’, ‘닥치는 대로 했던 드라마 일’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초기 기획 프로듀서 시절을 떠올렸다. 이는 그 시기가 정책의 변화로 드라마 시장에 새로운 자본이 유입되면서 드라마가 단순한 방송사의 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문화상품으로 정체성이 바뀌면서 겪어야 했던 혼란의 시기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991년부터 시작된 외주제작정책으로 1994년 드라마 <작별(SBS)>, <생의 한가운데(MBC)>, <인간의 땅 (KBS)> 등이 제작되어 방송사에 납품되었으나 2002년까지는 방송사에서 외주비율을 맞추기 위해 외주를 주었던 ‘시혜적 외주’[1]의 시기로 봐야 한다. 겨울연가 (2002, KBS), 대장금(2003, MBC) 등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류 열풍을 일으키면서 드라마가 돈을 버는 문화상품으로 부각 되고 제작사의 드라마 제작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배경에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방송사에서는 ‘전략적 외주’[1] 정책을 펼치게 되고 제작사들은 드라마 기획을 경쟁적으로 하게 된다. 정성효[28]는 2006년에 KBS에서 편성된 월화미니시리즈, 수목드라마, 주말연속극은 91.5%가 외주에서 제작된 것에 주목했다.

2000년대 중반에 한류 열풍으로 드라마 제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상황에서, 2011년에 드라마 편성이 가능한 종편채널이 등장하자 드라마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기획력으로 드라마에 진입해 승부수를 던졌던 기존의 케이블 방송 도전은 드라마 기획을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일로 만들게 했고 방송사 일부에서 또는 제작사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기획 프로듀서시스템이 체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드라마 제작환경의 변화 속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TV 기획 프로듀서들은 ‘암묵적 지식’을 이용해 드라마 생산과정 속에서 점점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며 입지를 다져왔다.

위와 같은 기획 프로듀서의 등장 배경과 역할을 TV 드라마 산업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드라마 산업이 핵심인 드라마 콘텐츠 기획의 주도권이 1991년 외주제작 정책과 한류 열풍으로 방송사 PD에서 작가와 프로듀서 쪽으로 이동한 점이 큰 분기점이 된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용석[30]은 현재 A급 작가 중심의 ‘작가 주도형 기획방식’과 ‘프로듀서 주도형 기획방식’이 공존하면서 드라마 기획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시청률과 완성도 면에서 인정을 받은 A급 작가3와 일할 수 없는 다수의 기획 프로듀서들이 일반 작가와 드라마를 기획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A급 작가가 전체 4.4% 20명인 점을 감안하면 대부분의 일반 작가는 기획 프로듀서와 함께 협업을 하며 드라마를 집필하는 구조가 된다[30]. 이용석은 A급 작가를 보유하지 못한 영세 제작사가 78.6%라는 점을 지적하며 일반 작가를 통한 드라마 기획의 활성화가 한국드라마 산업의 중요한 화두라고 주장했다[30]. 이렇듯 방송정책의 변화가 드라마 산업 내 생산구조를 변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등장한 TV 기획 프로듀서들은 ‘맨땅에 헤딩’하며 자신들의 입지를 만들어 왔다.

2011년, 드라마를 제작·송출할 수 있는 종합편성 채널이 개국하고 기존에 있던 tvn등 케이블 채널에서 본격적으로 드라마를 제작 방송하면서 드라마 제작의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외주 제작사에서는 드라마 기획·제작 경쟁이 불붙기 시작한다. 후발 케이블 방송사들과 기존의 제작사들이 기획에 사활을 걸고 다양한 드라마를 기획하면서, 자리 잡지 못했던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 시스템은 점차 체계화되는 과정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1.3. 감독과 작가의 조율사로서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

연구대상 기획 프로듀서들은 드라마 생산 내에서 자신들을 ‘서번트’, ‘주선자’, ‘어레인저(arranger)’, ‘조율사’, ‘중개자’ 등으로 표현하며 드라마 생산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특정했다. 특히 작가에 대한 관리, 관계는 매우 중요시하면서 가장 핵심적인 업무로 꼽았다.

저는 지금 대표가 되었어도 작가님들의 “매니저고, 서 번트다”라는 마음가짐이고 실제로 말도 그렇게 하고요, 아무리 신인이어도 제가 “작가님 나는 작가님 매니저예요, 힘든 거 좋은 거 다 저랑 같이 상의하시고 고민하시고 결정하시면 됩니다.”라고 말을 해요.(A)

A는 드라마를 잘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작가가 생산해내는 대본이기 때문에 기획 피디는 어떻게 하든 작가가 편안하게 자신의 기량을 펼치며 대본을 만들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식이나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작가의 입장을 이해하고 고충을 함께 해결해 주려는 인간적인 마음, 됨됨이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기획 피디는) 작가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제시를 할 줄 알아야 되지만 결코 그게 자기의 주장이 되어서는 안 돼요. 제안이어야지. 자기의 안을 관철시키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접근해서는 안 돼요. 결국은 결정은 작가가 하는 거예요.(A)

이렇게 작가를 이해하고 선을 넘지 않으면서 원만한 관계를 이끌려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드라마 텍스트를 제한된 시간 안에 잘 만들어내려는 산업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드라마 생산자들 간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드라마 제작을 지연시키거나 드라마의 방향성을 흔들게 되어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획 프로듀서에게는 작가 못지않게 긴요한 관계를 맺는 생산자가 있는데, 바로 드라마의 영상 연출을 책임지는 감독이다. 작가와 감독의 호흡은 드라마 성패를 결정짓기도 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어서 연구대상 기획 프로듀서들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원만히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다.

감독과 작가가 정말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면 프로듀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마음을 섞지 않고 등을 돌린 채로 작품을 끝내는 경우도 있어요. 시작해서 어느 순간 지나면, 그때 정말 지옥이죠.(중략) 방송을 하고 있는 도중에 발생한 일이면 무조건 마무리해야 된다는 게 첫 번째 목표가 되는 것 같아요. 적어도 감독이 뛰쳐나가거나 작가가 펜을 접거나 이런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면서 어떻게든 끌고 나가서 방송을 끝내야 된다는 게 목표가 되는 것 같아요. (C)

문화상품이 된 드라마는 기획부터 제작 자본이 들어가고 투자 손익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감독과 작가가 갈등이 심하면 그만큼 타격이 심하다. 연구대상 기획 프로듀서들은 가능한 작가와 감독이 충돌하지 않고 최대한의 성과가 나도록 하는 사람이고, 충돌을 하더라도 그 여파가 최소화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 그것이 기획 프로듀서의 역량이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고의 조합은 아니어도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프로듀서들은 대본이 나오면 작가에게 맞는 감독을 찾아서 ‘매칭’시켜주는 일도 한다.

감독과 작가가 서로 존중하면서 호흡이 잘 맞는다면 기획 피디는 꽤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기도 하니까요. 그런 작품은 (기획 피디들이) 다소 수동적으로 작업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B)

두 분이 대화가 안 될 때는 제가 중재하는 게 중요한 것 같고요, 이게 감정노동인 것 같아요. 설득하는 과정도 필요하죠. 제가 처음 제작사에서 일할 때 대표님이 ‘프로듀서의 덕목은 상대를 배려하는 거다’ 이런 말도 하셨던 것 같아요. (E)

작가와 먼저 만나면서 기획을 시작한 프로듀서들은 감독과 작가의 매칭, 대본 개발(디벨로핑), 캐스팅, 편성 등 드라마 제작 전반에 걸친 프리 프로덕션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생산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중재한다는 것이 공통된 경험이었다.

