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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Meaning of Family in the Novel 「Aging Family」

소설 「고령화 가족」에 나타난 가족의 의미 연구

  • 경은주 (경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
  • 양영자 (경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 Received : 2021.03.24
  • Accepted : 2021.04.26
  • Published : 2021.05.28

Abstract

The study intends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family in the novel 「Aging Family」. The Novel texts were analyzed from the perspective of In-mo, the main character, using qualitative research methods. Findings show that his family members were non-blood related as well as blood related, and the meaning of his family was changed from a "family with no pride, no affection" to a family with "human affection" and "loyalty stronger than blood". Based on these results, some implications for family social welfare practices were discussed.

본 연구의 목적은 소설 「고령화 가족」에 나타난 가족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에, 소설 속 주인공 인모가 가족의 의미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질적 연구 방법에 따라 접근하여 분석하였다. 그 결과, 그의 가족은 혈연과 비혈연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이른바 '정상가족'과는 거리가 먼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에 대해 인모가 인식한 가족의 의미는 "자부심도 애정도 가질 수 없는 존재"에서 "인간적인 정리"와 "피보다 진한 의리"가 존재하는 가족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이에, 이러한 연구결과에 기초하여 가족사회복지실천에 시사하는 함의를 논의하였다.

Keywords

Ⅰ. 서론

우리는 가족이 중요시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가족은 한국사회에서 자주 화두로 등장하고 있으며, 사회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분야에서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다. 한국 가족사회학 50년을 정리한 연구논문[1]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를 통해 가족 관련 연구영역의 다양함과 한국사회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높은 관심과 중요도를 파악할 수 있다[2].

가족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함에도[3] 불구하고, 이에 대해 답을 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가족은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직이지만, 시대와 사회의 변화 등으로 가족의 형태와 기능 또한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에 대한 정의나 관점도 학자에 따라 상이하게 제시되고 있다. 즉, 이들은 전통적인 가족 개념인 ‘가족은 무엇인가’라는 고정적이고 획일적인 정의를 내리는 데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무엇을 가족으로 볼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고 논의하는 경향을 보인다[3].

가족은 항상 변화해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가족 구성원인 각 개인의 변화는 가족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로 인한 가족의 변화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가족 외부의 변화에 대해서는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진보’ 등이 키워드인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는 반면, 가족 내부의 변화에 대해서는 위기의식과 함께 부적절한 사회 현상이 키워드인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4].

이러한 위기의식과 부적절한 사회 현상으로 보는 부정적 평가는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는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5], 즉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견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특정한 형태의 가족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고정적이고 획일적인 가족 개념으로[2][6], 법적으로 결혼한 부부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로 구성된 가족만이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통념이다[5][7][8]. 이러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갖는 심각한 문제는 ‘정상가족’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가족들을 ‘비정상 가족’으로 낙인을 찍어 사회적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는 부정적인 현상을 초래하는 것으로[6][7][9], 이는 사회복지 실천가들에게 있어 전통적 패러다임과 대안적 패러다임에 대한 이해가 매우 필요하고 중요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10]. 또한 이러한 ‘정상가족’ 대 ‘비정상 가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이른바 ‘정상 가족’에게도 압력으로 작용하는 문제를 낳고 있다.

소설 「고령화 가족」[11]은 이복형제, 이부남매, 비혈연 관계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시 말해 전통적인 가족관점에서 보면 ‘정상가족’과는 거리가 먼 가족의 모습을 띠고 있다. 영화평론가 육정학(2014)은 이러한 「고령화 가족」에 대해 “전통적 관점에서는 구조적 결손가족이며, 그저 밥만 열심히 차려주는 엄마가 진정한 엄마의 역할인지, 또 이들을 과연 식구라고 할 수 있는지”라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12]. 이러한 육정학의편견은 가족에 대해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급격한 사회변화로 인한 가족 개념 및 가족의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혈연성은 여전히 가족의 구성에 중요한 요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한국사회의 급격한 근대화가 낳은 여러 부작용들을 ‘사회적 안전망’이 견고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국가나 사회보다는 가족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왔고, 지금도 그 책임을 막중하게 감당하고 있는 상황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13][14]. 즉,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는 “믿을 건 가족뿐” 이라는 직계가족 중심의 ‘배타적 가족주의’ 또는 가족이기주의가 강력하게 작동되었기 때문이다[13]. 이는 결국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연결되며,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적 통념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정상가족’ 으로 일컬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상호 인정하는 노력과 함께 가족의 의미를 이해하는 노력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차원에서도 보다 경주될 필요가 있겠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가족의 다양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천명관의 소설「고령화 가족」을 통해, 가족의 의미는 어떠한지 이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소설 속 주인공 인모가 가족의 의미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질적 연구 방법에 따라 접근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즉, 본연구의 목적은 소설「고령화 가족」에 나타난 가족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Ⅱ. 선행연구 검토

“세상은 빠르게 변해간다. 그렇더라도 가족만큼은 변함없이 마지막까지 기댈 수 있는 끈이고, 또한 가족이 함께 사는 집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위로받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라 믿어왔다. (...) 아무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서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의 출발은 가족이다”[15]. 이는 2012년 11월 4일 방송된 SBS의 ‘무언가족 2’ 1부 ‘벽 너머의 가족’ 속 내레이션의 일부분이다. 같은 집에 거주하는 가족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는커녕 벽을 사이에 두고 그저 동거할 뿐인, 대화가 단절된 가족들의 위기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김규원(1995)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인지하는 가족 기준은 혈연성, 부계성, 동일 거주성 등이다[16]. 그런데 위의 ‘무언가족’ 속 가족들은 이러한 조건들에 부합됨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정상 가족’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즉, 이 가족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간주되는 ‘정상가족’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한 지붕 아래에서 타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 ‘무언가족’은 가족 간의 대화가 사라지고 갈등만이 존재하는 가족으로, ‘정상가족’의 외형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 내부의 “갈등과 균열을 위장”하는 ‘요새가족(fortress family)’[6]일 뿐이다.

가족 관련 연구는 사회학과 사회복지학, 가정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가족의 개념 및 인식 등에 대한 연구는 주로 사회학과 인류학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다[1]. 반면, 사회복지학 영역에서의 가족 관련 논의는 가족치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17].

가족 개념을 다룬 연구로는 양옥경[17][18]과 이영숙, 박경란[19], 전미경 외[5], 가족실태조사[20] 등을, 가족 의식과 관련한 연구로는 대학생, 1인가구, 도시주민 등을 대상으로 한 박진숙[21], 한남제[22], 김규원[16], 양옥경, 김혜영[23], 김혜영[24], 김경희, 홍지수[25] 등의 연구를 꼽을 수 있다.

