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체탐방 - (주)미성

  • 발행 : 2019.02.01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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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으로 국내 양계 기자재 산업 발전을 이끌어

- 생산부터 가공까지 토탈 시스템 완비 -

국내 양계산업 분야에 기계화, 자동화가 도입된 지는 불과 30여년에 불과하다. 현재는 국내 기자재들이 외국으로 수출될 정도로 크게 성장하면서 국위를 선양하고 있다. 본지는 엔지니어 출신으로 30여년 동안 오직 양계 기자재 분야만을 고집하면서 양계 기자재 산업 발전에 기여해온 (주)미성 김순중 대표를 만났다. 그는 현재 상지대학교 생명자원과학대학에서 축산학을 배우고 있는 만학도로 국내에서 타의 추종을 부러워할 정도로 양계 기자재 분야의 진정한 전문 엔지니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원주에서 열린 전국양계인대회에서는 업계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이 인정되어 양계협회로부터 감사패를 수여받기도 했다.

맨손으로 일군 양계 기자재 산업

1985년 국내 양계산업이 근대화에서 현대화로 넘어설 무렵부터 맨손으로 시작해 국내 양계 기자재 산업을 세계적인 수준까지 올려놓은 산 증인이 있다. 그는 강원도 원주에서 양계 기자재업을 하고 있는 김 순중 사장으로 생산부터 가공까지 기술력을 바탕으로 양계분야 토탈시스템 회사인 (주) 미성을 운영하고 있다. 엔지니어 출신인 김순중 대표는 하루를 48시간처럼 활용할 정도로 부지런하다. 그는 양계산업이 변천해오는 과정에서 손수 계사를 설계하고 내부에 기자재를 설치해 주는 등 양계산업 발전과 함께 양계역사를 함께 써내려 왔다.

취급품목도 각종 케이지를 비롯해 급이기, 집란기, 급수기, 환기, 계분처리기, 액란가 공시설, 할란기, 난각분쇄기, 살균기까지 다양하다. 이 모든 것들을 직접 제작하거나 MOU를 통해 완벽하게 제작, 설치해 준다. 김순중 대표는 하나를 공급하더라도 농가에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고집해 왔고, A/S도김 대표가 직접 처리해줄 정도로 지금도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사무실에는 각 농장의 데이터가 꼼꼼히 정리되어 꽂혀있을 정도로 기록관리도 철저하다. 현재는 농장 도면이나 케이지 시설 등 기초자료를 컴퓨터가 척척 해 주지만 아직도 사무실 한켠에 있는 제도기는 30년의 양계 기자재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한 (주)미성

국내 기자재 토탈시스템 업체로 부상

김순중 사장은 고등학생 시절 엔지니어를 꿈꾸며 관련 기술을 습득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전라도 광주 인근의 자동차 생산공장에 입사해 엔지니어로 근무한 바 있으며, 군을 졸업하고 말레이시아 건설 현장에서 1년간 파견근무를 마치고 나와 축산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85년부터 5년여 동안 양계 기자재를 공급하는 홍연축산 기계에서 기술과 A/S를 담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양계업계에 입문하였고, 1990년에는 현 서울 방화전철역 인근에 미성종합축산기계를 설립하고 집란시스템을 주력품목으로 직접 생산, 공급에 들어갔으나 도시화에 밀려 이듬해 강원도 원주시 우산동으로 공장을 이전하였다.

▲ 경기도 이천의 한 농장 설치장면(좌 케이지, 우 휀)

▲ 공장 내 제작 중인 직립식 케이지와 선별기에 대해 설명하는 김순중 대표

김순중 대표가 양계업계에 입문했을 때에는 A형케이지 2단을 땅바닥에 설치하여 사육하는 정도가 최고의 자동화 시설이었다. 김대표는 엔지니어 출신이었기 때문에 계사를 짓고 내부시설을 하고 심지어 전기 시설까지 모두 다루었다. 처음에는 포천, 동두천, 의정부 일대를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원주로 이사온 1991년부터는 타 업체들과 연계하여 전국적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김순중 대표는 이범성 삼양케이지 사장을 비롯한 뜻이 맞는 업체 들과 분업화 형식으로 국내 실정에 맞는 케이지 시설을 공급하였다. 당시‘유빈양계기구’라는 협업체를 만들어 건물부터 선별기까지 분업화하여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참여업체는 건물은 모란산업이, 계분벨트는 진영케이지가, 케이지는 삼양케이지가, 급이기는 서울기공이, 선별기는 한일자동선별기가 맡았고, 미성종합축산기계는 집란기만을 공급하면서 계사 시설을 주도해 나갔다. 이후 1995년 외국에서 수입품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같은 구성원으로‘해양시스템’을 발족하여 맞대응을 하였으나 IMF 등 재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서 장기 프로젝트는 중도하차하였다. 하지만 국내 양계 장치산업의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평을 받았다.