촬영을 나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준비가 되는 순간까지 기획 피디가 다 팔로잉을 하는 거고. 일단 온에어가 시작되거나 촬영 나가면 현장과 작가 간의 소통, 마케팅팀과의 소통 이런 것들 주로 하고, 온에어 때도 계속 대본이 원활하게 나올 수 있도록 계속 서포팅하고, 보조작가 관리 같은 것도 하고 이런 식의 일을 하죠.(A)

연구대상 기획 프로듀서들은 감독과 작가뿐만 아니라 제작에 관련된 다수의 생산자들을 대하면서 관계를 조율하고 업무를 진행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죠. 왜냐면 다 프로이고 기본 5년에서 10년간 이쪽 바닥에서 드라마를 위해 사신 분들인데 그분들이 해왔던 업적이나 경력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거고, 무시하는 순간 그 사람과는 일을 하면 안돼요(G).

프리프로덕션 일을 하면서 드라마에 참여하는 다양한 생산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기획 프로듀서들에게는 최고의 스태프를 꾸리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로 보였다. 감독에 따라서는 자신이 원하는 카메라, 조명 등의 스태프를 고집하는 경우도 많아 다양한 생산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서 우선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생산자들 가운데 기획 프로듀서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산자를 고르라면 ‘작가’라고 대답했다. 작가와 함께 했던 작품이 잘 되어 성과가 좋았을 때는 그 작가와 재계약까지 성사시키는 일 역시 기획 프로듀서의 일이다.

저랑 일을 한 작가님들이 지금도 제가 근무했던 제작사랑 계약이 너무 많아요. 제가 거의 100회를 계약해놔서. 왜냐하면 00 드라마 끝나고 회사에서는 무조건 길게 계약하라고 해오라고 했는데 작가님들이 길게 계약 안 하잖아요. 전 회사 미션을 받고 갔으니 작가님 설득을 했죠. “작가님 우리 오래 갑시다, 오래 합시다.” “그럼 나 당신 믿고 할게” 해서 100회 도장을 받았어요. 연속극도 하고 미니 도하고 섞어서요.(A)

제작사는 모두 어디나 마찬가지로 작가가 재산이기 때문에 소위 ‘대박’을 터트렸다거나 성과가 좋으면 작가를 계약으로 묶어 두고 계속 집필을 하게 하는 시스템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제작사의 규모가 크고 일 년에 일정 매출 이상을 내야 하는 회사들은 기본적으로 일 년에 3-4개 정도 드라마를 제작해야 하니 “회사 곳간에는 늘 작가 계약”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기획 프로듀서들은 성과가 좀 났던 작가들은 무조건 다 계약을 추진해야 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1.4.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들의 생존 전략은 ‘작가 확보’

연구대상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들은 한결같이 작가와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꼽았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를 거쳐 드라마의 정체성은 방송사 편성표에 있는 하나의 프로그램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판매하는 문화상품으로 변화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등장하여 성장해온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들은 작가를 중심에 두고 감독 등 드라마 생산 주체들을 조율하면서 그들의 역량을 키워왔다.

드라마는 장기간에 걸친 협업을 통해서 생산된다. 드라마 전체를 집필하는 기획하는 방송사나 제작사의 프로듀서에서부터 직접 대본을 집필하는 작가, 영상 연출을 맡은 감독, 연기를 하는 배우뿐만 아니라 카메라, 조명, 의상, 소품 등을 담당하는 수많은 스태프가 함께 일한다[31]. 이 중에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고 우호적으로 협력하기도 하는 감독과 작가는 드라마 생산의 핵심 주체이자 기획 프로듀서들이 가장 많이 대하는 생산자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에서 기획 프로듀서들은 감독과 작가라는 생산 주체가 서로 갈등을 극복하여 드라마 생산물을 잘 생산하도록 조율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꼽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렬[1]에 따르면 외주정책이 출발한 1991년부터 1997년까지는 PD 중심으로 제작이 이루어졌고, 1998 년까지는 스타 PD들이 설립한 PD 제작사들이 PBO4 시스템을 기반으로 해서 제작을 하였으며, 2007년까지는 한류 영향으로 제작의 중심이 연기자 쪽으로 쏠렸다가 2008년 이후로는 작가 중심의 제작이 이루어졌다[31]. 드라마 제작의 중심이 작가에게 쏠려 있는 상황에서 제작사들이 “성과를 낼 수 있는 작가”, “검증된 작가”, “높은 시청률을 낼 수 있는 작가”와 먼저 집필 계약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보인다.

표 2. 드라마제작산업 진화 시기별 경쟁 상황의 변화[1]

CCTHCV_2021_v21n10_286_t0002.png 이미지

대체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영화 프로듀서와는 달리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들은 대부분 제작사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감독, 작가, 방송사, 배우, 카메라맨 등 다수의 생산자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타협을 유도하며 유능한 작가를 다른 쪽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기획 프로듀서의 전략은 결국 제작사의 이윤 추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한 배경에서 기획 프로듀서 스스로 조율사, 중재자로서 역할을 하면서도 드라마의 핵심 역량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를 확보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모습은 드라마라는 ‘문화상품’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제작사와 방송사 사이의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보인다.

1991년 외주제작정책 이전, 방송사 자체 내에서 드라마가 제작이 되었을 때는, 먼저 방송사 직원인 드라마국 내 감독들이 라인업이 되고 감독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작가를 찾아 집필을 의뢰하며 드라마 기획과 제작이 시작되었지만, 외주 제작사가 주도적으로 제작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기획 프로듀서와 작가가 제작사에서 기획을 먼저하고 그에 맞는 감독을 찾는 방식으로 바뀌는 양상을 보여 왔다. 지금과 같은 제작시스템에서 기획 프로듀서들은 작가와 맞는 감독을 찾아내고 두 사람이 원만하게 드라마 제작을 하도록 조율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업무일 수밖에 없다.

한국 드라마 제작시장은 드라마 산업의 확대, 미니시리즈 드라마 편성의 증가, 새로운 미디어 진입으로 변화[30]를 맞으며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고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들은 자신의 역량을 발현시켜 줄 ‘작가 확보’에 집중함으로써 자신들의 생존 전략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대본 생산에 참여하는 드라마 생산자로서의 정체성

1.1. 드라마 대본의 퀄리티(quality)를 책임지고 작가의 역량을 끌어 올리는 생산자

연구대상 기획 프로듀서들은 드라마 생산자로서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인 작가 발굴’, ‘대본 디벨로핑’, ‘드라마 구성’ 등의 단어를 제시하며 자신들은 드라마 제작과정에서 생산자라고 했다. 특히 작가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측면이라든가, 대본의 개발(디벨로핑)과정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생산자임을 드러냈다. 드라마 텍스트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감독과 작가보다 뒤지지 않았다. C는 프로듀서들은 쉽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생산자로서 드라마에 대한 확고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프로듀서가 (드라마에 대해) 감독과 작가와의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방식과는 다른, 스킬의 차이죠. 프로듀서는 말하지 않아요. 내 것이라고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요. 그런데 ‘(드라마를) 내 것’이라고 생각해요. 끝까지.(C)

E는 “드라마 생산자가 맞느냐?”는 직설적인 질문에 “생산자가 맞다”고 대답하며 드라마 텍스트들이 실제로 플랫폼에 얹어질 수 있게 하는 게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이라고 했다. 작가 발굴과 대본 개발(디벨로핑), 플랫폼에 얹히는 편성까지 책임지는 기획 프로듀서는 드라마 생산자가 맞다는 것이다. A는 기획 프로듀서에게 핵심적인 것은 작가와의 호흡이라며, 작가에게 길을 제시해주고 방향을 제시해주면서 드라마 대본을 만들어내는 ‘길라잡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연구대상 기획 프로듀서들은 ‘길 안내’, ‘방향 제시’, ‘작가의 조력자’, 등의 표현을 하면서 작가와의 관계에서 있어서는 대부분 ‘특별함’을 보였다.