양옥경(2000)은 전통적인 가족 개념이 시대적으로 변화해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전통적 가족의 정서적 유대도 유지하는 ‘신가족주의’ 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다[17]. 또한 동일한 연구자인 양옥경(2001)은 대학생 대상의 경험적 연구에서, 남녀 학생 거의 동일하게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정의했으며, 가족의 범위로는 부모와 형제자매로 한정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18]고 하였다. 그러나 비혈연이라도 애정을 나누는 사이가 포함되어, 혈연보다는 사랑(애정) 중심의 가족이 강조되는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영숙, 박경란(2002)의 연구에서는 혈연성과 공동거주 등 전통적 관점에서 가족을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가족구성원의 기준과 관련하여서는 상호작용, 사랑, 공유하는 삶 등의 다양한 의견들이 포함된 결과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통해 당시의 혈연을 위주로 한 가족 개념이 변화하고 있는 가족 형태를 포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19]. 그 밖에 전미경 외(2007)는 가족형태나 혈연관계가 친밀감이나 원만한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환기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족 개념이 초등교과서에 반영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5]. 또한 5년마다 전국 규모로 조사되는 가족실태보고서 (2015)에 따르면 부모, 자녀, 배우자, 형제자매를 가족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혼인관계로 형성된 사람들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20]. 위의 선행연구들에서는 가족 개념과 관련하여, 혈연성이 중요시되나 연령이 낮아질수록, 그리고 남성보다는 여성일 경우 혈연성이 덜 중요시 되며, 가족의 범위 또한 넓게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대학생의 가족의식을 다룬 박진숙(1984)은 전반적으로 가부장의 권위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반면, 대를 잇겠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가족의식에 비해 약화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하였다[21]. 한남제(1995)는 가족제도의 빠른 변화에 비해, 가족의식의 변화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22]. 즉, 가족 역할의 성별 분담이나 부계 가족제도를 찬성하면서, 여성의 권한이 인정되는 양계제도를 수용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22]. 지역별, 계층별, 연령별 다양한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김규원(1995)의 연구에서는, 가족을 인식하는 기준이 ‘가족의 혈연성과 부계성, 가족생활의 동일거주성과 동일가계성’인 것으로 보고되었다[16]. 그러나 ‘가족이 반드시 혈연으로 이루어져야 하나?’는 질문에 ‘아니다’의 응답이 14.2%를 나타냄으로써, 연령이 낮을수록, 또한 학력이 높을수록, 혈연과 부계에 대한 가족의 인식이 비교적 낮은 모습을 보이고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16]. 김혜영(2007)의 연구에서는 가족을 ‘피로 맺어진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순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고[24], 한국과 일본의 가족 의식을 비교한 김경희, 홍지수(2013) 의 연구에서는 성별 및 성역할 의식, 사회경제적 요인들에 따라 가족의식의 정도가 상이한 것으로 나타났다[25].

이상의 선행연구들에서는 가족의 개념이 혈연보다는 사랑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즉 전통적인 개념으로부터 점차 다양화되고 있음을, 그리고 가족으로 인식하는 범위 또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가족형태를 반영한 연구는 그 필요성이 매우 크다 하겠다.

Ⅲ. 연구방법

본 연구의 분석 자료는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이다. 천명관은 급격한 사회변화에도 불구하고 잔존하는 한국사회의 병폐, 예컨대 엘리트주의와 남녀의 차별, 노동과 빈곤 등의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26][27]. 일례로, 그는 한국 문단에 공고히 존재하는 엘리트주의 혹은 관료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기존의 글쓰기 방식을 지양하는데, 은희경으로부터는 “전통적 소설 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에 빚진 게 없는 작가”[28][29]라는 평을, 또한 임철우로부터는 “소설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보기 좋게 비켜서는” 작품을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8].

이러한 소설「고령화 가족」텍스트는 Miles와 Huberman의 분석방법[30]에 따라 접근하여 해석하고 분석하는 절차를 거쳤다. 자료를 축약하고 배치하는 작업을 전체적 맥락과 연관시켜 연속적으로 수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오류는 해석의 재순환 과정을 거쳐 수정하였다. 이러한 재순환 과정은 결론도출 및 검증의 단계를 포함하는 전 과정에 적용·수행되었는데, 그 절차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료축약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료의 요약, 범주화 등의 작업을 하였다. 이때에는 ‘이해를 이해하고 해석을 해석’하는 Geertz의 ‘두꺼운 기술’ 방법이 적용되었다[31]. 텍스트가 상징하는 의미를 최대한 찾아내기 위해 한 단어, 한 단어씩, 한 문장, 한 문장씩[32] 심사숙고하여 해석하였다. 또한 해석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 전체 자료를 세 번 이상 읽고 반복하는 절차를 거쳐 주제어와 주제어에 따른 내용 요약으로 범주화 하였다. 둘째, 자료배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료를 체계적으로 배치하고 연결하기 위해 주제어 중심으로 범주화되어 있는 자료들을 상호연관성을 고려하여 표로 재구성하였으며, 이러한 자료 재배치작업을 3차례에 걸쳐 실시하였다. 상위 주제어의 도출과정에서 발견된 오류는 해석 또는 추가 분석의 재순환 과정을 거쳐 수정하는 절차를 거쳤다. 셋째, 결론 도출 및 검증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먼저, 주제별로 재구성된 내용을 연구목적에 부합되게 최종적으로 재배치하여 결론을 도출·검증하였다. 그리고 검증의 과정에서는 이전 단계에서 다루었던 자료들과 소설 원본인 「고령화 가족」텍스트를 비교·대조하는 절차를 거쳐 오류의 여부를 확인하였고, 이 때 발견된 오류 또한 재해석이나 재분석의 과정을 통해 수정하였다.

그 외, 타당성과 엄격성의 확보를 위해 질적 연구 세미나 팀원들(질적 연구자인 교수 1인을 비롯해 질적 연구자 8인으로 구성된 팀)로부터 연구결과를 검증받는 의사소통적 타당화 과정도 거쳤다.

Ⅳ. 연구결과: 가족의 의미 재발견

1. 등장 가족의 일반적인 특성

소설 속 인모의 가족은 자신을 포함하여 아버지, 엄마, 오한모(별명 함마), 미연 등 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현재 사망)는 한모가 2세 되던 해, 한모의 생모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엄마와 재혼한 경우이다. 따라서 인모와 한모는 이복형제이며, 엄마와 한모의 관계는 비혈연이다. 그리고 여동생 미연은 엄마가 결혼 기간 중 외도로 낳은 딸로, 인모와는 이부남매, 한모 및 아버지와는 비혈연 관계이다. 즉, 인모의 가족은 이른바 ‘정상 가족’과는 거리가 먼 가족형태이다.