일본 오미야 업체와 기술제휴

그런 와중에 미성종합축산은 자체적으로도 탄탄하게 내실을 꾸려나갔다. 1988년 국내에서 열린‘88올림픽’이후 계란 소비가 증가하면서 양계산업이 급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90년에 들어서면서 정부자금이 풀리고 단지화 바람이 불면서 자동화, 규모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당시 1991년 한국양계박람회가 올림픽 공원에서 열렸고, 미성종합축산기계는 조그맣게 개발한 집란 기를 선보이며 국제무대에 노크를 했다. 당시 외국에서 선보인 직립식 케이지들이 국내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면서 자존심을 구겼는데 그것이 국내 1인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이후 외국의 다양한 국제박람회를 관람하면서 국산화 발전에 진력을 다하였다. 김 대표는 자동화의 흐름에 맞추어 테이블 방식, 에스컬레이터방식 등을 개발하여 보급하였고, 1994년부터는 일본의 양계, 양우, 양돈 토탈시스템업체인 (주)오미야((株)大宮製作所)와 기술제휴를 하면서 최신식 바콘베이어와 집란기를 선보이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였고, 이 시스템은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 축산토탈시스템 회사인 (주)오미야 회사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1994년 일본의 (주)오미야 그룹과 기술제휴를 하면서 양계장 설비 등을 도입하는 조건으로 당시 600만엔(약 6천만원)에 기술제휴를 맺은 것이다. 아직도 서재에는 당시 도면화했던 설계도들이 남아있다. 2000년 초 공장에 불이 나면서 설계도면의 일부가 소실되었지만 김순중 대표의 머릿속에 있던 도면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기술을 살려 나갈 수 있었다.

▲ 과거에는 며칠 밤을 세워가며 제도기를 통해 직접 설계도면을 완성했으나 현재는 컴퓨터를 통해 쉽게 계사설계도면을 완성할 수 있다. 제도기에서 시연하는 장면(좌)과 컴퓨터 작업 모습(우)

2016년에는 (주)미성으로 법인등록을 하면서 새롭게 출발하였고, 기술력을 인정받으면서 현재까지 축산과학원, 서울대학교 평창캠퍼스, 일본 등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시설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

1999년에는 일본 난가공전문업체인 삼공기연((有)三共技硏)으로부터 할란기를 도입하여 내수 및 OEM 방식으로 일본 수출길을 열어 오란세척기 및 할란기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EGG CUTTER기를 현재까지 납품 중이며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 수출을 위해 기자재를 콘테이너에 싣고 있는 장면

만학의 꿈을 펼치며

김 대표는 만학도로 현재 상지대학교 생명 자원과학대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하다 보니 마음까지 젊어진다는 김 대표는 양계 기자재 업계에도 장인 정신을 가진 인재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따라서 앞으로 학업을 더 배워 기회가 된다면 후학양성을 통해 후학을 양성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초창기 1~2만수면 대농이었지만 이제는 20~30만수 정도 되어야 대농 취급을 받는다. 김 대표는 그때나 지금이나 욕심을 크게 부리지 않는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농장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해나갈 계획이다.

김 사장의 강점은 전문 엔지니어링뿐만 아니라 닭에 대한 생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닭이 생활할 공간과 농가들이 안심하고 닭을 기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 (주)미성이 추구하는 것은 완벽한 시설 속에서 안심하고 닭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다. 즉, 무창계사의경우 과거에는 전기만 나가면 닭들이 바로 문제가 생겼지만, 이제는 전기가 나가더라도 최소 환기를 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가동 될 수 있는 이중장치가 마련되어 위험을 최소화 시키고 있다.

국내에 양계 기자재 기술자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이때 전문가 양성은 물론 국내 양계 기자재 산업의 밝은 미래를 (주)미성이 이끌어 나가길 기대해 본다.