작가님들하고는 진짜 벗이죠. 작품을 하는 동안은 말동무, 제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 좋으면 같이 웃어주고 힘들면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돼야죠. 작가님이 힘들 때 제일 첫 번째로 생각나는 사람이 제가 되어야죠. 그게 제일 중요한 거 같고. 그만큼 서로 신뢰감을 쌓아야 되고.(G)

작가와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견이 있을 때는 작가를 존중하면서 타협과 해결로 가는 방법도 제시했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골방에서 자기 세계 안에 갇혀있는 경우가 많아서 자기 검열이 굉장히 심하고 누군가 판단해 주지 않으면 다음 프로세스로 못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서 어떤 결정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A는 그런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이 기획 프로듀서이기 때문에 아이템 선정부터, 시놉 단계, 캐릭터 연구 단계에서 작가가 믿고 “드라마 작업의 혈을 뚫어 줄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대상 기획 프로듀서들은 작가들의 대본 개발과정에서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매우 긴요하게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역량이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기획 프로듀서의 능력에 따라 구체적으로 몇 퍼센트까지 대본의 퀄리티나 작가의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느냐는 질문에 작가가 신인이냐, 기성 작가냐, 호흡 이잘 맞는 작가냐, 그렇지 않은 작가냐에 따라 다르지만 G의 경우는 30%라고 대답했고, C의 경우에는 40-60%, E의 경우는 60-70%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A는 구체적으로 수치화시키는 건 어렵다고 하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관여를 한다며 신인 작가의 경우에 대한 의견을 주었다.

신인작가들을 내가 디벨롭한다 라고 접근했을 때는 그냥 기성작가들처럼 일단 맡겨놓고 하는 게 아니라 “자, 어떤 아이템을 해보자”라고 했을 때 이 드라마를 구축하기 위해서 어떤 어떤 요소가 필요하고, 어떤 구성의 흐름이 중요하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트레이닝을 시키는 정도까지 가야 어떻게 보면 (프로듀서의) 완성형이라 볼 수가 있는 거예요.(A)

E의 경우에도 데뷔하지 않은 신인작가가 처음 0000 드라마를 했을 때, 감독이 대본에 대한 리뷰를 하는 양만큼 채널과 해당 제작사 기획 피디들이 대본의 신 (scene)이나 시퀀스까지 구체적으로 논의를 하면서 대부분의 대본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술회했다. 신인 작가의 경우, 끊임없이 대본 하나하나를 “케어”해 주고 같이 회의해주고 같이 수정해주는 정도까지 가는 게 능력 있는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이고, 기성작가들의 경우에는 드라마의 “텐션”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B는 기획 프로듀서들이 작가들의 역량을 끌어올리고 창작의 아이디어는 가지고 있으나 결국 대본으로 펼쳐지는 콘텐츠인 드라마의 창작자는 아니라고 했다. 동시에 “창작자는 아니지만 생산자는 맞다”며 작가들이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해 좋은 대본이 나올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이라고 했다. A는 기획 프로듀서는 “드라마 생산자이긴 하지만 작가의 조력자로서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캐릭터에 대한 의견도 내놓고 대본의 불편한 점에 대해서는 대안을 가지고 작가들과 대본 수정을 해 나간다고 한다. 작가들과의 관계는 자의식이나 자존감 정도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지만, 기본적으로 선을 넘지 않은 선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여 작가들 설득하여 대본의 품질을 높인다고 한다.

생산자로서 대본 개발에 참여하고 드라마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기획 프로듀서에게 어떤 자질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책임감’. ‘로열티’. ‘트랜드를 읽는 눈’, ‘대본을 보는 눈’, ‘어떤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지구력’,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세계관’이란 표현을 썼다. 또한 ‘설득을 위해 상대방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언변이나 인상’,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획 피디는 대중을 파악할 줄 아는, 시청자의 눈높이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죠. 곧 스토리의 상업적 가치를 높이는데 필요한 사람입니다. 기획 피디는 작가가 하는 고도의 집필 작업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대중의 정서를 궤뚫는 작품이 되도록 밀실에서 집중적인 작업을 하고있는 작가에게 계속 길 안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B)

C는 대본을 모니터하는 역량, 어떤 작가의 장점을 잘 간파하고 그 장점을 잘 살려서 대본을 좀 더 나아지게 “디벨로핑하는 역량”과 실제로 쓰는 역량은 좀 다른 거 같다면서 기획 프로듀서가 쓰는 역량은 실제 작가보다는 부족하겠지만 그걸 알아보고 발굴하고 좋은 방향으로 디렉션(direction)을 주고 그거를 끌어내는 역량을 발휘하는 지분이 있다면, 대본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지분은 60%까지는 있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주었다. 이러한 현실은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기획 프로듀서의 위상이 점점 확고해지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기획을 하면 기획에서 끝나고, 편성되면 “이제 제작파트에 넘겨. 어차피 제작회의는 감독이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했다면, 요즘엔 외주사들도 많이 변하고 있어요. 기획을 해서 편성이 됐으면 공개적으로 소개해요. 이 사람이 기획한 사람이야. CP가 대본 회의를 한다고 해서 이 사람(기획자)이 빠지지 않죠.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이 히스토리(history)를 더 많이 알고 있고, 이 작가의 장점을 더 많이 관찰한 사람이기 때문에 계속 그렇게 끝까지 가는 경우들이 더 많은 거 같아요.(D)

E는 기획 프로듀서가 꼭 갖춰야 할 자질로 두 가지를 꼽으며 “대본 보는 눈 즉 작품을 많이 알고 이해하고 있는 눈과 사람과 대화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A는 “기획 피디는 인성, 가치관, 대본 보는 눈, 대본의 옥석을 가려내는 혜안이 필요한데 사실 이런 것들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면서 기획 프로듀서로서 타고난 자질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획 피디를 하다가 작가로 전업을 도전하는 사례들이 있으니 그 변화도 지켜볼 만합니다. 또 기획자가 원작을 선택, 구매하고 각색을 하는 컨텐츠들이 다량 나오고 있으니 작품에 대한 지분이나 저작권도 변화 가능성 있다고 생각합니다.(B)

B는 기획 프로듀서들의 새로운 변화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하면서 드라마 생산자로서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이 더욱더 확대될 것이라는 기대를 드러냈다.