아버지는 평생 막노동과 오토바이 배달원, 아파트 경비원 등 전문적인 기술이 요구되지 않는 직업을 가졌다. 따라서 그의 교육수준은 그리 높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며, 엄마 또한 아버지와 유사할 것으로 보인다. 인 모에 의하면, 평소에 엄마가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거나, “몸만 성하면 된다.”는 식의 단순한 금언들만 얘기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엄마는 의사소통이 원활하거나 정서적인 지지가 있는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동시대의 저소득층 혼인이 우애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생존전략 차원에서 이루어졌는데[6], 초혼인 엄마 또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자식 딸린 아버지와 혼인을 하였고, 엄마가 아버지를 차가운 사람으로 표현했다고 한 내용 등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점이다.

주인공 인모는 가족 내에서 자신이 우선권을 누릴 수 있었던 요인이 공부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미연이 학교 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끔찍하게 보기 싫어했다거나 가정형편을 고려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음을 불만스럽게 표현했던 점 등을 고려해볼 때, 인모가 ‘아들’이라는 점도 가족 내에서 암묵적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경우 아들은 대학에 진학할 기회를 가졌지만, 딸은 취업을 강요받는[8][33]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맞닿아 인모도 매사에 우선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형제자매들간 교육수준에 차이가 있을 경우, 고학력의 아들이 집안의 중요한 결정에서 주도권을 갖는 가부장제에 기반을 둔 전통적 사고[34]가 이들 가족 내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가족 내에서 유일한 고학력자인 인모는 빈곤한 집안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신분상승을 꿈꾼다. 따라서 가족을 대할 때 그는 늘 무시하며, 필요시에만 가족을 찾는 이기적이고 양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가 가족들을 무시하는 태도는 그들을 지칭하는 표현들, 예컨대 “성실했지만 무능한 가장”, “할 줄 아는 말이 단순한 금언들뿐인”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재 한모와 인모는 무직 상태이다. 한모의 경우, 아버지의 교통사고 보상금 절반을 받아 차린 성인오락실과 후배와 함께 동업한 캄보디아 사업이 실패로 귀결된 때문이다. 한편 인모는 가전제품 등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팔아치운 신용불량자 신세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전력을 갖고 있다. 미연은 밤에는 술을 파는 카페를 운영 중인데 고급 승용차를 몰 정도의 여유가 있다. 3남매 중 미연만이 엄마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는 유일한 자녀이다.

인모의 가족은 겨울을 냉방에서 넘겨야 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빈곤한 생활에 전환점이 된 것은 아버지의 교통사고였다. 현재 인모의 가족이 살고 있는 “엄마의 집”은 교통 사고보상금 중 절반으로 마련한 것이다. “엄마의 집”은 신도시 외곽의 낡은 24평 연립주택으로 자동차 5대를 겨우 주차할 정도로 옹색한 곳에 위치해 있고, 녹슨 철근들이 건물 외벽에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는 20년도 지난 건물이다. 이러한 신도시 외곽 풍경은 도시와 농촌의 특성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모습으로, 현대적 사고와 전통적 사고가 혼재해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20Kg의 거구이자 전과 5범인 인간망종” 한모(52살)는 이미 3년 째 “엄마의 집”에 기거하고 있는 상태이다. 파산한 “퀭한 눈의” 중년의 인모(48살)와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한 미연(45살)이 “싸가지 없는 딸” 민경(16살)을 데리고 “엄마의 집”에 합류하게 되면서, 평균 연령 49살의 “고령화 가족”으로 재구성된다.

중학생 민경은 3남매가 “엄마의 집”에 합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출을 감행한다. 민경의 가출 촉발 요인으로는 두 외삼촌들의 행동을 두둔하는 외할머니의 태도, 큰외삼촌 한모가 민경의 팬티를 뒤집어쓰고 수음을 하다 들킨 사건, 친구들과의 흡연 목격을 미끼로 용돈을 갈취하는 작은외삼촌 인모, 또 시작되는 엄마의 요란한 연애 즉, 재구성된 “고령화 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이다. 민경의 가출은 한모와 미연의 출생비화를 비롯해 엄마의 불륜 전력마저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가족 내 갈등과 위기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동안 가족구성원들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과 희생을 해왔음을 깨닫게 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화해의 요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웃 노인들에게 인모의 가족은 최대의 관심사이다. 이들의 입을 통해 드러난 그의 가족 모습은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 내지는 편견임을 알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인모의 집은 “콩가루 집안”이며, 이러한 집안의 엄마는 “쥐 잡아먹은 거모냥 입술 시뻘겋게 칠하고 다니는 여자”이고, 한모는 “숭악한 놈”이며, 인모는 “영락없는 마약쟁이”이고, 미연은 “남자라면 죽고 못 사는 년” 이며, 민경은 “지 에미 닮아 벌써 싹수가 노란” 아이이다.

표 1. 주요 인물의 일반적인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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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례 재구성

「고령화 가족」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인 인모의 관점에서 작성된 소설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도 인모의 시각에서 가족의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가족은 “자부심도 애정도 가질 수 없는 존재”(141쪽)에서 “인간적인 정리”(238쪽)와 “피보다 진한 의리”(180 쪽)가 존재하는 가족으로 그 의미가 변화되고 있다. 이에, 이러한 가족의 의미 변화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2.1 “자부심도 애정도 가질 수 없는 존재”: “실패라는 낙인”을 간직한 사람들

인모에게 가족은 전과와 무능, 외도 등으로 멀쩡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마이너리그 중의 마이너리그”(107쪽)다. 인생의 실패자들만 모아놓은 것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부심도 애정도 가질 수 없는 존재”이다. 인모는 평균 연령 49살로 재구성된 자신의 “고령화 가족”(42쪽) 중 구성원들의 과거 실패담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민경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아마도 민경이 “미래세대”를 상징하는 청소년이어서, 3남매의 삶보다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1.1 외도 경험이 있는 엄마: 가출을 통한 미연의 출산

민경은 현재 가출한 상태이다. 한모는 민경의 가출로 괴로워하는 여동생 미연을 바라보며, 미연의 이혼과 조카의 가출, 인모의 파산 등이 엄마의 과거 죄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폭탄 발언을 한다. 그리고 한모의 입에서 “전파사 구씨”(136쪽)가 언급되는 순간, 인모는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순간적으로 되살아난다. 당시 어렸던 인모는 허겁지겁 바지를 올리던 모르던 남자의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 사건 이후, 엄마가 가출하였고, 형제들의 밥을 챙겨주는 일은 아버지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 아버지가 엄마를 다시 데리고 왔을 때, 엄마는 혼자가 아니라 갓난아기와 함께였다. 엄마의 외도는 한모의 출생 비화와 다르게 가족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따라서 집안에서는 한동안 서로 눈길을 피하는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막장드라마와 같이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141쪽) 없는 가족이었다. 따라서 인 모는 이러한 가족에 대해 자부심도 애정도 가질 수가 없었다.