1.2. 보람과 성취를 느끼며 제도적인 난관과 압박을 마주하는 TV 기획 프로듀서

드라마 제작과정에서 생산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작가 발굴, 대본 개발, 드라마 기획을 하고 있는 기획 프로듀서들에게는 그들의 노력과 성공에 따른 보람과 성취의 순간도 많았다. G는 작가에게 새로운 대본의 흐름과 라인 만들어서 제시했는데 받아 주었을 때, F는 드라마 성공적으로 끝내고 무대 위에서 인사하며 박수 받을 때, B는 첫 계약한 신인작가와 작업이 운이 좋게도 편성을 받고 성공해서 자신의 기획이 인정받았던 경우를 보람과 성취가 느껴지는 순간이라고 했다. A역시 자신의 기획 능력이 인정받을 때가 가장 보람이 있었다고 술회했다.

결정권자들 방송사 채널에서 꺼리던 이야기인데 밀어붙여서 보란 듯이 잘 됐을 경우에 그런 것도 보람 있고, 아무도 못 찾아낸 신인작가라는 옥석을 딱 가려서 ‘짜잔!’ 했는데 사람들한테 인정받을 때 그럴 때 엄청 보람되죠. 캐스팅에서도 그런 보람을 느낄 때 있어요. 정말 생각지 않았던 카드인데 왠지 모르게 감으로 밀어붙였는데 잘 돼서 칭찬받을 때 기분 좋죠.(A)

연구대상 기획 프로듀서 중에 36세로 좀 젊은 층에해당되는 E는 새로운 세대 기획 프로듀서답게 성취와 보람의 순간을 보다 큰 범위에서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감독과 프로듀서가 동일시되던 시대와 환경과 많이 바뀌었어요. 프로듀서가 작가나 감독보다 상위 개념으로 생각되는 시장 환경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구요. 권력을 가졌다고 좋은 게 아니라 그러다 보면 객관적인 눈으로 작가 감독님들과 함께 협업을 할 수 있는 거.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메이저 작가5 감독님 말고 신인 작가·감독님들과 작업할 때 프로듀서로서 더 많은 인풋(input)을 집어넣어서 뭔가 나오면 그게 프로듀서로서 가장 보람찬 것 같아요.(E)

한편 기획 프로듀서가 편성의 자율권이나 감독·작가의 선택권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갈등 상황을 경험하기도 한다. ‘조율사’, ‘중재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드라마 생산과정에서 생기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갈등을 마주하고 해결해야 하는 책임감이 있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C는 그런 경우 “적어도 기획을 누가 왜 했고 어떻게 시작했는지 생각하고, 끝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편이예요. 왜냐면 원칙과 초심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상황에 휩쓸려서 놓쳐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라고 털어놓았다. 그런 과정에서 바람직한 주장과 설득, 토의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how to’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요. 왜냐면 사실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프로듀서잖아요. 이런 노비가 없죠. 내가 그래도 매니저보단 나은 것 같다고 내가 그랬어요. 하지만 사실은 정말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죠.(F)

기획자로서 드라마 기획, 편성, 캐스팅, 제작 등 전 과정에 참여하다 보니 별의별 사건들이 다 생긴다고 했다. F는 “한글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한글은 다 배운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말이 안 통해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일들이 너무 많아요.” 라며 대화가 안 되는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자리라는 게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A는 아무래도 작가의 입장과 연출의 입장이 상당히 첨예할 때가 많다며 작가는 사실 현장을 보고 글을 쓰는 게 아니고 자기 안의 세계에서 글을 쓰고, 쓰인 대본을 가지고 현장에서는 또 현장 나름대로 호흡이나 정서에 따라서 약간의 이견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걸 중간에서 조율하는 게 제일 어렵다고 했다. 솔직히 “작가의 주장과 연출의 주장 사이에서 이걸 융화시키는 작업이 제일 힘들다”며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C는 드라마 제작과정에서 작가와 감독의 갈등은 흔하면서 격렬하게 진행된다면서 자신의 심정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기획 단계라면 가능성을 계속 시뮬레이션 해볼 거 같아요. “이 상태로 갈 수 있을까? 이거는 가다가 무너질 거 같다. 혹은 그냥 좌초될 거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좋은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가능성 없다고 하면 그냥 접는 거 같고요. 포기(?), 아니면 다른 새로운 판(?). 솔직하게 상의를 하겠죠.(C)

C는 더 복잡한 문제는 방송 도중에 작가와 감독과 배우 등 다양한 생산 주체의 갈등이 불거져서 제작에 타격을 주는 경우라고 했다. 그때는 이미 자본이 들어간 상태고 드라마 제작의 손익과도 연관이 되는 상황이라 최대한 깨트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가는 게 목표가 된다고 한다.

있는 요소를 제거하기 보다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으려고 노력하는 거 같아요. 작가를 더 투입하거나, 아니면 연출자를 좀 더 투입하죠. 배우랑 부딪히면 B팀 감독으로 붙이거나, 감독과 작가가 부딪히면 작가 감독을 다이렉트로 대화하게 두지 말고 프로듀서가 따로따로 얘기를 해서 알고는 있게 조율하는 작업을 하죠.(C)

또한 드라마 제작과정에서는 감독과 작가의 갈등 못지않게 방송사 CP, 원작자 등 다수의 생산 주체들과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했다. G는 소설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저작권을 확보하고 대본 컨폼 (confirm)도 많아야 했던 드라마가 당초 예상과 달리 너무 달라졌을 때 작가에게 원작의 취지에 맞게 드라마 내용을 수정해 달라는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가 방송사 CP에게 곤욕을 치렀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드라마는 거의 ‘생방’6수준으로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다. 그런 경우 기획 프로듀서가 뭇매를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나중에는 오해가 풀렸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하루 종일 다툼이 있었고, 많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또 방송 제도적인 문제 때문에 기획 프로듀서로서 압박을 받으며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도 있다고 했다. 기획 프로듀서는 준비된 대본을 가지고 방송사를 상대로 편성을 따낸다. 아무리 기획 프로듀서가 능력이 좋아도 편성은 채널 플랫폼에서 받아야 하는 거라서 의도치 않은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F는 어느 날 갑자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방송사에서 편성을 취소하는 경우를 예를 들었다.

여기서 편성을 빼면 진짜 000되는 거잖아요.(중략) 나중에는 그럼 제가 썼던 비용 다 주시고 가져가시라고 저 안 하겠다고 한 적도 있어요.(F)

불시에 이런 일이 있어도 드라마 기획자는 그런 상황을 다 책임지고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고 했다. 방송사에서 방송 도중 작가나 감독의 문제에 개입을 해서 무리한 요구를 할 때도 있는데, 그럴 경우 기획 프로듀서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했다. G는 ‘갑’의 위치에 있는 방송사 CP가 작가를 일방적으로 새로 투입해서 기존의 작가와 만난 적도 없이 공동 집필을 하는 이상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G는 “작가 둘이 서거의 만난 적은 한 번도 없고요, 초고를 000 작가님이 쓰면 그걸 가지고 다른 작가가 자기가 쓰고 싶은 것만 취합을 하면서 좋은 라인들만 빼서 가는 것”이라며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공동 집필을 보면서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작가뿐만 아니라 ‘갑’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요구를 할 때가 있어요. 드라마 ‘0000’ 때도 외부 연출을 두 명 섭외해서 방송사에 갔는데 연출도 안 하는 000 감독님을 연출로 크레딧을 올려야 된다. 이런 거 자체가 잘못된 거죠.(G)