“엄마, 이게 왜 그런지 알아요? 이게 다 엄마가 죄가 많아서 그래요. (...) 인모도 그렇잖아요. 우리 인모, 공부도 잘하고 진짜 똑똑한 애인데 어쩌다 인생이 이렇게 꼬였는지 모르겠어요.”(135쪽) “엄마가······ 그 전파사······ 구씨하고······ 그러지만 않았어도······ (...) 미연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았고 엄마는 혼이 나간 듯 목석처럼 멍하니...”(136쪽) “엉거주춤 바지춤을 끌어올리던 사내의...”(137쪽) “엄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 봄 (...) 무엇보다 낯선 것은 엄마의 등에 업혀 있는 갓난아기였다. (...) 또한 그때 유난히 큰 눈을 깜빡이며 포대기 안에서 나를 쳐다보던 그 계집애가 미연이였다고도 말하지 않겠다.”(139-140쪽) “막장드라마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 도대체 이놈의 집구석에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인가? 도대체 내가 어떻게 우리 가족에 대해 자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 오함마는 하루종일 방에 들어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눈길이 마주쳐도 황급히 눈을 피해 서로 눈길을 피하기는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 엄마는 어떻게 이런 엄청난 가족의 비밀을 수십 년 동안 감쪽같이 묻어둘 수 있었을까?.”(141-142쪽)

2.1.2 전과 5범인 장남 오한모: 폭력 등의 전력이 있는 “인간망종”

이 집의 장남이자 인모의 형인 한모는 폭력과 강간 등의 전력을 가진 전과 5범이다. 한모는 고등학교 시절에도 공부보다는 싸움꾼으로 유명했다. 따라서 그의 별명도 이에 걸맞게 공사장에서 쓰는 커다란 망치를 의미하는 “함마”(20쪽)였다. 공고를 졸업하던 해에 교도소를 가게 되었고, 그 후에도 집과 교도소를 반복하는 생활을 하였다. 출소 후, 미연의 도움으로 당구장을 차렸지만 강간죄에 휘말리면서 합의금으로 날리게 되었다. 이후, 아버지의 교통사고 보상금 절반으로 차린 성인오락실과 캄보디아의 사업 역시 실패함으로써 빈털터리가 되어 “엄마의 집”에 들어와야 했다. 현재, 그는 3년째 “엄마의 집에” “눌어붙어” 있다(이상 19쪽).

“쉰두 살에 백이십 킬로그램, 폭력과 강간, 사기와 절도로 얼룩진 전과 5범의 변태성욕자, 정신불구의 거대한 괴물······ 한 마디로 인간망종이다.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 (...) 아는 후배와 함께 라텍스 사업을 해보겠다며 캄보디아로 건너갔다가 이 년 만에 빈털터리가 되어... 슬그머니 엄마 집으로 기어들어와 삼 년째 눌어붙어 있는 중이다.”(19쪽) “머리가 아둔해 공부하고는 인연이 없었지만 그 유명한 깡패학교에서도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20쪽) “성인오락실을 해보겠다며 엄마를 졸라 보상금의 반을 날려버리고 말았다.”(21쪽)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동네 건달들하고 어울려 다니다 패싸움에 휘말려 일년형을 선고받고...”(42쪽) “오함마도 마침 교도소를 나와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자금을 댄 것도 또한 미연이었는데 (...) 전과 5범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미연이나서서 여자의 가족과 합의를 한 끝에 형량을 줄일 수 있었지만 합의금 조로 당구장 하나가 날아가고 말았다.”(44-45쪽)

2.1.3 “충무로의 낭인” 인모: 사실상 “전과자”

인모는 12년 전에 만든 한 편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충무로에서는 20억의 제작비를 “말아먹은”(16쪽)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다. 그동안 인모는 가족 내에서 그나마 평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신은 이혼과 전과, 무능 등의 실패한 이력을 가진 가족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충무로의 낭인”으로서 떠돌다 보니, 자신 역시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전과자로서 실패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엄마와 미연은 결혼 중 외도를 한 경험이 있고, 한모는 전과 5범이며, 자신 역시 과거에 아내의 내연남을 폭행한 죄를 저지른 전력이 있다. 그런데도 인모가 구속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한모가 자신을 대신해 혐의를 “뒤집어쓴 덕”(192쪽)이었다.

“내가 ‘말아먹은’ 것은 단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이십억의 제작비였으며 (...) 충무로의 낭인으로 십여 년을 떠도는 동안 비로소 나는 내가 실패한 것이 단지 흥행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인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16쪽) “그러나 나에겐 배신자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17쪽) “엄마를 포함해 나나 미연이나 오함마나 전과자이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모두 실패의 낙인을 간직하고 있었고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두리만을 떠돌며 낭떠러지를 걷듯 살아온 천애의 삶, 아무리 똥줄 타게 뛰어다녀봤자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무능과 무지, 숱한 수모와 상처, 불명예와 오명의 역사······”(140-141쪽) “상대는 그녀가 다니는 피트니스클럽의 헬스코치였다.”(185쪽) “눈알이 뒤집힌 나는 주먹이고 발이고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 야, 그만해. 이러다 사람 죽이겠다. (...) 나는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은 뒤, 무혐의로 풀려났다. 모든 혐의를 오함마가 뒤집어쓴 덕이었다. (...) 난 어차피 전과자야. 별 한 대 더 달아봐야 별 차이도 없다. (...) 앞으로 영화도 만들어야 할 텐데 교도소 같은 데 드나들면 안 되지.”(191-192쪽)

2.1.4 남성편력이 있는 미연: 거듭된 불륜에 의한 두 번째 이혼

미연은 불륜남과 두 번째 결혼을 하여 생활하던 중에도 지속적으로 바람을 피워, 두 번째 결혼마저도 이혼으로 끝나게 된다. 남편 장서방은 다른 사람을 통해 미연의 불륜 사실을 듣게 되고, 그로 인해 괴로운 나머지 술에 취해 미연을 폭행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딸인 민경에게조차 엄마 미연의 거듭된 연애는 더 이상 생경한 일이 아니었다.

“미연은 선글라스를 벗어 퍼렇게 멍이 든 눈자위를 보여주며...”(34쪽) “그런데 이때 식구들이 보인 반응은 뜻밖이었다. 오함마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나를 외면했고 엄마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화장실로 들어갔으며... 게다가 그 싸가지 없는 조카년은 씩씩대는 나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 비웃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36쪽) “장서방이 술을 잔뜩 먹고 와서 나한테 하소연을 하더라. 바람을 피우는 건 괜찮은데 제발 주변 사람들 모르게 피웠으면 좋겠다고.”(38쪽)

미연의 남성편력은 “낯짝 두꺼운”(38쪽) 한모마저 창피해 할 정도였다. 그동안 집안일에 무관심했던 인 모는 순진했던 여동생 미연이 어쩌다 화려한 남성편력을 가진 바람둥이가 되어버렸는지 머릿속이 복잡기만 하다.

“엄마도 알고 친척들도 알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야. (...) 게다가 이번에 눈 맞은 놈이 누군지 아냐? 걔 카페에 아르바이트하러 온 대학생 놈이란다. 내동네 창피해서 원······ (...) 그나저나 저 낯짝 두꺼운 인간이 창피해 할 정도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거지?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38쪽) “두 사람은 각자 결혼생활을 하던 중 장서방이 미연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렀다 서로 눈이 맞아 불륜의 관계에서 부부의 관계로 발전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장서방은 자신이 그 때문에 벌을 받는 모양이라고,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결국 자신의 눈에는 피눈물이 나는 법이라는 걸이제야 깨달았노라고 한탄하면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40쪽)

2.2 “인간적인 정리”와 “피보다 진한 의리”로 맺어진 가족: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인모는 자신의 가족이 사랑이 아닌 “인간적인 정리” 와 “피보다 진한 의리”로 지탱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즉, 엄마와 아버지의 관계는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믿음이 중시되는 “인간적인 정리”로 맺어져 있고, 나머지 가족구성원들과의 관계는 혈연성이 아닌 “의리”로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또한 인모는 동거녀인 캐서린과의 관계 역시 자신의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중시되는 “인간적인 정리”로 인식하고 있다. 인모가 인식하는 이러한 “인간적인 정리”와 “피보다 진한 의리”는 ‘희생’이라는 이타심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희생’은 남녀관계에서는 “인간적인 정리”로, 가족관계에서는 “의리”로 표현되고 있는데, “인간적인 정리”의 개념 역시 “의리”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고 엄마와 아버지의 “인간적인 정리”는 인 모와 캐서린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인모와 캐서린의 사이에는 신뢰뿐만 아니라,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는 부재한 사랑의 감정까지도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랑보다는 신뢰관계인 “인간적인 정리”를 강조하는 것은 가족을 지탱하고 있는 “의리”의토대가 ‘희생’이기에, 동거녀 캐서린의 ‘희생’을 부각시킴으로써 가족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인모의 가족이 혈연으로 구성된 ‘여느 가족’ 과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인간적인 정리”와 “피보다 진한 의리”가 가족을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2.1 사랑보다는 “인간적인 정리”가 중요시되는 관계

2.2.1.1 엄마와 아버지: “배다른 자식과 씨 다른 자식에게 층하 없는 사랑“을 주는 부모

엄마와 아버지 사이의 “인간적인 정리”는 상호 간에 사랑은 부재하지만 믿음은 존재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엄마가 보는 아버지는 말조차 붙이기 어려운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인모의 시각에서 본 엄마와 아버지는 추구하는 가치나 취미마저 상이해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부부였다.

“넌 느이 아버지를 닮아서 사람이 차가워. 말 붙이기도 어렵다.”(115쪽) “엄마와 아버지가 금실이 좋은 부부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복잡한 과거사 때문에 분란이 생긴 적도 없었다.”(142쪽) “아버지는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세대의 남자였다. 이에 비해 엄마는 잘만 하면 부자도 될 수 있고 뭔가 자신의 부모 세대와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엄마와 아버지의 다른 점은 취향에서도 나타났다.”(172-173쪽) “느이 아버지하고 나 사이에 사랑은 없었어도 인간적인 정리는 있었다. 아무리 죽은 지 십 년이 넘었다지만 그 사람이 평생 나한테 모질게 한 적이 없는데 말도 없이 가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238쪽)

인모는 엄마와 아버지 사이의 “인간적인 정리”가 혈연과 비혈연의 관계에 상관없이 자식들을 키운 것이며, 이러한 “인간적인 정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자신의 가족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엄마와 오함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란 얘긴데 아버지도 죽은 마당에 어떻게 엄마는 다 늙은 오함마를 제 자식 돌보듯 돌볼 수 있었을까?”(114쪽) “엄마가 말한 인간적인 정리라는 게 무엇이었을까? 밖에서 낳아 데리고 온 아이를 제 자식처럼 받아준 게 정리였을까, 아니면 배 다른 자식을 제 자식처럼 거둬 먹인 게 정리였을까? 하긴 두 사람이 서로 잡아먹을 듯 싸울 때조차도 아버지는 엄마의 과거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또한 미연을 다른 형제들과 층하를 둔 적도 없었고 그 점은 엄마도 마찬가지여서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 해서 오함마를 우리와 차별한 적이 없었다. (...) 그런 부부간의 정리마저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 집은 이미 콩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다.”(238-239쪽)

2.2.1.2 인모와 캐서린: 헌신적인 보살핌 속에서 느끼는 사랑

인모는 아는 선배로부터 캐나다로 이민을 간 윤 주가 이혼하고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윤주는 인모의 대학 후배였는데, 인모가 결혼한 후에도 한 달에 2 ~3회 만나는 불륜 상대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이들의 만남은 습관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이어져온 것이었으나, 인모는 윤주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윤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생각보다 깊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작년에 이혼하고 한국으로 혼자 돌아왔다더라.”(215 쪽) “우리는 한 달에 두세 번 만나 몰래 사랑을 나누는 사이였다. 그녀가 이민을 가기 전까지 우리는 열정도 없고 죄의식도 없는 불륜의 관계를 꽤 오랫동안 지속했다. 윤주는 이민을 가면서 이름을 캐서린으로 바꿨다. (...)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녀는 내 농담에 희미하게 웃어 보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눈에 물기가 고여있었다. (...) 열정도 없으니 상처도 남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녀가 캐나다로 떠나고 난 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편이 휑해지는 걸 느끼곤 했다. 그런 상실감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그녀의 빈자리는 아내가 떠났을 때보다 더 크고 깊었다.”(215-216쪽)

인모가 한모의 사기행각에 대한 보복폭행으로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었을 때, 인모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준 사람이 캐서린이었다. 캐서린의 헌신적인 보살핌에 힘입어, 인모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캐서린과 동거 중이었던 어느 날, 인 모는 중년이 된 캐서린에게서 불륜을 저질렀던 젊은 시절에도 느끼지 못했던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인모는 자신과 캐서린 사이 또한 엄마와 아버지의 사이처럼,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인간적인 정리” 가 존재하는 관계로 되어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아무도 없는 강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을 수도 있었던 나는 핸드폰을 통해 다시 세상과 교신했다.” (...) “캐서린은 아기를 돌보듯 정성껏 나를 돌봐줬다. 죽을 쑤어 먹이고 목욕을 시켜주고, 옷을 갈아입혔다.”(261-262쪽) “헌신적으로 나를 보살피는 캐서린을 지켜보며 나는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이타적인 행동 속에서만 완성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263쪽) “그저 부드러운 사랑의 빛만이 가득해 나는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의 감동에 가슴이 울컥했다.”(269쪽) “우리는 불안정한 상태를 지나 조심스럽게 신뢰를 쌓으며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다. 나는 엄마가 말했던 인간적 인정리가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열정적인 사랑보다 더 차원 높고 믿을 만한 것이라고생각한다.”(285쪽)