G는 이러한 관행은 방송사 내부자들만의 불문율이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면 자기들의 영역이 깨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된 걸 알면서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1.3. 드라마 생산자로서 TV 기획 프로듀서의 성장과 편성 권력의 벽

대본을 쓰거나 현장에서 연출을 하지는 않지만 드라마 생산자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기획 프로듀서들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면서도 부당한 제도적 압박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에 투자 자본이 몰려들고 제작사 간 기획 경쟁의 기획이 중요해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기획 프로듀서의 능력이 주목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동안 드라마 제작환경의 변화로 생산주체들의 역할과 권력 관계가 달라지며 드라마가 제작되어왔지만, 기획 프로듀서가 작품에 대한 지분이나 저작권에 대한 기대를 가질 만큼 드라마 생산과정 내에서 생산자로서 성장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장점을 더 많이 관찰하고 작가와 호흡을 맞춰 드라마 텍스트의 품질을 높이는 생산자로서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은 문화상품으로서 변화한 드라마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이제 드라마는 소비자들에게 선택을 받아야 하고 선택받기 위해서 생산자들은 성공하는 드라마 텍스트를 만들어내야 한다. 과거에는 ‘성공하는 드라마 텍스트’의 핵심 주체로 작가와 감독으로 충분했다면, 이제는 대본 개발 능력, 상업적 판단능력을 가진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이 절실하게 되었다.

이는 드라마의 기획 프로듀서들이 드라마 기획·제작과정에서 얻은 ‘암묵적 지식’으로 실제로 기획 과정뿐만 아니라 대본의 전체 구성은 물론 구체적인 시퀀스나 신 (scene)까지도 관여하면서 생산자로서 정체성을 더욱강화시키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기획 프로듀서들이 대본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관행은 제작사 간의 기획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작가확보를 위해 투자한 작가 계약금의 신속한 회수를 위해 편성을 빨리 받고자 하는 제작사의 노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기획 프로듀서들이 제작사 소속으로 제작사의 이윤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 자신들이 기획을 한 드라마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대본의 완성도를 높여 문화상품으로 드라마를 성공시키려는 전략인 셈이다.

반면 과거의 비해 제작사의 역량이 커지고 기획 프로듀서의 영향력이 확장됐다 하더라도 아직도 편성의 권한을 쥐고 있는 채널 플랫폼의 힘은 막강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미국의 넷플릭스가 우리나라에 진출한 이후 OTT 시장이 커지고 ‘텔레비전 없는 드라마’가 일상화되었지만, 지상파와 케이블의 방송사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편성의 권한이 있는 채널 플랫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드라마 제작에 관여하고 생산 주체 사이의 권력 관계에도 개입한다. 원하지 않는 작가의 투입, 연출하지 않은 감독을 크레딧에 넣는 관행은 기획의 참신함과 추진력으로 드라마 생산과정에서 생산 주체로 자리 잡은 기획 프로듀서에게 아직은 넘지 못할 권력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1991년 외주제작 정책이 시작되면서 바뀐 드라마 생산 지형이 기획 프로듀서라는 직업을 탄생시켰고 드라마 기획과 작가관리, 대본 개발이라는 영역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하며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고 있지만, 아직도 채널 플랫폼이 행사하는 편성권, 제작의 부당한 간섭에서는 자유롭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3. 드라마 생산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권력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TV 기획 프로듀서

1.1. 신인작가 발굴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는 전략

연구대상 기획 프로듀서들은 자신들이 가진 장점으로 ‘대중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 감각을 파악’, ‘대본이 드라마화 되는 결과를 영상으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능력’, ‘창작자는 아니지만 좋은 창작물을 만들 수 있게 유도하는 능력’, ‘작가의 관점이 아닌 시청자의 관점에서 객관적인 모니터링과 방향성 체크’ 등을 들면서 신인 작가 발굴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B는 신인 작가들과 기획 작업을 하고 싶어서 자신의 사비를 들여 1년여 정도 신인작가 두 팀과 기획 작업을 했던 경험을 이야기했고, A는 “스펀지처럼 잘 흡수하는 신인 작가”라는표현을 쓰며 신인작가와의 작업에 대해 만족감을 드러냈다. E는 “신인 작가나 감독님들한테 기회를 많이 드릴 수밖에 없는 외형적, 외부적 요인들이 있다”면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소위 잘나가는 작가·감독님들은 계약으로 많이 묶여 계셔요. 그게 채널이든 제작사든. 그렇다보면 그 작가님들이 묶여 계시는 동안 채널은 편성을 해야 하고 편성할 때 서로 에고가 있기 때문에 쉽게 편성이 되지 않죠. 공룡 대 공룡싸움, 이렇게 되면 편성이 쉽게 되지 않고 서로 기싸움 하고 그러다 보면, 신인작가들에게 틈새시장이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신인작가님들 중에 좋은 글을 찾게 되고 그래서 지금의 tvn도 보면 신인작가 작품 비율이 굉장히 높아졌어요. 50% 이상이 되는 걸로 알고 있고요.(E)

드라마에 대한 대중적 취향을 읽는 능력과 기획력을 가진 기획 프로듀서들에게는 신인작가를 발굴하여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일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역할을 확장하는 일로 여겨진다. 이 일은 작가의 의지와 관심도가 높은 소재를 정하고, 채택된 소재가 대본으로 잘 구현되도록 구성을 함께 하면서 신인 작가들이 드라마 제작환경에 적응하도록 이끄는 작업이라고 한다. A는 “신인작가의 덕목이 겸손함, 열린 마음”이라면서 본인이 가지 않았던 길을 많이 가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해서 들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글을 잘 쓰고 글 쓰는 법을 안다면, “구성 이서 투를 수 있고, 대사의 에지(edge)가 부족할 수 있고, 지문을 표현하는 디테일이 떨어질 수 있고 그런 거는 굉장히 국소적인 것”이라고 표현하며 신인작가와의 작업에 기대를 드러냈다. B 역시 기획 프로듀서로서 가장 보람된 순간을 새로운 작가를 찾아내 기획하고 대본 작업을 할 때라고 강조했다.

신인작가와 대본작업은 치열하게 작업할수록 애정은 더 갈 수밖에 없는데 그 작품이 방송사에 편성이 되고 캐스팅 과정에서 배우들이 대본을 좋아하여 작품에 참여하고. 방송이 되어 시청자들이 환호할 때, 그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B)

E에 따르면 기획 프로듀서가 대본 작업에 깊이 참여하고 신인작가를 발굴하여 작업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기획피디 중에 작가교육원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다며 “전문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수반까지 수료하고 나오는 경우도 많고, 작가로서 머리(역량)를 갖고 싶은 것도 있지만 작가님들 풀(pool)을 좀 알고 싶은 것도 있다”고 요즘 분위기를 전했다.

신인작가님들의 편성이 매우 용이해졌고, 회사가 설령 수익을 못 보더라도, 메이저 작가님들, 김은숙이나 박지은 작가님의 작품을 한두 작품 가지고 다시 리쿱(recoup)을하고 그렇게 하면, 신인작가님들이 글을 쓰고 방송을 하면서 레벨업(level up)을 하시거든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가풀(pool)이 넓어지는 현상이 생기는 것 같구요.(E)

E가 말하는 이른바 ‘메이저 작가들’은 모두 계약에 묶여 있고 드라마 아이템을 진행하는데도 작가가 쉽게 고집을 꺾지 않으니 편성이 늦어지지만, 아직 경험이 적은 신인작가들은 자신을 낮춰서라도 편성을 받는 게 중요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1.2 기획력과 자금력을 가지고 독립하는 프로듀서들

연구대상 기획 프로듀서들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거나 웃음을 가져다주는 드라마(A)”, “편한 공감뿐만 아니라 불편한 공감도 이끌어 내는 따뜻한 드라마(D)”, “우리 인생사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드라마(A)”, “눈물이 날 정도의 따뜻한 드라마(G)” 등의 표현을 하면서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드라마에 대해 말했다. A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드라마로부터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과거에 비해 드라마 시장은 급격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에 루틴하게 제작해왔던 방식대로만 해선 드라마는 이제 못살아 남아요. 이제는 드라마를 소비하는 메인 층들이 지금처럼 TV에서 10시 ‘땡!’ 하면 미니시리즈 보고 이러지 않아요. 그럼 뭐가 달라져야 되느냐, 드라마가 문법이 달라져야 되거든요. 예전처럼 10시에 앉아서 70분 보다가 다음날 또 10시에 와서 보고 이러지 않기 때문에 그들한테 뭔가를 끊임없이 이 드라마의 콘텐츠를 소비를 하게끔 하려면 당연히 그 사람들 입맛에 맞는 시스템이 필요한 거예요.(A)

기획 프로듀서들은 ‘문법이 달라진 드라마 제작 환경’ 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E는 “감독이나 작가가 예술성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하면 프로듀서는 그것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제반 사항을 만들어 주고 조금 더 나아가서 그들이 일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라며 드라마 외주제작 시스템에서는 능력 있는 좋은 작가와 감독을 잘 선별할 수 있는 프로듀서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획 프로듀서들은 축구로 치면 구단주 같은 사람이어서 좋은 작가와 감독을 찾아내 좋은 환경에서 그들이 일을 잘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G는 감독과 작가가 “자기가 애를 낳긴 했지만 온전하게 예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기획 프로듀서”라며 비유적으로 말했다. F는 “프로듀서는 기본적으로 돈을 끌어올 수 있어야 하고 돈을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드라마 제작을 위해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이들은 영화 프로듀서와 드라마 프로듀서와의 차이에 대해서도 확고한 차이점을 느끼고 있었다.

영화는 어쨌든 감독의 예술이라고 하고 우리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어쨌든 영화 프로듀서는 영화 한 편의 살림을 책임지는 역할이 굉장히 크죠. 우리 드라마 쪽은 살림에 대한 것은 제작 프로듀서들이나 제작 총괄 프로듀서들이 주로 하는 거고, 기획 프로듀서는 이 드라마의 정체성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베이스를 책임진다고 보시면 되죠.(A)

B도 영화 프로듀서는 “프로젝트별로만 움직이는 경향이 많아서 여러 개를 동시에 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드라마 기획 피디는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하는 게 대부분이고 예산이나 제작운용에 관한 일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며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는 자금 운영이나 투자금 유치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들었다. E는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가 조금은 집중하는 부분이 크리에이티브에 인벌브(involve) 되기도 하고 직접 글을 쓰기도 하고 직접 작가와 계약을 하기도 한다.”며 창작의 영역에 더 깊게 관여하는 특징을 꼽았다.

너무 드라마를 제작하는 채널과 제작사도 많아서,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즘의 작가, 감독님들은 직원들도 있지만 프리랜서가 많아서 내가 어디 가서 어떻게 내가 일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분들을 알맞은 곳에 계약해 주고 일할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 프로듀서인 것 같아요.(E)

‘작가와 감독을 찾아 계약’을 해주고,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제반 사항을 만들어’ 주고, ‘크리에이티브 한 부분에 관여’하고, ‘돈을 컨트롤 할 줄 아는’ 기획 프로듀서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독립을 해서 독자적인 제작사를 차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제작사에서 주도했던 여러 편의 드라마들이 흥행에 성공해서 2016년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투자를 받아 기획 프로듀서로는 업계 최초로 독립을 한 A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드라마 시장에서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이 앞으로 어떻게 확장될지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기본적으로 판을 짜는 시대가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어느 채널이랑 이런 이런 콘셉트의 드라마를 하는데, 나는 이번 콘셉트엔 이런 작가를 붙이면 좋을 것 같고, 이런 작가를 데리고 어떤 어떤 대본을 생산해내면 좋을 것 같고, 여기에 캐스팅을 누굴 붙이면 좋을 것 같고... 한마디로 미국 시스템인거죠.(A)

저는 우리나라도 헐리우드의 쇼런너 개념 같은 것으로 결국 비슷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숀다 라임스나 제임스 카메론이나 이런 분들이 감독 출신이지만 그래도 쇼런너 하고 계시고 프로듀서 출신 쇼런너들이 되게 많잖아요. 그런 분들이 영역을 넘나들고 있고, 저희 안에서도 영역을 넘나드는 분들이 생기고 있거든요.(E)

A를 이어 드라마 생산 현장에서 기획을 했던 프로듀서들이 투자를 받아 독립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E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옛날에는 제작사 대표가 단순히 전주(錢主)였다면 이제는 ‘전주 플러스 기획도 할 줄 알고 이 업계도 잘 아는 프로듀서가 했으면 좋겠어.’ 이런 판이 되고 있는 것 같다”며 앞으로 기획력과 자본력을 가진 기획 프로듀서가 제작사를 설립해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F는 기획 프로듀서의 약진과 확장된 역할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다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감독에서 배우로 갔다가 작가로 갔다가 프로듀서 시대가 될 거다”라고 사람들은 얘기를 해요. 그런데 그러기에는 모든 일들이 좀 명쾌하지가 않아요. 너무 변수가 많거든요. 기본적으로 프로듀서 시스템이라면 사실은 어차피 수학 공식처럼 되어야 하는 거거든요. 그러려면 작가도 정말 미드처럼 크리에이터 시스템이 되어야 되는 거구요. 미국에는 작가 프로듀서가 많고 그 사람들에게 파워를 가져다주는 저작권이 있어요. 근데 지금 현재로 우리나라 프로듀서나 제작사가 저작권이 없어요.(F)

기획 프로듀서의 영역이 넓어지고 입지가 단단해지는 한편, F의 지적대로 미국처럼 저작권을 확보하지 못한 프로듀서들이 얼마만큼 힘(power)을 가지고 영역을 확장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지점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프로듀서는 미국처럼 저작권을 가지고 성장한 경우가 아니라서, 한류를 바탕으로 엔터테인먼트사업에 투자하려는 거대 자금으로 새로운 기획 프로듀서 시장이 형성되고 기획력과 자금력으로 세력을 키워나갈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건 기획력으로 회사를 차리고 대기업의 투자를 받는 제작사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점점 기획 피디의 역량을 커질 것 같아요. 제작사를 차릴 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분들이 작가·감독한테 어떤 존재들인지 부각이 될 것 같구요. 헐리웃처럼요. 헐리웃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고 좀 꼰대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듀서, 작가, 감독들이 같은 역량으로 다 따로따로 존재하잖아요. 영화판처럼 드라마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E)

지금 이미 작가 혼자 뭐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에요. 이 모든 걸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지금 이 변화되는 시기가 정말 공부해야 되는 시기가 됐어요. 콘텐츠를 가지고 내가 어디에 가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도 공부를 해야 되거든요.(F)