인모가 자신과 캐서린 간 관계에서 사랑보다는 신뢰관계인 “인간적인 정리”가 자리해가고 있음을 강조한 것은, 가족을 지탱하고 있는 “의리”가 ‘희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캐서린의 ‘희생’을 부각시킴으로써, 동거녀인 캐서린을 가족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가 캐서린을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은, 엄마의 장례식이나 미연의 개업식과 같은 중요한 가족행사에 캐서린과 함께 참석하는 행위 및 한모를 만날 계획을 세워두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캐서린도 와서 장례 일을 도왔다. 미연과 캐서린은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미연은 엄마가 살아계실 때 캐서린을 한 번이라도 보여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어쩜 그럴 수가 있냐며 나를 책망했다.”(281쪽) “미연과 근배씨는 신도시 안에서 운영하던 카페를 정리하고 집 근처에 식당을 냈다. 순두부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었다. 개업식이 있던 날, 캐서린과 나는 커다란 화분을 하나 사들고 식당을 찾았다. (...) 캐서린과 나는 조만간 오함마를 만나러 갈 계획이다.”(285-286쪽)

2.2.2 “피보다 진한 의리”로 지탱되는 가족들

2.2.2.1 한모: 가족을 위해서라면 교도소 가는 것도 두렵지 않은 집안의 장남

인모는 아내의 내연남에게 보복 폭행을 계획하고, 내연남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한모도 불렀다. 그러나 한모는 이러한 인모의 의도를 모른 채 그 장소로 나갔다가, 체격 좋은 남자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는 인 모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인모는 계획한 보복 폭행을 실행하기는커녕, 되레 아내의 내연남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한모의 등장으로 기세가 역전되었는데, 이성을 잃은 인모는 쓰러져있는 내연남을 한모가 뜯어말릴 때까지 폭행하여 헬스코치 일을 더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려 놓았다. 그 결과, 한모는 전과자인 자신이 인모의 폭행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서 “썩는”(192쪽) 선택을 내려야 했던 것이다.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이다. (...) 헬스코치를좆나게 두들겨 패기로 한 것이다. (...) 나의 계획은 이랬다. 일단 헬스코치를 한적한 장소로 불러낸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오함마를 부른다. 물론 오함마에겐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다.”(185-186쪽) “야, 그만해. 이러다 사람 죽이겠다. (...) 헬스코치는 육 개월 동안 병원에 누워 있다 피트니스업계에서 영원히 은퇴했다. 그의 의도대로 사건은 간통사건이 아니라 폭행사건으로 바뀌었다. (...) 난 어차피 전과자야. (...) 넌 무조건 모른다고 잡아떼. 다 내가 한 짓이라고. (...) 오함마는 나의 지저분한 치정극에 연루되어 일 년 육 개월을 교도소에서 썩어야 했다.”(191-192쪽)

이외에도, 한모는 가출한 조카 민경을 예전에 알았던 “동생들”(178쪽)을 통해 찾았는데, 그 대가로 그들을 대신해 3년에서 4년 정도의 교도소 생활을 또 다시 감수해야만 하였다. 이처럼 그가 조카 민경을 위해 또 다시 교도소행을 감수한 것은, 팬티사건 때 의리를 지켰던 조카에게 한모 또한 “의리”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족 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한모에게는 두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는 동생이 업소를 하나 하는데 좀 도와달라고 해서······ 사장 명함을 파서 갖고 왔는데 모른 척 할 수도 없고”.(178쪽) “어차피 별 몇 개 달았는데 한 번 더 간다고 달라질 게 뭐 있냐? (...) 그럼, 혹시 민경이도······? 맞아, 동생들한테 부탁했어. 여자애들 찾는 건 걔네 들 전문이잖아. 전국 어디에 숨어도 귀신같이 찾아내거든. 민경이 술집으로 팔려갈 뻔했는데 간신히 빼내왔다. 사실 민경이 찾아주는 대가로 걔네들하고 거래를 한 거야. 내가 바지 한 번 서는 걸로....”(179쪽) “그러다 민경이가 가출하고 난 다음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어. 그게 뭔데? 그앤 나하고의 의리를 지키려고 했던 거야. (...) 그래서 나는 민경이를 내 손으로 직접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했어. 그애가 의리를 지켰으니까 나도 의리를 지켜야지.”(180쪽)

그러나 한모가 조카 민경을 구출한 장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가족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조카 민경이 구출된 곳은 성매매를 위해 10대 가출청소년들을 인신매매하는 범죄조직의 소굴이었는데, 한모는 조카 민경만을 구출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을 뿐, 함께 감금되어 있던 다른 청소년들의 구출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혈연을 중시하는 ‘정상가족’에게서 나타나는 ‘배타적 가족주의’[17] 혹은 이기적인 가족주의가 혈연과 비혈연의 관계로 형성된 그의 가족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2.2.2.2 엄마와 미연: 대를 통해 이어지고 있는 모녀의 가족을 위한 희생

엄마는 평생 “전쟁”(41쪽)과 다를 바 없는 지독한 빈곤과 싸우며 살았다. 3남매를 키울 때 제대로 먹이지 못했고, 병든 남편을 수발해야 했으며, 남편이 사망한 이후에는 교도소를 들락거린 장남 한모를 위해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던 고단한 삶이었다. 이러한 고단한 삶은 칠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생활비를 벌기 위해 화장품 영업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3남매가 세상살이에 실패한 것이 빈곤한 삶으로 이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엄마인 자신이 자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세상에 나가 싸울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밥상을 열심히 차려 “끼니”(198쪽)를 챙겨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엄마의 사랑법이었다.