“참신한 기획”, “대중의 정서를 읽는 안목”, “대본을 보는 눈”으로 기획력을 조직화시키고 작가와 감독을 선별하여 매칭시키며 드라마 산업의 새로운 축으로 등장한 기획 프로듀서는 기대만큼이나 내면의 또 다른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반발이라도 앞서야 되고, 앞서서 봐야 되고, 앞서서 걸어야 되고 그런 훈련과 스텐바이가 되어있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도태되고 리타이어(retire) 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 트랜드나 이 시대와 조류에서 유행에 뒤처지는 ’올드 제너레이션(old generation)‘이 되는 구나. 이런 생각이 스스로 들 때. 그럴 땐 조금 물러나야 되는 거 아닌가.(C)

“몸으로 직접 부딪히고 몸으로 직접 경험해보면서”(A). “맨땅에 헤딩하면서”(C), “무슨 직책인지도 모르면서 드라마 일을 했던”(H), “캐스팅 디렉터에서 시작해 드라마 보는 눈을 키우며(B)” 드라마 기획에 뛰어든 TV 기획 프로듀서들은 이제 드라마 생산 주체에서 빠질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며 드라마 생산지형에 새로운 역학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드라마 제작 편수가 많아지고 기획력이 중요해지면서 기획 프로듀서에게 자본을 대며 드라마 제작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자본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1.3. ‘프로듀서 주도형 기획방식’의 도래

이용석[30]은 현재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시장의 새로운 리소스(resource)의 등장으로 기획 프로듀서를 뽑으며 이미 과거에도 존재해 왔던 A급 작가 중심의 ‘작가 주도형 기획 방식’에 ‘프로듀서 주도형 기획방식’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고 보았다. A급 작가를 확보하지 못한 기획 프로듀서가 일반 작가와 함께 공동 작업 체계를 갖추고 있는 현상에도 주목했다. 2011년에서 2020년까지 미니시리즈 집필 작가는 총 452명인데 그중 A급 작가는 20명인 4.4%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대부분의 기획 프로듀서들 일반작가와 작업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했다[30].

제작사 내부적인 요인도 작동한다. 기획 프로듀서들이 많아지면서 자신의 아이템을 가지고 기획을 하려는 성향이 뚜렷해지는데 이런 경우 ‘메이저 작가’가 붙지 않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미 성과를 내고 시청률로 검증받은 ‘메이저 작가’가 다른 사람의 기획안으로 드라마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기획 프로듀서들은 신인 작가를 찾아 자신의 기획안으로 드라마를 기획하려는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기획 프로듀서들은 ‘메이저 작가’와 ‘메이저 감독’이 ‘기싸움’을 하며 편성이 늦어지는 틈을 타서 자신이 준비한 기획안으로 신인 작가와 드라마 대본을 만들어 편성에 성공하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와 감독이라는 강력한 생산 주체들 사이에서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드라마를 기획·제작하면서 드라마 생산자들 사이에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기획 프로듀서들이 신인 작가와의 호흡을 중요시하며 발굴에 나선 것은 현재 드라마 생산과정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 노동렬[1][표 2]은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시장에서는 2008년부터 ‘작가중심’으로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았는데, ‘작가중심’이란 결국 대본 중심이고 대본이 좋을 때는 언제든지 드라마 제작이 가능한 제작환경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기획 프로듀서들이 작가를 발굴하고 드라마 아이템을 키워서 좋은 대본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능력을 인정받은 기획 프로듀서들에게는 자본이 따라붙고 자신들이 성장한 제작사를 떠나서 독립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CJ E&N 소속으로 스튜디오드래곤에서 ‘나의 아저씨', '나쁜녀석들', '또 오해영',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등의 기획, 제작에 참여했던 박호식 프로듀서는 2017년에 <바람픽처스> 설립해 독립했다. 그 후 2020년 8월에 카카오M이 바람픽쳐스 100% 지분을 인수했다[32]. 미국계 영화사에서 일했던 변승민 프로듀서는 레진엔터테인먼트로부터 투자를 받아 제작사를 설립한 후, 2021년 1월 독립하면서 <클라이맥스 스튜디오>로의 사명 변경 소식과 함께 총 18편에 달하는 향후 라인업을 공개해서 화제를 모았다[33]. 2021년 6월에는 다시 jtbc에 회사 지분을 넘기면서 현재 가장 주목받는 제작사로 성장하고 있다. <클라이맥스 스튜디오>는 영화 쪽과 드라마 쪽 모두에 인프라가 있는 것을 장점으로 최근 다양한 드라마를 만들어내면서 프로듀서가 설립한 제작사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드라마의 기획력을 인정받은 기획 프로듀서들이 대기업의 엔터테인먼트의 자금을 끌어들여 제작사를 확장하고 드라마의 기획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기존의 형성된 작가, 감독, 배우 등 드라마 생산자들의 권력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며 새로운 역학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Ⅵ. 맺는말

이 연구 결과, 1991년 외주제작 정책이 시작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직업인 TV 기획 프로듀서는 작가를 발굴하고 계약하며 대본 개발을 돕는 조력자에서 “창작자는 아니지만 드라마 생산자”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생산 주체로 바뀌었으며 현재 우리나라 드라마 생산과정 속에서 새로운 역학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송사에서 드라마가 독점적으로 제작되는 시대에서 제작사에서 먼저 드라마를 기획하여 편성을 받는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역할이 생긴 TV 기획 프로듀서는 초기에는 드라마를 기획한다기 보다는 작가의 집필에 협력하고 도와주는 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류 열풍이 불고 드라마 제작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던 2000년 중반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제작사·방송사 간드라마 기획·제작 경쟁이 치열해지고, 2011년 종합편성 채널 개국, 케이블의 드라마 기획 열풍 등의 변화를 겪으면서 기획 프로듀서는 드라마 생산과정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생산 주체로 진화하게 된다.

“조율사”, “중재자”, “어레인저”, “길라잡이” 등의 역할을 자처하는 TV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는 드라마에 맞는 작가와 감독을 선별해서 매칭(matching)하고, 다수의 생산자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여전히 편성권을 가지고 있는 채널 플랫폼의 권력 앞에서는 편성이 무산되기도 하고 부당한 제작 간섭을 받는 난관을 만나기도 한다. 아직도 막강한 ‘갑’의 위치에 있는 방송사의 압박과 전통적인 생산자로서 드라마 제작과정에서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는 작가와 감독, 배우들 사이에서 TV 기획 프로듀서들은 ‘신인 작가와의 작업’이라는 전략을 세워 자신의 기획안으로 드라마 대본을 완성시켜 성공하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이제 드라마는 단순한 방송의 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뛰어난 영상콘텐츠로서 전 세계적으로 팔리는, 소위 ‘돈이 되는’ 산업 소비재가 되었다. 지상파에서 지정한 시간에만 볼 수 드라마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콘텐츠를 돈을 내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는, ‘내 돈 내산’7하는 드라마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드라마는 과거 대중예술 영역에서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영상제조업영역으로 변화된 측면이 있다.