“십여 년 째 화장품 영업을 계속 하고 있는 걸 보면 생활비 정도는 버는 모양.”(14쪽) “하긴 그녀에겐 일평생이 전쟁을 치르는 것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살림에 아이 셋을 키우고, 남편을 수발하고, 홀몸이 되어 큰아들 옥바라지로 한 세월을 보내는 과정이 전쟁보다 하등 나을 것도 없었을 터...”(41쪽) “문득 엄마를 쳐다보니 그녀는 어느새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 우리들이 먹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 그저 못 입히고 못 먹이는 자식들을 안쓰러워하는 눈빛과 그래도 열심히 먹고 잘 자라니 다행이라는 흐뭇한 미소가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나는 그날 삼겹살을 굽는 자리에서 다시 목격한 것이다.”(58쪽) “부실한 사람은 없으나 세상에 나가 패배하고 돌아온 것이 모두 어릴 때잘 거둬먹이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61쪽) “그래서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식들을 집으로 데려가 끼니를 챙겨주는 것뿐이었으리라.(...) 또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몸을 추슬러 다시 세상에 나가 싸우라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198쪽)

이러한 엄마의 가족들을 위한 희생적인 삶은 딸인 미연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미연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에 대한 꿈을 접고 회사에 취업을 하였는데, 곧 술집으로 옮겨 일을 하였다. 이는 가족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수입이 더 나은 술집으로 옮겼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미연이 가출한 민경 때문에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가족들에게 고단했던 지난 삶들에 대한 울분들을 토로한 대목을 보면 가능하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이 감당해야 했던 가족 내 희생[8][33][35]을 엄마와 마찬가지로 미연 또한 감당해왔던 것이다. 인모는 이러한 미연의 뒷모습에서 어느 날, 중년의 엄마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여동생 미연이 엄마의 고단했던 삶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카페가 어떤 성격의 카페인지 대강 짐작이 안 가는 바는 아니었으나 가족들은 미연에게 해라 마라 달리 참견할 계제가 없었다. (...) 영화감독으로 데뷔했을 때 미연은 나에게 값비싼 양복을 한 벌 맞춰주기도 했다. (...) 오함마도 마침 교도소에서 나와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자금을 댄 것 또한 미연이었는데...”(44쪽) “그때 나는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을 훔쳐보며 희미하게나마 엄마의 부서진 희망 같은 걸 감지했다. 그런데 훌쩍 시간을 건너뛰어 또다시 여동생의 뒷모습에서 여자의 무겁고 숙연한 운명을 들여다보고 있다니, 여자의 인생은 그렇게 대를 이어 반복되는 것인가?”(103쪽) “술집이 뭐가 끔찍해? 이 집 식구들 다 거기서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사는데. (...) 아마 다들 눈치 채고 있었을 거야. 근데 왜들 모른척 했어? 그 때 누군가 따귀라도 갈기면서 욕이라도 하지 그랬어. (...) 씨발. 무슨 가족이 그래? (...) 그 더러운 돈 벌어가지고 엄마 생활비 주고 아버지 약값 댔어. 오빠 양복도 해주고. 근데, 어떻게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없어?”(132-133쪽)

2.2.2.3 민경: 싸가지는 없지만 나름의 의리는 있는 조카

한모가 조카인 민경의 팬티를 머리에 둘러쓰고 자위를 하다 들킨 일은 가족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엄마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니어용 팬티가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며 가족들의 말문을 막아놓았다. 민경 역시 팬티 주인을 확인하려는 엄마 미연의 질문에, 자신의 것임을 부인함으로써 한모를 위기로부터 모면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한모는 조카 민경이 이처럼 거짓말을 한 것이 “의리”였음을, 민경이 가출하고 난 후에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

“글쎄, 그게······ 저 변태 같은 인간이······ 저 팬티를 갖고······”(109쪽) “그 빤쓰······ 내 빤쓰다. 엄마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빨개졌지만 표정은 비장했다. (...) 민경아, 이거 네 빤스 아냐? 순식간에 모든 식구들의 눈이 민경에게로 쏠렸다. 민경은 잠시 팬티를 살펴보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내 거 아닌데······”(111-112쪽) “그런데 난 민경이가 왜 자기 팬티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어. 엄마야 나를 감싸주려고 그랬다지만······ (...) 그러다 민경이 가출하고 난 다음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어. 그게 뭔데? 그앤 나하고의 의리를 지키려고 했던 거야. 그래서 거짓말을 한 거지.”(180쪽)

한편, 인모는 조카 민경이 흡연하는 장면을 목격하는데, 엄마인 미연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 대신, 그대 가로 용돈의 절반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외삼촌인데도 민경은 가출을 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용돈을 인모에게 챙겨주는데, 인모는 이러한 조카 민경의 행동 또한 “의리”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민경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담배를 꼬나물고 다리를 떨며 입으로 연신 ‘씨발’거리고 있었다.”(82쪽) “엄마한테 뒈지게 맞고 한 달 동안 용돈을 한 푼도 못 받는 게나 을지 아니면 아무 일 없이 반이라도 받는 게 나을지 잘 생각해봐.”(86쪽) “내가 느물거리며 쳐다보자 민경은 군말 없이 지갑을 꺼내 돈을 건넸다. 세어보니 십만 원이었다. 어쩐 일인가 싶어 나는 민경과 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주일치니까 이걸로 끝난 거예요.”(124쪽) “그렇다면 민경이 나가기 전에 나에게 돈을 준 것도 일종의 의리였을까?”(180쪽)

2.2.2.4 인모: 가족을 지탱하는 힘이 “의리”임을 뒤늦게 깨달은 가족 내 유일한 수혜자

인모는 20여 년 만에 다시 모인 “엄마의 집”에서 한모와 미연의 출생 비밀, 엄마의 외도 전력, 미연의 거듭된 외도, 민경의 가출 등 위기와 갈등을 겪으면서, 그동안 자신만이 가족 내에서 보호와 보살핌을 받았던 유일한 가족구성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각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낌없이 희생하고 보살피는 삶을 살아왔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인모도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생활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실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타적인 행동이 주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며, 가족을 지탱하고 있는 힘은 혈연보다 강한 “의리” 임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늘 나를 배려해줬고 무엇에서든 우선권을 주었다.”(252쪽) “그들은 나를 지지해줬지만 나는 고생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아온 덕에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었다. (...) 나에 대한 기대가 부서져 산산조각난 뒤에도 그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나 자신이 나를 포기한 뒤에도 그들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253쪽) “오함마의 사기 행각이 드러나면 경찰은 인터폴을 통해 그를 수배할 수도 있다. (..)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261-262쪽)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평생 보살핌만 받았을 뿐 누군가를 돌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누군가를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는 삶······”(263쪽) “한쪽 귀에도 문제가 생겨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 다리 하나 부러진 게 무슨 대수랴 싶었다.”(265쪽) “비록 깡패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기는 했지만 그날 밤, 내가 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이전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272쪽)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자, 인모는 한모의 “유난스”(268쪽)러웠던 굴곡진 삶도, “짱알”(243쪽)거렸던조카 민경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전엔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앓던 이가 쏙 빠진 것처럼 시원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210쪽) “여름철 피서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가을의 바닷가처럼 적막해 여름내 그렇게 답답하게 느껴졌던 스물네평 연립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같이 있을 땐 원수처럼 미워하다가도 막상 없으면 그리운 게 식구인 모양인지 나는 문득문득 민경의 짱알거리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오함마의 뱃고동 소리도 그리웠다.”(243쪽) “삶의 과정이 유난스럽긴 했지만 그도 결국 아버지처럼 그저 세상살이가 너무 버겁고 힘겨울 뿐인, 무능한 사내 중의 하나였던 셈이었다.”(268쪽)