문화상품이 된 드라마는 완성도 있는 영상콘텐츠인동시에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게 되고 산업적인 측면에서 ‘많이 팔리는’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한사람에게 의존한 기획과 개발과 제작보다는 한 명의 스태프라도 더 있는 것이 상업적 가치의 판단을 높일 수 있다는 배경에서 성장한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의 영향력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기업의 자본이 ‘상품으로서 드라마’에 주목하고 능력 있는 기획 프로듀서의 제작사 설립을 돕고 있어서 미국과도 다르고 다른 아시아 국가와도 다른 독특한 한국형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 체제가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기획·제작 시장에 자본이 들어와 수익 창출을 위한 경쟁이 지금보다 더욱 치열해지면 기획 프로듀서의 능력에 따라 드라마 생산자 내의 권력의 역학관계도 현재보다 더 역동적으로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연구는 그동안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TV 드라마 프로듀서에 대해 ‘가까운 거리’를 지향하는 심층 인터뷰와 참여관찰이라는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드라마 생산과정에서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과 정체성, 노동경험을 살펴봄으로써 드라마 생산자연구가 지향하는 미디어 생산 문화와 노동 정체성, 그리고 생산자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드라마 생산 내에서 감독과 작가 외에도 다양한 생산자들과 관계를 맺는 TV 기획 프로듀서들이 겪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갈등과 타협에 대한 분석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또한 기획 프로듀서 1세대 중심으로 이루어져 최근에 기획 프로듀서 세계로 들어온 ‘3세대 기획 프로듀서’의 목소리는 구체적으로 다룰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앞으로 드라마 생산 지형 내에서 생산 주체로서 중추적 역할을 할 젊은 기획 프로듀서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기획 프로듀서들이 설립한 제작사에 대기업 자본이 몰려들어 드라마 기획과 제작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기획 프로듀서들의 전략에 대한 연구, 방송사 중심 제작·유통 등을 벗어나려는 미국식 전문 스튜디오 설립이 확산되는 제작환경에서 기획 프로듀서들의 역할에 관한 연구 등 후속 연구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맺는다.

* 본 연구는 2020년도 단국대학교 대학연구비 지원으로 수행되었습니다.

References

  1. 노동렬, 방송 드라마 제작 산업의 공진과 과정과 인센티브 딜레마,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2. H. Braverman, "Labor and monopoly capital: The degradation of work in the twentieth century," NYU Press, 1998.
  3. 박진선, 김새봄,이헌율, "한국 드라마의 집필 시스템 변화 분석," 방송과 커뮤니케이션, 제16권, 제3호, pp.5-52, 2015. https://doi.org/10.22876/BNC.2015.16.3.001
  4. 박지훈, 류경화, "국제시사 프로그램의 생산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에 관한 연구 MBC 의 서구와 제 3세계 재현을 중심으로," 언론과 사회, 제18권, 제2호, pp.2-39, 2010.
  5. J. T. Caldwell, Production culture : industrial reflexity and critical practice in flim and television, Durham, N.C : Duke University Press, 2008.
  6. Mayer, V. Below, the line: Producers and production studies in the new television economy,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Books, 2011.
  7. 윤석민, 장하용, "외주정책을 둘러싼 논쟁의 특성과 그 성과에 관한 연구," 한국방송학보, 제16권, 제2호, pp.242-274, 2002.
  8. 이오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생산과정에 대한 민속지학적 연구: KBS <인물현대사>의 인물선정과정을 중심으로," 언론과 사회, 제13권, 제2호, pp.117-156, 2005.
  9. 김동원, "노동시장 양극화 해소가 급선무다," 노동법률, 통권231호, pp.32-35, 2010.
  10. 김영찬, "미드 (미국 드라마)의 대중적 확산과 방송사 편성 담당자의 '문화 생산자' 그리고 '매개자'로서의 역할에 관한 연구," 방송문화 연구, 제19권, 제2호, pp.35-61, 2007.
  11. 박진우, "유연성, 창의성, 불안정성: 미디어 노동 연구의 새로운 문제 설정," 사단법인 언론과 사회, 제19권, 제4호, pp.41-86, 2011.
  12. 김현미, "문화 산업과 성별화된 노동: TV 방송 프로그램 여성 작가들의 사례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제21권, 제2호, pp.69-103, 2005.
  13. 나미수, "텔레비전 드라마의 생산자 연구: 생산 과정에 나타난 젠더의 문제를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 제21권, 제2호, pp.159-199, pp.69-101, 2011.
  14. 이상길, 이정현, 김지현, "지상파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자의 직무인식과 노동 경험: 파견직 FD에 대한 심층인터뷰를 중심으로," 방송과 커뮤니케이션, 제14권, 제2호, pp.158-205, 2013.
  15. 김미숙, 홍지아, "TV드라마 작가 연구: 드라마 생산과정에서 겪는 타 생산자들과의 갈등과 타협을 중심으로," 한국방송학보, 제30권, 제4호, pp.41-82, 2016.
  16. 김미숙, 홍지아, "드라마 제작과정에서 벌어지는 생산자 사이의 갈등연구: 두 편의 드라마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언론정보학보, 제86권, pp.7-41, 2017.
  17. 노동렬, "방송콘텐츠 제작방식 변화에 따른 불공정 관행 변화: 외주제작사 입장을 중심으로,"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제17권, 제5호, pp.540-551, 2017. https://doi.org/10.5392/JKCA.2017.17.05.540
  18. 노동렬, "방송콘텐츠의 창의성 증진을 위한 생산시스템 연구 : KBS <개그콘서트>와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방송문화연구, 제21권, 제3호, pp.9-48, 2009.
  19. 김익상, 김승경, "1990년대 기획영화 탄생의 배경과 요인 연구," 동국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씨네포럼 27, pp.257-288, 2017.
  20. 서성희, "한국 기획영화에 관한 연구: <결혼이야기>를 중심으로," 영화연구, 제33권, pp.371-393, 2007.
  21. 임건중, "한국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위한 기획 개발 단계,"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제12권, 제10호, pp.72-81, 2012. https://doi.org/10.5392/JKCA.2012.12.10.072
  22. 김선아, "한국영화 기획개발과정에서의 프로듀서의 역할과 개선방안: 'PGA의 Produced By' 규정을 기준으로,"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제13권, 제10호, pp.214-225, 2013. https://doi.org/10.5392/JKCA.2013.13.10.214
  23. 민대진, "현대 한국영화에서 프로듀서의 중요성과 역할 연구," 영화연구, 제24권, pp.167-192, 2004.
  24. 박지훈, 영화제작 매스터북, 책과길, 2008.
  25. 윤석진, 박상완, 디지털 시대, TV드라마 '기획'에 관한 시론-최지형 CP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언어문화, 2013.
  26. 임정현, 방송콘텐츠 글로벌 집필능력 강화를 위한 국외 심화교육 연수보고서, 한국전파진흥협회, 2015.
  27. 이정훈, 박은희, "외주제작정책 도입 이후 지상파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변화," 방송문화연구, 제20권, 제3호, pp.31-58, 2008.
  28. 정성효, "기형적 제작시스템 전체 콘텐츠 산업 위협," 방송문화, 제3월호, pp.4-15, 2007.
  29. https://recruit.kbs.co.kr/board/fieldworkDetail.do?boardId=5&boardNo=1119
  30. 이용석, "한국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변화: 새로운 기획 시스템, 새로운 제작 요소의 등장," 한국방송학회, '방송 제작 시장 변화와 요소시장의 변화 탐색' 발표집, pp.7-32, 2021.
  31. 김미숙, 드라마 작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푸른사상, 2018.
  32. https://www.hankyung.com/entertainment/article/202008056042H
  33.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7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