그리고 인모는 자신이 그동안 “미래에 있을” 목표만을 바라보며 살았으나 상처만 남겨진 삶만 남았음을 깨달으며, 앞으로는 자신에게 “허용된 삶”을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이상 286쪽), 즉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훼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역사이기 때문이다.”(286-287쪽)

Ⅴ. 결론 및 함의

본 연구의 목적은 소설 「고령화 가족」에 나타난 가족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에, 주인공 인모가 인식한 가족의 의미를 질적 접근을 통해 분석하였다. 그 결과, 인모의 가족은 혈연과 비혈연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이른바 ‘정상가족’과는 거리가 먼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러한 가족은 “자부심도 애정도 가질 수 없는 존재”에서 “인간적인 정리”와 “피보다 진한 의리”가존재하는 가족으로, 그 의미가 변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에, 이러한 연구결과가 가족사회복지실천에 시사하는 함의를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족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는 다양성 감수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가족사회복지실천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은 이른바 ‘정상가족’ 이외의 다양한 형태의 가족에 대한 선입견 내지 편견으로부터 탈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회복지사들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실천패러다임으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측면이 있다[10]. 이러한 실천패러다임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하는 한, 이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겪는 사회적 배제와 차별[6][7][9] 등의 문제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지원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본 소설 속 「고령화 가족」도 ‘정상가족’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한, 혈연과 비혈연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매우 문제적인’ 가족으로 범주화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가족들을 ‘정상’ 대 ‘비정상’의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이해한다면, ‘정상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은 계속해서 사회적으로, 그리고 사회복지실천 현장에서도 배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족사회복지실천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에게는 가족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는 다양성 감수성을 제고하는 노력이 매우 요구된다 하겠다.

둘째, 가족 내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가족주의의 병리적 측면을 해결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족주의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에서 발생하는 가족 내 성 차별이다[2][6][33][35][36]. 이러한 가족 내 성차별은 가족구성원들 간에 불평등하게 부여된 ‘가족에 대한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며[6][8][36],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의 희생자는 주로 여성들[8][33][35]이었다. 가족을 위해 가족구성원들이 희생하는 것은 일정 부분 당연한 일로 여겨졌고, 따라서 암묵적으로도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은 주로 가족구성원들 전체에게 요구되기보다는 여성들에게 요구된 측면이 강하였다. 소설 「고령화 가족」속 인모의 가족에서도 이러한 가족주의적 병폐가 여실히 드러났다. 인모가 아들인데다 공부를 제일 잘 한다는 이유로 가족 내에서 누렸던 혜택 이면에는, 나머지 다른 가족구성원들의 힘겨운 희생이 있었다. 다시 말해, 혈연과 비혈연의 관계인 인모의 가족 내에도 ‘가족에 대한 의무’가 남성과 여성 사이에, 그리고 공부를 잘한 자녀와 그렇지 못한 자녀들 사이에 불평등하게 부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공평한 의무는 여성인 엄마와 미연에게 “대를 이어”(103쪽) 세습되고 있었고, 전과자로서 가족 내외의 주변인인 한모에게도 집중적으로 부과되어 있었다. 소설「고령화 가족」의 작가 천명관은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26][27], 그가 관심을 갖는 노동 문제나 빈곤, 성차별 등의 문제들이 소설「고령화 가족」에서도 가족 내 성 차별이나 단순직 종사자들의 빈곤 등의 문제로 집약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가족주의에 내포된 병리적 측면이 가정 내에서만 노정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와 회사 등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는 점은 그 문제의 심각성이 매우 큼을 의미한다. 한국의 재벌들이 가족주의에 내포된 희생과 헌신을 노동자들을 다루는 경영전략으로 이용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13]. 따라서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가족주의적 병폐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가족사회복지실천현장의 차원에서는 물론 범사회적 차원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셋째, 사회적 안정망의 사각지대에 있는 가족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지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 모의가 족은 빈곤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 3남매는 어린 시절, 냉방에서 지내야 할 만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가족은 사회복지 서비스 등을제공받은 언급이 없다. 그리고 인신매매를 당할 위기에 처해있던 조카 민경을 구출할 때에도, 한모와 인모는사회복지기관이나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자구책을 마련하여 대응하였다. 그 결과, 인모의 가족구성원들은 때로 폭력이나 사기 등 반사회적이고 위법적인 행동들도 서슴지 않고 감행하는 문제를 노정하고 있었다. 이처럼 인모의 가족이 위기상황에 직면했을 때에도, 사회적 자원을 활용하거나 요청을 하기 보다는 가족의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사회복지 서비스 등에 대한 정보가 결여되어 있고, 경찰 등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모가 조카 민경을 구출할 때에도, 다른 또래 청소년들을 구출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이는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식[13]의 가족이기주의가 작동한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안정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의 가족들을 발굴하여 지원하는 노력이 사회복지실천현장에서는 물론 행정복지센터를 중심으로 한 공공기관에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강구될 필요가 있고, 사회복지 서비스에 대해 안내하는 홍보 활동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시킬 필요가 있다 하겠다. 또한 가족이기주의를 벗어나 사회적 연대의식을 갖춘 민주시민으로 성장해나가도록, 시민교육 등이 평생교육 차원에서 지원될 필요가 있다 하겠다.

넷째,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을 상호 인정하는 사회복지실천이 보다 활성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해당 가족 구성원들이 인식한 가족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가족의 의미가 “자부심도 애정도 가질 수 없는 존재”에서 “인간적인 정리” 와 “피보다 진한 의리”가 존재하는 가족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로써,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가족형태를 띨지라도, 이 가족 구성원들은 “인간적인 정리”와 “피보다 진한 의리”로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가족의 다양성을 상호 인정하는 사회복지실천이 보다 활성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혈연성에 기반을 둔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를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에게도 관심을 갖는 연구가 보다 활발히 수행될 필요가 있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의 제한점이다. 본 연구에서는 1인칭 주인공인 인모의 시점에서 가족의 의미를 분석하였다. 따라서 인모의 사고나 감정, 내면의 심리를 심층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한 장점이 있다. 반면,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의 감정이나 심리상태, 사고 등은 인모의 시각이나 추측에 기대어 분석한 제한점도 있다. 따라서 인 모가 인식하는 가족과 가족구성원에 대한 의미 및 나머지 가족구성원들이 생각하는 그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모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 오랫동안 “자부심도 애정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나머지 가족구성원들은 다르게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가족구성원 전체가 인식하는 가족의 의미를 다루는 후속연구가 수행된다면, 보다 포괄적이고 심도 있는 이해가 가능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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